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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의 훈련
2016. 3. 6(주일낮예배, 예닮삶개회) 디모데전서 4:7-8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였다. 찬송을 인도하던 담임목사님은 신이 나서 힘차게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어서 너무 감사하다고 저는 오늘밤 너무 행복하다고 인사를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부흥강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으면 담임목사님이 저렇게 행복해할까? 적어도 수십명은 왔겠지! 하면서 기대를 하였다. 그런데 찬양과 기도시간이 마치고 강단에 올라온 부흥강사는 실망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예배당에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있는데 성도의 수가 자신을 포함해도 15명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몇 명되지 않는 성도를 본 부흥회강사는 맥이 빠져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런데 찬송을 인도하고 앉은 담임목사님은 15명도 되지 않는 그 성도들을 보면서 좋아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두 명의 목사님이 부흥회 앞에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는데, 어느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이겠는가? 창세기 24장에는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낙타 10필을 끌고 메소포타미아 나홀로 간 종은 아주 쉽게 리브가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종이 보기에 리브가는 아리땁고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처녀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지금 이 조건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지난 주일오후예배 시간에 김성용전도사님 아내 조건으로 제가 5가지를 이야기 하였다. 부모님 신앙이 좋고, 또 본인의 신앙이 좋고, 성격좋고, 능력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이 예쁘면 된다고 했다. 그때 성도님들의 반응은 전도사님 결혼은 불가능하다 였다. 그리고 그 다음주 수요기도회 시간에 이충만전도사님이 설교를 하였다. 그때 26살 밖에 되지 않는 이충만전도사님은 자신의 배우자의 조건을 2가지로 말했다. 먼저 하나는 신앙이 좋아야 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예뻐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교회 전도사님들의 결혼조건에 빠지지 않는 것이 예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만났는데, 리브가는 아리따왔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아리땁다는 말은 예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힘이 좋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창세기 24장에는 리브가가 얼마나 힘이 좋은지를 알려준다.
한번 계산해 보기 바란다. 약대 한 마리는 일반적으로 100L의 물을 마신다고 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종이 10마리를 끌고 갔으니 그 약대에게 물을 배불리 마시우게 하려면 1000L, 무게로 따지면 1톤의 물이 필요하다. 그런데 리브가는 약대 10마리에게 그 물을 마시게 하기 위하여 16절을 보면 우물로 내려가서 물을 길러와 약대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리브가는 몇 번 물을 길으러 다녀야 하겠는가?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물동이는 12L의 물을 담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리브가가 12L의 물동이를 가지고 있었다면 무려 90번을 왕복하며 물을 길으러 다녀야 했다.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12L의 물동이를 가지고 있었다면 90번을 반복하며 물을 길으러 다녀야 했다. 약대를 끌고 온 아브라함의 종은 가만히 앉아 있고 리브가는 그 종과 약대를 위하여 저녁에 1.5L 페트병 8개를 들고 90번을 왕복하며 다녔다면 리브가의 체력이 얼마나 좋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체력이 좋은 리브가가 최선을 다하여 아브라함의 종을 섬겨서 이삭의 아내가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제 한번 상상력을 동원해서 제 질문에 답하기 바란다.
1. 리브가의 체력은 선천적이었겠는가? 아니면 후천적이었겠는가?
2. 그리고 리브가가 손님 대접하기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겠는가? 반복적이었겠는가?
사람의 근육은 사용하는 것만 발달한다. 그래서 골프를 치면 사용하지 않는 근육을 사용할 수 있어서 좋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리브가도 마찬가지다.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90번 반복하는 것은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버틸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종만을 섬긴 것이 아니라, 그 우물가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 리브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도와주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이것이 리브가의 삶이었다. 리브가는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여인이었고, 하나님은 이러한 리브가의 삶을 사용하여서 아브라함의 종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아브라함이 보낸 종과 리브가의 만남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는가? 우리교회가 교회당을 이전한 후에 당진동일교회 이수훈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목사님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목사님이 수박이 먹고 싶어서 하나님 수박이 먹고 싶은데 돈이 없네요? 하고 입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몇시간이 지난 후에 교회 집사님이 수박을 한덩이 사서 오신 것이었다. 너무 놀라서 어떻게 내가 수박먹고 싶은 줄 알고 물었더니 집사님은 수박을 사서 오게 된 이야기를 하였다. 집사님이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몸이 너무 아파서 조퇴를 하고, 집으로 오던 길에 급한 일이 있어서 한 아저씨가 리어커를 대고 수박을 파는데, 자신이 급한 일이 있어서 한덩어리 값에 두덩어리를 준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집사님의 머릿속에 수박을 좋아하는 목사님이 생각나서 두덩이를 사 한덩이를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수훈목사님은 감동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목사님이 수박먹고 싶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몸이 아파서 조퇴하는 집사님이 수박을 싸게 파는 수박 장수를 만나게 하고, 또 그때 이수훈목사님을 생각나게 해서 그 아픈 몸으로 수박을 사서 집으로 가지고 오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역사를 운행하시는 모습이다. 하나님은 역사를 운행하실 때 마치 톱니바퀴가 돌아가듯이 모든 것을 순조롭게 운행하시는 전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렇게 전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만날 때도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갔을 때 은혜를 베풀어서 순조롭게 이삭의 아내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하시고, 또 선한 열심과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리브가를 만나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선한 열심과 최선을 다하는 삶을 잊어버리겠는가? 작년 가을에 주현이가 중간고사시험을 친 후에 수학시험을 못쳤다고 하였다. 주현이 말에 의하면 객관식문제를 너무 오랫동안 풀어서 뒤에 나오는 주관식문제를 풀 시간적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급하게 문제를 풀다가 실수하여 숫자를 잘못 기록했다는 것이다. 아는 문제를 틀렸으니 얼마나 억울하게 분했겠는가? 그런데 며칠이 지난 후 주현이가 아주 밝은 표정으로 오늘 시험 채점을 했는데, 실수한 그 문제를 선생님이 틀렸다고 해야 하는데, 맞다고 채점을 했다는 것이다. 그 한문제가 주현이에게 얼마나 중요했냐면 한문제로 2등급이 될 수도 있고, 1등급이 될 수도 있는 사항이었다. 그런데 주현이는 교무실에 찾아가서 채점이 잘못되었다고 선생님과 말씀드려서 오답처리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 집에 와서 이 이야기를 한 후에 주현이는 저에게 아빠 나 잘했지! 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 때 저는 그래 잘했어 우리 딸 착해 하고 주현이를 격려해 주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제 속마음은 그냥 넘어갔으면 1등급인데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주현이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뭐라고 말하겠는가? 정답은 그래 잘했어! 하는 말이지만, 속으로는 아쉬움이 가득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직이라는 이름보다 눈앞에 있는 이익을 더 가지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시대는 정직한 사람이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앞에 이익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많은 응원을 받고 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바른 열심과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바른 열심과 성실의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창세기 37장에는 17살인 요셉이 꿈을 꾸고 형님과 아버지 야곱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요셉은 2번 꿈을 꾸는데 첫 번째 꿈은 요셉이 형님들과 밭에서 곡식단을 묶고 있는데 형님이 묶은 곡식단이 요셉이 묶은 곡식단에 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꿈은 요셉이 길을 가는데 해와 달과 11별이 요셉을 향하여 절을 하였다는 것이다. 요셉이 이 꿈을 꾸고 내 꿈을 들으시오 하면서 이야기할 때 요셉의 형제들은 네가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하면서 화를 내었는데, 야곱은 그 말을 간직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 부분을 성경은 아주 재미나게 표현하고 있다. 창세기 37:11을 읽어보기 바란다.
(창 37:11)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여기서 시기하다는 말은 창세기 4장을 보면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을 때 가인이 아벨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창세기 27장을 보면 야곱이 가인의 장자의 축복을 빼앗으므로 말미암아 가인이 야곱에게 가지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요셉의 형님들이 분노가 치밀어서 요셉을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그때 야곱은 요셉의 꿈이 어떻게 이루어질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같은 꿈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다른 반응을 할 수 있는가? 야곱은 형님 에서를 피하여 도망하던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그 꿈에서 만난 하나님이 어떻게 약속을 이루었는지를 경험하는 삶이었다. 그렇게 꿈을 꾸고, 또 그 꿈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야곱은 요셉의 꿈도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슨 말인가? 리브가가 늙은 종과 약대에게 물을 주기 위하여 90번이나 왕복하며 우물을 내려갈 수 있었던 것과 또 야곱이 요셉의 꿈이야기를 듣고 죽일 듯이 분노하지 않고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삶을 통하여 훈련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삶에 어떤 훈련을 받고 있는가? 우리교회는 내일부터 회복과 부흥이라는 주제로 예닮삶 15일을 한다. 교회가 이렇게 특별새벽기도회를 한다고 하면 많은 분들이 이번 예닮삶에는 어떤 은혜를 받을 것인가? 기대한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나도 옛날에 많이 해 봤다. 그러나 기도할 때만 약간 좋고 다시 원래로 돌아가더라고 포기해 버리는 분도 있다. 그런데 훈련을 받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한가지 차이가 있다. 그것은 훈련을 받은 사람은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발견하고 감동할 수 있다. 아니 하나님은 이렇게 반복된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이 쓸 수 있는 일군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훈련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일어나도 그 뜻을 알 수 없고, 또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사용받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지금 당장 신앙에 큰 변화가 없다 할지라도 반드시 신앙의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거짓교훈에 빠져서 외식과 거짓이 난무한 사람들 속에서 성도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말씀이다. 특별히 2절에서 거짓교훈에 빠져 외식하는 사람을 양심에 화인 맞았다고 표현하는데, 이 말은 뜨거운 불에 쇠를 달구어서 노예의 몸에 도장을
찍는다. 그래서 그 노예는 누구의 소유인지를 구별해 놓는 것이다. 그런데 불로써 몸에 도장을 찍어 놓으면 도장이 찍힌 부분은 감각이 없어져서 아무런 느낌도 느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거짓교훈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아무런 감각도 없이 매말라져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변에 온통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에 성도는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겠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읽어보기 바란다.
(딤전 4:7-8)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8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오늘 본문은 경건에 연단하는 사람과 육체의 연단하는 사람을 대조하고 있다. 양심에 화인 맞는 사람은 육체의 연단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따라 외식으로 금식하고, 또 철야기도를 하면서 자신의 신앙이 얼마나 좋은 지 겉으로 드러내며 또 스스로 만족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잠깐의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육체의 연단과 대조되는 경건에 이르도록 자기 자신을 연단하는 사람은 영원한 유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경건의 연단은 어떤 것이겠는가?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많이 듣고 참조한다. 이번에도 설교를 준비하면서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김동호목사님의 설교였다. 목사님은 경건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자신이 독일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를 해 주었다. 독일여행을 간 목사님은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비텐베르크 성당도 보았고, 또 루터가 청년시절에 훈련을 받았던 수도원도 방문해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할 때 사용한 책상과 의자도 보았다. 당시 루터가 훈련받았던 수도원은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않는 무서운 곳이었다고 한다. 높은 벽이 있고, 그 벽안에서 수도사들은 한평생 2끼의 식사를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잠자는 침대의 매트리스는 마대자루에 낙엽을 넣어서 만든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거친 음식을 죽지 않을만큼 조금만 먹고, 또 불편한 잠자리에서 잠을 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앉는 의자는 딱딱해서 조금만 오래 앉아있어도 허리가 아파오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렇게 독일여행을 통하여 중세 수도사의 삶을 돌아보던 목사님은 중세시대 수도사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였을까? 하는 질문을 했다.
왜 김동호목사님이 중세수도사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였을까? 하는 질문을 하겠는가? 그것이 참된 경건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경건은 내가 얼마나 거룩해지느냐?가 기준이 아니라,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가고, 또 그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적 연단으로 내가 얼마나 거룩해지느냐?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가는 그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육체의 연습이 아니라, 경건의 훈련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또 그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찾아서 순종할 수 있는 그러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되어져 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이제 말씀을 맺는다.
기독일보에 부산서지방 부일교회 김무송목사님 은퇴찬하예배에 아들이 쓴 편지를 기사로 올렸다. 그 편지의 한 부분을 그냥 읽어드리겠다.
내가 철없던 시절 아버지를 통하여 느낀 목회자의 모습은 가난, 희생, 봉사 뿐이라고 느꼈었다. 유창한 설교를 통하여 부흥시키는 목사님이 되길 바란 적도 있었고, 재미난 설교로 청중을 모으는 능력을 지닌 목사님이 되길 바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항상 평범한 설교를 하는 조그만 교회의 목사님으로 27년을 지나셨다. <중략>
떠먹는 요쿠르트가 나온 지 3-4년이 지난 후에야 처음으로 우리에게 사 주시고 온 가족이 맛이 상한 것같다고 가게에 항의하러 갔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받았던 우리 가족,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단 한번도 가족끼리 삼겹살 외식도 못 시켜준 가장이 나의 아버지다.
형이 고등학교 3학년일 때 학급 지원금 5만원을 못 내셔서 키 작은 우리 형을 제일 뒷자리에 앉히신 아버지, 둘째인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심한 급성 간염으로 입원시키라는 의사 말에도 3개월간 집에서 휴양시키셨던 아버지, 동생은 영양이 부족하여 소아 결핵이 걸려 투병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시던 아버지가 바로 나의 자랑스런 아버지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아들은 하나님께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달라고, 그래서 아버지보다 30배 60배 100배의 돈을 더 많이 벌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인지 형님은 S전자 책임연구원으로, 또 자신은 전문의로 셋째는 한의사가 되어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자녀들이 아버지를 향하여 가지는 한가지 마음은 무능한 아버지이지만, 존경하고 자랑스러운 아버지라는 것이다. 저는 이 글을 읽고 나는 자녀들에게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는 하나님 앞에는 어떤 목사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유능하지만 부끄러운 목사가 아니라, 무능하지만 자랑스러운 목사였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하여 하나님을 알아가고, 배워가며, 그 뜻에 순종할 수 있는 경건의 훈련이 있는 자리로 나아올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