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호 _일곱 개 바람 이야기

[구사영]

<정정호 산문집 _ 바람개비는 즐겁다>

일곱 개 바람 이야기

   사막에는 비가 아니 옵니다.

   나무도 풀잎도 보이지 않고 모래만이 끝없이 깔려 있는 곳이 사막입니다. 다른 땅에는 꽃이 피고 새가 울어도 사막에는 뽀얀 모래 위에 봄 바람이 이따금 불 뿐입니다. 다른 땅에는 푸른 잎새가 너울너울 늘어지고 그 사이로 차디찬 샘물이 흘러나려도, 사막에는 하얀 모래 위에 여름 바람이 이따금 불 뿐입니다. 다른 땅에는 갖은 곡식이 열고 노랗게 붉게 단풍이 들어도 사막에는 하얀 모래 위에 가을 바람이 이따금 불 뿐입니다. 다른 땅에는 눈이 나리고 얼음이 얼어도 저 사막에는 아무러한 변화도 없이 끝없는 모래 위에 이따금 겨울 바람이 불 뿐입니다.

                                                                   — 피천득, 산문시 「어린 벗에게」 첫 문단(강조는 필자)

   2000년 나의 잡문집 『팽팽한 밧줄 위에서 느린 춤을』이 나오고 벌써 20여 년이 흘렀다. 다른 사람이 쓴 책들을 읽고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무거운 연구논문 쓰느라 분주했던 나는 에세이식 글을 별로 쓰지 못했다. 퇴임한 지 6년이 지난 이제야 겨우 산문집을 내게 되었다. 소위 상아탑의 학술논문 기능공으로 수십 년 지내다 보니 나의 창작 본색은 사라져버린 듯하다. 안간힘을 써서 간신히 이전에 쓴 글들을 모으고 몇 편은 새로 써 겨우 책 한 권 분량을 만들었다. 이번 산문집이 첫 저서를 낼 때처럼 가슴이 설레는 이유는 무엇일까? |

  일찍이 중·고교 시절부터 시, 에세이 등 창작에도 뜻이 있었으나 대학과 대학원에서 오래 공부하고 연구하다 보니 나는 창작보다 남의 글을 읽고 설명만 하라는 공자님 말씀 “술이부작(述而不作)”에 충실하게 되어 창작하는 작가가 되지 못하고 영어를 가르치는 교수와 재미없는 논문을 쓰는 학자로 살았다. 은퇴 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창작하는 작가로 “변신”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아무쪼록 이번에 상재하는 산문집이 내 글을 쓰는 “작이불술(作而不述)”의 새로운 “시작(始作)”이 되면 좋겠다. 그러나 “변신”은 언제나 느리고 어렵다.

  현재의 나를 만든 것의 8할은 “바람”으로, 인생 전반부 최소 다섯 번의 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첫 번째 바람은 “시대”와 역사의 바람으로 초등학교 입학 전 바람이지만 아마도 해방공간의 혼란과 6·25전쟁의 민족 비극이 나의 무의식에 깊이 각인된 것이 틀림없다. 유년기 바람은 내가 얼마나 즐겼는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이리저리 피난 다니느라 몸 고생을 크게 했겠지만 어려서인지 고통스럽다는 생각은 크게 없었던 것 같다.

  나의 부모님은 8·15해방 전까지 함경북도 명천에 사셨다. 해방 직후 북한에 젊은 김일성 장군이 들어와 토지 개혁, 지주 축출, 지식인 추방, 기독교 탄압이 시작되자 곧바로 월남하신, 말하자면 원조 탈북인(북한 이탈주민)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얼마 후 최대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으로 38선을 중심으로 위아래 오르내리며 이리저리 피난 다니다가 1953년 7월 휴전이 되어 인천(제물포)의 당시 변두리였던 주안(朱安)에 정착하였다. 전쟁 후 궁핍하게 살았던 인천의 바람은 너무나 차가웠다. 그 바람은 아마도 시인 김소월이 1920년대 초 제물포를 방문하여 쓴 시 「밤」에 나오는 바람이었을까.

       벌써 해가 지고 어두운데요,

       이곳은 인천에 제물포, 이름난 곳.

       부슬부슬 오는 비에 밤이 더디고,

       바닷바람이 춥기만 합니다. (제2연)

소월에게 제물포의 추운 “바닷바람”은 어린 시절 나의 바람이기도 했다. 황폐한 이때 바람개비는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어린 시절 4계절 바람은 나에게 다양한 맛과 멋을 주었다. 봄 “산바람”은 따스하고 훈훈했고, 여름 “바닷바람”은 염분으로 끈적하고 후덥지근했다. 가을 “하늘 바람”은 상큼하고 스산했으며, 겨울 “문풍지 바람”은 섬뜩하고 엄혹한 냉기를 뿜었다. 그곳에서 초·중·고등학교에 다니다 대학은 서울에서 다니게 되어 서울시민이 되었다. 결국, 나는 해방공간과 6·25전쟁이라는 “시대와 역사의 바람에 나부꼈던 바람개비가 아니었을까?

  두 번째 바람은 인천의 서해 “바람”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주안에서 살다가 바다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산동네로 이사 가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살았다. 궁핍한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지낸 어린 시절,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동네 뒷동산에 올라 바람개비를 들고 서해를 바라보면서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가슴으로 품으며 바다 너머 세계를 동경하고 미래를 몽상하였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은 뛰어다니며, 나 스스로 바람을 만들기도 했다. 뒷산으로 불어오는 인천 앞바다 바람은 대부분 서풍(西風)이었다.

  세 번째 바람은 대학 시절 근대화, 민주화 바람이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1968년 프랑스에서는 근대 서구문화의 모든 가치를 반성하고 새 판을 짜려는 대학생들의 68문화혁명이 있었다. 대학 시절은 대부분 박정희 유신독재 반대 시위로 툭하면 학교 문이 닫혀서 제대로 강의 교재를 마친 적이 없었고, 공부는 주로 독학과 자습으로 채워졌다. 안타깝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한 불만의 시대였다. 민주화 바람은 그만큼 혹독하여 고학으로 대학과 대학원을 다닐 때 나의 바람개비는 날개가 찢어진 바람개비였다.

   네 번째 바람은 문학과 문화 “이론(理論, Theory)”의 바람이다. 학문에 뜻을 세운 나는 운 좋게도 서울 소재 대학에서 일찍 자리를 잡은 후 1981년 1월 30대 초반에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때 마침 유럽과 미국은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서구의 근대 계몽주의 해체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해체주의, 페미니즘. 생태학, 포스트식민주의, 문화 연구 등 새로운 서구 이론의 바람 속에 서 있던 나의 바람개비는 여러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불규칙하게, 그러나 강하게 흔들리며 돌았다.

  40대 미혹됨이 없는 “불혹(不惑)”의 나이를 지나고 다섯 번째 바람은 내 나이 50세를 넘기면서 맞은 성령의 바람이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지나간 삶을 반추하고 회고하면서 홀연히 나는 알게 모르게 지은 내 죄를 알고 놀랐고 그러면서도 내가 받은 은혜에 울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 성령의 충만함”(사도행전 2 : 2~4)을 느꼈다. 이전에도 교회에는 일요일 신자로 다녔지만, 이번에는 진정한 회심(回心)이었다. 뒤늦은 나이였지만 교회에서 각종 교육과 훈련을 받으며 예수님의 작은 제자가 되기로 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아직도 나 자신이 “구별”된 기독교인으로 제대로 살고 있는지 부끄러울 뿐이지만 위로 하나님 을 사랑하고 옆으로 나의 이웃과 자연을 사랑하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로새서 2 : 6~7).

  판단에 혼란이 비교적 적어진 인생 후반부 60대 “이순(耳順)”을 맞은 시기에 나에게 분 여섯 번째 바람은 남북통일의 바람이다. 함경도 출신인 초기 탈북민 부모님의 아들로서 나는 무의식 속에서 항상 나의 뿌리에 관심이 있었다. 이와 더불어 나이가 들면서 70년 이상 지속하는 한반도 분단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남북통일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게 되었다. 1945년 8·15해방이 “도둑같이” 몰래 왔듯이, 문인으로서 “문학으로 통일하자”와 기독교인으로 “복음적 평화통일”을 논하면서 미리미리 준비하고 있으면 통일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닐까? 나는 통일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통일문인협회에 참여하고 탈북민과 함께 드리는 예배에도 정기적으로 참석하였다.

  칠순이 넘었으나 공자의 말씀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규범에 벗어나지 않는다(從心所欲不輸矩)”는 경지에 다다를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제 나에게 새롭게 불어올 일곱 번째 바람은 무엇일까? 아마도 창작이 될 것이다. 그동안 죽은 작가들의 글을 읽고 묘지기처럼 그것에 관한 글만 쓰고 살았다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삶에는 나의 글을 쓰고 싶다. 일곱 개 나의 바람은 무지개 색깔처럼 다채로웠으면 좋겠다. 일곱 개 바람이 모이면 회오리바람이 될까? 나는 그 회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 은하수로 나아갈 수 있을까.

  전반부와 후반부 인생길에서 나는 일곱 가지 바람을 앞에서 맞으며 바람을 타기도 했지만 거스르면서도 살아왔다. 자전적 요소가 강한 이 산문집 제목이 바람개비는 즐겁다인 것은 바람을 타며 노는 바람개비놀이를 즐겼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즐겼다는 말은 바람과 다투거나 싸우지 않고 바람개비를 함께 돌렸다는 뜻이다. 단계별로 어떤 곤경과 환난 속에서도 낙망보다 비전과 희망을 품고자 애썼다. 다른 말로 “비극적 환희”를 가지고 살고자 노력했다는 뜻이리라. 바람이 거칠고 세찰수록 바람개비는 더 빠르고 힘차게 돈다. 그러나 이제부터 나는 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수동적 바람개비가 아니라 휘파람을 불며 내 안에서 스스로 바람을 일으키고 만들어내는 능동적 바람개비가 되고 싶다.

  노인이 된 인생 후반부에도 계속 바다와 산과 하늘을 생각하며 바람이 잘 부는 곳에서 바람을 맞으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춤추며 바람개비를 돌리고 싶다. 그러나 나의 바람은 한국 동요의 아버지 윤석중의 아기 같은 부드러운 바람도 아니고 미국의 민중시인 칼 샌드버그의 바람의 도시 시카고의 빌딩들 사이로 부는 칼바람도 아니다. 나의 일곱 개 바람이 다 모이면 이제 정지용의 바람이 될까?

바람 속에 장미가 숨고

바람 속에 불이 깃들다.

(...)

바람은 음악(音樂)의 호수(湖水).

바람은 좋은 알리움!

오롯한 사랑과 진리(眞理)가 바람에 옥좌(玉座)를 고이고

커다란 하나와 영원(永遠)이 펴고 날다.

        - 정지용, 바람 2」 부분

오랜 기간에 걸쳐 써낸 다양한 글을 모으다 보니 목차를 만들기 위해 분류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태준의 『무서록』처럼 부(部)나 장(章)으로 나누지 않고 무작위로 배열할까도 했지만 나는 이 산문집을 억지로 4부로 나누었다. 1부 봄은 어린 시절 나 자신과 가족에 관한 글로 이루어졌다. 2부 여름은 살아오면서 아름다운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고, 3부 가을은 책 바보인 나의 독서일기의 일부이다. 4부 겨울에서는 최근 나의 새로운 관심사가 드러난다.

모아놓은 글을 다시 읽으면서 내 글의 특징을 생각해본다. 내가 보아도 내 글에는 남의 글 인용(引用)이 너무 많다. 나는 치유할 수 없는 인용 중독자다. 그러나 나는 즐겁게 고백하고 인정한다. 아마도 나는 글에서 나 자신의 목소리와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글쓰기나 글짓기”보다 여러 글을 병치시키고 절합시키고자 하는 것 같다. 나의 개성을 죽이고 저자가 거의 소멸하는 “저자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텍스트 이론에 충실해지려는 것인가? 태양 아래 과연 새로운 것은 있을까? 모든 텍스트는 상호텍스트성 아래 서로 침투되어 얽혀 있는 역동적인 거미줄이 아닐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소중한 독자들을 위해 나의 글쓰기가 지루하고 단성적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다성적인 목소리들을 서 로 침투시키는 혼종적 “글짜기”를 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나의 글쓰기의 또 다른 특징은 글 시작 전에 제사(題詞)가 꼭 붙는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제사가 제법 길기도 하고 하나가 아니라 두세 개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 버릇은 내가 존경하는 영국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대문인 새뮤얼 존슨을 따라하다가 생긴 것이다. 존슨 박사는 그리스나 로마의 고전작가 글을 제사로 씀으로써 자기의 글을 공공의 장(public sphere)으로 만들려고 했다. 오래된 작가의 글을 불러내는 것은 『햄릿』에서처럼 일종의 유령 불러내기다. 이것은 어쩌면 경애하는 독자들을 깨워 불러오는 방식이기도 하다.

앞으로 나의 일곱 번째 바람인 창작의 새로운 바람은 잡문, 에세이, 시로 확장되어 나가기를 감히 바란다. 바람개비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나는 스승 피천득 선생처럼 짧고, 쉽고,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다. 사랑하는 독자들이 지극히 사적이고 잡종적인 나의 글판에서 어떤 작은 공감이라도 얻었으면 좋겠다. 염치없는 바람이다. 끝으로 흔쾌히 소설 형식으로 발문(跋文)을 써준 놀라운 친구 우한용 소설가가 고맙다. 나의 보잘것없는 글들이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신 푸른사상사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21년 5월 5일 어린이날

코로나 19 펜데믹의 한 가운데에서 치열한 새판짜기의 “바람”이 불어오면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나의 “바람개비”는 더 즐거우리라.

       웃으며 춤추는 어린이(笑舞兒)

      정정호 삼가 씀

[사무총장]

"칠순이 넘었으나 공자의 말씀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규범에 벗어나지 않는다(從心所欲不輸矩)”는 경지에 다다를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제 나에게 새롭게 불어올 일곱 번째 바람은 무엇일까? 아마도 창작이 될 것이다. 그동안 죽은 작가들의 글을 읽고 묘지기처럼 그것에 관한 글만 쓰고 살았다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삶에는 나의 글을 쓰고 싶다. 일곱 개 나의 바람은 무지개 색깔처럼 다채로웠으면 좋겠다. 일곱 개 바람이 모이면 회오리바람이 될까? 나는 그 회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 은하수로 나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