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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22
위험하다고 알려진 DIK(데라 이즈메일 칸)지역으로 가다.
6시에 기상하여 짐을 챙기고 게스트룸에서 준비된 빵을 알아서 해 먹고 설거지까지 했다. 외국인 두 분도 나와서 아침 식사 준비를 하신다. 한 분은 MCS(Murry Christian School) 이사회에서 선생님과 만났던 분이라고 한다.
7시에 게스트룸을 나와 ‘라왈 삔디’를 향해 출발하였다. 시외버스 정류장이 이스라마바드에 없고 외곽인 ‘삔디’ 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 들어가는 곳은 ‘반누’지역 ‘데라이즈메일 칸’ 이라는 곳이다. 몇 년 전에 외국인 댁에 로켓포로 공격했던 과격한 지역이고 아프가니스탄에서도 가까운 주이다. 바탄인??
선생님의 친구 가 전통의상을 다림질까지 해 왔다.
이 친구는 약간 마른 외모에 웃음기 없는 얼굴, 특히 다른 파키스탄인 보다 더 시커멓게 생겨서 별로 신뢰가 안갔다. 혹시나.... 만에 하나... 선생님이 믿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10년전에 사귀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형편이 어려우면 사람은 바뀔수 있으니까 자기 동네에 데려가서 우리를 탈레반에게 팔아 넘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전에 사역을 같이 했던 친구라......
약간은 불안한 심정으로 선생님이 만들어 놓은 현지의 스케줄이니까 위험지역이라고 거절 할 수도 없어서 따라가기로 했다. 대안이 없으니까....
‘구즈란왈라’에서 ‘이슬라마바드’로 올 때 위험부담이 더 크기에 여권도 놔두고 복사본만 들고 왔고 큰 가방은 부려놓고 작은 기내용 가방과 배낭에 짐을 넣어서 왔는데... 이제 기내용가방도 눈에 띄니까 배낭 하나만 메고 가야한단다.
갈아 입을 속옷도 빼놓고 간단한 세면도구와 카메라만 메고 나머지 짐은 선생님 차 안에 두었다.
이제껏 선생님이 말하기를 “파키스탄은 안전한 곳입니다. 생각만큼 위험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좋고 친절합니다” 라고 말을 해서 이제 긴장이 좀 풀릴만 하니까...
‘DIK’ 지역은 다른 곳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다시 긴장분위기를 만든다.
먼저 이슬라마바드 바로 옆도시 ‘삔디’에 있는 대우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코딱지 만한 고물택시에 5명이 탓다. 어제보다 좀 상태가 좋은 차라고 잡았다는데......
엉덩이가 축축해서 확인해보니까 어제 내린 비로 인해 택시의자가 전부 물을 머금었다.
어떻하나..
속옷까지 물이 들었다.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뒷자리에 앉은 우리 세명 모두 그렇다.
그런데 기분 나쁜 것은 이 택시가 30년이 다되어 가는 차라서 먼지와 더러움도 오래된 것이라 기분 찜찜...
선생님의 흰색 ‘샬왈까미즈’는 마치 실수로 응을 한것처럼 더러워져 버렸다.
2일간 무슨 옷으로 버티지....
고가도로 건설로 인해 중앙분리대가 생기고 도로는 뻘로 질퍽하고 반대편으로 진입을 못해서 내려서 반대편에서 다시 택시를 탓다. 이 과정에서 선생님의 우산은 그 차에 놓고 와버렸네...
어찌 해서 겨우 도착한 정류장..
말로만 들었던 그 유명한 대우버스...정말로 대우 상표 로고와 함께 회사이름도 대우버스이고 버스차량도 대우버스였다. 파키스탄에서 독점적인 시외버스 겸 고속버스였다.
어제 예약한 덕분에 돈만 지불하면 되었다. 이나라에 없던 예약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안내양이 탑승했는데 승객들에게 물과 간식, 헤드폰을 나눠주었고, 안내방송도 하고 벨을 누르면 달려 왔다. 여자들의 사회적 진출이 금기시 되는 나라에서 이런시스템을 도입하는데에는 라호르에 본사를 둔 고위급 직원들 중에 크리스챤이 많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승무원들은 어떤 사회적 위치로 생각할까?
우리나라에서 스튜어디스 쯤 될까, 아니면 버스차장일까
정답은 후자라고 한다.
생계를 위해서 일은 하지만 가족들이 부끄럽게 생각한다니....
대우전용 버스 터미널이 있었고 버스탑승할 때 가방검사를 했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캠코더로서 승객들의 얼굴을 전부 촬영하는데 2시감 마다 멈추는 중간 정류장에서 이 과정을 또 되풀이 하였다.
테러가 많은 나라라서 그런가 보다.
오늘은 차장만 탑승했는데 테러위협이 있으면 보안SECURITY GUARD요원(이 무기를 들고 탑승한다고 했다. 보안요원이 없는 것을 보니 안심해도 된다는 뜻이라고 선생님이 우리를 안심시킨다.
서비스로 신문도 무료로 주는데 우리는 가판대에서 신문을 샀다. 젖은 엉덩이를 말릴 요량으로 신문을 펴서 의자에 놓고 깔고 앉았다.
현지인이 말한다.
신문을 깔고 앉으면 안된다.
왜
혹시 신문에 알라나, 모하메드, 이슬람, 코란 등의 내용이 있으면 모욕죄가 성립되어서 큰일 난다고 한다.
사장사모님 전화가 왔다.
파키스탄에서 한국인 2명이 납치되었다고...
정보의 출처가 확실하지 않고 별로 신뢰도가 없는 말씀이라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4시간쯤 지났을 때 엄청난 크기의 인더스강 수력댐을 보았다.
한국의 현대건설에서 3차 건설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 경계선의 검문소에서 여자를 제외하고 모두 차에서 내리라고 하였다. 신분검사를 한다는데..
갑자기, 나는 이 지역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다.
나의 비자가 없기 때문이라나....
여권과 비자를 복사해서 가지고있어야 하는데 나는 한국에서 여권만 복사해서 들고 다녔었다. 비자까지 복사해야 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현지에 사는 사람과 외국인의 생각 차이였다.
이제껏 외국여행을 그렇게 많이 해도 국경지대를 제외하고는 비자 보자고 한 사람은 없었다. 아하~ 바로 이 지역은 파키스탄국가 안이지만 ... 탈레반이 출몰하는 외국이나 다름 없는 곳이구나......
‘여기는 위험한 지역이라서 외국인은 함부로 못가는 곳이다’
안내자 분이
‘나도 전직 경찰인데...... 내 손님이다... 한번 봐 달라’
“그럼 나중에 올 때 파키스탄 전통과자를 좀 사 오라!”
그렇게 무사히 통과하였다.
빡뚜나 지역! 파키스탄 한국인도 이 지역은 들어온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이다.
특히, 한국인 여자는 출입이 안되는 지역이었다. 남자들만 현지인 복장을 하고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입은 현지인 복장도... 5일간 기른 수염도 이 사람들의 매서운 눈길을 피할수 없었다.
마치, 100년전에 서양인 들이 한복을 입은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얼굴생김새가 완전히 다르니까 위장전술, 동화전술이 안 통하는 것 같다.
중국, 운남성 지나서 귀주성에 갔을 때 현지인들이 바라보던 시선과 비슷했다. 우리가 100년만에 들어온 두 번째 외국인 이었다고 했었지....
길가에는 수많은 양떼가 목동들과 길을 막고 있고 빵빵거리며 버스가 지나가자 양들을 한 쪽으로 모느라고 여간 고생이 아니다. 그런데도 버스 기사는 비키라며 클락션으로 위협을 해 댄다.
저 목동들은 ‘빠반떼’라고 하는 무국적 유목민들이 대다수라고 한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인도 등을 떠 돌며 텐트촌을 형성하고 국적없이 목축업으로 생계를 유지한다고 한다. 길가에는 텐트들이 즐비하다. 요즘에도 저런 사람이 있다니....
이곳의 지형은 2시간 전의 지형과 판이하다. 전형적인 중동의 지형을 떠 올린다. 산들... 그러나 평야지대에는 사탕수수를 심어 놓았고, 야자수가 곳곳에 있다. 훨신 더 따뜻하다.
‘인더스 강에서 낚시하고 싶다’고 농담으로 말했는데 진짜로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낚시를 하게 해 준다고 한다.
도로가 비포장으로 바뀌었다.
파키스탄 정부에서 신경을 쓰지 않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환경은 훨신 열악하다. 사회기반시설이 부족하다. 이런 곳에도 대우버스는 달린다. 훌륭한 버스회사이다.
손님을 위한 기사의 태도는 훌륭하다. 프라이드가 느껴진다. 아까전에 내가 못들어 올 상황에서도 열심히 나를 위해 변명해 주고 옆에서 거들어 주었다.
은하철도 999의 로봇 기장보다 훨신 훌륭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자신의 고향에 왔다면서 여기서는 자신이 짱이란다. 그러면서 목에는 신분증 하나를 거는 것이었다.
어제 이슬라마바드에서 하나 밖에 없는 맥도날드 햄버거 가게앞에서 접선해서 오늘 아침 우리와 함께 DIK 지역으로 가는 이사람은 베일에 가려진 존재였었는데....
자기 고향에 오니까 비로소 선생님이 데려 온 이 사람의 정체가 밝혀졌다.
현재의 신분은 ‘TV 뉴스 기자’ 였다. 이 지역에서 유명한 뉴스채널이라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언론매체 였고 회사의 중요한 지위에 있는 촬영, 편집 프로그램 기술자였다.
또한, 오엠회에서 교육을 받을 때 선생님과 함께 일한 동역자였고 이후에 학을 전공하고 사역자로 섬기고 있는 분이었던 것이다.
3만루피(약 30만원)라는 보통 사람의 두세배 급여에 보너스까지 받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 기술분야에서 대학진학을 해서 전문가로서 살아 가야 할지, 아니면 모든 지위를 내려놓고 자신이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전임 목회자로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였다. 나와 사장님은 전자를 추천해 주었다.
이런 무슬림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에 있어야 영향력을 더 발휘할 수 있다고...
그런데, 이 친구는 현재 DIK지역의 사역자들이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몸을 너무 사리기 때문에 자신은 더욱 적극적인 생활을 보여주고, 교육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사역과 생계일로 인해 진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중이었다.
현지의 지도자에 대해서도 갈등이 있었다. 자신은 좀더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고 싶은데 현지님은 충돌을 피하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Open University 에서 방송관계 더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과 공부에 대한 갈등....
대우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많아졌다.
언론사 직원이 승용차를 가져 왔는데 빨간 주유경고등이 들어 와 있고 조수석 선바이저에는 코란이 끼워져 있다.
길가에는 식육점에 양고기가 생으로 걸려있고 발목, 도가니가 있다. 음~! 도가니탕 하면... 맛있겠군! 파리떼만 빼면... 그래도 인도보다는 깨끗한 편이다. 도로는 뻘밭이다. 그래도 이슬람 종교가 인도 다신교 믿는 사람들보다는 깨끗함을 강조하는 듯 하다. 집앞에는 청소를 하는 편이다.
시장통에서 장작불을 때는 위에 드럼통 반을 자른 화덕을 놓고 난을 굽고 있는 청년에게 카메라를 비추니까 더 열심히 움직여서 난이 반쯤 찢어질 정도로 돌려댄다. 이사람들은 카메라에 담기는 것을 너무 좋아 하는 듯하다.
지나는 길에 들른 그 가게 옆에서 게스형제는 몇몇 물건을 구입하고 난을 몇 개 구입했다.
‘데라 이스마엘 칸’ 지역에는 인구 백만명.
자동차는 더러워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손님접대는 극진하다.
먼저 집에 들렀다. 말이 집이지 그냥 벽돌로 구멍이 숭숭 뚫린 집에 천을 둘러서 바람을 막았고 시멘트 방바닥에는 양탄자와 쿠션 몇 개를 놓은 것이 전부다.
자신의 누나와 한 집에 사는데 누나는 30년 넘게 교사생활을 했는데도 마지막 월급이 4만원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나라의 교육현실에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고 나의 비전인 제3세계 학교 설립에 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너무 많은 기대를 가질까봐서 중간에 말을 끊었다.
친구들이 낚시 준비를 다 했다고 하여 밖으로 나왔다. 비가 온 뒤라서 도로가 엉망이라서 한참 돌아서 가는데 집옆의 벽면에 거무스름한 뭔가를 반죽하여 수백개씩 붙여 놓았다. 자세히 보니 소똥을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반죽덩어리로 만들어 둥글게 벽에 붙였는데 사람의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다. 자연보호개념이 부족하여 마을 주위공터에는 쓰레기들이 지천으로 늘렸고, 인더스강 지류인 엄청난 크기의 습지들이 쓰레기로 오염되어서 지하수 오염이 걱정되는 정도이다. 우리나라 창원 주남저수지, 창녕 우포늪 같은 곳에 여기 저기에 엄청난 크기로 있다. 아마 람사르 습지 조약에 가입되지 않은 듯 보인다. 아니면, 현재의 생존환경이 더 급해서 자연보호는 사치스런 개념인지도 모르겠다.
주위의 엄청난 넓이의 초지를 보니 가슴이 탁 트인다. 수리과의 맹금류가 참 많다. 한꺼번에 100마리도 넘는 녀석들이 군무를 펼치는데 매가 마치 까마귀떼처럼 날아다닌다. 내 평생 이렇게 많은 맹금류를 한꺼번에 본 적이 없다.
지금 사진을 못찍어서 후회되는 장면이 두 개있다.
하나는, 소똥을 말리기 위해 줄지어 벽에 붙여 놓은 것이고
두 번째는, 나뭇가지위에 수리가 7~8마리 한꺼번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승용차로 이동하는 동안
트랙터위에 엄청나게 쌓고 가는 사탕수수가 장관이다.
낚시할 장소로 이동하는데 제방같은 곳 양쪽으로 펼쳐진 하늘과 땅, 호수는 사람의 마음을 Healing 시킨다. 이것이 바로 ‘생태관광’, 정치만 안정되면 훌륭한 관광지가 될 수 있는 정말 좋은 곳이다. 언제 이런곳을 볼 수 있을까!
제방에서 밀밭이 펼쳐진 둑을 따라 걸어 가다 보니 어린시절 보리밭 사이를 걷던 생각이 절로 났다. 께스 친구들이 줄낚시를 가져왔는데 지렁이를 못구해서 시장통에서 육류의 내장을 가져왔다. 낚시바늘은 최소한 가물치 정도는 잡을 수 있을 정도로 큰데.... 이친구들 낚시 경험이 없어서 별로 신뢰는 안되지만, 한 친구는 자신의 아버지가 과거에 이걸로 35kg이나 되는 고기를 잡은 적이 있다고 자랑한다. 솔직히 못믿겠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여 주고.... 낚시를 빙빙 돌려 던졌다.
역시나
우리는 강태공인가 보다.
세월을 낚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눈에 담았다.
석호주변에는 커다란 민물조개 껍질들이 널려 있었다. 무슬림들은 조개를 먹지 않는다.
조금만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파면 수많은 조개가 나올 것 같다. 우렁이도 많이 보였다.
조개에 관해 이야기 하자 친구 4명이 죽은 조개껍질들이 살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니라고 하자, 자신이 보여준다며 들어 올렸는데..... 바닷가에 사는 우리는 척보면 아는 죽은 조개를 구별 못했다. 어느 바보 같은 조개가 진흙 속에 숨지 않고 밖에 나와 있을 것인가! 살아 있는 조개 주변에는 숨구멍이 있게 마련이라고 알려 주었다.
아하~ 이 사람들은 조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당연하구나~
..
어깨에 오십견이 와서 낚시를 던지지 못하고 내가 몇 개를 던졌다. 우리팀 옆에 마을 청년들 몇 명이 오순도순 모여서 모닥불을 지피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은 미국신문 기사에 나온 바로 그 ‘탈레반’ 무리와 거의 똑 같다.
나의 우리의 인상 속에 심겨진 ‘탈레반’ 그 모습은 파키스탄 시골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이다. 총만 들고 있다면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하리라 싶다.
얼마 전에 미국 무인기의 오폭에 의해서 파키스탄 사람들이 탈레반으로 오해받아 죽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렇구나~ 이렇게 순박한 사람들이 미국의 비행기에서 보면 탈레반으로 보이는 것이구나~
내가 다가가서 인사를 하자 반갑게 맞아 준다.
그리고 같이 사진을 찍자며 휴대폰을 꺼낸다. 여기 사람들은 처음 보는 외국인과 사진 찍기를 즐기는 것 같다. 그런데 휴대폰은 99% 노키아이다. 슬라이드도 아니고 폴더도 아니고 그냥 자그마한 무선전화기 같이 생겼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이메일을 전해주며 사진을 보내 달라고 했다. 첫머리를 대문자로 적어 주는데 여기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다. 아마도 소문자를 잘못 알려준 것일까? 진짜 대문자일까?
물고기는 허탕치고 친근한 사람들과 웃고 떠들다가 땅거미가 져서 다시 마을로 돌아 왔다.
정전이 되어서 골목길이 어두웠다. 휴대폰으로 길을 비치며 걸어오는데 마치 40년 전 고향마을로 돌아 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사량도 풍경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친구들 한 팀은 큰길로 가고 나 는 골목길로 가면서 누가 빨리 가나 내기를 했다. “Real Pakistan”을 보여 주겠다고 했는데 ...우와 나는 몸매가 되니까 골목길을 그나마 통과했는데.. 어른은 통과하지 못할 넓이의 골목이었다.
하도 인상 깊어서 다음날 아침에 아들과 함께 다시 가서 셔터를 눌렀다.
자신의 방송사에 잠시 가 보자고 해서 들렀다.
방송사 지국이니까 그래도 기본적인 형태의 시설물을 상상하고 갔는데..... 이건 방송국 지국이 아니라 소 마굿간에 컴퓨터 한 대 들여 놓은 듯하다.
휑한 지붕 높은 가정집 같은데 정말 컴퓨터 한 대에 직원 4명이 전부다. 임시로 사용하는 건물이라고 하는데.... 심하다.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뉴스 지국장의 나이를 알고 보니 62년생, 같은 해에 태어났다. 오~ 마이~
우리는 몇 살로 보이느냐고 했더니 나는 35살이란다. ..... 살짝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한다. 허 허 허
지오뉴스는 지난 정권 때에 언론의 핍박이 심해서 두바이로 본부를 옮겼다가 이번 정권들어서 다시 본부를 파키스탄 카라치에 두고 있다고 한다.
South Korea에서 왔다고 하니까 이번에도 어김없이 파키스탄 사람들이 물어 보는 질문을 한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래도 이분은 방송사에 근무하다 보니까 우리가 남한사람인 것을 알고 적어도 우리가 핵개발 하지 않은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파키스탄사람들은 우리에게 “핵무기 개발에 대해서 축하한다!”라고 이야기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두가지 관점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Are you a missionary?”라고 질문을 하였다. 우리는 여행객“Tourist”라고 이야기 했다. 그러자 놀랍다는 듯이 자신의 나라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하루 뒤에 방송될 기자로서의 자신이 기획하고 녹화한 내용을 미리 보여주었다. 내용은 ‘폭탄테러를 간접적으로 경험한 초등학생이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림을 통해서 표현하고 학교의 프로그램으로서 그림그리기를 지원한다’는 그런 내용이었는데...
이 아저씨의 목소리를 방송에서 들어 보니 세월에서 나오는 깊이가 있고 우렁차다.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온갖 종류의 사건, 특히 분쟁에 관해서 취재하다 보니 꽤나 유명한 지역 인사였다.
방송사 지부장은 자신은 무슬림이지만 타 종교에 대하여 개방적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