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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꼬박 이틀 동안 훤은 아무 말이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문안을 했고, 수업도 받았다.
하지만 짬이 나면 혼자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예전 장난을 치기 위해 골몰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연우의 처녀단자가 끝끝내 올려졌다는 염의 말을 듣고는 조용히
자선당으로 사령(使令)을 불렀다.
“현재 성균관의 재회(齋會, 성균관 유생들의 자치 기구. 일종의 학생회)의 활동은 어떤 경향을
띠는지에 관한 것과 장의(掌儀, 재회의 학생회장. 동장의·서장의로 두 명이었음)를 맡고 있는
두 명의 신원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해 오너라.”
훤의 귓속말을 들은 사령은 의아해 하며 훤을 보았다. 훤은 평소와 다름없는 장난기 가득한
소년의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 말 말고 지금 즉시 알아오너라. 그동안 장난을 안 쳤더니 심심하여 그러느니라.
단! 장난일지언정 이 일은 기무(機務, 중요하고 비밀을 지켜야 할 일)이니, 네 입은 네가
단속해야 명이 부지 될 것이다.”
사령은 고개만 갸웃하고 인사한 뒤 나갔다. 상선내관은 훤에게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얼굴에 가득한 짓궂은 표정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로 했다. 훤은 오늘 염이 건네 준
연우의 봉서를 열어 읽었다. 처녀단자로 인해 집안이 어수선할 것임이 분명한데도 내용에는
그러한 것은 없이 그저 세자의 심기가 어떤지에 대한 염려만이 있었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
없이 읽은 책 감상과 하루 있었던 일들이 적혀있었다. 오늘은 개미떼가 왜 줄지어 이동을
하는지, 사계절의 변화는 왜 생기는지, 아침놀은 비가 올 징조이며 저녁놀은 가물징조인데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의문이 적혀있었다.
“어찌 이리도 궁금한 것이 많은지······.”
연우의 표정이 손에 잡힐 듯하여 훤은 환하게 웃었다. 이윽고 무언가 결심 한 듯 옆에 있는
상선에게 말했다.
“상선, 아래 내관을 시켜 조각장(彫刻匠)중에 특히 빼어난 솜씨를 가진 자를 조용히 불러오너라.”
“대체 뭐하시려는 것인지 소인에게 만이라도.”
“사령에게 명한 것과는 다른 일이다. 그냥 연우낭자에게 뇌물이라도 바쳐볼까 하고.”
상선은 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파악하지 못한 채 심부름을 시켰다. 한참 만에 데려온
조각장에게 훤은 조용히 귓속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조각장은 한동안 난감해 하다가 훤이
건네는 패물들을 가지고 물러났다. 훤이 무엇을 하려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상선내관의
초조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야소대(밤 수업)가 끝날 즈음에 사령이 조사한 문서를 전해왔다.
훤은 문서를 훑어보더니 장난기 가득한 소년의 표정으로 사령에게 명했다.
“동장의를 불러오너라.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변복을 시켜 데려와야 한다. 지금 당장.”
“하오나 곧 인경이 시작 될 터인데······.”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야간통행증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 그 시간까지 같이 궐로 들어오면 된다.”
사령이 급히 나가고 난 뒤에 상선은 불안하여 훤의 눈치만 살폈다.
“대체 어쩌시려고 이러시옵니까?”
“상선은 걱정 말고 개(얼굴 가리개)나 준비하거라. 내 얼굴이 앳되어 장의에게 보여주기 싫구나.”
훤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채 내관으로 변복한 장의가 들어 올 때까지 앉아 있었다.
장의는 원인도 모르고 세자의 비밀 명령에 의해 자선당까지 오고 말았다. 비록 장난 심한
세자란 악명을 떨치고 있긴 해도 세자란 곧 다음 대권을 이을 차기 왕이란 사실은 충분히
공포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자신이 훗날 신하가 되어 모셔야
할 왕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세자가 될 가능성이 많은 것이었다. 훤은 개로 얼굴을 가리고
장의의 얼굴을 들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장의는 꼼짝 없이 고개를 바닥에 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침묵하며 분위기를 엄하게 다스리던 훤이 입을 열었다.
“난 이 나라의 세자다. 알고 온 것이냐?”
“네, 네. 그러하옵니다. 어인 일로 미천한 이 몸을 부르시었나이까.”
“내가 왕세자책봉례를 받으며 동시에 성균관 입학례 또한 같이 받았다. 그러니 비록 성균관에
나아가 같이 수업을 받지 못하고 따로이 홀로 수업을 받긴 해도, 나 또한 성균관 유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숙인 상태로 더욱 긴장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불안은 상선내관도 마찬가지였다.
“학덕 높은 그대들과 같은 성균관 유생이어서 참으로 자랑스러웠느니. 그런데 요즈음은······.”
“요즈음은 어떻단 말씀이옵니까?”
“내가 성균관 입학례를 받은 것이 부끄럽다. 유생들은 학문만이 길이던가? 학문을 하면 배운
대로 도를 행하는 것 또한 도가 아니런가?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어도 신하는 신하인 것.
임금이 도가 아닌 길을 가려하면 도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신하의 본분인데 어찌 성균관에선
못 본 척 하고 있는 것인가?”
한참을 심사숙고 하던 장의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저기······, 혹여 미진한 이 몸이 잘못 생각하는 건 아니올련지 모르겠으나······. 이번의 세자빈
간택에 관한 말씀이시온지······.”
“신하된 입으로 현재 잘못되어져 있는 점을 말해보아라.”
장의는 주먹에 힘을 주었다. 미래의 왕이 질문을 하고 있다. 그것도 자신의 가례문제로. 입을
자칫 잘못 놀리다간 이제껏 공부해 오고 있는 모든 것이 날아가고, 가문조차 어려워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눈앞의 세자는 평소 소문으로 들어오던 철없는 장난꾸러기가 아니었다.
현재 세자빈 간택의 잘못된 점에 대해선 유생들이 무엇보다 불만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
세자는 윤씨 일파, 즉 외척의 비호아래 있는 세자이었고, 그 잘못된 점이 또한 외척세력의
처녀로 내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세자는 자신을 비호하고 있는 세력의 험담을
하라는 것이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지금 비밀리에 너를 데려왔다. 이는 너의 입에서 나오는 그 어떤 말도
비밀에 두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말해보아라. 세자빈 간택이 한 일족의 세력 유지를 위한
도구로 쓰여도 되는 것인가?”
“아니옵니다. 이는 필시 잘못된 것이옵니다. 우리 성균관의 재회에서도 여러 번 안건으로
나왔던 문제이옵니다.”
“그런데 왜 가만히 있는가? 두려운가? 그대들이 관직에 나아갈 때쯤, 그대들의 왕으로 있는 건
과연 지금의 상감마마실까? 다음 대에서도 외척일파가 관직자리를 다 유린한다면 과연
그대들에게 돌아갈 관직이 남아나겠는가? 그러면 그대들이 현재 밤새워 학문을 닦을 이유가
없을 것이야.”
“그러하오시면 세자저하께옵서도 저희와 뜻을 같이 하시겠다는 것이옵니까?”
“난 정당한 세자빈 간택을 지지한다! 물러가라. 앞으로 성균관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할 것이야.
그리고! 오늘 나를 만난 건 너와 나만이 아는 일이다.”
장의는 진심으로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한 뒤 물러났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훤은 개를
던지고 자세를 편안하게 했다.
“에구, 개를 들고 있으니 팔도 아프고 무지하게 힘들구먼. 상선, 어떻던가? 나도 제법 의젓해
보이지 않던가? 장의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더냐?”
상선내관은 사색이 되어 훤을 보았다. 십년 가까이 옆에서 모시고 있지만, 시치미를 떼고
천진무구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훤이란 세자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방금 마마께옵서 지시한 것이 무엇인지는 아시옵니까? 권당(捲堂, 학생데모) 파동을 선동하신
것이옵니다!”
“단지 재회에서 상소를 올리는 것에서 그칠지, 아니면 연좌 농성에 들어갈지는 그들이 결정할 일이다.”
“마마, 자칫 이 일이 상감마마께 심려를 끼치게 되오면.”
상선내관은 말을 중단하고 입을 다물었다. 훤의 표정이 장난기를 비우고 잠룡의 눈으로 바꿨기
때문이었다.
“상선. 이번 간택 건에서의 아바마마의 심려를 오히려 덜어드리려는 것이다. 이번 일의 가장 큰
걸림돌은 아바마마가 아니시다. 아바마마도 어찌 할 수 없는 부분이란 것을 알았다. 성균관의
유생들은 현재 권당으로 번진다 해도 별로 손해 볼 것은 없다. 되려 손해보다 성공했을 시의
이익이 더 큰 것이다. 이 일이 실패로 돌아가도 대대로 성균관 유생들에게 내려지는 처벌은
관대하니 위험부담도 없고. 그러니 지금 현재 가장 움직이기 쉬운 곳이 바로 성균관이다.”
상선내관의 얼굴에 공포감이 서렸다. 이제껏 자신이 보필해온 세자가 아니었다. 그 큰 차이를
적응할 수 없었기에 더욱 공포스러웠다.
“마마, 그, 그러면 차후엔······.”
“성균관의 상소는 무시 할 수 없을 터. 이는 대간(臺諫,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사헌부와
국왕의 독주를 간쟁하는 사간원의 간관(諫官))에 큰 힘을 실어줄 것이다. 그리고 대간을
견제하는 홍문관 또한 대쪽 같은 대제학이 버티고 있다. 하니 결코 그들의 움직임에 걸림돌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가 같이 상감마마께 상소를
올릴 터이고, 아바마마는 비로써 운신할 폭이 생기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들 모두가 서로
눈치만 보며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불씨를 성균관에서 지펴주는 것뿐이다.”
“이 일이 잘못되면 세자자리가 위태로워지실 것이옵니다. 위험하옵니다.”
“세자궁은 끝까지 침묵한다!”
“네?”
상선내관이 놀라서 훤을 보았다. 단지 이렇게 일만 벌여놓고 침묵한다니,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렇게만 해 놓는다고 해서 연우가 세자빈으로 간택되진 못할 것이었다.
“정당한 세자빈 간택이라 해 놓고 내가 연우낭자를 내정해 두면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세자빈 자리를 꿰차는 것은 연우낭자의 현명함에 맡기는 수밖에. 그리고 세자궁에서
침묵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외척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이다.”
이 말은 외척이 세자로 비호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자신들에게 겨누고 있는 손톱을 숨긴 호랑이
임을 숨기겠다는 말이었다. 만약에 세자가 외척에 대한 적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발각 될 경우,
그들은 아주 작은 약점 하나라도 잡아내어 세자를 폐위시키려 온갖 악행을 일삼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세자는 그들이 이용하기에 적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철없는 어린애 같기도
하면서 그들에게 전혀 반감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세력들의 모함을 받을 만큼 멍청하지도 않다. 훤은 그런 중간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상선내관은 그간의 세자의 모습이 안전한 세자자리 확보를 위한 연극이었음을
이 순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소인, 세자저하를 뫼옵고 있음이 영광이옵니다.”
상선내관이 감격에 겨워 머리를 조아리자 훤은 어린애 같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하하하! 뭐, 그 정도는 아니고. 민망하게 왜 이러느냐. 내 이런 모습을 연우낭자에게 자랑하고
싶은데 그건 곤란하겠지?”
조금 전의 모습을 완전히 감춘 훤의 모습에 상선내관은 다시 의아해졌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그동안 스승들을 너무 심심하게 한 것 같구나. 내일은 열심히 스승들을 골려볼까? 그리고
할마마마께 어리광이나 실컷 부려봐야 것다. 말도 잘 듣고.”
훤은 방긋 웃으며 연우에게 받은 서찰을 모아 싸놓은 보에서 하나를 꺼내 읽었다. 배시시
행복한 표정을 하던 훤은 다시 보에 서찰들을 꼼꼼하게 싸서 품에 안아보았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연우의 흔적에 기대었다.
그 다음 날부터 시작된 성균관의 상소는 서서히 조정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궐 밖에 앉아
연좌 농성을 해도 왕의 답이 없자, 며칠 뒤 결국 본격적인 권당인 수업거부와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그러자 훤의 의도대로 대간도 이에 가세를 하여 왕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아니, 엄격히 말하면 외척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었다. 왕에게도 이것은 절호의 기회였다.
그래서 세자빈 간택을 하는데 있어 어떻게 하면 공정한 심사를 할 수 있는 가에 대한 것을
경연에서 논의를 했고, 외척들의 기세에 눌려있던 대신들은 각자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훤은 다른 날과 다름없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소동과는
상관없이 날은 가고 초간택의 날은 다가왔다. 연우 또한 처녀단자에서 선발한 명단에 들어가
초간택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훤은 목욕을 마치고 나와 화를 내고 있었다. 언제나 애지중지 하던 연우의 서찰을 싼 보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잠을 잘 때도 이것을 껴안고 잘 만큼 품에서 놓지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목욕하러 들어가기 전에 자선당에 두었는데 이것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훤이 화가 나서 날뛰고 있던 차에 비현각에서 발견되었다며 시강원관리 하나가 가지고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현각에 이것이 가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훤은 직접 보가 있던 곳이
어디냐며 덜 마른 긴 머리카락을 날리며 비현각에 나갔다. 비현각의 세자 서안에 있었다는
관리의 말에 더욱 의구심이 생겨 인상을 쓰고 있던 차에 양명군이 훤을 방문했다.
“세자저하께옵서 자선당보다 비현각에 더 자주 계시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훤은 얼른 보를 내관에게 건네고 양명군을 맞았다.
“잠시 찾을 것이 있어서 이리 나왔습니다. 자선당으로 가실까요?”
“아니, 잠시 지나던 길에 들렸습니다. 뵈었으니 가봐야지요.”
“오랜만에 얼굴을 보이시고는 섭섭하게 그냥 가시겠다니요.”
훤은 자선당까지는 아니더라도 비현각에 우선 자리 잡고 앉았다. 양명군도 잠깐만이라며
자리에 앉았다.
“요즈음 허 염이란 자에게서 학문을 익힌다 들었습니다.”
“형님도 문학을 아십니까?”
“제 벗이옵니다. 그 집에 자주 가서 그에게서 학문도 익히고, 김제운이란 자에게서 검술도
익히며 막역한 사이로 지내고 있습니다.”
“아! 형님께서 검술을 배우고 있단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리고 종학(宗學, 세자이외의 왕자들의
교육기관)에도 열심이란 소식 들었습니다.”
“종학은 제가 나가고 싶어서 나가는 것이 아니고 아니 나가면 상감마마께옵서 호통을 치시니
어쩔 수 없이 나가는 겁니다. 전 벗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더 재미있는데 제 벗들은 하나같이
꽉 막힌 자들이라.”
훤은 소리 내어 웃었다. 놀자고 해도 책만 들고 있을 염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마음대로 궐 밖을 나가지 못하는 자신과는 달리 궐 밖 출입이 자유로운 양명군이 부럽기도 했다.
“문학은 그렇다치고 김제운이란 자도 그렇습니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습니다. 저보다 한 살 아래인데 그 검술과 인품이 칼날같이
정갈하여 배움을 갖습니다.”
“저도 어떤 사람인지 한번 보고 싶습니다.”
“아마 힘들 것입니다. 그는 서자 출신이라 관직에 나갈 수 없으니 세자저하를 뵈올 기회란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스스로를 다듬는데 게을리 하지 않으니 이 또한 그를 숭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훤의 또 다른 호기심이 일었다. 염과 친하다면 그 또한 괜찮은 인간일 것 같았다.
“김제운이라······. 아비는 어떤 자입니까?”
“전 오위도총부를 통솔했던 김윤영도총관의 서자입니다. 현재 김윤영도총관은 퇴역하여 조용히
계시고, 그의 원 어미는 한때 장안을 휘어잡던 명기였으나 이미 그가 어릴 때 죽어 그는
도총관의 본처 손에 길러졌다 들었습니다. 어미가 기녀여서 인지 그의 외모 또한 출중합니다.”
“좋은 자들과 벗을 하니 형님이 부럽습니다.”
훤의 말은 조금의 거짓이 없는 진심이었다. 어릴 때부터 훤의 주위에 친구라고는 없었다.
모두가 어려워하고 피하기만 했고, 놀이를 같이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없는 일이었다.
놀다가 실수로 세자의 몸에 작은 상처라도 생기면 그들 부모까지 피해가 갔다. 그래서 어른들에
둘러싸여 지내는 것만이 전부였고 간혹 친척 아이들이 궐내에 놀러 와도 그들끼리 노는 것을
멀리서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는 것만이 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어떤 아이도 자기들의
무리에 세자를 넣어주지 않았다. 그들과 자유롭게 놀고 있었던 것은 언제나 양명군이었다.
“그런데 문학의 집에 자주 갑니까?”
“네. 매일 저의 집 가듯이 갑니다. 그런데 요즘은 염이 바빠서 자주 가기가 힘듭니다. 그는
세자저하의 문학 일을 제하고는 독서당(젊은 관리들 중 특출 난 인재 극소수만 뽑아 다른 관직
없이 오직 학문에 전념하던 곳. 이곳을 거친 인재는 곧 엘리트 코스를 보장받음)에 거하라는
어명이 있다 들었습니다.”
훤은 새삼 염의 자질에 감탄 했다. 독서당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나라에서 키우는 인재란
뜻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문학에게 누이가 있다 들었습니다. 혹여 본적은 있습니까?”
양명군의 웃고 있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순진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는 자신의
철없는 동생을 보았다.
“누이가 있는지는 어찌 아십니까?”
“어쩌다 들었습니다. 문학처럼 아름다운가 해서.”
양명군의 표정이 복잡하게 바뀌더니 이윽고 말했다.
“별당에 있는 규방처녀를 어찌 함부로 볼 수 있습니까? 그건 예가 아니지요. 하지만 우연이 딱
한번 보긴 했는데······.”
훤의 몸이 양명군에게로 쏠렸다. 그 뒷말이 궁금해서 입안에 침이 삼켜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심장은 마구 두근거렸다.
“음, 염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습니다. 어찌나 박색이던지, 염과 한 배에서 난 것이 맞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더이다. 제가 이제껏 본 여인 중에 그리 박색인 얼굴은 또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보지 않았습니다.”
“그, 그 정도였습니까? 정녕 문학과는 그리도 안 닮았습니까?”
“네, 그러하옵니다. 그러니 관심을 접으십시오. 이런, 잠시라 하였는데 오래 앉아있었습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열심히 예학에 힘쓰십시오.”
훤은 양명군을 보내놓고 실망하여 비현각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리 박색인 얼굴은
처음이라니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처음 염과 닮았을 것이란 기대감에 연우에게
마음이 간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 아름다운 사내의 누이라면 더 아름다울 것이란 기대감.
하지만 실망에만 그쳤을 뿐 연우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은 접어지지 않았다. 그러기엔 이미
연우에 대해 얼굴만 빼고 다른 것은 너무나도 많이 알고 난 뒤였다. 그리고 이제껏 알아온
연우에 온통 마음이 빼앗겼기에 박색이라는 것만으로 연우를 포기하려는 마음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훤은 연우가 박색이란 말에 신경이 팔려 사라졌다가 비현각에 나타난, 연우의 서찰을
싼 보에 대해선 그만 깜박 잊어버리고 말았다.
초간택의 바로 전날, 훤은 석강을 마치고 염에게 봉서를 하나 내밀었다. 염은 놀란 눈으로 그
봉서를 뚫어져라 보았다. 매일 봉서를 건네받았지만 이번 봉서는 다른 날과는 달랐다. 안에
서찰이 아니라 볼록하게 다른 것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봉해진 것이긴 하나 염은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비녀였다. 그것도 금으로 만든 봉황비녀, 즉 봉잠이었다.
봉잠은 궁궐에서 왕비나 세자빈으로 간택 된 여인에게 하사하는 패물 중에 하나였다.
염은 알면서도 두려움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해를 품은 달이다!”
“네? 무슨 말씀이온지······.”
“왕은 해라 하고 왕비는 곧 달이라고 한다. 나의 마음의 정비는 연우낭자로 이미 삼아버렸으니
그에 대한 나의 정표로 이 봉잠을 보내는 것이다. 이 봉잠은 하얀 달인 백산호를 입에 문 봉황이,
붉은 달인 적산호를 가슴에 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연우낭자가 나를 가슴에 품고
내일부터 시작되는 세자빈간택에 최선을 다해 나에게로 오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느니.
그리고 이 나를 평생 옆에서 보필해주길 바라느니.”
그 순간 염이 느끼는 감정은 참으로 복잡하였다. 머릿속도 엉망으로 꼬여 들어갔고 가슴에
숨 막히는 통증이 느껴졌다. 이런 사태까지 온 것은 온전히 연우를 노출시킨 자신의 탓이었다.
“이 이후에 우리 연우를 어찌 하실 것이옵니까?”
“난 세자빈으로 간택되길 바랄 뿐이다.”
“만약에 초간택에서 떨어진다면 우리 연우를 깨끗이 잊어주시옵소서.”
훤은 답하지 않았다. 그런 경우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세자빈의 간택 조건에서 외모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것 보다 높았다. 때때로 이것이 문제화 되었을 만큼 외모에 치중되어
후보자들을 보았는데, 나이대가 비슷비슷한 여인들이라 대답하는 것은 다 고만고만하였기에
덕성이나 다른 것은 후보자들끼리 큰 차이가 없는 현실 때문이었다. 만약에 이미 내정된 후보가
철회되고 엄격한 기준에 맞춰 간택을 한다고 해도 박색이 선출되기란 하늘의 별따기인
셈이었다. 염은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훤의 다짐을 받고서야 봉서를 가져갔다.
초간택이 시작되었다. 그와 함께 성균관 유생들은 공관(空館, 동맹 휴학)에 돌입했다. 이 여세에
힘입어 삼사에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외척들이 수세에 몰리자 이번에는 대비가 어미라는
위치를 빌어 직접 왕을 협박하고 나섰다. 그래서 왕과 다른 대신들은 초간택이 거행되는
교태전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한 채 30명의 참여자 중, 7명을 간택하고 결말이 났다. 불행히도
그 7명 중에 연우도 들어있었다. 훤은 뛸 듯이 기뻤지만 염의 마음은 슬픔으로 굳어졌다. 그래도
아직 재간택이 남아있었다. 재간택에서 탈락만 되어 준다면 적어도 삼간택 후보에선 제외될
것이고 그러면 불행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재간택은 초간택이 있은 지 보름
뒤에 다시 거행되었다. 간택되길 비는 훤과 탈락되길 비는 염의 마음이 비현각을 뒤 덮고
있었다. 교태전 가까이 갈 수 없는 세자는 어서 빨리 사령이 결과를 가져오기만 바라고 있었다.
석강이 끝날 즈음에 사령이 숨넘어가는 소리로 달려왔다.
“결과가 나왔느냐?”
급하게 묻는 훤에게 사령은 염의 눈치를 살피며 힘겹게 말했다.
“네, 삼간택에 올라가는 후보가 결정되었사옵니다. 그런데······.”
사령은 다시 한 번 염의 눈치를 보았다. 훤이 성격 급한 티를 팍팍 내며 말했다.
“어서 말해라! 문학의 누이는 어찌 되었느냐?”
“세 후보에 들어갔다 하옵니다.”
염은 슬픔에 넋이 나가버렸다. 이와는 반대로 기뻐하는 훤에게 사령이 다시 어두운 말을 했다.
“그런데 윤대형 판윤의 여식이 올 때와 달리 육인교를 타고 차지내궁 등 50여명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갔다 하옵니다.”
훤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이것은 윤씨 일파의 여식이 내정되었음을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음 삼간택은 보나마나란 의미였기에 염은 무너지는 슬픔을 추스를 길이 없어
조용히 책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염이 비현각에서 나가버리자 훤의 표정은 더욱더
매서워졌다. 사령이 무서움에 덜덜 떨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런데 이상한 점이······.”
훤의 날카로운 눈빛이 사령의 졸아든 심장을 조각내었다. 마치 말을 전달하는 자신이
대역 죄인이 된 듯했다.
“그, 그렇게 차지내궁이 호위를 하며 갔는데도 내, 내전에선 글월비자를 아니 보냈다 하옵니다.”
이 말은 아직 온전히 세자빈 자리가 굳어지진 않았다는 말이었다. 세자빈으로 확정되었다는
봉서를 지닌 글월비자가 윤씨 내정자를 따라가지 않았다는 것은 왕비의 하교가 내려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는 아직 왕이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무리 대비가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인다고 해도 왕의 뜻을 따르는 왕비의 하교 없이는 무위로 돌아갈 일이었다.
“가서 장의를 다시 데려오너라.”
훤의 명령에 사령보다 상선내관이 더 놀라 세자 앞에 엎드려 간곡하게 사정했다.
“마마, 아니 되옵니다. 지금 그를 불러들였다간 탄로 날 가능성이 많사옵니다. 이 사실을 윤씨
일파가 알게 되오면 마마뿐만이 아니라 연우아기씨가 참형을 면치 못할 것이옵니다. 삼간택
후보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현재 충분히 견제되고 있을 것이옵니다. 만약에 그를 다시
불러들이신다면 이 몸 목숨을 걸고 막을 것이옵니다.”
훤은 상선내관의 간곡함에 서서히 화를 가라 앉혔다. 그리고 머릿속을 낮게 낮추었다. 한참동안
끓어 넘치는 불안감을 가라앉히니 양명군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세 명의 후보에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외모는 출중하다고 생각해도 될 일이기 때문이었다.
왜 양명군이 그런 말을 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기분은 좋아졌다. 외모가 그러하다면 다른
면에선 연우가 압도적으로 출중할 것이라 짐작되기에, 삼간택을 하는 장소에 객관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훨씬 유리할 것이다. 그 일을 가능하게 해줄 사람은 현재
가만히 있는 왕이었다. 훤은 왠지 지금까지 가만히 있는 자신의 아버지한테 믿음이 갔다.
이렇게 유리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밀어붙이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 또한 마지막 삼간택을
노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왕이 염에게 쏟는 정성, 홍문관대제학에게 거는 신념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을 추종하는 사림세력은 훤이 왕으로 등극했을 때 외척세력과의
힘의 균형을 이뤄줄 것이다. 이런 계산이 서자 왕의 심중 또한 연우에게 가 있으리란 확신이
섰다. 그래서 훤은 왕을 믿고 조금 숨을 고르기로 했다. 이제껏 조급한 마음이었기에 세 후보에
들어와 준 것만으로도 훤은 행복했다.
보름이 다시 지나고 삼간택이 열리는 날이 되었다. 성균관의 유생들은 그 전날부터 궐밖에
앉아 호곡권당(號哭捲堂, 궐 밖에 앉아 곡소리를 내며 시위하던 데모)을 벌이며 군사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대비가 세자빈을 간택하는 날에 곡소리를 낸다는 이유로 관련 유생들을 다
처벌하라며 노발대발해도 정작 왕은 꿈쩍하지 않고 있었다. 조반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초조하게 있던 훤에게 사령이 뛸 듯이 기쁜 발걸음으로 달려왔다.
“마마! 갑자기 삼간택 장소가 변경되었다 하옵니다.”
“뭣이? 어디로?”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친 훤에게 사령은 얼굴에 희망을 가득 담고 외쳤다.
“원래 장소였던 교태전이 아니라 상감마마의 침전인 강녕전에서 거행된다 하옵니다.”
“그래서? 장소를 강녕전으로 옮긴 연유가 있을 것 아니냐?”
“삼간택을 심사하기 위해 상감마마뿐만이 아니라 종실제군 세 명과 삼사 관원 세 명 그 외에
대신 세 명이 간택에 참여한다 하옵니다.”
“그렇구나! 그들은 교태전엔 들어갈 수 없으니 마땅히 장소가 변경이 되어야 함이야! 아바마마!”
훤은 강녕전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세자를 감시하기 위해 왕이 보낸 내금위 군사가 자선당의
월대 아래에 버티고 섰다. 갑자기 내금위 군사의 감시를 받게 된 것이 기분 나쁘긴 했지만 이는
세자를 보호하려는 왕의 의도였기에 훤은 잠자코 자선당에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재간택은
점심식사를 내어주며 식사하는 모습 등 여러 가지 모습을 심사하기 위해 하루 종일 걸렸지만,
삼간택은 세 명으로 축소되어 있고 또 깊이 있는 질문이 이뤄졌기에 오전으로 결정을 내었다.
세 후보 중 단 한명만이 세자빈이 되어 오늘 주수라(점심수라)를 받게 될 것이다. 훤은
초조함으로 인해 조강도 생략했다. 보덕도 내금위 군사의 감시로 인한 것으로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 주었다. 오전 한 때가 삼년의 세월 보다 길게만 느껴졌다. 그 장소에 가지 못하고
자선당에 갇혔기에 훤의 마음은 더욱 그러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루각에서 정오를 알리는
오고(午鼓)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내금위 군사들이 자선당에서 물러났다. 그 뒤를 이어 결과를
알아보러 사령이 뛰어갔다. 세자가 가면 안 되었기에 훤은 초조하게 자선당의 월대 위를
서성거리다가, 마당에 내려서 서성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마음엔 사령이 명나라에나 다녀온
거리만큼 늦게 느껴질 때쯤에 결과를 안고 나타났다. 훤에게 달려오는 그의 표정은 이미 결과를
말하고 있었다.
“연우낭자냐? 어?”
“네! 홍문관 대제학의 여식인 허씨 처녀가 대례복을 입었다 하옵니다.”
훤이 너무 기뻐 온 몸에 힘이 쫙 빠진 것과는 달리 상선내관이 먼저 만세를 불렀다.
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기뻐도 눈물이 난다더니, 이런 기분이구나. 난 아바마마와 연우낭자를 믿었느니. 진심으로 믿었느니.”
“감축드리옵니다, 마마.”
“내 너무 보고 싶어 대궐 담을 넘어보려고도 생각했었는데······. 그동안 잘 참았구나.
이젠 연우낭자를 볼 수 있게 되었어. 필시 눈부시게 아름다울 것이야. 아니 그렇다고 할지언정
그 학식과 인품에서 눈이 부실 것이야.”
훤은 두 팔을 벌리고 자선당의 뜰을 열심히 뛰어다녔다. 아무리 숨 가쁘게 뜀박질을 해도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못하고 서성거리기만 하다가 석강에 들어온 염을
보고는 연우를 대신해 염을 꽉 끌어안았다.
“연우낭자가 나의 아내가 될 거라네.”
“알고 있사옵니다.”
“나의 아내가 될 거라네. 어서 빨리 가례를 해 달라 조를 것이야. 그래야 연우낭자를 볼 수 있을
터이니. 연우낭자를 만나보았나?”
“아직. 이젠 저의 집으로는 올 수 없으니······.”
삼간택에서 세자빈으로 간택이 되면 그 순간부터 세자빈이었기에 자신의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별궁에 거처를 마련하고 가례까지 세자빈 예절수업을 받아야 했다. 그러니 염도 연우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 연우와의 남매애가 남다른 염이었기에 벌써부터
헤어짐에 슬펐다.
이렇게 기뻤던 날도 단 하루뿐이었다. 그 다음 날부터 별궁에 있던 연우가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한 것이었다. 평소 건강했던 것을 알고 있던 훤이었기에 그동안의 긴장으로 인해 몸살이
난 것쯤으로 여겼지만, 병세는 더욱 깊어져 결국은 본가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집안에 이유 모르게 아픈 이가 있으면 세자궁으로 들어올 수 없는 법 때문에 염도
훤 앞에서 사라졌다. 병이 나아지면 다시 가례를 진행할 것이란 왕의 윤언은 있었지만 이런
의지도 오래가지 못했다. 세자빈으로 간택된 지 단 20일이 지난 후 연우가 죽었다는 비보가
자선당으로 날아들었다. 처음에 훤은 장난이라 생각했다. 사실이 아니며 세자빈 내정자를
뒤집듯 이런 사실을 뒤집고 연우가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다. 보름이 지나도록 훤은 연우의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우가 죽은 뒤 보름 만에 초췌한 몰골의 염이 비현각에
나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석강을 했다. 훤은 염을 보니 더욱더 연우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먼저 그 사실을 재확인할 용기도 없었다. 석강을 마친 염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세자저하, 이것으로 마지막이옵니다.”
“무엇이? 무엇이 마지막이란 말인가?”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었사옵니다. 소인은 이제 죄인의 몸이니 더 이상 세자저하의 앞에 나올
수가 없사옵니다. 마지막으로 인사하라는 어명을 받고 왔사옵니다.”
훤은 연우의 죽음에 넋이 나가 있느라 염의 처지는 미처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비록 그들의
잘못은 아니지만 병이 있는 자를 말하지 않고 세자빈으로 간택하게 했으니 이는 중죄 중에
중죄였다. 그 죄를 물어 염 또한 파직은 벗어 날 수 없었고 곧 귀양에 보내 질 위기에 있었다.
이는 홍문관대제학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칫 사약을 받을 수도 있었다.
“안 된다! 너는 아바마마의 신하가 아니라 나의 신하가 될 사람이다. 그러니 이렇게는 절대
안 된다! 네가 나를 떠나면 나중에 누가 나를 보필한단 말이냐!”
훤은 염의 눈동자에 담긴 슬픔을 보았다. 자신의 처지 때문이 아니었다. 연우를 잃은 슬픔은
훤보다 더 했기에 이대로 연우를 따라 죽어도 아무 미련이 없다는 눈동자였다. 염은 품속에서
봉서를 하나 꺼냈다.
“이것······. 우리 연······. 연우가 마지막에 남긴 것이옵니다. 얼마 전 그 아이 방에 들어가니 서안
안에 감춰두었던지, 남아 있었사옵니다. 아무래도 세자저하께 남긴 것인 듯하여 가져왔사옵니다.”
훤은 떠나는 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염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울컥 울분이 치솟아 올라
사라진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 떨리는 심정으로 연우의 봉서를 열었다. 곱게 접혀 들어가 있는
종이를 펼치는 훤의 손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다 펼친 순간 훤의 슬픔이 터져 나왔다.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힘이 없었던지 그 정갈하던 서체는 덜덜 떨며 쓴 흔적이 역력했고,
먹을 갈 힘도 없었던지 미처 덜 간 먹으로 써서 글자 주위마다 흐리게 물이 번져나간 흔적이
있었다. 힘없이 떨며 쓴 서체가 눈에 밟혀, 글을 읽을 수가 없었고, 눈물이 떨어져 내려 또 글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대로 읽지 못하고 그 마지막 봉서를 넣어버리고 말았다. 그 뒤에도
연우가 생각날 때마다 주고받은 서찰을 꺼내 읽었지만 마지막 봉서만큼은 마음이 아파 열지 않았다.
과거의 회상에서 돌아온 염은 흐릿한 달빛 아래에서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때 전해드린 그 봉서가 주인을 제대로 찾아간 것이었나이까?”
“음. 그래, 나의 것이었소.”
“나에겐 아무것도 아니 남겨놓고는, 훗!”
염은 이제야 연우가 자기에겐 서찰 하나 남기지 않았음에 서운해진 모양이었다.
“그대는 그때 같이 있었으니 그렇지.”
“아니옵니다. 그 당시 저도 숙부 댁에서 감금당해 있었사옵니다. 혹여 돌림병인지 몰라서.”
염은 그때가 생각났는지 감정 없는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연우 옆에 있을 거라며 울부짖으며
발광하던 염을 부친은 숙부의 집에 가둬뒀었다.
“그랬군.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소.”
“이젠 옛날 일이옵니다. 그런데 마지막 봉서에 무슨 말이 적혀있었는지 물어봐도 되올련지요.
소신은 마지막 그 아이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하였사옵니다.”
“나도 기억에 없소. 슬픔에 가려 미처 다 읽지도 못하였으니. 기억나는 건.”
순간 훤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그 옛날 마지막 서찰에 적힌 구절들이 새록새록 생각났다.
그런데 그 구절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기억이 흐릿해 잘못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훤은 그 마지막 서찰을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자야한다는 핑계를 대고 급하게
염을 돌려보냈다. 궁으로 잘 오지 않는 염이었기에 훤이 먼저 염더러 일어서라는 말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염은 의아해 하며 인사한 뒤 물러났다. 염이 물러나자 훤은 급하게
아랫고상궁(왕의 개인 물품을 관리하던 궁녀)에게 명하여 귀중품을 넣어둔 고(창고)에 가서
우(雨)라 적힌 화각함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훤의 급한 표정에 밀려 궁녀 두어 명은 아랫고
상궁과 함께 뛰어서 화각함을 가져왔다. 화각함 안에는 작은 상자와 연우에게 받은 봉서들이
넣어져 있었다. 그 중 가장 아래에 있는 봉서를 뒤져서 꺼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다 물러가게
하고 세자 때부터 보필해온 상선내관과 운만 남으라고 명했다. 봉서를 펼쳐든 훤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내용을 확인한 훤의 눈에 차차 눈물은 메말라지고 번뜩이는
눈빛만이 남았다. 한참동안 글을 읽고 또 읽던 훤이 그 서찰을 운에게 건넸다.
“읽어 보아라. 연우낭자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서찰이다.”
운은 이유를 모른 채 서찰의 내용을 확인했다. 운의 눈도 놀라움으로 차갑게 굳어졌다.
세자저하 보시오소서
마지막 힘을 내어 서신을 남깁니다. 혹여 폐가 될지, 아니면 세자저하께 미처 안 전해질련지
모르겠지만 이리 적어봅니다. 이제 곧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젠 영영
세자저하를 뵈옵지 못할 것이옵니다. 딱 하나 소원이 있다면 세자저하를 뵈옵고자 하는
것뿐이었사온데 이를 이루지 못하고 가니 이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음이옵니다. 부디 만수무강
하시어 이 소녀의 몫까지 살아주시옵소서.
허 연 우
“이것은······.”
“운아, 너도 이상한 점을 보았느냐?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오면 나를 영영 보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는 바꿔 말하면 아버지가 가져오는 약을 먹으면 죽는다는 말이 아닌가!”
운은 차마 답하지 못하고 마른 침만 삼켰다. 하지만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하오나 전 홍문관 대제학의 인품은 고매하기로 그 명망이 높았사옵니다. 저 또한 가까이서
글을 배웠사옵니다. 절대 자식을.”
운은 뒷말을 급하게 삼켰다. 자식을 죽였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자식을 죽일 약을
먹이다니 이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 당시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건강한 낭자였다. 그런데 그 건강하던
여인이 갑자기 죽었다. 그럼에도 그 병의 원인조차 모른다고 하였고, 간택된 세자빈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도 제대로 하지 않고 덮어버렸다. 하찮은 평민이
죽었어도 그리 소홀하게 사인(死因) 조사를 하지는 않을 것인데.”
옆에 있던 상선내관도 그 당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운의 손에 있던 서찰을
빼앗듯이 받아 내용을 확인했다. 상선이 목소리를 낮춰 울분을 토했다.
“상감마마, 필시 그 당시 어떤 일이 있었을 것이옵니다.”
“그 당시 연우낭자를 진맥한 이는 누구인가?”
“상왕께옵서 직접 주치내의관을 보내시어 병을 살피라 하였다 들었사옵니다.”
“이런! 그는 상왕께서 승하하셨을 때 사약을 받지 않았는가?”
왕이 죽으면 왕의 주치의도 죽음에 책임을 물어 사약을 받는 것이 법도였기에 원망할 수도
없었다. 훤은 잠자코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빠졌다. 의문만이 가득하고 그 의문에 대한 답은
하나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내의원에서 올리는 국화차가 들어왔다. 훤은 내일 다시 점검해
보기로 하고 화각함을 잠가 옆에 둔 채 차를 마시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어김 없이 왕이
잠에 들자 월이 들어와 훤의 잠든 옆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