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결코 자랑할것이 못된다.(Poverty is not to be proud of-)"
"가난만큼 견디기 힘든것도 없다.(There is nothing so hard to bear as poverty)"
"가난해도 원망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요,부자이면서 교만하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다.(貧而無怨難,富而無驕易)"라는 격언은 예나 지금이나 지극히 옳은 말이다.
나는 불운하게도 고조부 때부터 대를 이어 극빈한 가문에서 병약한 몸으로 태어났다.
조부의 결혼 비화(秘話)는 우리집과 진외가(陳外家)양 가문에 면면히 전해 내려오는 난감한 일화이다.
어느 초겨울 아침, 조부의 혼례 예식이 다가왔음에도 잔치 준비는커녕 호구지책을 걱정하고 있을 때,신부댁(조모)에서 하인이 말을 몰고와서 그 날이 혼인 날임을 알리고서야 ,비로소 증조부는 조부를 안은채 입은 헌옷 그대로 말을 타고 신부댁으로 가서 혼례를 치루었다한다.
양반 댁(?)이란 말만 믿고 시집 온 조모의 일생은 필설로 다 표현할수 없는 고난의 점철이었음을 진외가에서 여러 번 듣고,이제야 얼굴도 기억이 아련한 조모에게 가문을 대신하여 용서를 빈다.
내가 태어난 봉화"닭실"은 이중환(李重煥)이 쓴 "택리지(擇里志)"에서 밝혔듯이 삼남의 四吉地의 으뜸(三南四吉地首也)으로,일찍부터 양반(?)들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직업의 호불호 폐습에 젖어 노동을 달갑게 여기지 않던 터에,극빈한 우리 집이 세습된 빈곤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했음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새 새댁 시절 식량이 떨어졌으나 이웃 친척 집에 구걸하는 것이 창피해서 청솔가지를 부엌에 넣고 굴뚝으로 연기를 뿜어 내,끼니를 만드는 흉내를 내며 어린 자식과 함께 굶었으니,체면과 지조를 천금같이 여기던 어머니의 가슴을 지금 열어보면 숯 덩이 보다 더 검게 탄 부스러기만 남았으리라 짐작된다.
지금은 용변도 자식의 손에 의존하며 아들도 알아보지 못하니 측은하고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60년 3월,서울의 대학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을 때 "tuberculosis is active at the right upper lung."란 판정을 받고,Chest Clinic, 이효근 박사의
헌신적인 치료와 독지가의 온정으로 투병 생활에 몰입하였고, 차츰 회복의 긴 세월을 땀흘려 기도하는 생사(生死)의 기로에서 건강이 차츰 회복되어 기적같이 살아났다.
총무처 시행 공무원 시험을 거쳐 국가공무원으로 임용되었을 때(1964년),정부에서는 재정보증인 두 사람을 세우도록 요구하였으며.재정보증인에 대하여는 공무원이 국가에 손실을 입혔을 때, 보증인등이 그 손실을 보전하겠다는 서약을 하도록 의무규정을 부과하였다.
우리집 부엌에 잡초가 난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아무리 일가친척이지만 누가 감히 위험을 간과하고 보증인을 자처했을까?
그후 他姓 어른의 배려와 오랜 세월이 흐른후 보증보험 덕택으로 그 위기를 넘겼다.
그후, 2년마다 실시하는 공무원 건강검진에서 1차 검사에 그 아팠던 흔적이 어김없이 나타나, 2차 정밀 검사를 받고, "결과 "이상없음"판정이 날때까지, 전전긍긍하며 기도할뿐 다른 방도가 내게는 없었다.
부끄러운 자화상을, 내년이면 모교 입학 50주년의 세월에 의지하여 여기에 내어놓으며, 내가 오늘 살아 있음을,주위의 따뜻한 손길이 내게 있음을,용서하는 관용이 나를 감싸고 있음에 감격한다.
옷깃을 여미며 다시 한 번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아,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임을 명심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