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
그는 고려 말 혼란한 정세 속에서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꿈꿨다. 그리고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잡은 이성계와 협력해 마침내 조선을 건국하는 데 성공했다.
정도전의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이다. 고조할아버지는 봉화호장 정공미(鄭公美)이고, 아버지는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鄭云敬)이다. 어머니는 우연(禹延)의 딸로 어머니가 노비라고 전해진다. 정도전은 외가의 신분 때문에 종종 반대파들로부터 정치적 공격을 받기도 했다.
1362년(공민왕 11)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충주사록, 전교주부, 예조 정랑, 지제교 등을 지냈다. 친원배명(親元排明)정책을 반대하다가 유배를 당하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다. 정도전은 1383년(우왕 9) 함주 막사로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가 교류했으며, 뜻을 모아 새로운 왕조를 건설했다. 개국공신으로 이성계의 지지에 힘입어 막강한 권력을 쥔 정도전은 각종 제도를 개혁하고 정비해 조선 500년 역사의 기틀을 마련했다.
조선은 새로운 왕 이성계의 나라이기도 했지만, 성리학의 왕도정치를 꿈꾼 정도전의 나라이기도 했다. 고려의 유학자였던 그가 과감하게 고려를 버리고 새 나라의 건국을 꿈꾸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정도전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학문에 뜻이 있어 아버지가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그곳에서 정도전은 정몽주, 이숭인(李崇仁), 이존오(李存吾), 김구용(金九容), 박의중(朴宜中) 등을 만나 함께 유학을 배우며 교류했다.
정도전이 관직에 나간 것은 136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이때 충주사록을 지내고 2년 후 개경으로 와 삼사도사를 거쳐 통례문지후라는 관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하자 관직을 떠났다가, 1367년(공민왕 16) 이색이 성균대사성을 맡고 정몽주, 이숭인, 김구용 등이 유학 교육을 일으키자 정도전도 성균박사로 동참했다. 정도전의 학문은 이때 깊어졌다고 한다.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고, 두 사람은 이로써 의미심장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정도전은 술이 취하면 이 일을 두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한 고조(漢高祖)가 자방(子房, 한 고조 유방의 책사)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자방이 한 고조를 이용한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이 책사로서 이성계에게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성계의 힘을 빌려 개국한 것이라는 의미가 깔려 있다.
정도전은 새 왕조의 정책과 제도를 정비해 나가는 바쁜 와중에 또 하나의 중요한 임무를 하명받았다. 바로 새 도읍지의 건설이었다. 태조는 고려의 수도인 개성을 떠나 새롭게 왕업을 이루고 싶어 했다. 여기에 개성이 수도로서 운이 다했다는 풍수도참설도 영향을 끼쳤다. 태조는 1392년 천도를 천명하고 도읍지 물색에 나섰다.
공주 계룡산 근처가 새로운 도읍지로 적당하다는 무학대사의 말을, 하륜이 추천한 무악,
모두 정도전이 터가 좁다고 반대했다. 결국 태조는 정도전이 추천한 한양을 도읍지로 결정하고 지금의 경복궁 자리를 정궁 터로 잡았다. 그리고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에 종묘, 서쪽에 사직단을 세웠다. 1395년(태조 4) 9월 경복궁과 종묘가 완성되자 한양으로 대대적인 천도를 감행했다. 태조는 기쁨과 감회에 젖어 정도전에게 일렀다.

명실공히 정도전은 조선을 설계하고 한양을 건설한 것이다.
중앙집권적 양반관료체제를 지향하면서 무엇보다 재상의 역할을 중시했다. 그는 왕은 국가의 상징이고 구심체이지만, 국정은 재상이 주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국가 조직을 재상 중심으로 편성하여 재상이 정치를 주도하는 정치체제라면 왕은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태조가 조선 건국에 공이 큰 이방원을 배제하고 후비 신덕왕후 강씨의 둘째 아들 방석(芳碩)을 세자로 세웠을 때 정도전이 이를 반대하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누가 왕이 되든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강력한 왕권보단 똑똑한 신권주의를 주장한 것이다.
왕을 마음대로 주무 를수있는 신하가 돼려고 대찬 이방원보다 뭘 모르는 어린 방석이 왕이 돼는게 삼봉은 원한 것이다.
정도전은 명나라와의 갈등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오히려 요동정벌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동조한 태조는 함경도의 성곽을 수리하는 등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정도전은 직접 쓴 병서 《오진도(五陳圖)》로 군사 훈련을 시키며 귀족들이 소유하고 있던 사병을 관군에 귀속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왕자들과 공신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특히 이 일은 사병을 잃으면 대권의 꿈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이방원을 크게 자극했다.
이방원은 정도전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제1차 왕자의 난이 그것이다. 1398년(태조 7) 8월 남은의 첩 집에 정도전, 심효생(沈孝生) 등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를 무렵, 이방원이 자객들과 함께 남은의 첩 집에 들이닥쳤다. 정도전은 옆집으로 도망쳤지만 곧 잡혀와 이방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실록에는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등이 태조의 병환이 위독해 피접을 가야 한다는 핑계로 여러 왕자들을 불러내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이를 미리 알게 된 이방원이 선수를 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승자인 태종 이방원의 기록이다.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면 정도전이 과연 호위병도 제대로 세워 두지 않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을지 생각해 보면 알 일이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정도전의 사상이 조선 왕조의 기틀을 잡는 중심 사상이었으며, 그가 짧은 기간 동안 이루어 놓은 많은 것들이 그대로 조선의 500년 역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새 나라를 설계한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