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베이(화북, 중국어 간체자: 华北, 정체자: 華北, 병음: Huábei, 영어: Northern China 또는 North China)는 중국의 6대 중국지리대구(中國地理大區)의 하나로서 북부 지방이며, 화베이 평원이 그 중심이다.
중국 대륙의 중심인 중원(中原)은 역사적, 전통적으로 화이허(淮河)를 기준으로 화베이와 화난(華南)로 크게 구분해 왔다. 화베이는 황하를 중심으로 한 황하 문명의 발상지이고, 대체로 이 지역을 차지한 정치 세력이 중국을 통일하였으며, 현재도 화베이 지방의 베이징이 중국의 수도이다.
화북(华北)
2개의 성 : 허베이 성(河北省), 산시 성(山西省),
직할시 : 베이징 시(北京市), 톈진 시(天津市),
자치구 : 내몽골 자치구(内蒙古自治区)
- 주요 도시
베이징(北京/Beijing, 북경) : 중국의 수도이며, 중국의 정치, 문화의 중심도시이다.
톈진(天津/Tianjin, 천진) : 베이징의 외항(外港)으로 각종 공업이 발달하였다.
타이위안(太原, 병음: Tàiyuán)은 중국 산시 성(山西省)의 성도이며 옛날에는 진양(晉陽)이라 불렀던 도시이다.

허베이 성/하북성
河北省
Hebei Province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 중의 하나. 성도는 스자좡 (石家庄)시.
약칭은 지(Ji, 冀)로 한자로는 기라고 읽으며 기주에서 유래했다. 그 외에 과거 연나라가 있던 지역이라 연(燕)이라고 하기도 한다. 성의 인구는 약 7,100만명. 북쪽으로 내몽골 자치구, 동쪽으로 랴오닝 성, 서쪽으로 산시 성(山西), 남쪽으로 허난 성, 산둥 성과 접한다. 화북 지방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성. 이름의 유래는 황하(河)의 북쪽(北)에 있다고 해서.심플하다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 직할시와 톈진 직할시를 둘러싸고 있는, 말하자면 대한민국의 경기도와 비슷한 포지션에 해당한다. 물론 크기는 넘사벽급. 월경지도 일부 있다. 하지만 경기도가 한국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데에 비해 허베이 성의 존재감은 중국 전체에서 보면 상당히 낮다. 일단 중국 정치의 핵심부인 베이징에 가까워 남쪽의 상하이 등 경제특구들보다 아직 개방이 덜 되었고, 베이징 시의 면적이 거의 강원도만해서 허베이 성까지 베이징 도시지역이 확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2010년대 들어 허베이성 중부 일대에 위치한 깡촌인 슝셴, 롱청, 안신 일대를 묶어서 슝안신구를 경제특구로 지정하고 벤처산업 위주로 개발하겠다고 당국에서 발표하면서 이 지역에서 부동산 투기 열풍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산업
위에서 말했듯이 수도와 인접했다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중국 개방 정책의 특성상 다른 성보다 산업 자체는 비교적 낙후되어 있는 편이다. 그러나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제조업은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농업은 거의 전적으로 밀농사를 짓는다. 이는 화북 지방의 대체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철강 산업은 상당히 발달한 편인데, 세계 철강 생산량 1위는 중국, 2위는 허베이성, 3위는 탕산시, 그리고 9위는 탕산시에서 숨기고 알리지 않은 생산량(...)이라는 유머가 있을 정도.
수도를 둘러싼 지역이니만큼 교통은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당연히 북쪽은 거의 듣보잡 취급을 받는다(...).[1] 만주지역과 남쪽의 광활한 중원지대를 잇는 교통 인프라가 이 곳을 지나간다.
역사
고대부터 평야지대를 바탕으로 관중-중원과 더불어 가장 풍요로운 동네였고 이 때문에 하북을 근거지로 삼았던 원소는 군웅할거 초창기에 최강의 세력을 구축했고 원소를 쓰러뜨린 조조 역시 관중-중원과 더불어 이곳에서 나오는 국력을 바탕으로 촉과 오를 압도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금나라,원나라,청나라 같은 북방유목민족이 세운 정복왕조 역시 수도권을 화북지역으로 자리잡으며 정치 중심지가 점차 양자강 유역에서 이 곳으로 이동하였다.
춘추 전국 시대부터는 지금의 북경 지방이 '계'라는 지명으로 불리기 시작해 연나라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게 다수설의 견해이다. 이후 전한대에는 '유주'라는 행정구역으로 편성되어 그 이름으로도 불렸다. 삼국시대에는 공손찬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이후 삼국을 통일한 서진이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받아 허베이 지역을 빼앗기게 된다. 이 때 이 곳에 전연, 후연 등의 나라들이 들어선다. 이후 수나라, 당(통일왕조) 시대에는 한족의 문화권에 들어갔지만 이때는 변방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북쪽인 점도 있고, 타 민족의 침입이 상당히 잦았던지라(...)
5대 10국 시대의 마지막에 이 지역을 연운 16주라는 이름으로 거란에게 뺏긴 것으로 또한 유명하다. 이후 통일 왕조인 글로벌호구 북송이 몇 번이고 이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송의 안습한 군사력으로는 거란(요)을 쓰러뜨릴 수가 없었다.요나라가 쓰러지지 않아 그래서 여진족(금)과 연합해 거란을 뭉개고 이 지역을 탈환했으나 곧바로 금에게 뒷통수를 털리고 이번엔 화북 전체를 먹혀버린다(...).
그리고 금이 멸망하고 원나라가 들어서자 마침내 이 지역은 제국의 중심지로 거듭난다. 명나라[3]와 청나라 역시 이 지역을 수도로 삼으면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떠올라 지금에 이르고 있다.
명나라 때와 청나라 때에는 수도가 위치해 있다고 해서 즈리성(直隸; 직예성)이라고 불렀고, 중화민국이 된 뒤에도 북양정부의 수도가 북경에 있었기 때문에 계속 직예성으로 불리다가, 국민당의 2차 북벌로 북양정부가 무너지고 1928년 6월 국민정부가 베이징까지 점령하면서 베이징은 베이핑으로, 직예성은 하북성으로 개칭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33년 열하사변으로 일본군의 침공을 받았고 하북 사건을 구실로 1935년 6월 10일, 하매 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었으며 1935년 11월 25일, 기동사변으로 기동방공자치위원회가 수립, 1936년 지둥방공자치정부로 거듭나면서 500만에 달하는 인구가 일본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면서 중일전쟁이 이곳에서 일어났으며 항전 기간동안 일본군의 점령지로 8년을 점령당했고 신멸작전이 벌어져 대규모 학살이 벌어진곳이다. 이 학살로 당시 세를 불리며 거대해지던 팔로군의 기세가 꺾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수도를 다시 베이징에 두었지만, 다시 직예성으로 이름이 바뀌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