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감(龜鑑)과 갑골문
귀감은 '거북과 거울'이 합쳐진 말… 거북의 신성함 상징
신문이나 방송에서 미담(美談)의 주인공으로 누군가를 잔뜩 추어줄 때 약방의 감초처럼 활용하는 말이 ‘귀감’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이 말의 뜻을 ‘거울로 삼아 본받을 만한 모범’이라고 푼다. “(세상의) 귀감이 되다” “귀감으로 삼다” “신사임당은 한국 여성의 귀감이다” 등과 같이 쓴다고 용례를 들었다. 본, 본보기, 교훈, 모범 등을 비슷한 말로 제시했다.
참 무책임한 사전이다. 귀감이 왜 본보기(의 뜻)일까 하는, 한국어를 쓰는 대중 즉 언중(言衆)의 당연한 궁금증을 상상할 수 없었을까? 국어 전문가들이 만든 사전 아니던가? 때로 표제어(제목)보다 더 아리송하거나 어려운 말을 풀이라고 늘어놓는 이런 방법은 문제가 있다. ‘아하! 그렇구나’ 하고 얼른 감이 잡혀야 사전 아닌가.
갑골문을 담은(새긴) 거북 등껍질의 모양. 염원이나 기원, 궁금한 일 등 그 점치는 내용을 표현한 글자가 갑골문이다.
귀감은 거북 귀(龜)와 거울 감(鑑)이 합쳐진 한자어다. 그러고 보니 ‘거울로 삼다’는 말은 알겠는데 거북은 왜 그 말에 들어 있지? ‘거울로 삼아 본받을 만한 모범’이란 풀이의 어떤 부분에 어떤 의미 또는 상징성으로 거북이 웅크리고 있을까?
점(點) 하나, 획(劃) 하나에도 의미 없는 것은 없다는 게 문자의 세계다. 심상치 않은 동물인 거북의 이름이 그 말에 괜히 들어있을 리는 없다. 한자사전은 ‘거북등과 거울이라는 뜻으로, 사물(事物)의 본보기’라고 풀었다. 거북등은 거북의 등껍질을 말하는 것이겠다. 거북의 존재를 아예 보여주지도 않은 국어사전과 비교된다.
귀감(龜鑑)이란 말이 가지는 속뜻이나 역사성에 대한 이해나 궁리가 없다면 사전들의 그런 풀이는 허망하다. 귀감이란 말의 본디를 톺아보면 거북이 거울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짓는 요소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거울이 아니라 거북과 어깨를 나란히 한 거울이기에 그런 거창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3500년 전 동아시아 황하(黃河) 유역에서 문자의 새벽이 열린다. 갑골문(甲骨文)의 출현이다. 거북의 등껍질[甲]이나 소의 뼈[骨]에 새겨진 그림 모양의 글자[文]는 오늘날 한자의 어원이자 원본이다. 그 글자는 세상의 여러 일[사(事)]과 물체[물(物)], 즉 사물을 그림으로 표현한 상형문자였다.
귀감의 거북은 응당 갑골문을 보듬은 등껍질의 주인공이다. 거북 등껍질의 안쪽에 불을 피운 흔적과 함께 그려진 그 기호(글자)들은 당시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念願)을 담고 있다. 기호 자체에 넋이 스민 제사(祭祀)의 글자였던 것이다.
“묻습니다. 재앙을 피하는 제사를 지내고자 하는데 (신은) 받아 주실까요? 왕비가 아들을 낳겠습니까? 날이 가물었는데 비가 오겠습니까? 전쟁을 시작할까요? 환자가 회복할까요?”
점을 쳐 길흉(吉凶)을 묻는 형식이지만, 상당 부분은 ‘이렇게 해 줍시오!’ 하고 신에게 조르는 것이 그 속셈이다. 등껍질에 불을 놓아 생기는 균열(龜裂), 즉 트거나 벌어지는 모양을 보고 점괘를 얻었다. 그 균열 곁에 날카로운 물체로 글씨를 새겼다. ‘점괘대로 비가 왔다’는 식의 결과 보고 내용도 새겼다.
그 글자가 일상생활의 단순한 기록이 아닌 신성한 기호였던 것이니, 그것을 담은 거북의 등껍질 역시 신성한 물건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세상의 본디나 종족의 혼백이 거기에 스민 것으로 알지 않았을까?
이집트 고분 벽화의 상형문자(히에로글리프)와 상징들. 신과 소통하는 신성한 뜻의 그림이 문자로 발전한 것으로 본다. 신과 여신, 이승과 천상의 모습들을 표현하고 있다.
상형문자의 공통점일까? 이집트 상형문자 역시 왕(인간)이면서 신(神)인 파라오가 하늘과 소통하는 신성(神聖)한 기호였다. 그래서 그 문자의 이름도 ‘신성문자’다. 이집트 상형문자의 이름인 ‘히에로글리프’(Hieroglyph)는 후세 사람들이 이 이름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거북이 거울과 함께 본보기 또는 모범의 뜻인 귀감이란 이미지를 짓는 내역(內譯)이자 내력(來歷)을 살폈다. 수천년 역사가 끼친 흔적임을 또렷하게 본다.
갑골문은 은(殷)으로도 불린 고대 중국의 상(商·기원전 16∼11세기) 왕조 때 만들어져 오랜 역사와 함께 금문(金文), 전문(篆文), 예서(隸書) 등의 단계를 거쳐 지금의 문자체(文字體)인 해서(楷書)로 변모해 오고 있다. 현대 중국은 일부 글자의 획수나 모양을 간략하게 한 간체자를 쓴다. 우리의 한자와 중국 글자의 모양이 얼마간 다른 이유다. 그 줄기는 같다.
글자가 그런 역사를 겪는 사이, 그 글자를 처음 담았던 거북 등껍질들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자취도 찾을 길 없어 거북의 갑골과 문자에 관한 얘기는 아득한 전설로만 여겼다. 중국 역사의 거대한 미스터리였다. 그러다가 1899년 그 유물들이 고대 은나라의 폐허에서 홀연히 나타났다. 갑골문을 은허(殷墟)문자라고도 하는 이유다.
갑골문 조각의 탁본. 사람, 수레, 말, 새그물 등의 (그림)글자가 새겨져 있다. 축이 부러진 마차의 그림은 사냥에서 사고가 났음을 표현한 것일까?
어원이 없는(사라진) 상태로 변화해 왔던 문자들이 갑골문 유물 출토와 함께 큰 소용돌이에 들게 됐다. 후한 때의 학자 허신(許愼)이 서기 100년 무렵 편찬한 ‘설문해자’(說文解字)는 그 정밀함과 성실함으로 지금도 위대한 문헌으로 대접받지만, 110여년 전 갑골문의 재림(再臨)으로 ‘수정판’을 내야 할 형편에 처했다. 허신은 갑골문을 알지 못한 상태로 그 책을 썼다.
갑골문(유물)의 오랜 실종에도 불구하고 거북은 세상의 본디나 종족의 신성한 상징성을 간직한 존재로 대접을 받았다. 그 증거가 한자문화권에서 오래 쓰인 ‘귀감’이란 개념이다.
■ 사족(蛇足)
한자는 동아시아 문화의 대표적 명품 중 하나다.
갑골문을 토대로 발전해 온 그 문자를 현재 중화민족의 영토인 아시아 대륙 일부와 한반도(대한민국), 인도차이나 반도(베트남), 일본 열도 등의 여러 겨레가 자기네 말을 적는 글자로 오래 써왔다. 과거 이들 사이에서는 말은 통하지 않아도 글자를 써 소통하는 필담(筆談)이 쓸모 있었다.
당시 황하 유역이 동이족(東夷族)의 근거지였다고 하며 우리 겨레와 초기 한자의 관련성을 추측하는 주장이 학계 일부에서 제기되어 온 것도 언급되어야 한다. 원로 학자인 진태하 교수(문자학)가 그 대표에 해당한다. ‘식민사관을 극복해 우리의 고대사부터 바로 세우자’는 취지의 주장을 펴는 우리역사복원연대(공동대표 박정학) 일부 연구자도 이 대목에 관심을 두고 있다.
역사가 흐르며 중국(대만 포함) 이외 지역에서는 한글, 가나 등 각각 제 말을 적는 글자를 만들어 쓰거나 베트남의 경우 아예 서양 알파벳을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자문화권의 개념은 엄연하다. 세계로 흩어진 중국계인 화교(華僑)나 한국, 일본, 베트남 출신들의 독특한 문화도 한자문화권과 무관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