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대도호부 관아> 객사 임영관삼문
경포대, 오죽헌, 김시습기념관, 선교장 등 민간 기념물 및 경승지와 짝하는 관가 유적이다. 여기까지 봐야 제대로 강릉을 보는 셈이다. 객사의 정문 임영관삼문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어 풍광이 수려한 명승과 민간 전승 뿐만 아니라 관의 영역의 장엄한 정사까지 갖춘 전천후 도시가 강릉임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1. 방문지대강
명칭 : 강릉대도호부 관아 (동헌, 의운루, 객사 임영관삼문, 전대청, 칠사당)
위치 : 강원도 강릉시 용강동, 강원도 강릉시 임영로131번길 6
입장료 : 없음
방문일 ; 2023.2.22.
2. 돌아보기
1) 강릉대도호부 관아 소개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고려시대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서 머물던 여관터. 객사터·객관터. 사적.
1994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93년 강릉시 청사 신축예정 용지에 대한 발굴조사로 드러난 강릉 객사터이다.
현재 강릉 임영관 삼문은 이 터의 남측에 1962년 국보로 지정 보존되어 있고, 서측에는 임진왜란 이후 경주에 있던 태조이성계의 어진을 모셔다 봉안하였던 집경전(集慶殿)터가 있다.
조선 영조 때인 1750년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임영지(臨瀛誌)』에 의하면, 임영관은 936년(고려 태조 19)에 창건되었고, 그후 1627년(인조 5) 대청(大廳)이 화재를 당하여, 1633년 부사 유문화(柳文華)가 다시 건축하였다. 그후 수차례의 중수와 중창을 거쳐 1927년에 이르렀다.
『임영지』에 의하면, 강릉객사의 규모는 전대청(殿大廳) 9칸, 중대청 12칸, 동대청 13칸, 낭청방(廊廳房) 6칸, 서헌(西軒) 6칸, 월랑(月廊) 31칸, 삼문(三門) 6칸 등 모두 83칸이었다고 한다.
1993년도의 발굴조사에서 고려 초기부터 중기 이후, 조선시대의 연화문 암·숫막새들과 조선시대 와편들, 11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는 고급 청자편들, 16·17세기의 조선 백자 및 분청자기편들이 양호한 상태로 나왔다.
이들 출토품 및 유구, 『임영지』의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임영관은 고려 초기부터 1927년 1차, 1929년 2차의 강릉공립보통학교 설립에 따라 일제에 의하여 철거될 때까지 이 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에는 본래 공민왕이 1366년(무오년)에 낙산사 관음에 후사를 빌기 위하여 왔다가 길이 막혀 열흘동안 강릉에 머물렀을 때 쓴 ‘임영관(臨瀛館)’ 편액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객사문에 걸려 있는 편액은 1970년대에 다시 모사 제작한 것이다.
임영관지는 1993년 이곳에 있던 경찰서의 철거로 빈터로 남아 있다가 1993년 5월 10일 강릉시 청사 신축기공식 후 관상수를 옮겨심기 위하여 캐내던 중 임영관의 건물유구가 노출됨으로써 곧 발굴조사에 착수하여 사적으로 지정하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강릉대도호부관아 아문
강릉시는 동헌 의운루 등의 건물 건축을 2012년에 마무리하고 2014년 명칭을 '임영관지'에서 '강릉대도호부관아'로 변경했다.
강릉임영관 '강릉대도호부 관아' 명칭 변경
조선시대 관아인 강릉임영관이 '강릉대도호부 관아'로 명칭이 변경된다.
사적 제388호인 임영관 관아는 12년간 복원사업을 거쳐 2012년 10월에 임영관 내 객사의 정청인 전대청과 중대청, 동대청, 아문과 동헌, 별당, 의문루 등 관아 건물 대부분이 복원돼 일반에 공개됐다.
(2014. 9. 22. newsis)
중문
동헌
별당
3) 동헌
관찰사·병사·수사(水使)·수령(守令)들의 정청(政廳)으로서 지방의 일반행정 업무와 재판 등이 여기서 행해졌다.
지방관의 생활 처소인 내아(內衙 : 西軒이라고도 함.)와 구분되어 보통 그 동편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헌으로 불리게 되었다. 아사(衙舍)·군아(郡衙)·현아(縣衙)·시사청(視事廳)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군현의 크기와 시대에 따라 건축의 양식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다. 그러나 조선 후기 건물인 경우 일반적으로 3, 4층의 석축 위에 정면 6, 7칸, 측면 4칸의 목조 주심포(柱心包) 구조에 팔작지붕의 장중한 체제를 갖추고 있다.
보통 중앙 3칸은 마루로 된 대청이며, 양쪽에는 1, 2칸씩의 온돌방으로 꾸며져 있다. 또 방의 전후에는 1칸씩의 툇마루로 되어 있다. 건평은 40∼50평 정도가 일반적이었다. 이들 동헌의 정면에는 ‘○○당(堂)’ 또는 ‘○○헌(軒)’ 등의 현판을 달았다. 동헌과 내아는 담이나 행랑으로 격리되어 있고, 협문으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동헌은 객사(客舍)·향교와 함께 지방 관아의 핵심 건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대부분 훼철되거나 소실되어 현존하는 것은 매우 드물다.
현재 남아 있는 동헌 건물로는 강원도감영 청사였던 원주의 선화당(宣化堂), 김제 군아인 사칠헌(事七軒), 충주목 아사인 청녕헌(淸寧軒), 울산도호부 동헌이었던 일학헌(一鶴軒) 등이 대표적이다.
그 밖에 동래·직산·태인·과천의 동헌 청사도 다소 개축되었거나 변모된 형태로 남아 있다. 용인 민속촌에 복원된 관아 건물은 원주 선화당과 과천 현아 등을 고증하여 재구성한 것으로 동헌과 내아 문루 등이 비교적 잘 복원되어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의운루
의운루 전경과 내부. 최근에 재건한 터라 내부에는 어떤 현판도 걸려 있지 않다. 건물은 복원하여도 역사를 복원하기는 힘들다. 이제부터 새로 써나가야 한다.
2) 임영관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기와건물. 본래 강릉객사의 정문으로, 오늘날 주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그 정문만이 강릉경찰서 마당에 남아 있다.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승려 범일(梵日)이 관사(官舍) 터에 절을 지었으나 절은 병화(兵火)로 소실되고 그 문만이 남아 있다가 그 자리에 부관(府館)을 옮겨 지음으로써 객사문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염양사(艶陽寺)의 삼문(三門)을 객사로 옮겨 지었기 때문에 사문(沙門)이라 불려 왔다고도 한다.
양식은 주심포식(柱心包式)으로 되어 있고, 그 평면은 측면 중앙칸 자리에 세운 기둥들 사이사이에 커다란 널판장문을 쌍으로 정면 3칸에 달아 실(室)은 하나도 없다.
본래의 기단 모양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고, 막돌초석 위에 배흘림이 뚜렷한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측면 중앙 옆에서 문짝을 달게 된 기둥들만은 방주(方柱)를 세운 것이 주목된다.
기둥 윗몸은 창방(昌枋)으로 결구(結構)하고, 거기에서 헛첨차를 내어 주두(柱頭: 대접받침) 위에 놓은 초제공(初諸工) 위의 첨차를 받치고 있다.
기둥 위에 놓은 주두와 헛첨차 위에 놓은 소로[小累]들은 굽면이 모두 곡면이고 굽받침이 있으며, 또 헛첨차가 있고 첨차의 밑면은 모두 연화두형(蓮花頭形)으로 조각되어 있어서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의 주두 및 첨차와 그 모습이 흡사하다.
그러나 수덕사 대웅전에서는 헛첨차의 안쪽에 보아지가 있어 퇴보[退樑]를 받치고 있지만, 이 객사문에서는 보아지가 없고 창방이 직접 결구되어 있다.
공포(栱包)는 외이출목(外二出目)·내일출목(內一出目)으로, 초제공 위에는 일반적으로 살미첨차를 놓는 것과는 달리 보를 놓고, 보머리[樑頭]끝을 쇠서[牛舌]로 하였음이 특이하다.
문루에는 고려시대 공민왕의 친필인 ‘임영관(臨瀛館)’이라는 가로 3m, 세로 1.2m 크기의 현판이 걸려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강릉객사 정문 임영관 3문. 국보 51호
맨 앞의 건물이 중대청
임영관 삼문의 안쪽에서 바라본 동헌
객사 내부. 앞 건물이 중대청. 뒷건물 중심이 전대청, 보이는 서쪽이 서대청
중대청
임영관. 중대청의 뒷건물 전대청이 객사의 핵심이다. 중앙에 걸린 편액은 공민왕의 친필?이다. 삼문에 걸었던 것을 2006년 복원 후 원래의 자리인 이곳에 옮겨 걸었다.
(본래 공민왕이 1366년(무오년)에 낙산사 관음에 후사를 빌기 위하여 왔다가 길이 막혀 열흘동안 강릉에 머물렀을 때 쓴 ‘임영관(臨瀛館)’ 편액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객사문에 걸려 있는 편액은 1970년대에 다시 모사 제작한 것이다.)
이곳에서 임금에게 망궐행례를 올렸다. 양쪽의 건물은 서대청과 동대청. 중앙에서 온 관리가 묵던 공간이다. 객사는 이동하는 관리가 묵는 숙소라는 기능 외에 망궐행례의 공간이라는 기능도 같이 수행했다. 전주 객사에서도 볼 수 있다.
서헌. 정 3품 관리가 사용했다는 서헌
망궐행례를 지낸 전대청. 임영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동대청
동대청 쪽에서 본 전대청. 끝쪽이 서헌. 동대청에서 품계가 더 높은 관리가 묵었다.
객사 내부 전경
임진왜란 이후 경주에 있던 태조이성계의 어진을 모셔다 봉안하였던 집경전(集慶殿)터. 객사 내부에 있다.
칠사당.
툇간. 본채와 균형이 깨진다고도 하나 매화와 어우러져 격조높은 풍광을 보여준다.
매화가 다 피면 건물이 보이지 않을 듯하다. 산청 남명의 산천재 앞의 남명매, 외로운 한 그루가 아닌 매화밭이 조성되어 있어, 관공서가 아니라 별당아씨의 건물같은 느낌이 난다.
단청 없는 민나무가 든든하다.
은행나무 보호수
칠사당에서 바라본 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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