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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미술, 이당 김은호와 운보 김기창 주제로 보는 명화
2015. 7. 10. 4:41
줄리아의 친절한 미술관
https://blog.naver.com/helmut_lang/220415709439
프랑스는 나치 협력자 중 문화예술인에 대해서는 더 가혹한 처벌을 내렸습니다. 국민에게 막중한 영향을 가졌던 만큼 그에 따른 책임도 크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한국은 책임을 묻기는 커녕 친일반민족 행위에 앞장섰던 화가들이 미술계의 거장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한상범 동국대 법대 교수님은 이같은 현실에 “예술로 우리 정서에 독약을 뿌리고 마취시킨 이들은 총칼을 든 친일파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며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려 민족의 얼을 훼손했던 친일반민족 화가들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예상보다 너무 많은 화가들의 명단이 쏟아져나와 저도 많이 당황했는데요, 수많은 친일 화가들 중 가장 적극적이었고 또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화가 이당 김은호와 운보 김기창의 친일 미술을 소개합니다. (월전 장우성도 만만치 않습니다만 오늘은 빼고 얘기하도록 하지요)
친일 미술의 전개
예술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일제는 그림을 식민통치 정당화와 황국신민화 즉 조선인 동화정책의 핵심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습니다. 이들은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던 화가들을 모아 조선서화미술회(회장 이완용), 서화연구회(회장 귀족 김윤식), 서화협회(회장 화가 안중식) 등 미술단체를 만들었고 적극 후원하기 시작했지요. 이러한 미술단체들은 총독부 관리, 친일파 인사, 일본 화가들과 교류하며 총독부 관리하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참여하는 등 행각을 이어나갔는데 특히 전람회에서는 國展이 30년 만에 폐지된 것과 똑같이 스승이 심사를 하고 제자가 작품을 출품해 수상하는 등 짜고 치는 고스톱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전람회에서 상을 수상하려면 심사위원들과 친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는 얘기로 친일파 수장이었던 이완용이 심사 위원 중 한 명이었다고 하니 분위기가 어땠을지 짐작이 됩니다.
친일미술조직 단광회 회원들과 <조선징병제시행기념 기록화> 1943년
오른쪽 신문에 실린 그림이 바로 친일미술조직 단광회가 조선 징병제 실시를 기념해 공동 제작한 그림입니다.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과 비행기를 들고 있는 아이, 친일파 윤치호, 일본인 군인과 관료들이
징병으로 소집된 조선 청년을 둘러싸고 서 있습니다
흔히 학도병이라 불리던 소년들이 바로 이들인데요,
친일미술인들은 학도병을 마치 예수처럼 거룩하게 묘사함으로
징병제가 조선의 자식을 황군으로 내선 일체하는 영광스러운 행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감격에 겨워 청년을 환송하고 있는 모습의 주변인들 역시 같은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일전쟁 후엔 화필보국, 회화봉공, 결전미술 등의 이름으로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에 부역하는 미술이 본격화됩니다. 화가들은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거나 일제의 수탈정책을 정당화하는 선전용 그림을 그렸으며, 나아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일본에 통합시키려는 민족말살정책에 동조하는 그림도 그렸습니다. 특히 대표적인 친일미술조직인 단광회(조선인화가 7명+ 일본인 화가 11명)는 1943년 일본이 조선인징병제를 실시하자 이에 동조하는 그림을 공동으로 제작해 조선군 사령부에 헌납하기도 했지요. 이들의 활동으로 조선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일제의 전쟁에 나가 총알받이가 됐는데요, 이는 친일 미술이 얼마나 위험하고 반민족적, 반인륜적 범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당 김은호
창덕궁에서 순종의 어진을 그리고 있는 이당 김은호 / 그가 그린 순종의 어진, 1928년
한국 근대 미술의 거장으로 불리는 이당 김은호(1892~1979)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화가입니다. 먼저 그의 약력에 대해 잠깐 알아보면요, 일본식 이름은 쓰루아먀 마사시노기. 1919년에는 3·1운동에 가담해 독립신문을 배포하기도 했지만 1924년 일본 도쿄 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친일 행각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김은호는 친일미술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에 들어가 일본 제국주의에 동조하는 작품을 그렸고 총독부가 주최한 미술전람회에서 다수 입상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1928년 순종의 어진을 그리게 된 김은호는 민병석, 윤덕영, 송병준 등 친일파 귀족들과 일본 고관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조선 최고의 초상 화가로 자리매김합니다. 그의 작품은 섬세한 필선과 맑고 세밀한 채색이 특징인데요, 전형적인 왜색풍의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당 김은호의 <금차봉납도>, 1937년
친일여성단체가 미나미 조선총독에게 금비녀(금차)를 바치는 모습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은호는 일본의 승리를 위해 금비녀를 헌납하자는 친일여성단체인 ‘애국금차회’의 활동을 소재로 한 작품 <금차봉납도>를 그려달라는 친일파 지인의 부탁을 거절하다가 결국 그려주게 되고 이 그림은 조선총독부에 헌납됩니다. 미나미 총독에게 금비녀를 헌납하는 여인은 친일 귀족 윤덕영의 아내이고 그 옆으로 친일파 여성과 총독부 관리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김은호는 윤덕영과 매우 친밀했던 사이로 그가 어용화가로 발탁되어 궁에 드나들 때 윤덕영의 도움이 컸다고 합니다. 훗날 김은호는 이 작품에 대해 윤덕영과의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린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그의 친일 행각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김은호는 일제강점기 내내 ‘화필보국(畵筆輔國)', 즉 '그림을 통해 나라 즉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하자'는 당시의 활동 분위기에서도 벗어나지 않고 그림을 그렸는데요, 일본의 대동아 전쟁 승리를 위한 기금 마련 전시에 참여하기도 했고 또한 일본 제국주의 찬양과 황국신민화를 목적으로 한 공모전의 심사위원이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이 그려진 시기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입니다
전쟁으로 서울은 잿더미가 되었고 너도나도 피난을 떠나야 했던 바로 그 시기에
조선 최고의 화가라는 사람이 피난민 행렬이나, 비침한 민족의 현실은 그리지 않고 이런 그림을 그렸답니다.
벚꽃이 만발한 봄 날, 벛꽃무늬 한복을 입은 여인이 색동저고리 차림의 아이와 산책을 즐기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에 저렇게 차려입고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는 사람이 과연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인이 입고 있는 한복도 한복인지 기모노인지 모를 정도로 왜색풍이 강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1926년 김은호가 일본 도꾜東京에 머물 당시 그렸던 작품을 토대로 다시 제작한 것인데요
일본이 패망한 후에도 김은호는 여전히 이러한 왜색풍의 그림을 즐겨 그렸기 때문에 친일화가라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친일은 단순히 개인적인 활동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김은호는 친일 화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많은 친일 행각을 벌였습니다. 그는 한국의 근현대 채색화를 일본화에 수장했고 왜색풍 그림이 현대적인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뿌리내리도록 최전방에서 노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제자들이 지금까지도 한국 미술계의 중심축으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 근현대회화는 발전은커녕 식민지 잔재로 남아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광복 후 대한미술협회(미협) 회원들 중 그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니 그의 파벌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됩니다.
18세기 후반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중 일부 / 김은호의 호랑이
조선의 호랑이는 몸통길이만해도 180cm가 넘는 거대한 시베리안 호랑이로
예로부터 조선의 상징이며 악귀를 쫓는 영물로 여겨져왔습니다
김홍도가 그린 호랑이는 등을 곧추 세우고 꼬리를 치켜 든 채 정면을 매섭게 응시하고 있는데요,
자세와 표정에서 호랑이의 용맹과 힘이 매우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수리의 선명한 王자와 검은 가로줄무늬의 털 하나하나 역시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반면에 오른쪽 김은호가 그린 호랑이는 마치 동물원에서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호랑이를 보는 것 같습니다
표정은 마치 고양이처럼 온순하게 느껴지고 꼬리도 바닥으로 축 처져 있는 것이 곧 하품을 하고 잠이 들 것 같습니다
게다가 살은 왜이렇게 쪘는지...용맹함과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김은호는 절대 그림을 못그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왜 조선의 호랑이를 저런 식으로 묘사했을까요?
민족의 얼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의도대로 그린 거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이는 작품입니다.
김은호가 그린 <논개영정>/ 윤여환의 <논개영정>
김은호의 논개를 보면 야릇한 기분이 듭니다
논개라기 보다는 미인도에 더 가까운 그림이지요
작품의 모델은 심지어 서울기생 김영애입니다.
일제의 영향을 받은 짧은 저고리와 꽃무늬 치마는 임진왜란 시대의 복식과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반면 고증을 거친 윤여환 교수의 논개 영정은 쪽머리가 아닌 가채머리를 하고 있으며
복식도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요, 자세와 표정에서도 왜장을 향한 결의가 느껴집니다.
광복 후 김은호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국전 심사위원을 거쳐 수도여자사범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을 거치며 이순신, 신사임당, 논개, 춘향, 안중근, 서재필, 정몽주 등은 물론 미국 윌슨 대통령,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등의 초상화를 그리며 미술계를 호령했습니다. 또한 그는 1962년 문화훈장대통령상을 받았고 1965년 3·1문화상, 1968년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여하는 등 미술계의 권위 있는 원로로 부와 명예를 누렸습니다. 김은호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엇갈립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를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포함시켰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된 화가였다는 것입니다.
운보 김기창
두 번째 친일 화가는 운보 김기창(1913~2001)입니다. 일명 귀머거리 화가로 알려져 있는 그는 한국 화단의 거목이라 불릴 만큼 대단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고 작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입니다. 어린 시절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각을 잃은 김기창은 17세에 이당 김은호의 제자로 들어가 한국화를 배웠습니다. 일제강점기 그는 스승의 활동과 왜색풍 화법을 그대로 밟았는데요, 위에서 언급한 일본과 친일화가들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차례 입상을 하며 입지를 다져나갔 습니다. 조선미술전람회는 일본 군국주의 찬양과 조선 민중의 사상 순화를 목적으로 열렸는데요, 김기창은 1938년 추천작가로까지 선정되었습니다.
이당 김은호의 작품과 분위기가 비슷하지요?
운보 김기창은 일제 치하가 한창이던 1934년 왜색풍이 가득한 이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지고, 도쿄 일왕을 암살하려던 이봉창 의사가 일본에서 처형되던 그 때
김기창은 친일파들과 어울리며 이런 그림이나 그리고 있었습니다.
여인의 잔무늬 저고리와 체크 치마, 아이의 꽃무늬 한복와 단발 머리는 누가 봐도 왜색입니다.
사실 묘사 위주의 채색화법, 섬세한 필치는 일본인들이 좋아하던 화풍이구요.
게다가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했을 당시 저런 좋은 집에서 새하얀 쿠션에 기대고 앉아
한가롭게 부채질이나 하며 축음기를 듣고 있는 모녀가 조선인 중에 누가 있었을까요?
친일파 가족들이 아니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요? 친일화가가 아니라면 불쌍한 조선 민중을 그렸어야지요?
1942년 김기창은 친일미술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가 개최한 반도총우미술전람회에 참가합니다. 스승 김은호는 위원작가로 함께 참여했지요. 반도총우미술전람회는 징병제 실시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것으로 작품의 주제는 징병제에 관련 된 것만 가능했습니다. 김기창은 이 시기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하자는 그림을 다수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그는 일제를 찬양하고 황국신민의 영광을 고취하기 위해 열린 결전미술전에서 <적진육박>으로 ‘조선군 보도부장상’을 수상하기도 했지요. 남양군도에서 소총에 대검을 끼우고 적진을 향해 육박전을 치르러 돌진하는 ‘황군’을 모습이 담고 있는 <적진육박>은 작품에 담긴 사상이 뛰어나다는 일제의 판단아래 어린이 잡지 <소국민> 1944년 5월자 표지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운보 김기창의 <적진육박> 1944년 / <총후병사> 1944년
사실 김기창은 장애를 극복한 천재화가라는 타이틀과 대중적 인기 그리고 대한민국 현대 화단에 적지 않은 족적을 남긴 탓에 친일 논란에 대한 찬반논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완전 군장한 병사가 쉬고 있는 모습을 그린 <총후병사>와 매일신보에 실린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으로 친일의 도마에 올랐지만 이 정도 작품으로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부당하는 반론이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004년 <적진육박>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의 친일행적도 서서히 들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김기창이 참여한 결전미술전은 친일미술행위의 절정으로 불리는 전람회입니다. 당시 출품된 작품들의 내용은 모두 '결전'으로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을 찬양하는 미술이었습니다. 여기서 김기창은 당당히 Top 3에 해당하는 상을 받은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1941년 친일 화가, 일본인 화가들과 함께 '보국 열의로 총우의 대작을 망라한다'는 목적의 친일단체 구신회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김기창은 1962년 서울문화상, 1977년 은관문화훈장, 1981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고 같은 해 예술원 정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앙일보 중앙문화예술상(1982), 예술원상(1983), 5·16민족상(1986) 등 여러 상을 수여 하며 미술계의 거장으로 자리 잡았지요. 또한 한독미술가협회 회장, 세계문화자유회 한국지부 실행위원, 아시안게임 동남아채묵 추진위원장, 88 서울올림픽 아트 작가로 활동하는 등 정치적 활동도 활발히 했습니다. 이런 그를 누가 감히 비판할 수 있었을까요?
김기창의 <전복도(戰服圖)>
마치 기생처럼 묘사된 조선의 무당입니다
무당은 신과 만나는 종교적 제의인 굿을 주관하는 사람으로 우리나라 민간 신앙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김기창의 작품에서 귀신과 싸우기 위해 옷을 갖춰 입은 무당은 야릇한 시선으로 보낼 뿐입니다.
몸은 반쯤 돌아가있고 손은 허리에 가 있는데요,
이 자세와 시선은 일본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유혹하는 여인의 자세와 같습니다.
김기창은 자신의 친일 행각에 대해 변명으로 일관했는데요, 1993년 충북 청원에 건립하려던 자신의 기념관 계획에 대해 시민단체 등에서 반대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친일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은 실력이 없었어. 당시 뽑힌 사람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인데 높은 나무가 바람을 많이 받는 것처럼 나는 지금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반성이 전혀 없었던 것인데요, 그는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에 의해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됐습니다.
이쯤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집니다. 왼쪽 사진 속 인물이 바로 운보 김기창입니다. 가운데는 그가 그린 세종대왕의 영정이고 오른쪽은 1만원권에 그려진 세종대왕의 모습이지요. 친일파가 그린 그림이 세종대왕의 표준 영정이 된 것도 기함할 일인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그림이 화폐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품을 잘 보세요. 세종대왕의 얼굴과 김기창의 얼굴이 너무나 닮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기창은 세종대왕의 영정을 상상으로 그렸다고 밝혔는데요, 의도적이었는지 우연이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약간 부은 듯 보이는 긴 눈과 눈밑 지방 그리고 크고 두툼한 코와 커다란 귀와 늘어진 귓볼, 앞턱의 모양까지 모두 김기창의 얼굴이 겹쳐 보입니다.
친일 화가가 그린 그림이 화폐에 들어가 있는 것은 쉽게 넘길 문제는 아닙니다. 게다가 만원 뿐 아니라 5만원권의 신사임당은 김은호의 작품이고 100원짜리 주화의 이순신의 초상화 역시 대표적인 친일화가 장우성의 작품입니다. 올 초 이 문제가 국회에서 논쟁이 되었다고 합니다. 화폐 등에 그려져 있는 위인들 초상화 중 친일 반민족행위 전력이 있는 화가들의 그림을 빼자는 법안을 놓고 여야가 찬반으로 갈려 설전을 벌인 것인데요, 새누리당의 반대로 무산 혹은 연기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과거 식민지에서 독립했던 나라 중 나라를 배신하고 반민족 행위를 한 예술가가 그린 작품을 영정으로 삼고 또 그 그림을 화폐에 올린 나라는 세계에 단 한 곳도 없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영정을 화폐에 올리지 못하는 나라도 물론 없을테지요.
김기창 <가을> , 1934년
가을걷이로 바쁜 부모의 새참을 가지고 가는 새 남매를 그린 그림입니다
김기창은 이 작품으로 1935년 총독부가 주최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을 했습니다.
그림의 주제와 분위기는 모두 일본의 요구대로 그려진 것 같습니다
청량한 가을 하늘 아래 목가적인 풍경, 평화로운 분위기가 풍기는 조선의 시골 모습..
일본의 통치 아래 행복한 조선황민을 그린 작품이 아닐까요.
가장 선명하고 확실한 친일적 화단활동을 해왔던 스승 김은호와 제자 김기창은 광복 후 자신들의 탄탄한 인맥을 활용해 대한민국의 화단에 거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많은 화가들이 이들의 제자로 또 제자의 제자로 이어지는 중이구요. 포스팅을 하며 우리는 언제쯤 명확하게 정리된 과거사 위에 서 있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노를 너머 슬픔마저 느껴집니다. 친일파들의 흔적들...이제는 지워야 할 때가 아닌지 고민하게 되네요.
일제시대에 성공적으로 화단활동을 한 사람들은 다 제거하면 음지에서 활동을 제대로 못하고 고생한 화가들만이 친일하지 않은 화가로 남겨질 것입니다.
참고문헌
『한국근대미술의 역사』(최열, 열화당, 1998)
『근대한국미술의 전개』(이구열, 열화당, 1977)
『이당 김은호의 생애와 예술』(이규일, 호암갤러리, 1992)
『한국근대미술연구』(이경성, 동화출판공사, 1975)
YouTube 최진기 강의 <친일의 민낯> <-- 시간 되시면 이거 꼭 보세요! 제 글보다 훨씬 명료하고 잼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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