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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식 설교를 이끌어 가는 네 가지 형식
1. 스토리 진행(running the story)
성경사건의 진행을 그대로 옮겨 설교하기
2. 스토리 보류(Delaying the story)
설교본문을 뒤로 미룬채 현재의 관심사로부터 설교시작하고 그 다음 본문을 대입
본문이 익히 알려져 있어 놀라움 전달에 어려움 있을 경우
3. 스토리 유예(suspending the story)
성경본문으로 설교 시작하여 다른 무엇이 스토리 진행과정에서 돌출하는 것 즉 스토리 흐름 선상에 있는 해당 본문을 떠나는 것으로 이 경우는 다시 본문으로 돌아옴
그러나 만일 두 본문을 갖고 십작하여 어느 하나를 다루다가 다른 본문으로 가서 다시 돌아옴 없이 끝맺으면 스토리 보류에 해당함
4. 스토리 전환(alternating the story)
기본적인 줄거리에 다양한 성경 기사를 그때 그때 동원하는 기법
* 이야기식 설교의 작성단계
1. 평형(disequilibrium)을 뒤집어라
이 이 단계는 청중들을 설교의 주제에 참여시킴으로 그들의 평형감각(늘 갖고 있는 생각)을 뒤집어 놓는 단계이다.
회중의 경청태도는 매우 다양하고 준비상태 역시 천차만별이다.
존 듀이는 "사고(thinking)는 심각한 문제점을 만난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언명.
예를 들어 "오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한다면 그 다음 회중들이 경청하게 하기 위해서는 긴장감(문제)이 전달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의 문제는 너무도 자주 사랑의 손길을 펼쳐 보지만 되돌려 받는 것이라고는 멍들고 상처 입은 손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거부당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갈등이나 문제점은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재료이다. 이 말은 설교제목에도 적용된다. 설교제목은 결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호함과 문제를 드러내야 한다.
연극이나 영화의 서두가 각양의 모호함과 문제를 제시하며 시작하는 것에 주목하라.
모든 설교에는 언제나 이슈가 되는 중요한 모순 꼼짝할 수 없는 상황 혹은 문제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서론에서 이런 모호함이 다루려는 주제에 대한 직접적인 모호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서론은 보다 핵심적인 주제를 향한 핵심적인 모호함을 위한 무대장치 정도로 구상될 수도 있다.(하지만 이 방법이 설교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회중이 따라오지 못한다면 그것은 문제일 수 있다.(이것은 서론의 예화 사용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설교를 열어가는 단계의 목적은 청중의 마음에 모호함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
지금까지 우리 설교는 설교에서 줄거리는 제쳐두고 설교하도록 배워왔고 심지어 서론 부분에서 한 문장으로 된 핵심 개요를 말하도록 배워왔다. 이것은 드라마가 시작되기도 전에 중앙무대로 나가서 드라마에서 하게될 모든 중요 포인트를 발표해 버리는 멍청한 극작가와 다름 없는 것이다.
바람직한 예:
a. 월러스 해밀턴의 "기독교도 기회가 있는가"라는 설교: "기독교를 향해 돌진하는 강력한 힘들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과연 기독교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b. 어네스트 프레몽티틀의 "어린아이로"라는 설교: 예수님의 이 이야기에는 확실
히 매력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습니다.
c. 레즐리 웨더헤드의 예수는 거룩함과 세속을 구별하셨는가? 라는 설교에서: "저는 가는 곳 마다 현대 종교의 가장 흔한 비판이 바로 종교가 실제적인 삶과 무관하다는 점임을 발견 하고는 무척 고민을 합니다"
d. 데이빗 뤼드의 우리 기도의 응답은 무엇인가 라는 설교에서 : "여러분이 기도할 때 누군가가 듣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예들은 공통적으로 설교의 서두에 '걸려있는 무엇'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끝맺음과 해명이 필요한 무엇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불완전하기에 회중이 계속 듣게 하는 것
문제는 이 도입뒤에 바로 해결책을 주면 안된다는 것. 제럴드 케네디의 설교가 보기: "오늘밤 저는 여러분에게 좋은 소식인 복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세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은 인격의 좋은 소식입니다. 우주의 핵심과 그 중심에는 한 인격체가 자리잡고 있는데 바로 하나님이 한 인격이라는 사실 이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이 설교에서 금새 긴장이 사라지게 됨/ 만일 복음은 인격의 좋은 소식이라는 문장다음에 이런 문장을 집어넣는다면 어떨까: 아니 그게 어떻게 좋은 소식입니까? 아마 그런 질문을 던지는 분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사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소식들은 대부분이 좋지 않은 소식들입니다. 특별히 오늘날 이곳 저곳에서 너무도 비인격적이고 비인간적인 경험들을 하며 사는 것은 좋지 않은 소식중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비인격적인 세상속에 우주의 핵심과 그 중심에 하나님이라는 한 인격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소식입니까.
이 단계에서는 해답을 주지 않는 게 중요하다. 회중들로 질문과 문제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2. 모순을 분석하라
이 단계는 분석과 진단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길이로 보면 가장 긴 단계로 나머지 것들을 묶어 놓은 것 보다 길 수도 있다.
이 단계의 핵심어는 "왜 그런가?" 이다. 이런 것을 갖고 모순의 핵심으로 뛰어들게 해야 한다. 이 단계는 진단의 단계인바 진단은 우리 설교 임무에 핵심적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심각한 질병으로 문제점을 느끼고 의사를 찾는 것과 같다. 의사의 진단이 얼마나 중요한가? 왜 그런가를 물어보는 진단은 설교 내용뿐 아니라 설교구성을 유지해 나가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적절한 분석은 깊이를 요구하며 깊이 있는 분석을 위해서는 단순성을 넘어 인과관계의 복잡성까지 나아가야 한다. 예를 들어 탕자가 왜 집을 나갔는가? 를 놓고 인과관계의 복잡성의 차원에서 풀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EX) 왜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가? 전형적 대답: 그들은 게으르기 때문이다. 그럼 왜 게으른가? 왜냐하면 동기부여가 없기 때문이다 왜 동기부여가 없나? 왜냐하면 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존중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 일하는데서 실패한 문제가 일하지 않는 문제의 배후에 있음을 알게 됨
만일 이런 분석이 피상적일 때 거침없이 술술 나오는 대답으로 일관하게 되고 그것은 회중의 신뢰를 떨어뜨림
사람들은 이미 완성된 가구에는 약간의 관심을 보이나 가구 만두는 과정에는 상당한 관심을 보임을 알아야 한다. 설교자는 회중과 함께 분석의 과정을 경험해야 한다.
요약하면 이 단계에서는 1) 피상적인 분석에서 깊이 있는 진단으로 옮겨가기 2) 해결의 준비가 되도록 청중을 세워가기 3) 말씀이 선포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기
ex) 헬무트 틸리케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이 비유는 너무도 단순하고 아름다울 만큼 자명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또 어릴 적부터 친숙한 것을 포함하고 있어서 우리는 여기에 한마디라도 덧붙이기를 주저합니다. 왜 우리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이 이해하는 것을 해부하고 분석하며 머리를 짜내면서 이리저리 궁리해야만 합니까?
이 언급 뒤 틸리케는 곧 바로 "우리는 자주 우리가 가장 친숙한 바로 그것들의 내적인 신비를 놓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 비유가 너무나도 자명해서 철저하리 만치 진부한 요점을 내포함을 설교자가 알고 있음에서 나온 말이다.
즉 현대의 독자는 바리새인에게는 냉담하고 세리에게는 동정적이 되기 때문이다. 틸리케는 이런 기존의 이미지에 바리새인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의로운 인물이며 세리는 좋지않은 인물임을 내세우는 새로
운 이미지 작업을 시도하면서 관심을 고조시킨다. 이리되면 회중은 그러면 왜 바리새인은 의롭게 되지 못하고 세리만 의롭게 되는가에 대해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여기서 회중의 '왜 그런가?'라는 질문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때 틸리케는 "여기가 바로 우리가 두드러진 핵심을 만나는 자리입니다"라는 멘트를 덧붙인다. 이를 통해 그는 모호함이 주는 절박한 긴장감을 증대시키면서 모순을 분석하는 자리로 옮겨간다. 그리고 그 해결점의 실마리를 드러내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단계의 궁극적인 목적은 왜 그런가에 대한 설명에 도달하는 것이다.
3. 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내라
이 단계는 문제화된 이슈를 해결해 주는 어떤 설명을 찾는 단계이다. 지금 문제가 되는 논점을 납득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이것은 기대하지 않은 곳으로 부터(상식적인 기대) 오며 그것이 모든 것을 뒤집어 놓는다. 소위 역전의 발생이다.
다음의 조크에도 분명한 역전이 보인다: 올리버 경은 영국의 유명한 사냥클럽의 꽤 나이든 회원이다. 그 회원들은 모여서 차를 마시며 언제나 그 클럽 시니어 멤버에게 사냥의 독특한 개인 경험을 이야기하도록 한다.
올리버 경 차레가 되었다. '음'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우리가 아프리카의 코끼리를 사냥하고 있었지요. 거대한 수컷 코끼리를 쫓으면서 하루 온종일을 보내고 거의 잡는 희망을 포기하려던 순간이었습니다. 언덕 꼭대기에 올라 갔는데 갑자기 저기 아래에 내가 이제껏 본 것중 가장 큰 숫코끼리가 황야에 서 있는 것이었어요. 여러분 제가 나의 총을 들고 내 눈에 들어온 코끼리를 향해 막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내 오른 편 풀숲에서 부스럭 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바라보니 불과 몇 피트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벵갈산 호랑이가 있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 호랑이가 으르렁 으르렁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 말 하기가 참 부끄럽습니다. 여러분 저의 바지가 다 젖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말을 듣던 한 젊은 멤버가 말했습니다. "올리버 경님, 너무 부끄러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순간에는 누구나 그럴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 때가 문제가 아니요" 라고 올리버 경은 대답하면서 "그 때가 아니라 지금... 제가 으르렁 으르렁 하는 그 순간에 바지를 적셔 버린 거에요"
이 유머는 전혀 기대치않은 역전을 통해 전달된다.
이 부분이 밋밋해 지는 이유가운데 하나는 역전의 논리가 아닌 성경을 근거한 '어떻게로' 급히 나아갈 때 그러하다.
프스터-헤리스는 "해결의 방법은 언제나 문제가 된 그림을 뒤바꾸고 역전시키고 급회전시켜서 새로운 그림이 급작스럽게 떠오르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의 대표적 실레를 틸리케는 많이 제공한다: 그는 탕자를 고향에 돌아오게 한 것은 먼 타국이 그를 고향에 돌아가고 싶도록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고향 생각이 먼 타국을 진저리치게끔 싫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만일 탕자의 비유를 가지고 설교할 때 이 본문은 잔치에참여한 의롭지 못한 아들과 문밖에 있는 충성된 아들로 대별될 수 있으며 이것은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 본문이 설득력을 가질려면 본문에 대한 역전의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 즉 여기서 둘째 아들을 역설적으로 성실한 자로 그려지도록 해야 한다: "충성되고 충직하게 일한 결과가 결국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잔치가 되도록 한 경험을 하지않은 자가 있습니까? 열심히 일한 대가가 더 많은 일을 하게 하는 반면 무 책임 하게 산 사람이 오히려 잔치의 주역으로 등장한 다는 것은 우리의 속을 꽤 불편하게 합니다. 상이나 명예가 언제나 묵묵히 있어야 할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흐려 우연히 그 자리에 있게 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분명히 아십시오 잔치는 분명 불공정한 것입니다!"
이런 진행은 분명 역설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역설에 회중들은 공감하기 마련이다. 바로 여기서 설교자는 역전을 마련해야 한다. 즉 큰 아들이 잔치의 바깥에 방치되었는데 어떻게 예수 이야기에서 그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큰 아들이 성실하기에 당연한 결과인가 아니면 그의 성실을 다시 보아야 하는가?
큰 아들은 들에서 돌아오면서 집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것을 보고 의아심과 기대반으로 돌아와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알기 위해 아버지가 아닌 종을 찾는다. 에수는 이 장면을 의도적으로 집어넣으신 것이다. 즉 아버지를 신뢰하지않는(지금까지의 아들과는 정 반대의) 큰 아들의 그림이다. 이미 작은 아들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기전에 이미 큰 아들의 반응은 드러나 있다.
Ex)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 기사 - 내적인 모순은 모든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근원적 제사를 바치도록 요청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유일한 도구인 이삭을 바치라는 것이다. 언약의 이름으로 약속 성취의 유일한 도구를 파기하라고 아브라함에게 요청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역전의 원리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 형태로 가능하다:
원인-결과의 역전
변화된 원인의 역전
변화된 가정의 역전
변화된 논리의 역전
일단 해결의 실마리가 분명하게 되면 청중은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된 것이다.
4. 복음을 경험하라
이 단계는 복음을 경험하는 단계이다. 일단 해결의 실마리가 드러나면 청중은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된 것이다.
이때 조심할 것은 복음의 누전(the homiletical short circuit)이다. 즉 회중은 해답을 빨리 듣고 싶어하고 설교자 역시 그런 기대에 부응하려 한다는 것이다.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실제적인 내용은 선포보다 앞서는 실제적인 내용과 일치해야 한다. 이 내용을 설교 서두에 전하는 것은 치명적이 될 수 있다.
5. 결과를 기대하라
지금까지 설교의 구성은 논점과 더불어 간단한 해결의 언급도 밝히면서 설교를 시작하여 설교의 본론은 주로 성경구절과 현대의 상황을 한데 얽어 놓는 일을 포함한 해결책을 상술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들은 결론 부분을 구성하는 설교의 '물음'의 최고점으로 인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헌신으로의 초청(call to commitiment)으로 끌고 가도록 해야 했었다. 이 마지막 요구나 초청이 최고의 절정이었다.
이야기식 설교는 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고조되는 긴장감이 설교의 70% 진행정도에서 깨지기 시작한다. 해결은 복음이 새롭게 나타난 상황과 교차할 때 발생하고 '물음'이란 - 결과를 기대하는- 복음에 응답함으로 가능케된 차이점을 한층 더 보여주는 것이다.
즉 클라이맥스가 설교의 종결부에 나타나는 전통적 인 방식과 달리 여기서는 해결의 순간에 위치한다. 그리고 나서 그 해결의 결과로 인해 문제를 다시 정돈하는 것이 설교의 '물음'과 동등한 것이다. 즉 절정은 복음의 제시에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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