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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28
성령충만한 사람에게 왜 고난이 오는가? (성령강림주일) 사도행전 4:23~31
I. 고난행전
어느 교회 목사님이 신장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신장을 이식 해 주어야 하는데 교우들 가운데 이것저것 검사를 마친 다음에 무려 200 여명의 교우가 자신의 신장을 목사님께 제공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감사하 기도 하고 누구의 신장을 이식 받는게 하나님 뜻인가? 그래서 예배를 드 리게 되었습니다. 예배 도중에 목사님께서 강력한 선풍기 한 대를 돌리더 니 아주 부드러운 깃털 하나를 그 앞에 두었습니다. 깃털이 공중으로 날더 니 교인들 머리 위를 왔다갔다 합니다. 목사님께서 “이 깃털이 떨어지는 사람의 신장을 이식 받는 걸 하나님의 뜻으로 알겠습니다.” 교인들이 침묵 가운데 기도하더니 금방 이 침묵기도가 통성기도로 바뀌었습니다. 깃털을 향하여 다같이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주여, 깃털을 주시옵소서. 주여~.” 깃털이 날다가 날다가 목사님 머리 위에 떨어졌다는 얘기예요.
실제로 있었던 일도 아닌 거 같고 또 있음직한 얘기도 아닙니다. 모인 사람들이 목 사님과 사랑을 나누고 싶은 마음 왜 없겠습니까? 생명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 분들이지요. 그러나 정작 고통이 내게 온다고 했을 때에 그것을 감당한다는 것은 생 명처럼 상대를 사랑하지 않고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 그런 얘기이지요.
여러분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여러 별명이 있습니다. 성령행 전, 교회행전. 제가 거기에 별명을 하나 더 붙여 준다고 한다면 고난행전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회가 세워질 때에, 성령이 그 교회에 복음을 온 땅을 전해가는 과정 속에서 초대교회는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많은 고난을 감내 했습니다. 역경과 어려움을 겪게 내야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을 감당하는 과정에 보면 복음서의 기도와 사도행전의 기도에 약간의 차이를 볼 수가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예 수님의 제자들이 기도할 때 물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 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대게 혼자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동산 에서 제자들과 함께 손잡고 야훼 삼창하고 우리 통성기도 하자 그런 거 없지 않습니
까? 조용한 기도입니다.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와서 보면 함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언필칭 합심기도 통성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이 그 가운 데 임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 임했을 때에 이적과 기사가 표적이 매일 같이 상식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 다.
베드로가 40년동안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성전미문의 걷지 못하는 사람을 향하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걷지 못하 는 사람을 걷게 합니다. 이 일로 베드로가 고난을 겪게 됩니다. 옥에 갇히고 매를 맞 습니다. 복음을 전했더니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5천명이 하나님 앞에 돌아 오는 큰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이 일로 말미암아 교회 에 무서운 핍박과 고난과 시련을 견디게 되는 것이지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 마음속에 모두 다 궁금한 질문 한 가지가 떠오르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에 왜 고난이 왔을까? 성령 충만한 사람들에게 왜 핍박이 왔을까?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들이 왜 무서운 시련을 겪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 입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이 “성령충만한 사람에게 왜 고난이 오는가?”입니다.
II. 신비주의, 율법주의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신비주의로 해석을 하곤 합니다. 예 수 믿으면 성령 받으면 아픈 사람도 낫는다.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도 평안해진다. 사업과 장사가 안 되는 사람들도 형통한 삶을 누리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내가 애쓰지 않아도 어떤 신비한 힘이 나타나서 요술방망이 같은게 나타나서 지니가 나타 나서 우리를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지요. 성령 받으면 예수를 잘 믿으 면 기도를 열심히 하면 내가 가진 자원과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조건과 상관 없이 어떤 초월적인 능력에 의해서 내 욕심이 채워지고 좀 더 좋게 말하면 내 기도 가 응답되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기도의 응답이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현세적이고 일시적인 축복을 얻는 것이 마치 신앙의 목 적인양 변질되어져버립니다. 이 번영신학적인 위복주의적인 생각이 신비주의에 빠져 들게 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자기 경험을 더 앞세웁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 하지 않고 언제나 자기 머릿속에 지나가는 것, 기도 며칠 하고는 그 다음에 어떤 신 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된 것인 양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나님 이렇 게 하라 그랬다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향하여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 향하여 하나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 장사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경우들이 많이 있는 것이지요.
초대교회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에게 왜 고난이 오는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 다. 제가 이 질문 제목을 던졌을 때 그래 맞아 왜 성령 충만한 사람들에게 고난이 오지? 여러분 마음속에 동일한 질문에 생겼을 텐데 초대 교회 성도님들은 이런 질문 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겁니다.
또 신실하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고난이 찾아왔을 때에, 위기를 만났을 때에, 핍박 이 찾아 왔을 때에 ‘내가 뭘 잘못했지, 내 죄 때문인가 봐.’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난이 찾아왔을 때에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는 건 아름다운 일 아닙니 까? 그리고 어려움이 있을 때에 자기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보면서 한 걸음 더 성결한 삶으로 나아가는 기회로 만들어 가는 것 근사한 일이지요.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향 하여 또 공동체 전체를 향하여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런 생각을 “율법주의”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질병이 죄 때문에 왔다고 한다면 그 동안 건강하게 사신 것은 여러분의 의 때문이었습니까? 여러분 사업이 어렵고 실패를 경험하는 것 죄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동안 형통하게 잘 먹고 잘 산 것은 여러분이 착한 일 많이 해서 그랬다는 말입니 까? 다른 사람의 고난이 죄 때문이라고 한다면 형통은 의 때문이었느냐? 하는 것입 니다. 그것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율법적인 사고방식이 우리 성도들의 믿음을 성장시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와 기쁨이 없어집니다. 항상 얼굴이 우울하고 찡그 러진 삶을 사는 것은 율법주의에 찌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좀 못나서 엄지손가락이 깨졌어요. 뼈가 부러졌어요. 그
래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 러분 머릿속에 목사님의 손가락 깨졌다고 그러니까 우리 목사님 뭘 잘못 했지? 우리가 모르는 죄가 뭘까? 그러면 그동안 제가 열 손가락으로 뻔지 르하게 잘 사는 것은 내가 잘나서 그랬습니까? 내 의 때문에 그렇게 잘 산 것입니까? 여러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아니었느냐? 그 얘기입 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은혜 아니면 구원받을 길도 없고, 은혜 아니면 살아갈 길도 없는 게 우리 아니었냐는 것입니다. 나였고 너였고 우리 아니었냐. 그 얘기지요. 이것을 죄 때문이 라고 생각하고 죄책감에 빠져 있는 것 이것은 신학적인 성경적인, 복음적 인 해석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신비주의에 빠질 때마다 위복주의, 번영신학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율법 주의에 빠질 때마다 생명의 종교가 하나의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는 윤리도덕이 되 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신비주의나 율법주의가 아닌 복음적인 교회, 사도 행전의 교회는 어떤 교회였을까요? 사도행전의 교회는 영성적인 교회였습니다.
III. 영성적 교회
왜 우리는 이 성령 충만한 사람, 성령 충만한 공동체에 고난이올까? 그랬을 때에 이 해가 되는데 초대교회 사람들은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까요? 초대교회 성도님 들은 성령 충만하다고 하는 것을 신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충 만하고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길을 가는 것이 성령 충만의 길이라 고 믿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걸어갈 때에 손해 보는 거 당연한 것 아 닙니까? 바보 취급 받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었느냐. 그 얘기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핍박이 있어도 “핍박 사라지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를 드린 구석 이 없어요. 고난이 시련이 찾아와도, 이 고난이 시련이 한방에 날라가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가 전혀 없더라는 것이지요. 환경을 바꾸어서 나를 편안하게 해 주세요 라 는 기도가 없어요. 이 환경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이 어려운 환경, 고난의 환경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됩니까? 주의 몸된 교회는 어떻게 이 어려운 고난의 현장에서 더 복음을 잘 증거하며 복음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이
것이 그들의 기도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고난이 있을 때마다, 핍박 있을 때마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담대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지금 고난이 있다고 그래서 내 믿음이 비굴하게 초 라하게 타협적인 믿음생활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용기를 주세요. 담대하게 해 주세 요. 말씀대로 생각하고 말씀대로 살게 해 주세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증거 하며 살게 하여 주십시오.
“증거”는 입으로 증거하는 것을 포함하지만 모든 삶으로, 모든 가치관으로 공동체가 함께 말씀의 증언자가 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핍박과 고난이 있을 때 담대하게 하나님 말씀을 증거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이지요. 이게 영성적인 교회입니다.
IV. 복음주의적 교회
초대교회는 신비주의나 율법주의가 아니라 복음적인 교회였습니다. 복음주의적인 교 회였다고 하는 것이지요. 보통 사람들이 성경의 가치를 깊이 묵상하지 않고 생각하면 고난이 없는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병든 것보다는 건강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을 합니다. 실패보다는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게 믿음 좋은 사람들의 길이라고 생 각하는 것이지요. 고난이 없어야 선교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이 없을 때 에 우리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복음이 잘 전해지 기 위한 고난이었다고 얘기합니다. 우리 믿음이 더 잘 영글어 지기 위해서, 우리가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는 길 잘 가기 위해서, 기도 포기하지 않고 신앙 식지 않고 게으르지 않고 말씀 떠나지 않고 신실한 성도로 살아가기 위하여 핍박도 필요하고 고난이 필요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고 초대교회 성도님들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 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상황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때에 고난의 신학, 재난의 신학이 잘 정립되지 않으면 마지막 때에 종말의 때에 믿는 자를 보겠 느냐. 이때가 바로 이때라고 생각하고 경성해야 된다는 겁니다. 조금만 어려우면 믿 음이 낙심이 되고 기도가 식어지고 현실적이고 우리 일시적인 이런 것들만 생각하다 가 신령한 영적인 차원을 잃어버리면 내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가? 마지막 때에 주 님 곁에 남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인지 나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는 것입 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이 여기 계시면 제가 한번 여쭤 보고 싶어요. “선생님,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복음을 열심히 증거하고 복음대로 살려고 애를 썼고 또 많은 성경을 기록했고 기독교 2천년동안에 가장 영향력 있는 어르신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했는데, 선교를 위해서 모든 삶을 걸으셨던 분인데 그 모진 고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견디셨습니까? 그 고난을 어떻게 이겨냈 습니까?”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대답을 합니다. 빌립보서 1장12절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나의 당한 일이 뭘까요? 온갖 고난이고 온갖 손해이지요. 온갖 억울한 일이지요. 이 해가 안 되고 용납이 안되는 일들이지요.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 었더라는 얘기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힙니다. 그러면 “하나님 이 상황이 말이 됩니까? 내가 뭘 잘못해서 감옥에 갇힌게 아닌데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복음, 열심히 증거해서 빨리 교회를 세우고 땅끝까지 로마까지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밖에 없는 것 잘 하시지 않습니까? 왜 나를 감옥에 가둡니까? 왜를 묻지 않았습니다. Why? 없는게 초대교회 입니다. 왜가 없었습니다. 그냥 감옥에서 기도하는 겁니다.
낮에 맞았던 등어리가 터져서 쓰리고 아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바울도 실라도 끙끙거리고 드러누워 있습니다. 실라 우리 일어나서 찬송하세. 선생님 신라의 달밤도 아닌데 무슨 찬송을 합니까? 그 한밤중에 찬송하고 기도했더니 옥문이 열려요. 간수 장이 예수를 믿어요. 로마의 시위대에 고급 정치가들이 찾아와서 예수를 믿어요. 이 게 유럽교회의 시초가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다고 간수를 만날 수 있습니까? 로마의 장교들 로마의 고급 관료들을 만날 수 있습니까? 감옥에 들어가서 만나는 거예요. 이게 사도 바울이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감옥에 들어가서 도리어 교회를 세우지 않았느냐. 핍박 때문에 고난 때문에 복음의 진보가 있지 않았느냐? 그 얘기입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예수님이 날 위하여 고난당하셨다고 한다면, 날 위해 죽으셨다고 한다면, 내가 예수
님을 위하여 고난당하고 손해 보고 죽을 수 있다면 그것 영광 아니겠어? 그 얘기입 니다. 그게 재난신학입니다. 고난의 신학, 사도 바울의 고난신학이라는 것입니다. 이 게 복음주의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고난이 있고 지금은 개인적인 고난이 아니라 이게 세계적인 재난 상황 아닙 니까? 이 재난 상황에서 내가 진짜임을 보여드릴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찾기를 원하 시는 그 한 사람 예배자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원하는 리얼크리스천 진짜 알곡 신자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그런 사람임을 보여줄 수 있어서 너무나도 기뻐요. 이게 바로 복음적인 교회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V. 다이아몬드 신앙
고난 중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만나요. 오늘 본문 29절에 보면 고난을 만났 어요. 온갖 사람들이 초대교회를 비난하고 핍박을 합니다. 그때 29절에서 “담대히 하 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행4:29) 담대하게 해 달라고, 담대하게 말씀대 로 살게 해 달라고, 담대하게 말씀 증거하며 살게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본 문 마지막 31절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 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흔들거리기 시작합니다. 진동이 일어납니다. 성령이 그 자 리에 임재하십니다. 그리고 신비한 일들이 일어나고 사도들을 매질하던 사람들의 팔 이 부러지고 몽둥이로 내리치던 사람들의 몽둥이가 공중으로 휘익 올라가더니 땅으 로 떨어지더니 매질하던 인간들의 머리가 박살이 나고 걷지 못하는 사람 걷는다고 감옥에 넣었던 사람들의 다리가 부러지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게 아닙니다.
31절 마지막 결론이 담대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성령받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 을 증거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고난 가운데 당당해 지는 것, 담대해 지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보는 기회입니다. 내가 알곡임을 내가 진짜임을 내가 진실한 제자임을 보여주는 기회로 만들어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으로 성령 받고 예수님이 심장 속에 가득히 불타오르는데,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살아가는데, 그 하나님을 더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주님을 닮아서 성
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주는 부스러기 같은 선물을 구하는 위복주의 번영신 학 신비주의 아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더 인격적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그랬다 저렇게 하라고 그랬다. 이상한 몸짓을 하고 신비한 모습을 하고 이런 모습이 아닙니다. 지극히 아름다운 인격의 사람들입니 다. 지극히 진실한 사람들입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것을 빼앗긴다고 할지라도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말씀의 증언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위기를 만났을 때에, 너무 삶이 고통스러울 때에 기도해야지 왜 기도 안 합니까? 무엇이든지 기도하라고 그랬는데. 제가 손가락 끝 하나 부러지고 나니까 말 초신경이라서 그런지 참 되게 아프데요. 그냥 팔딱팔딱 뛰게 됩니다. 아파서 저절로 공중에 붕붕 뜹니다. 그러니까 기도 했겠지요. 이것이 뼛속으로 염증이 들어가지 않 도록 그리고 지금 붙일 수 없는 상황인데 하나님 뼈가 잘 아물도록 기도 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현실에 매몰되어지고 지금의 아픔과 고난과 고통에 하나님의 뜻이 안 보이고 말씀도 안 보이고 내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도 안 보이고 이게 위복주의 번영 주의 신비주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성적인 복음적인 기도를 하고 복음적인 사람 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요.
시커먼 숯 검댕이하고요 그 비싼 다이아몬드하고 원소가 똑 같습니다. 배 열이 조금 다를 뿐이에요. 숯 검댕이도 연필심으로 쓰는 흑연도 그리고 다 이아몬드도 원소가 똑같이 탄소입니다. 큰 탄소 하나에 서너 개의 탄소가 배열이 되어져 숯 검댕이 되고 흑연도 되고 다이아몬드도 되는 겁니다. 다 이아몬드는 오랜시간 동안 무서운 압력을 견뎌낼 때에 추위를 견뎌내고 열을 견대낼 때에 그 배열이 아름다워지는 겁니다. 그게 영롱한 다이아몬 드가 되는 것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고 난 다음에 연탄재로 얼굴이 시커멓게 된 것처럼, 믿음생 활이 시커멓게 검정이 묻어서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상처를 내어, 마치 먹물 통처럼 만들어 버리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다이아몬드는 강철도 자릅 니다.), 또는 다이아몬드 같아서, 지구상에 이보다도 더 큰 위기가 온다고 하더라도 든든히 견디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쩌면 종말론적인 상황을 몰고 올 수 있는 첫 번 째가 바로 이 바이러스입니다. 지금은 변종바이러스지만 신종 바이러스가 뇌를 공격 하면 걸리자마자 즉사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자
연현상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종말론적인 현상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 니다. 여러분 지금은 종말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 을 것인가? 오늘 이 시간에 주님이 재림하신다면, 이번 성령강림 주일이 주님이 재 림하시는 주일이라고 한다면 부끄러움 없이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가? 내가 진짜 임 을, 알곡임을, 담대한 사람임을 말씀의 사람임을 구원받은 사람임을 은혜로 살아왔던 사람임을 보여 줄 수 있는가? 다이아몬드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라고 하는 것입니 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믿고 기대합니다. 여러분은 다이아몬드 신앙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