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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낙천」 송익필
[ 樂天 宋翼弼 ]
惟天至仁(유천지인) 오직 하늘은 지극히 어질고
天本無私(천본무사) 하늘은 본래 사사로움이 없어서
順天者安(순천자안) 하늘을 따르는 자는 편안하고
逆天者危(역천자위)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위태롭네
痾癢福祿(아양복록) 고질병과 복록은
莫非天理(막비천리) 천리 아닌 것이 없으니
憂是小人(우시소인) 근심하는 자는 소인이요
樂是君子(낙시군자) 즐기는 자는 군자이네
君子有樂(군자유락) 군자는 즐김이 있어
不愧屋漏(불괴옥루) 집이 새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네
修身以俟(수신이사) 몸을 닦고서 기다리니
不貳不夭(불이불요)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아첨하지도 않는다네
我無加損(아무가손) 나에게 더할 것도 덜 것도 없는데
天豈厚薄(천기후박) 하늘이 어찌 후하고 박하게 대하겠는가?
存誠樂天(존성락천) 성심(誠心)을 보존하고 천명(天命)을 즐긴다면
俯仰無怍(부앙무작) 내 행동에 부끄러워할 것 없을 것이네
〈감상〉
이 시는 천명(天命)에 순응하는 것과 자락(自樂)을 노래한 송풍(宋風)의 설리적(說理的)인 시이다.
송익필은 산림삼걸(山林三傑)의 한 사람이며(“評者謂鄭湖陰(평자위정호음), 魯蘇齋(노소재), 黃芝川館閣三傑(황지천관각삼걸) 金梅月(김매월), 南秋江(남추강), 宋龜峰山林三傑(송구봉산림삼걸)” 남용익(南龍翼)의 『호곡시화(壺谷詩話)』), 팔문장가의 한 사람이었다(“首與友善而推許者(수여우선이추허자) 李山海(이산해), 崔慶昌(최경창), 白光勳(백광훈), 崔岦(최립), 李純仁(이순인), 尹卓然(윤탁연), 河應臨也(하응림야) 時人號爲八文章(시인호위팔문장)”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문(墓碣文)」). 송익필의 시에는 이렇게 천명(天命)에 순응하며 자락(自樂)하는 시가 많은데, 이것은 소옹(邵雍, 1011~1077)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았다. 소옹을 비롯하여 송대(宋代)의 성리학자들은 “물래이순응(物來而順應, 정명도(鄭明道))”처럼 자연에 순응함으로써 락(樂)을 얻는다고 보았다.
「시집후서삼수(詩集後序三首)」에 의하면, “세상에서 시를 논하는 사람은 옛것을 높이고 지금의 것을 낮게 평가한다. 그러므로 비록 이름난 시인과 대시인이라 하더라도 흠집을 찾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선생은 혀를 차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성당의 맑은 정조와 소옹의 자득을 겸하였다.’고 한다. 선생이 우연히 읊었던 시구에서 드러난 것이 이러한데, 그 고아한 기품과 심오한 이치와 수양한 도타운 정도는 대개 상상할 수 있겠다.
······고생스런 나그네 길이나 유배된 처지에서도 평화롭고 관후한 마음가짐을 잃지 않았고, 바람에 흔들리는 꽃과 눈을 비추는 달빛 사이에서 유유자적하며 한가로워 침잠의 즐거움을 누렸으니, 이때를 달관하고 순명으로 처신하여 애락(哀樂) 따위의 정이 마음속에 들 수 없었던 분이 아니겠는가? 죽서 심종직공이 ‘제재를 성당(盛唐)에서 취했기에 그 음향이 청아하고, 뜻을 격양(擊壤)에서 취했기에 그 말은 이치에 맞다.’고 했는데, 내 이제 시고를 보고 그 말이 정말 맞는 말이라고 느꼈다.
그분이 살아 계실 적에 옛날 소옹이 안락와에서 품었던 경제의 대법을 주제로 한번 토론해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世之論詩者(세지론시자) 尊古而卑今(존고이비금) 雖名家大手(수명가대수) 無不求疵(무불구자) 至於先生(지어선생) 則吃吃嘖嘖(칙흘흘책책) 咸曰盛唐之淸調(함왈성당지청조) 堯夫之自得兼焉(요부지자득겸언) 先生之偶發於吟詠詞句之間者若此(선생지우발어음영사구지간자약차) 則其稟氣之高(칙기품기지고) 造理之深(조리지심) 所養之厚(소양지후) 蓋可想矣(개가상의) ······和平寬博之旨(화평관박지지) 不失於羈窮流竄之際(불실어기궁류찬지제) 優游涵泳之樂(우유함영지락)
自適於風花雪月之間(자적어풍화설월지간) 其庶乎安時處順(기서호안시처순) 哀樂不能入者矣(애악부능입자의) 竹西云(죽서운) 材取盛唐(재취성당) 故其響淸(고기향청) 義取擊壤(의취격양) 故其辭理(고기사리) 余觀之信然(여관지신연) 恨不及其在世時(한불급기재세시) 提安樂窩中經世大法一討之(제안락와중경세대법일토지)).”라 하여, 소옹(邵雍)의 자득(自得)함을 얻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주석〉
〖痾〗 오래된 병 아, 〖癢〗 병 양, 〖愧〗 부끄러워하다 괴, 〖俟〗 기다리다 사, 〖不貳(불이)〗 =불이과(不貳過), 〖夭〗 굽히다 요, 〖俯仰(부앙)〗 행동. 〖怍〗 부끄러워하다 작
각주
1 송익필(宋翼弼, 1534, 중종 29~1599, 선조 32):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 할머니가 안돈후(安敦厚)와 비첩(婢妾)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庶女)였으므로 그의 신분도 서얼(庶孼)이었다. 아버지 안사련이 안돈후의 손자 안처겸(安處謙)을 역모자로 고변(告變)하여 안씨 일가를 멸문시켰다. 이 공으로 안사련은 당상관에 오르고 부유해졌다. 그러나 죄상이 밝혀져 1566년(명종 21)에 안씨 일가에 직첩이 환급되었다. 따라서 송익필은 서얼인데다 아버지 사련의 죄로 인해 과거를 볼 수 없었고, 이후 출세의 길이 막히고 말았다. 과거를 단념하고 경기도 고양(高陽) 구봉산 밑에서 학문을 닦으며 후진을 가르쳤다. 이이(李珥)·성혼(成渾)과 교유했으며, 무이시단(武夷詩壇)을 주도하여 당대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문명을 날렸다. 탁월한 지략과 학문으로 세인들이 ‘서인(西人)의 모주(謀主)’라 일컬었다. 1584년(선조 17) 이이가 죽자 동인(東人)의 질시가 그에게 집중되었다. 동서(東西)의 공방이 심해지는 가운데 동인(東人)의 사주를 받은 안씨 일가에서 그의 신분을 들어 환천(還賤)시켜 줄 것을 제소했다. 1586년(선조 19) 마침내 그의 형제를 비롯해 일족 70여 인이 환천되었다. 이후 그는 김장생·정철·이산해의 집을 전전하며 숨어 지냈다. 이름을 바꾼 그는 황해도에서 복술가(卜術家)로 변신하고 부유한 토호들을 꾀어 호남에 있는 정여립을 찾게 만들었다. 그런 뒤 정여립이 모반을 꾀한다고 고변을 하여 1589년(선조 22)의 기축옥사(己丑獄事)를 일으키는 배후조종자 역할을 했다. 은인인 이산해가 궁중과 결탁해 세력을 굳히려 하자 시로써 풍자한 것 때문에 이산해의 미움을 사서 극지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 1592년(선조 25) 유배 중 임진왜란을 당해 명문산(明文山)으로 피했다가 면천(沔川)에서 김진려의 집에 기식하다 1599년(선조 32) 66세로 객사했다. 학문적으로는 사변적인 이론보다 실천 윤리인 예(禮)를 통해 이(理)에 접근할 것을 중시했다.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은 그의 제자이다. 문학적으로는 시·문에 다 능해 시는 성당시(盛唐詩)를 바탕으로 청절(淸絶)했으며, 문은 고문(古文)을 주장하여 논리가 정연한 실용적인 문체를 사용했다. 「제율곡문(祭栗谷文)」은 조선시대 23대 문장의 하나로 평가받을 정도이며, 「은아전(銀娥傳)」은 당대로서는 보기 드문 전기체(傳記體)의 글이다.
「제금오신화」 이수 김시습
[ 題金鰲新話 二首 金時習 ]
其二(기이)
玉堂揮翰已無心(옥당휘한이무심) 옥당에서 붓을 휘두를 마음 이미 없고
端坐松窓夜正深(단좌송창야정심) 단정히 송창에 앉았으니 밤이 정히 깊구나
香揷銅甁烏几淨(향삽동병오궤정) 구리 병에 향 꽂히고 책상이 깨끗한데
風流奇話細搜尋(풍류기화세수심) 풍류기화를 자세히 찾아보노라
〈감상〉
이 시는 『금오신화』에 대해 쓴 시이다.
옥당에서 붓을 잡을 마음이 진작 사라졌으니(관인으로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함을 이름), 그 결과로 소나무가 내려다보이는 서재(書齋)에 앉아 있노라니 밤이 매우 깊다. 방 안을 돌아보니, 구리 병에 향이 꽂혀 향불을 피우고 책상은 아무것도 없어 조촐한데, 그런 환경과 분위기 속에서 풍류기화인 『금오신화』를 본다(정치권력으로부터 멀어진 뒤에 쓰인 것이 『금오신화』이다).
〈주석〉
〖玉堂(옥당)〗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揮〗 휘두르다 휘, 〖翰〗 붓 한, 〖松窓(송창)〗 소나무가 내려다보이는 창으로, 별장이나 서재를 일컬음. 〖烏几(오궤)〗 오피궤(烏皮几)로, 검은 양가죽으로 싼 작은 책상임. 옛날 앉을 때 몸을 기대는 것으로 사용함. 〖搜〗 찾다 수
각주
1 김시습(金時習, 1435, 세종 17~1493, 성종 24):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 5세 때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후일 중용하리란 약속과 함께 비단을 하사받아 오세신동(五歲神童)이라 일컬어졌다. 과거준비로 삼각산(三角山) 중흥사(中興寺)에서 수학하던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은 소식을 듣자 그 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31세 되던 세조 11년 봄에 경주 남산(南山) 금오산(金鰲山)에서 성리학(性理學)과 불교에 대해서 연구하는 한편,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속에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기구한 일생을 보냈는데,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한 것이다.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얻은 생활체험은 현실을 직시하는 비판력을 갖출 수 있도록 시야를 넓게 했다. 그의 현실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불의한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과 맞닿으면서 중민(重民)에 기초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구가하는 사상으로 확립된다. 그의 저작은 자못 다채롭다고 할 만큼, 조선 전기의 사상에서 그 근원을 찾아보기 어려운 유·불 관계의 논문들을 남기고 있다. 이 같은 면은 그가 이른바 ‘심유천불(心儒踐佛)’이니 ‘불적이유행(佛跡而儒行)’이라 타인에게 인식되었듯이 그의 사상은 유불적인 요소가 혼효되어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는 근본사상은 유교에 두고 아울러 불교적 사색을 병행하였으니, 한편으로 선가(禪家)의 교리를 좋아하여 체득해 보고자 노력하면서 선가의 교리를 유가의 사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후대에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이황으로부터 ‘색은행괴(索隱行怪)’ 하는 하나의 이인(異人)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차운기정백형」 정이오
[ 次韻寄鄭伯亨 鄭以五 ]
二月將闌三月來(이월장란삼월래) 이월이 다하고 삼월이 오려 하니
一年春色夢中回(일년춘색몽중회) 일 년의 봄빛이 꿈속에서 돌아가네
千金尙未買佳節(천금상미매가절) 천금으로도 아름다운 시절 살 수 없으니
酒熟誰家花正開(주숙수가화정개) 누구 집에 술 익고 꽃이 한창 피었는가?
〈감상〉
이 시는 정백형의 시에 차운하여 보내 준 것으로, 지나가는 봄에 대한 아쉬움을 노래하고 있다.
2월이 가고 3월이 오려고 하니, 세상을 밝게 비추던 봄빛도 떠나가려 한다. 천금이라는 많은 돈을 주고도 이 아름다운 봄 경치를 살 수 없으니, 술이 익고 꽃이 한창 핀 누구 집에서 이 좋은 봄날에 술 한잔 할까?
기, 승구는 두보(杜甫)의 「절구만흥(絶句漫興)」에 “이월이파삼월래(二月已破三月來) 점노봉춘능기회(漸老逢春能幾回)”의 구절을 변용(變容)한 것이고, 전구는 소식(蘇軾)의 「춘소(春宵)」에 “춘소일각치천금(春宵一刻値千金) 화유청향월유향(花有淸香月有香)”이라는 구절을 변용한 것이다. 이처럼 전대의(前代) 시구(詩句)에서 자연스럽게 변용한 이러한 수법이 높이 평가되어, 허균은 “마땅히 조선 초 절구시(絶句詩) 중에 가장 으뜸이다(당위국초절구제일(當爲國初絶句第一))”라 평했고, 『성수시화』에서는 “당나라 사람의 좋은 글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불감당인가처(不減唐人佳處))”라는 평을 가하고 있다.
〈주석〉
〖闌〗 다하다 란, 〖正〗 확실히 정
각주
1 정이오(鄭以吾, 1347, 충목왕 3~1434, 세종 16): 자는 수가(粹可), 호는 교은(郊隱) 또는 우곡(愚谷), 시호는 문정(文定),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1374년(공민왕 23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394년 선주부사(善州府使)로 나간 것을 시작으로, 성균관대사성·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76세에 풍질(風疾)에 걸려 벼슬에서 물러났다. 성석린, 이색, 정몽주 등과 교유하였으며, 신유학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의 문물을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는데, 1398년 경사(經史)를 간추려 올렸고, 『사서절요(四書節要)』를 찬진(撰進)하기도 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동년회우왕윤 설연 여유고불부 이시기」 변계량
[ 同年會于王輪 設宴 余有故不赴 以詩寄 卞季良 ]
今夕神仙醉紫霞(금석신선취자하) 오늘 저녁 신선이 자하주에 취하리니
錦筵銀燭映靑娥(금연은촉영청아) 비단 방석 은촛불이 예쁜 소녀를 비추이리
夜深踏月婆娑舞(야심답월파사무) 야심토록 달빛 따라 너울너울 춤을 추니
滿帽花枝影半斜(만모화지영반사) 모자에 가득 꽃가지 그림자 반쯤이나 기울었네
〈감상〉
이 시는 동년(同年) 과거급제자들이 왕륜사에 모여 잔치를 열었는데 일이 있어 가지 못하고 시를 부쳐 준 것으로, 자긍(自矜)·화려함·해학·여유를 누리는 배타적(排他的) 기득권(旣得權)을 가진 관각문신(館閣文臣)들의 분위기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오늘 저녁 동문 급제자들이 신선처럼 신선이 산다는 자하동(紫霞洞)에 모여 자하주(紫霞酒)를 마시며 취할 것이요, 비단 방석과 은으로 된 촛불이 있는 화려한 잔치에 예쁜 기생까지 함께하고 있을 것이다. 밤이 깊도록 흥에 겨워 너울너울 춤을 추니, 과거급제 후 받은 어사화(御賜花)가 반쯤 기울었을 것이다(술에 취한 동료들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그린 것이다).
배타적 기득권은 성품을 형성하기도 하는데, 『필원잡기』에는 변계량의 고집스러운 성품에 대한 일화(逸話)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문숙공(文肅公) 변계량(卞季良)은 고집스런 성품이었다. 선덕(宣德) 연간에 흰 꿩을 하례하는 표(表)에 ‘유자백치(惟玆白雉)’라는 어구가 있었는데, 문숙공이 말하기를, ‘자(玆)는 중행(中行, 글자를 가운데 줄에 씀)으로 써야 한다.’ 하니, 제공들은, ‘성상(聖上)에 속한 것이 아닌데, 왜 중행이라 이르는가?’ 하였으나, 문숙공은 자기 의견을 고집하였다.
제공들은 취품(取稟, 임금에게 문의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세종(世宗)께서는 제공들의 의견을 옳다고 하니, 공이 다시 아뢰기를, ‘농사짓는 일은 남자 종에게 물을 것이요, 길쌈하는 일은 여자 종에게 물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나라를 다스릴 때에 매와 개를 데리고 사냥하는 일이라면 문효종(文孝宗)의 무리에게 묻는 것이 마땅하오나, 사명(詞命)에 이르러서는 노신(老臣)에게 위임하는 것이 마땅하오니, 다른 사람의 의견을 가볍게 따라서는 안 됩니다’ 하여, 세종이 부득이 그의 의견을 좇았다.
(卞文肅公季良性固執(변문숙공계량성고집) 宣德年間(선덕년간) 賀白雉表詞中(하백치표사중) 有惟玆白雉之語(유유자백치지어) 文肅曰(문숙왈) 玆字宜中行(자자의중행) 諸公曰(제공왈) 不屬上(불속상) 何謂中行(하위중행) 文肅固執之(문숙고집지) 諸公曰(제공왈) 宜取旨(의취지) 世宗是諸公之議(세종시제공지의) 文肅復啓曰(문숙부계왈) 耕當問奴(경당문노) 織當問婢(직당문비) 殿下爲國(전하위국) 若鷹犬宜問文孝宗輩(약응견의문문종배) 至於詞命(지어사명) 當依任老臣(당의임로신) 不可輕許他議(볼가경허타의) 世宗不得已從之(세종부득이종지))”
〈주석〉
〖赴〗 나아가다 부, 〖紫霞(자하)〗 신선이 타고 다니는 자색빛 노을. 여기서는 신선이 산다는 자하동(紫霞洞)이나 신선이 마시는 자하주(紫霞酒)를 말함.
〖靑娥(청아)〗 예쁜 소녀. 〖婆娑(파사)〗 춤추는 모양. 〖帽〗 모자 모
각주
1 변계량(卞季良, 1369, 공민왕 18~1430, 세종 12): 본관은 밀양.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4세 때 고시(古詩)의 대구(對句)를 암기하고 6세 때 글을 지었으며, 13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주부(典校主簿)가 되었고, 1392년 조선 건국 때 천우위중령중랑장(千牛衛中領中郞將) 겸 전의감승(典醫監丞)이 되었다. 1407년(태종 7) 문과중시에 을과(乙科)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이 되고 예조우참의가 되었다. 태종말까지 예문관대제학·예조판서·의정부참찬 등을 지내다가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집현전대제학이 되었다. 당대의 문인을 대표할 만한 위치에 이르렀으나 전대의 이색(李穡)과 권근(權近)에 비해 격이 낮고 내용도 허약해졌다는 평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 문학은 조선 왕조를 찬양하고 수식하는 일이었다. 「태행태상왕시책문(太行太上王諡冊文)」에서는 태조를 칭송하면서 조선 건국을 찬양했고, 경기체가인 「화산별곡(華山別曲)」에서는 한양도읍을 찬양했다. 정도전에게 바친 「봉정정삼봉(奉呈鄭三峰)」에서도 정도전이 완벽한 인재라고 칭송했다.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의 뒤를 이어 조선 초기 관각문학(館閣文學)을 좌우했던 인물이다. 20년 동안이나 대제학을 맡고 성균관을 장악하면서 외교문서를 쓰거나 문학의 규범을 마련했다.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를 고치는 작업에 참여했으며, 저서에 『춘정집(春亭集)』 3권 5책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감흥」 칠수 변계량
[ 感興 七首 卞季良 ]
其四(기사)
春蠶復秋蛾(춘잠복추아) 봄철의 누에가 가을에는 나방 되니
歲月無停期(세월무정기) 세월은 멈출 기약이 없구나
人生非金石(인생비금석) 인생은 금석처럼 단단하지 않으니
少年能幾時(소년능기시) 젊은 시절 얼마나 되겠는가
馳名日拘束(치명일구속) 이름을 내려니 날마다 얽매이고
靜言心傷悲(정언심상비) 말없이 지내자니 마음이 슬프구나
旣壯不努力(기장불노력) 젊어서 노력을 하지 않으면
白首而無知(백수이무지) 백발이 성성토록 아는 것이 없다오
思之一長歎(사지일장탄) 생각하며 길게 탄식하니
庶幾來可追(서기래가추) 오는 것을 따를 수 있을 것 같네
〈감상〉
이 시는 입신(立身)의 어려움과 빠른 세월 그리고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기대에 대해 노래한 것이다.
봄에는 누에였던 것이 가을이 되면 어느새 나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간다. 세월이 너무나 빨리 지나간다. 그러한 세월을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쇠나 바위처럼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니, 젊은 시절이야 얼마나 되겠는가? 세상에 이름을 떨치려니 날마다 세속의 일에 얽매여야 하고, 가만히 지내자니 마음만 아플 뿐이다. 젊어서 학문에 정진하지 않으면 늙어서 아는 것이 없게 되니, 젊은 시절에 학문에 노력해야 한다. 이런 것을 생각하며 길게 탄식하니,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 다가오는 것은 따라갈 수 있으니,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지자.
〈주석〉
〖蛾〗 나방 아, 〖停〗 머무르다 정, 〖庶幾(서기)〗 거의 되려함.
〖來可追〗 『논어(論語)』에, “초나라 광인인 접여가 공자 앞을 지나며 노래하였다. ‘봉이여, 봉이여! 어찌 덕이 쇠하였는가? 지나간 것은 간할 수 없거니와 오는 것은 오히려 따를 수 있으니, 그만둘지어다! 그만둘지어다! 오늘날 정사에 종사하는 자들은 위험하다’(楚狂接輿歌而過孔子曰(초광접여가이과공자왈) 鳳兮鳳兮(봉혜봉혜) 何德之衰(하덕지쇠) 往者不可諫(왕자불가간) 來者猶可追(내자유가추) 已而已而(이이이이) 今之從政者殆而(금지종정자태이))”라 하였음.
각주
1 변계량(卞季良, 1369, 공민왕 18~1430, 세종 12): 본관은 밀양.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4세 때 고시(古詩)의 대구(對句)를 암기하고 6세 때 글을 지었으며, 13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주부(典校主簿)가 되었고, 1392년 조선 건국 때 천우위중령중랑장(千牛衛中領中郞將) 겸 전의감승(典醫監丞)이 되었다. 1407년(태종 7) 문과중시에 을과(乙科)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이 되고 예조우참의가 되었다. 태종말까지 예문관대제학·예조판서·의정부참찬 등을 지내다가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집현전대제학이 되었다. 당대의 문인을 대표할 만한 위치에 이르렀으나 전대의 이색(李穡)과 권근(權近)에 비해 격이 낮고 내용도 허약해졌다는 평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 문학은 조선 왕조를 찬양하고 수식하는 일이었다. 「태행태상왕시책문(太行太上王諡冊文)」에서는 태조를 칭송하면서 조선 건국을 찬양했고, 경기체가인 「화산별곡(華山別曲)」에서는 한양도읍을 찬양했다. 정도전에게 바친 「봉정정삼봉(奉呈鄭三峰)」에서도 정도전이 완벽한 인재라고 칭송했다.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의 뒤를 이어 조선 초기 관각문학(館閣文學)을 좌우했던 인물이다. 20년 동안이나 대제학을 맡고 성균관을 장악하면서 외교문서를 쓰거나 문학의 규범을 마련했다.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를 고치는 작업에 참여했으며, 저서에 『춘정집(春亭集)』 3권 5책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국화불개 창연유작」 서거정
[ 菊花不開 悵然有作 徐居正 ]
佳菊今年開較遲(가국금년개교지) 아름다운 국화가 금년에는 비교적 늦게 피어
一秋情興謾東籬(일추정흥만동리) 가을의 정과 흥이 동쪽 울타리에 게으르도다
西風大是無情思(서풍대시무정사) 가을바람은 참으로 무정도 하지
不入黃花入鬢絲(불입황화입빈사) 국화에 들지 않고 귀밑머리에 들었구나
〈감상〉
이 시는 60대 만년에 국화가 피지 않아 실망하여 지은 것으로, 늙어 감을 읊은 노래이다.
올해는 국화꽃이 예년과 비교해 늦게 피어 가을의 흥취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가을바람은 무정하게도 국화에 들어서 꽃을 피우지 않고 귀밑머리에 들어와 늙음을 재촉하고 있다. 서거정은 인생의 말년을 담담하고 재치 있게 묘사하고 있어 허균(許筠)이 이 시를 두고 ‘가애(可愛)’라 했을 것이다. 정조(正祖)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은 6세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문형(文衡)을 20년이나 역임하였다. 살아 있을 때 문집을 세상에 간행해 내놓은 경우는 사가와 강희맹(姜希孟)뿐이다. 이 사람으로 인해 본조(本朝)의 문권(文權)이 무게가 있게 되었다. 그의 글은 자연의 질박함이 흩어지지 않아 원기(元氣)가 완연해서 다듬고 꾸미는 근세의 습속은 전연 하지 않았고, 더구나 많은 서적을 섭렵하여 고사에 익히 밝았으니, 세상의 추대를 받아 문단을 주도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었다(四佳六歲(사가륙세) 能屬句(능속구) 典文衡二十年(전문형이십년) 生時文集之印行於世(생시문집지인행어세) 獨四佳與姜希孟也(독사가여강희맹야) 本朝文權之重(본조문권지중) 輒推此人(첩추차인) 蓋其爲文(개기위문) 大樸未散(대박미산) 元氣渾然(원기혼연) 絶不爲近世雕繪之習(절불위근세조회지습) 况又博洽羣書(황우박흡군서) 明習故事(명습고사) 無媿其主盟之專而見推於世也(무괴기주맹지전이견추어세야)).”
〈주석〉
〖悵〗 슬퍼하다 창, 〖較〗 비교하다 교, 〖謾〗 느리다 만, 〖鬢絲(빈사)〗 귀밑머리에 난 털.
각주
1 서거정(徐居正, 1420, 세종 2~1488, 성종 19):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권근의(權近) 외손자.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文風)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端宗) 폐위와 사육신(死六臣)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혹독한 비평가였던 김시습(金時習)과도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그 자신도 뛰어난 문학저술을 남겨 조선시대 관각문학이 절정을 이루었던 목릉성세(穆陵盛世)의 디딤돌을 이루었다. 그의 저술서로는 객관적 비평태도와 주체적 비평안(批評眼)을 확립하여 후대의 시화(詩話)에 큰 영향을 끼친 『동인시화(東人詩話)』, 간추린 역사·제도·풍속 등을 서술한 『필원잡기(筆苑雜記)』, 설화·수필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이 있으며, 관인(官人)의 부려호방(富麗豪放)한 시문이 다수 실린 『사가집(四佳集)』 등이 있다. 명나라 사신 기순(祁順)과의 시 대결에서 우수한 재능을 보였으며 그를 통한 『황화집(皇華集)』의 편찬으로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추일우음」 성혼
[ 秋日偶吟 成渾 ]
窮秋山日下西林(궁추산일하서림) 늦은 가을 해 서쪽 숲속으로 사라지는데
落葉蕭蕭行逕深(낙엽소소행경심) 낙엽이 쌓여 가는 길을 덮고 있네
身世未應同宋玉(신세미응동송옥) 신세 응당 송옥과 같지 않지만
如何憀慄感人心(여하료률감인심) 어찌하여 슬프고 아픈 마음이 느껴질까?
〈감상〉
이 시는 늦가을 해가 저물어 가는 것을 보고 자신 또한 늙어 가는 속절없는 세월에 대한 소회(所懷)를 노래하고 있다.
김상헌(金尙憲)이 쓴 「우계선생신도비명(牛溪先生神道碑銘)」에 성혼(成渾)에 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선생은 천부적인 자품이 독실하고 민첩하여 저절로 도에 가까웠다. 거처하는 집을 묵암(默庵)이라고 이름 붙이고는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처음에 청송공께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 나아가 종유(從遊)하여 올바른 학문을 얻어들었는데, 선생은 가정에서 이를 배워 도를 들음이 매우 빨랐다. 일찍이 한 번 과거에 응시하여 초시(初試)에 입격하였으나, 병으로 인해 복시(覆試)에 응시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하는 데 전심전력하였다.
평소에 조정암과 이퇴계(李退溪)를 높이고 사모하였으며, 위로 거슬러 올라가 고정(考亭) 주자(朱子)를 표준으로 삼았다. 이때 문성공(文成公) 이율곡(李栗谷) 또한 도학(道學)으로 자임하였으므로 서로 함께 의리를 강명해 조예가 더욱 깊어졌다. 그러자 한 시대의 선비들이 모두 귀의하여 우계 선생이라고 칭하였다. 얼마 뒤에 도신(道臣)이 학행이 탁월하다는 내용으로 아뢰어 두 차례나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뒤에 다시 6품으로 뛰어올라 적성현감(積城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사방에서 배우러 와서 따르는 자들이 더욱 많아지자, 선생은 이들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서실의(書室儀)를 게시해서 제생(諸生)들로 하여금 따라 행할 바를 알게 하였다.
산서(散署)의 서장(署長)과 여러 사(寺)와 원(院)의 관료와 부장관, 공조의 좌랑과 정랑에 여러 차례 제수되었는데, 그 사이에 소명(召命)을 받들어 한 번 경성(京城)에 가서 숙배한 뒤 상소를 올리고 즉시 돌아온 적도 있었다. 사헌부의 관원에 제수된 건 지평(持平)으로 부른 것이 열 번 남짓이었고, 장령(掌令)으로 부른 것이 두 번이었으며, 편안한 수레로 길에 오르도록 명하기까지 하였으나, 모두 굳게 사양하였기 때문이고, 봉사(封事)를 올려 선(善)을 따르고 학문에 힘쓰는 방도를 아뢰었다.
선생은 성품이 겸손하고 신중하여 이렇게 관직에 제수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나 그 실제는 자연 엄폐할 수가 없으므로, 조정의 신하들 중 성상께 아뢰는 이가 많았던 것이다. 성상께서 이 문성공에게 묻기를, ‘성혼의 어짊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마는, 그의 재주는 어떠한가?’ 하니, 이 문성공이 답하기를, ‘홀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직임을 담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알 수 없으나, 사람됨이 선을 좋아하니, 선을 좋아하면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도 충분할 것입니다.
다만 병이 많아 사무가 많은 부서를 맡기기가 어려우니, 한가로운 부서에 두고서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게 하면 반드시 성상의 덕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天資敦敏(천자돈민) 自然近道(자연근도) 號所居室默庵(호소거실묵암) 以自規(이자규) 初聽松遊趙靜庵之門(초청송유조정암지문) 得聞正學(득문정학) 先生學于家庭(선생학우가정) 聞道甚早(문도심조) 嘗一赴公車中選(상일부공차중선) 以病不再試(이병부재시) 自此遂棄擧子業(자차수기거자업) 專心爲己之學(전심위기지학) 常尊慕靜庵退溪(상존모정암퇴계) 以上遡於考亭而爲之準則(이상소어고정이위지준칙) 時栗谷李文成公(시율곡이문성공) 亦以道學自任(역이도학자임) 相與講明義理(상여강명의리) 造詣益深(조예익심) 一時士子靡然歸向(일시사자미연귀향) 稱爲牛溪先生(칭위우계선생) 久之(구지) 道臣以學行卓異聞(도신이학행탁이문) 再授參奉(재수참봉)
尋超敍六品(심초서륙품) 除積城縣監(제적성현감) 不就(불취) 四方學子從之者益衆(사방학자종지자익중) 先生訓誨不倦(선생훈회불권) 揭書室儀(게서실의) 俾諸生知所遵行(비제생지소준행) 歷除散署署長(역제산서서장) 諸寺院僚貳(제사원료이) 工曹佐郞正郞(공조좌랑정랑) 間嘗承召一至京城(간상승소일지경성) 而拜疏卽歸(이배소즉귀) 其爲臺官則以持平召者十餘(기위대관칙이지평소자십여) 掌令者再(장령자재) 至命安車就道(지명안차취도) 皆固辭(개고사) 上封事(상봉사) 陳從善典學之道(진종선전학지도) 蓋先生性謙愼不敢當(개선생성겸신불감당) 而其實自有不可掩者(이기실자유불가엄자) 朝臣多爲上言之(조신다위상언지) 上問李文成(상문이문성) 成某之賢(성모지현) 予已聞知(여이문지) 顧其才如何(고기재여하) 文成對曰(문성대왈) 謂之獨任經濟(위지독임경제) 臣不敢知(신불감지) 其爲人好善(기위인호선) 好善優於天下(호선우어천하) 但善病難任劇(단선병난임극) 置之閑局(치지한국) 使入侍經筵(사입시경연) 則必能裨益聖德(칙필능비익성덕)).”
〈주석〉
〖蕭蕭(소소)〗 초목이 흔들려 떨어지는 소리. 〖逕〗 좁은 길 경, 〖宋玉(송옥)〗 전국(戰國) 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 굴원(屈原)의 제자이다. 굴원이 충간(忠諫)을 하다가 추방당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구변(九辯)」을 지어 그의 뜻을 밝혔으며, 「초혼(招魂)」 등의 초사(楚辭)를 지었음. 〖憀慄(료률)〗 슬퍼하고 가슴 아파함.
각주
1 성혼(成渾, 1535(중종 30)~1598, 선조 31): 본관은 창녕.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묵암(默庵). 10세 때, 기묘사화 후 정세가 회복되기 어려움을 깨달은 아버지를 따라 파주 우계(牛溪)로 옮겨 살았다. 1551년(명종 6)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병이 나서 복시에는 응하지 않았고,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 들어가 『상서(尙書)』 등을 배웠다. 20세에 한 살 아래의 이이(李珥)와 도의(道義)의 벗이 되었으며, 1568년(선조 1)에는 이황(李滉)을 만났다.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을 제수받은 것을 시작으로 계속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1573년 공조좌랑·사헌부지평, 1575년 공조정랑, 1581년 내섬시첨정, 1583년 이조참판, 1585년 동지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받았으나 대부분 취임하지 않거나 사직상소를 올리고 곧 물러났다. 1584년 이이가 죽자 서인(西人)의 영수가 되어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동인의 최영경(崔永慶)이 원사(寃死)할 위험에 처했을 때 정철(鄭澈)에게 구원해 줄 것을 청하는 서간을 보내는 등 당파에 구애되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천에 머무르던 광해군의 부름을 받아 의병장 김궤(金潰)를 돕고 곧이어 검찰사(檢察使)에 임명되고, 이어 우참찬·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594년 일본과의 강화를 주장하던 유성룡·이정암(李廷馣)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다. 이에 걸해소(乞骸疏)를 올리고 이듬해 파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해동십팔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이황의 주리론(主理論)과 이이의 주기론(主氣論)을 종합해 절충파의 비조(鼻祖)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