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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터)>
따져보면 정자 이름인데도 인근 지역을 나타내는 대명사로 쓰이는 세검정, 인근에서 풍광 좋기로 유명한 세검정, 조선 시대 사초를 세초하던 세검정은 여러모로 유명하다. 역사적 유적지이면서 동시에 경승지여서 문학과 그림의 예술공간이기도 하다. 5분 10분 안에 걸어 이동 가능한 주변의 유적지 홍지문, 탕춘대성, 석파랑 등과 함께 어우러져 의미가 배가된다.
문화재 지정 : 서울특별시 시도기념물 제4호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세검정로 244 (신영동 168-6)
참관일 : 2020.12.5.
가. 소개
1) 건립 시기
세검정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연산군이 탕춘대(蕩春臺)를 지으면서 유흥을 위해 지은 정자라는 것, 둘 째는 후에 인조가 이곳에 정자를 짓고서 ‘세검정(洗劍亭)’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설, 셋째는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는 것, 넷째는 영조 때 총융청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군사들의 휴식을 위해 지었다는 것 등이다.
네 번째 설은 당시 총융청 감관으로 있던 김상채(金尙彩)의 문집인 『창암집』(蒼巖集)에 영조 23년(1747)에 육각정의 정자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확실하다. 총융청(摠戎廳)은 서울의 방비와 아울러 북한산성의 수비를 담당하던 곳이다. 영조 24년 (1748년)에는 고쳐 지으면서 洗劍亭 현판을 새로 달았다고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네 번째 설이 확인된다. 실록에는 세검정이 3번 나오는데 모두 정조조 이후다. 승정원일기나 일성록에 나오는 사례까지 살펴도 모두 정조조 이후다. 연산군, 인조, 숙종 조에는 세검정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특히 인조가 지었다면 실록에 나와야 되지 않을까.
정조 14년(1790)에 정조가 “ㆍㆍㆍ돌아오다가 세검정(洗劍亭)에 이르렀는데, 정자에는 영종(英宗)의 어제시(御製詩) 현판이 있었다. 상이 차운하여 칠언 절구를 짓고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여 올릴 것을 명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영종은 고종조에 영조(英祖)로 고치기 전의 묘호이다. 정조가 세검정에 가서 영조의 어제시 현판을 확인한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영조조에 지은 것은 확실하고, 나아가 영조의 어제시 현판이 있었던 것까지 알 수 있다. 현판은 1941년 화재 때 함께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2) 건립 배경과 정자 이름 유래 :
《궁궐지 宮闕志》에 인조반정(광해군 15년(1623) ) 때 이귀(李貴)·김류(金瑬) 등의 반정인사들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씻었던 자리라고 해서 세검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는 말이 있다는 설과 『궁궐지』에는 단지 “계해년의 반정 때 창의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세검정이라 이름하였다”(癸亥反正時 由彰義門入 故名洗劍亭)는 말만 있다는 설이 있다. 『궁궐지』도 숙종조본, 고종조본 등 여러 판본이 있으니 원문을 찾아 다시 확인해봐야 할 듯하다.
칼을 씻었다는 말은 상징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칼을 씻는다’의 행위와 무관하게도 사용될 수 있다. 손을 씻었다는 말이 하던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인 것처럼, 칼을 씻는다는 세검(洗劍)도 씻어서 보관하고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니, '정의의 칼을 씻어서 칼집에 넣어 싸움을 끝내고, 평화의 시대를 맞이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즉 '세검정'은 인조반정을 의거로 칭송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고 보는 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곳은 풍광이 빼어난 곳이므로 조선 초기 언제쯤엔 정자가 생겼을 수 있다. 연산군, 숙종, 인조 때 건립설도 이전에 이곳에 정자가 있었기에 나온 얘기인 것으로 보인다. 인조반정 뒤로는 칼을 씻었다는 사연에 평화를 염원하는 뜻을 얹어 민간에서 세검정으로 바꿔 부르지 않았을까. 영조 때에는 정자의 중건이 있었고, 영조의 현판 하사로 세검정이라는 이름을 공식화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거 같다.
세검정은 2009년 2월 5일로 세검정 터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이유는 멸실된 유적에 건물을 완전히 새로 복원한 경우는 ''터''라는 한글 표현을 붙여주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공식 명칭은 세검정 터이다.
3) 위치
: 삼각산과 북한산이 보이는데, 그곳에서 발원한 물줄기들이 모여 시내를 이룬 홍제천에 자리잡고 있다. 세검정 앞에는 화강암 너럭바위가 어울려 맑은 물과 빼어난 바위의 수석(水石) 경치를 누릴 수 있는 곳이다. 홍제천이 흐르는 사천계곡을 중심으로 한 세검정 주변 일대는 경관이 아름다운 풍치지구로 유명하다.
홍제천(弘濟川)은 근처에 홍제원(弘濟院)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홍제원은 조선 시대 빈민 구제기구이자 국립여관인데, 주로 중국 사신들이 묵어가던 곳이다. 지금 3호선 홍제역 근처에 있었다. 홍제천은 ‘사천’(沙川), ‘모래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모래내는 사천의 우리말 이름이다. 홍제원 근처에 모래가 많이 퇴적되어 있어서 물이 늘 모래 사이로 흘러갔기 때문이었다. 넘쳐흐르는 사천(沙川)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령폭포에 이른다.
근처에 홍지문과 탕춘대 산성, 그 앞으로 석파랑이 있다.
4) 복원 :
원래의 정자는 1941년 인근에 있던 종이공장의 화재로 소실되어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丁자형의 3칸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자 복원에는 겸재 정선의 그림이 활용되었다. 그러나 그림과 달라진 부분이 많다. 주춧돌은 사각기둥이 아니라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드는 사다리꼴인데 그나마 너무 짧고 체감이 급격하다. 주춧돌이 짧다보니 그림 속 누각형 정자는 간 곳 없고 그저 작고 평범한 집 하나가 암반 위에 올라앉은 모습이 되어버렸다. 절병통이 사라진 지붕은 형태만 같을 뿐이며 담장도 일각문도 없이 길가에 나앉아 있다.
나. 다른 지역 세검정(洗劍亭)
서울 외에 세 군데에 같은 이름의 건물이 있다.
1) 만포 세검정
북한 만포시 세검정(복호정(伏胡亭), 洗劍亭) : 북한 자강도(평안북도) 만포시 압록강
1636년(인조 14) 청나라 군사가 침입해 왔을 때 박남여(朴南輿)장군이 지휘한 우리측 군사가 이곳에서 적을 맞아 싸워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정자를 세우고, ‘적을 벤 칼을 여기에서 씻었다’ 하여 세검정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관서팔경(關西八景)의 하나로 일컬어졌으나, 1938년 일제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최근 북한에서 복원 작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2) 여수 세검정
이순신 수군 지휘하고 업무를 봤을 곳으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수군들이 칼과 창을 갈고 다듬었던 곳이라고도 한다.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86년에 주춧돌을 보고 복원하였다. 정자가 아니고 온전한 한옥 건물이다.
3) 삼수 세검정(洗劍亭)
고산이 삼수(함경남도)에 유배되어 갔을 때 지은(1664) 한시에 등장하는 정자다. 고산유고(孤山遺稿)에 “만호(萬戶) 경가행(景可行)이 이 바위 위에 작은 정자를 짓고는 나에게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기에 내가 세검(洗劍)이라고 명명(命名)하였다.”라는 기록과 함께 한시 ‘등세검정(登洗劍亭)’이 올라 있다.
하늘이 만든 대 위에 사람이 정자 지으니 / 天作之臺人作亭
큰 강물 작은 개울이 기꺼이 감싸고 도네 / 大江小澗肯廻縈
연희는 강남의 곡조를 능숙하게 부르는데 / 燕姬慣唱江南曲
초객은 택반에 행음하며 유독 마음 아파라 / 楚客偏傷澤畔行
일만 골 풍악 소리에 취객의 흥이 더해지고 / 萬谷笙鐘添醉興
일백 숲 화려한 단청에 유객의 정이 뒤설레네 / 百林金碧惱遊情
용천검 씻을 맑은 물결 준비되었는데 / 淸瀾准備龍泉洗
바다 뒤집는 고래를 솜씨 좋게 뉘 잡을까 / 好手誰屠偃海鯨
고산은 예론문제로 1659년에서 1667년까지 삼수에 유배되어 있었다. 일부 고산 윤선도가 서울 세검정을 다녀갔다고 하는데, 삼수 세검정으로 봐야할 듯하다.
*세검정 아래 너럭바위 차일암과 계곡
《한경지략 漢京識略》에는 “정자 앞의 판석은 흐르는 물이 갈고 닦아서 인공으로 곱게 다듬은 것같이 되었으므로, 여염집 아이들이 붓글씨를 연습하여 돌 위는 항상 먹물이 묻어 있고, 넘쳐흐르는 사천(沙川)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령폭포가 있다.”고 하였다. 《동국여지비고 東國輿地備攷》에는 장마가 지면 해마다 도성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물구경을 하였다.”고 적혀 있다. 정약용도 이곳에 와 폭우 구경을 하였다. 아래 너럭바위는 세초를 할 때 사용된 차일암(遮日巖)이다.
이곳은 서울 근교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후에도 아이들이 수영을 하고 초중고생이 소풍을 왔던 곳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물이 많은 곳이었다. 다행히 1급수에서만 볼 수 있는 도롱뇽과 버들치가 살아 이 계곡은 2009년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다. 세검정의 의미
1. 역사의 공간 : 인조반정
이수광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에는 인조반정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민심은 곧 천심이라, 광해 15년 계해년 3월 12일 저녁에, 전 부사 김유ㆍ이귀(李貴)ㆍ김자점(金自點)ㆍ심기원(沈器遠) 등 몇 사람과 모의한 바 없이 자연의 합심으로 지금의 창의문 밖 세검정 골짜기에 비밀히 모여서 반정할 공론을 약속하고 장단 부사 이서(李曙)와 북병사 이괄(李适)에게 의견을 알아본 결과 혼연히 협조하기로 하고 이천 부사 이중로(李重老)ㆍ전 한림 장유(張維) 같은 이도 가담하기로 하여, 약속한 날 저녁에 홍제원(弘濟院)으로 집결하기로 하였다.”
세검정이 언제 건립되었는지와는 관계없이 세검정 자리에서 모여 거사를 도모한 것은 사실이다.
“근래에 여색을 탐하는 것이 풍습이 되었는데, 무변(武弁)이 더욱 심합니다. 만포 첨사(滿浦僉使) 조명철(曺命喆)은 전 진장(鎭將)이 좋아한 여자를 간음하려고 하였는데, 그 여자는 끝까지 수절하다가 부득이한 지경에 이르자 스스로 세검정(洗劍亭) 아래의 물에 투신하여 죽었습니다. 그 원귀(冤鬼)의 곡성이 시끄러워 한 진(鎭)이 소란스러웠고,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머리에 키를 쓴 채 불경을 외워 물리쳤다고 합니다. --- 의금부에 잡아들여서 그 죄를 명백하게 바로잡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그대로 따랐다. (일성록 > 정조 > 정조 11년 정미 > 1월 19일 > )
세검정의 또 다른 면이다. 세검정 아래 홍제천이 투신을 할 만큼 많은 물이 흘렀던 것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이 관창(觀漲, 큰물 구경)을 했던 곳이라는 것이 상상이 된다.
2. 기록의 공간 : 조지서 옆, 세초 공간, 세초연,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따르면 세검정은 열조(列朝)의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사초(史草)를 물에 씻는 세초(洗草)를 하고 관원에게 잔치를 베풀던 곳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세검정은 창의문 밖 탕춘대 앞에 있으며, 차일암(遮日巖)이 있다. 열조(列朝)의 실록(實錄)이 이루어진 후에, 반드시 여기서 세초(洗草)하였다." 라고 하였다.
세초란 실록 편찬에 사용되었던 사초(史草)와 원고들을 없애는 일이다. 보통 종이에 먹물로 쓴 원고를 물에 씻어 글씨는 지워버리고 종이는 재활용하였다. 사초는 사관(史官)이 직접 보고 들은 국가의 대소사와 자신의 논평을 기록한 것을 말한다. 사관들이 일차로 작성한 초초(初草)와 이를 다시 교정하고 정리한 중초(中草), 실록에 최종적으로 수록하는 정초(正草)의 세 가지가 있다. 세초는 그중 초초와 중초를 물에 씻는 것이다.
세초는 대외비인 사초의 유출을 막고 공간(公刊)된 정사(正史)에 대한 시비의 소지를 예방하기 위해서였으며, 사관(史官)들이 소신껏 역사를 기록하도록 권장하고 그들을 보호하며 사초가 남아 분쟁에 악용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 세초를 하고 남은 종이를 재활용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세초를 세검정의 홍제천에서 행한 이유는 근처에 종이 만드는 국가기관 조지서(造紙署)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지서를 이곳에 세운 이유는 일대에 닥나무가 많았고, 홍제천 맑은 물이 종이를 만들기 좋았기 때문이다.
일성록 정조 11년조에는 한 무인이 좋아한 여자를 간음하려 해서 세검정 아래 투신하여 자결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원귀(冤鬼)의 곡성이 시끄러워 한 진(鎭)이 소란스러웠고,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머리에 키를 쓴 채 불경을 외워 물리쳤다’고 하여 한 진이 소란스러웠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은 의금부에서 죄인을 잡아들여 처리하는 것으로 해결하였다. 세검정 아래 홍제천은 사람이 투신할 정도로 깊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세초가 끝나면, 세검정 아래 차일암에서 말렸고, 말린 종이는 관청 조지서(造紙署)에서 재활용 가능한 새로운 종이로 만들었다. 지금도 차일암에는 세초에 사용되었던 천막을 친 간이시설 흔적이 남아 있다. 세초 후에는 세검정 아래 차일암(遮日巖)에서 참여한 사람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잔치 세초연(洗草宴)을 베풀었다.
3. 예술의 공간 :
1) 문학의 공간
홍제천 세검정 구간은 말고 깊은 물이 흐르며 너럭바위가 널려 있는 수석과 수목의 공간이었다. 수려한 풍광으로 많은 시인 묵객들이 애호하는 경승지가 되었고, 시와 그림 등이 창작되었다. 정조도 그 시인들 중 하나였다.
전쟁을 경계한 뜻 되새기며 이 정자에 임하니(詰戎餘意此臨亭)
한양 북쪽 하늘 높고 뿔피리 소리 청아하다(漢北天高畫角淸)
사랑스런 저 샘물 깊고도 힘이 있어(可愛源泉深有力)
시원스런 물줄기 온 산을 울리도다(冷然一道萬山聲).
국왕답게 풍광을 통해서도 태평성대를 노래하고 뻗어나가는 도읍의 기운을 노래했다.
오늘날은 깊고도 힘찬 물은 흔적으로도 남았지만, 세검정 아래 깊은 물에 투신한 사람이 있고 보면 당대 홍제천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세검정에는 다산 정약용의 흔적도 남아 있다. 다산은 1783년 진사시 합격 후 1801년 신유사옥으로 유배를 가기 전까지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1791년 신해년 여름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다산은 한혜보 등 벗들과 세검정에서 노닐었던 일을 기록한, ‘유세검정기’를 지었다. 폭우 구경, 관창 관창(觀漲)을 하는 경험을 기록한 글이다.
“세검정의 빼어난 풍광은 오직 소낙비에 폭포를 볼 때뿐이다. 그러나 막 비가 내릴 때는 사람들이 옷을 적셔 가며 말에 안장을 얹고 성문 밖으로 나서기를 내켜 하지 않는다. 비가 개고 나면 산골 물도 수그러들어 버린다. 이 때문에 정자가 저편 푸른 숲 사이에 있는데도 성중의 사대부 중에 능히 이 정자의 빼어난 풍광을 다 맛본 자가 드물다.”
산문 이외에 세검정을 노래한 한시 3편이 더 있다.
북한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세검정까지 이르러 장난삼아 육언시를 짓다[自北漢回至洗劍亭 戲爲六言]
나그네 밭길 깊숙한 골짝에서 나오니 / 客行出自幽谷
시냇가에 날아갈 듯 정자 하나 서 있네 / 溪上翼然有亭
비 지나간 반석은 티없이 깨끗하고 / 雨過盤陀濯濯
바람 부는 허공은 해맑기 그지없다 / 風吹虛籟泠泠
성 가까운 절간은 오히려 속기 감돌고 / 近城僧院猶俗
인간 세상 단풍은 아직도 푸르고녀 / 下界丹楓尙靑
티끌 먼지 속으로 이제 이 몸 들어가면 / 若使塵埃裏至
노을 휘장 구름 병풍 쓸쓸하여 가련하리 / 可憐霞帳雲屛
세검정에서 놀며[游洗劍亭]
서로 만난 두 비탈 있지 않으면 / 不有雙厓合
뭇 골짝 흐르는 물 어찌 맡으리 / 那專衆壑流
장마비 시름한 지 오래인지라 / 祗緣愁雨久
성문 나와 놀이를 한번 가졌네 / 故作出城游
날리는 물거품에 반석 차갑고 / 飛沫盤陀冷
푸른 그늘 어두워 난간 그윽해 / 蒼陰伏檻幽
처마 머리 서렸네 군왕의 기운 / 楣頭有御氣
임금 글씨 명루를 제압하누나 / 宸翰鎭名樓 *신한(宸翰) : 임금이 직접 쓴 문서나 편지
높은 성곽 복도가 어렴풋이 보이는데 / 層城複道入依微
종일토록 시내정자 속물이란 드물구나 / 盡日溪亭俗物稀
흥건한 바위 안개 일천 나무 촉촉하고 / 石翠淋漓千樹濕
어지러운 물소리 두세 뫼가 나누나 / 水聲撩亂數峯飛
어두운 시내 골짝 한가로이 말 매두고 / 陰陰澗壑閒維馬
바람드는 격자창에 옷을 벗어 걸었다네 / 拍拍簾櫳好挂衣
우두커니 오랫동안 앉아 있기 안성맞춤 / 但可嗒然成久坐
시 비록 이뤄져도 금방 아니 돌아가리 / 不敎詩就便言歸 (다산시문집 제2권)
*정약용 세검정 시 감상
정약용의 '세검정'에서는 세간에서 현실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단지 정자의 아름다움을 묘사하였을 따름이다. 오히려 영조가 써 내렸다는 현판에 대한 찬사를 바쳐 영조를 이은 정조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천주교에 관대한 정조는 정약용의 우산이었다. 정조가 승하하자마자 우산을 잃어버린 다산은 순조 등극 원년에 정적이 일으킨 신해사옥으로 유배를 갔고, 조카사위인 황사영이 일으킨 백서사건으로 다시 불려와 국문당한 뒤 강진으로 이배(移配)를 가서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야 했다.
어두운 시내 골짝에 한가로이 말 매두고 / 바람드는 격자창에 옷을 벗어 걸었다네
이 모습에서는 현실을 염려하는 선비보다 자연에 귀의한 탈속한 선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천주교도나, 현실에 비분강개한 유자의 모습도 찾기 힘들다. 평생을 기독교와 천주교와의 갈등 속에 있었던 다산의 본모습은 아마도 이처럼 유유자적하며 강호가도를 즐기는 편안한 隱逸 시인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몇 번을 배교했던 정약용에게 당시 천주교는 감당하기 어려운 정치적 사회적 무게였을 것이다.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세검정이라는 이름에서부터 드러나는 역사현실과의 문제를 피하고 자연 묘사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목민심서 등을 통해 현실 개혁안을 제시했던, 알려진 모습과 맞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에 대한 변혁보다 안주에 무게를 둔 것이 그의 본모습이 아닐까 싶다.
이외에도 무명자 윤기(無名子 尹愭 1741~1826)선생의 문집 <무명자집>에 수록된 시가 두 편,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의 시가 한 편 등등이 전한다.
2) 그림의 공간
세검정을 그린 그림은 겸제 정선의 그림이 두 편, 이도영의 그림 한 편이 전한다. 이도영의 그림은 1925년 작품이고, 겸재 정선의 그림은 정조 대 세검정 축조 당시의 그림이므로 겸재 그림을 집중적으로 본다.
(1) 겸재 정선 평면화 세검정도, 선면화 세검정
1) 선면화(扇面畵) ‘세검정’
겸재는 세검정을 두 가지 그림으로 그렸다. 하나는 평면화이고 하나는 부채에 그린 선면화이다. 정선은 「풍악전면도(楓岳全面圖)」, 「정양사도(正陽寺圖)」, 「금강내산도(金剛內山圖)」, 「도산서원도(陶山書院圖)」 등의 선면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특히 많이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다.
두 그림은 동일한 소재를 그린 진경산수화인데, 가만히 보면 같으면서도 많이 다르다. 다른 점을 몇 가지 살펴본다.
선면화는 담채색 소품이다.(어떤 자료는 일부분이 채색되어 있어서 확인이 필요하다.) 절병통과 세 군데 합각이 선명하게 묘사되었고, 누마루 위에는 갓을 쓴 채 난간을 등지고 마주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두 선비의 모습이 또렷하다. 삼면에 담장이 둘러 있는데, 북편 담장 한가운데는 일각문이 있고, 담장 밖에는 선비들이 타고 온 말과 나귀 그리고 동자의 모습이 보인다. 계곡으로 난 편문 아래에는 계단이 있다.
정자와 자연의 조화, 사람과 자연의 조화를 보여준다. 둘러싼 산들은 정자도 사람도 호위한다. 산수화답게 원근감도 없이, 사람 중심으로 자연을 해석한다. 산은 물을 보호하고, 나무를 품으며 사람도, 사람이 쉬어가는 정자도 품는다.
그런데 지붕에 올려져 있는 절병통의 항아리가 한 개다. 절병통(節甁桶)은 전각이나 육모 정자, 팔모 정자 등의 지방 마루의 가운데에 세우는 탑 모양의 장식 기와를 말한다. 추녀가 들리는 것을 막고 누수를 막는 실제적인 기능도 있다. 경복궁 향원정은 특히 절병통이 아름다워 유명한 건물이다.
1941년 세검정이 소실되고 1977년 복원할 때 정선의 이 선면화를 참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복원된 새 건물에서는 절병통이 사라졌다.
2) 평면도 세검정도 :
세검정 건립 후 정선(73세)이 영조에게 보이기 위해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목적에 맞게 정자를 부각시켜 선명하게 그리고 나머지 배경은 희미하게 처리하였다. 정자를 보여주려고 그린 그림이다. 마치 의궤처럼 사실 전달의 목적을 가진 그림인 것이다. 따라서 후일 복원을 위해 그림을 참고할 양이면 이 그림이 적당하다.
이 그림에도 절병통이 있지만 항아리가 두 개다. 나머지 정자의 모양은 선면도와 거의 같다. 계곡으로 나오는 편문(便門) 앞의 길이 계단이 아니고 바위를 이용한 내리막이다. 정자 안에는 사람이 없고, 빈 공간이 더 도드라지게 그렸다. 그림 속의 사람은 T자 모양의 정자의 앞 ㅣ자 부분이 더 긴 것도 선면도와의 차이이다. 이 그림은 선면도보다 정자를 강조해서 그린 그림인 것이다. 자연과의 조화보다 정자 중심의 자연을 그린다. 정자만 들어내면 오히려 느긋한 한편의 산수화가 온전할 것같다. 그만큼 정자는 어색하게 앉아 있다.
두 그림의 차이는 정자의 차이에 그치지 않는다. 선면도의 사람은 모두 정자와 관련된 사람들인데, 평면도는 두 일행을 그리고 있고, 이들은 모두 정자가 목적이 아닌 행인이다. 한 팀은 각각 하인에게 견마 잡히고 말과 나귀를 타고 지나가는 양반 두 명이고, 한 팀은 하인에게 등짐을 지우고 긴 지팡이를 들고 유람에 나선 양반으로 보인다. 정자와 사람의 조화는 찾기 어렵다.
배경은 더 많이 다르다. 평면도는 계곡 공간을 중심으로 산천을 부드럽게 그린데 반해 선면도는 날카로운 봉우리에 계곡을 침범하는 산자락을 강조하여 마치 정자가 산의 호위를 받는 듯하다. 계곡의 바위 또한 평면도는 너럭바위가 여러 개 널려 있는데 반해 평면도 계곡의 바위는 많이 생략되고 단순화되어 있다. 평면도의 산은 등선이 부드럽고, 떨어지는 선도 매우 부드럽니다. 따라서 물이 산을 넘어 널찍하게 아래로 뻗어나가는 모습이 되었다.
평면도는 수(水)를 그린 그림이고, 선면도는 산(山)을 그린 그림이다. 각각 물 속의 정자와 산속의 정자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물의 확장과 뻗어남을, 산의 폐쇄와 아늑함을 그리고 있다. 물론 산수의 가시적 모습도 많이 다르게 표현된다.
진경산수화를 소재 중심으로 봐서는 안 되는 이유를, 동일 소재의 이 그림이 말해준다 하겠다. 우리 나라 진경을 그렸다는 이유로 정선과 그의 그림을 칭송하는 것이 소재주의적 관점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3) 이도영의 세검정
이 그림은 채색화이다. 그러나 세검정 자체가 실제와 많이 다르다. 절병통이 없을뿐더러 담장도 없다. 홍제천 너럭바위들도 간 데 없다. 바위는 사납고 거친 데다 바위의 질감을 느낄 수 없다. 그 사이 들어섰을 집 여러 채가 정자 뒤에서부터 산자락에까지 군데군데 들어서 있다. 집은 험한 바위나 바위산 아래 어두운 모습으로 숨어 있다.
정자 앞 바위는 험악한 모습인데 정자 뒤 산은 끝없이 높아지지만 부드러운 등성이에 꽃이 피고 밝은 나무와 부드러운 흙길이 유연하다. 어디로 가는지 모를 길이 넓고 밝은 모습으로 산을 휘감으로 구불구불 안으로 들어간다. 그 옆의 길이 따로 노는 걸로 보아 인간세로 가는 길은 아니다.
모르는 세상은 긍정하고, 아는 세상은 부정하는 느낌이다. 실제를 왜곡하면서 그린 마음의 그림이 지향하는 바를 알기 어렵다.
4) 오늘날의 실제 세검정
오늘날 복원된 세검정, 우리 눈 앞의 세검정은 어떤 모습으로 실재하는가. 평면도, 선면도, 채색화 중 무엇인가. 이제 모두 육안으로 실제를 볼 수 있으니 따로 해설이 필요없을 터이지만, 세 그림 어떤 모습도 아닌 단조로운 모습이다. 담장이 없어지고 규모가 작아진 것은 좁아진 터 탓이려니 하지만, 지붕 위 절병통은 왜 사라졌는가.
산과 물과의 조화를 보여주는 겸재의 세검정은 이미 없다. 산도 물도 이미 시들어서인가. 그렇다면 주변 인가와의 조화나 인가를 압도하는 새로운 면모를 구현하려 한 시도가 있는가. 홍제천에 북악산에 있는 고유한 정자가 아니라, 어디에나 있는 정자 중 하나인 거 같다.
그래도 재현이 반갑고, 정자가 반갑다. 말로만 세검정인 동네가 아니라, 실재가 있는 세검정을 만들어 준 것이 고맙다. 거기다 세검하고 평화를 만드는, 그런 염원을 이으려는 마음이 실재한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 홍지문(弘智門)
탕춘대성을 쌓고 홍지문(弘智門)을 내었다. 지금의 성문과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은 1921년 대홍수로 허물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본래의 성문은 산성의 북쪽이라고 하여 ‘한북문(漢北門)’이라 했으나,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弘智門)’ 편액을 하사하여 공식 명칭이 되었다. 지금의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그런데 ‘弘智門’을 가로쓰기하여 쓰기 방향이 반대가 되어 있어 매우 낯설다.
*탕춘대성(蕩春臺城)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숙종 41년(1715)에 수도를 방위하기 위해 지은 성곽이다.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해 쌓은 4km의 산성이다.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홍제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조하였다.
탕춘대성 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 터(현 서울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였다. 이후 성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을 배치하였다.
홍지문 옆 오간대수문과 연결되어 있다.
석파랑
*석파랑(石坡廊)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이 1958년에 옮긴 언덕배기의 석파정 별당이다. 석파정에 있던 일곱채 건물 중에서 별당 석파랑만을 현재 위치로 옮겨 지었다. 석파랑(石坡廊)은 대원군 이하응의 호 ‘석파’를 딴 이름이다. 손재형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예가로. 일본에 건너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찾아온 사람이다.
석파정(石坡亭)은 인왕산 기슭에 위치한, 조선말기의 대표적인 별장으로, 흥선대원군의 별장이다. 원래 안동 김씨 김흥근의 별장이었다. 별장을 사고자 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대원군은 고종을 데려와 이 집에서 묵었다. 왕이 잔 곳이라 신하가 살 수 없는 관례 덕분에 대원군 소유가 되었다. 지금은 사유지로 개방되지 않는다.
석파정의 일부를 옮겨 지은 석파랑은 한정식집이 되어 있다. 석파정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 석파정 별당인 석파랑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3호다.
석파랑 입구 문서루는 순정효황후 윤 씨의 옥인동 생가를 옮겨온 것이다. 당시 중국에서 들여온 호벽(胡壁)을 재현했고 입구에는 신라와 백제의 와당을 붙여 고풍스러움을 살렸다. 덕분에 옛 한옥의 기품이 그대로 살았다. 지금은 음식점으로 쓰인다.
나룻배를 타고 서귀포까지 온 제자 이상적에게 감복한 추사는 자신의 심경을 담아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 유명한 ‘세한도’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집이 바로 김흥근의 부암동 별서 삼계동산정 별당 월천정(三溪洞山亭 別堂 月泉亭), 즉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의 석파정 석파랑(石坡亭 石坡廊)이다. 송백은 석파정 정원수다. (참고 : 박상준, 오!!! 멋진 서울/ 서울신문 2020-07-20, 2020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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