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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감곡 매괴 성모순례지 성당 원문보기 글쓴이: 윤재/프란치스코
金伯淳 王都人 健淳之族兄也 本家貧寒 志切功名 先祖尙容 官爲國相 崇德丙子
김백순 왕도인 건순지족형야 본가빈한 지절공명 선조상용 관위국상 숭덕병자
大淸兵陷江都 尙容義不屈 自焚死
대청병함강도 상용의불굴 자분사
61. 因此健祠旌閭 本國建大報壇於闕內 祭祀前明萬曆崇 禎兩皇帝
인차건사정려 본국건대보단어궐내 제사전명만력숭정양황제
每年國王率丙子死節人子孫 行展拜禮 禮罷設科 試與祭人 謂之忠良科 伯淳獨不與祭曰
매년국왕솔병자사절인자손 행전배례 예파설과 시여제인 위지충량과 백순독불여제왈
尊周之誠 不在與祭 今日與祭者 專爲希覬科名 事甚不誠 吾不爲也
존주지성 부재여제 금일여제자 전위희기과명 사심불성 오불위야
김백순은 서울 사람으로 김건순의 일가 형입니다. 집안이 본래 몹시 가난하여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릴
생각이 간절하였습니다. 그의 선조 김상용은 벼슬이 정승이 되어 숭덕 병자년에 청나라 군대가 강화
도를 함락시키자 의리를 굽히지 않고 스스로 불에 타 죽 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나라에서는 대궐 안
에 대보단을 세워 전 명나라의 황제였던 만력과 숭정 두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해마다 국왕이
병자년(1636년)에 절개를 지켜 죽은 이의 자손들을 거느리고 전배의 예를 드리고 예식이 끝나면 과
거를 베풀어 제사에 참여한 사람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이것을 충량과라고 합니다. 김백순은 홀로 이
제사에 참석하지 않고 “ 오늘날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주나라를 높이는 정성으로 이 제사에 참례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과거에 급제할 기회를 노리는 것이니 그것은 성실하지 못한 일이오.
그래서 나는 하지 않는 것이오.” 라고 하였습니다.
註
- 숭덕병자년: 숭덕은 중국 태종의 연호(청나라 태종 원년으로 1636년)
- 대보단: 명나라 태조,신종,의종을 제사 지내던 사당(임진왜란시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주었다 하여
1704.12.21(숙종 30)에 창덕궁 안에 완공
- 만력,숭정: 만력은 명나라 신종. 숭정은 명나라 의종(임진왜란시 원군을 보내줌)
初年隨人毁謗聖敎 力爲擧子業 見世途危險 無心進取
초년수인훼방성교 역위거자업 견세도위험 무심진취
62. 讀宋儒書窮究性理 又見道理疑晦 不可全信 遂讀老莊之書 因而悟人死有不滅者存
독송유서궁구성리 우견도리의회 불가전신 수독노장지서 인이오인사유불멸자존
創爲新論 講說於朋 儕之間 友等誚之曰 此人議論新奇 必從西敎矣
창위신론 강설어명 제지간 우등초지왈 차인의론신기 필종서교의
처음 몇 해 동안은 남을 따라 덩달아 성교회를 비방하며 과거 공부에 힘썼는데 세태가 위험해 짐을
보고는 벼슬에 나아갈 마음이 없어 송나라 유학자들의 저서를 읽고 성리학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러
나 그 이치가 의심스럽고 분명하지 못하여 전적으로 믿을 수 없음을 깨닫고는 마침내 노자, 장자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깨닫고 새로운 이론을 세워서
친구들에게 설명하였더니 친구들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사람의 이론이 신기하니 반드시 서양 종교
를 따르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伯淳聞而疑之曰 我得超人之見 而人以爲西敎 則西敎必有妙理 遂與敎友相從 數年辨論
백순문이의지왈 아득초인지견 이인이위서교 즉서교필유묘리 수여교우상종 수년변론
確然信服 嚴守規誡 其母亦熱心歸化
확연신복 엄수규계 기모역열심귀화
63. 但其妻本來强悍 常望丈夫之顯達 一朝絶望 不勝恚恨 詬辱備至 兼之族黨親友
단기처본래강한 상망장부지현달 일조절망 부승에한 후욕비지 겸지족당친우
咸加毁罵 伯淳少不撓動 其母舅自來誘說 終不能得 乃曰 汝不聽吾言 當與汝絶交 伯淳曰
함가훼매 백순소불요동 기모구자래유설 종불능득 내왈 여불청오언 당여여절교 백순왈
寧與舅氏絶交 不能與吾主絶交 於是友人莫 下胎書告絶 宗族僉議別族 而伯淳晏如也
영여구씨절교 불능여오주절교 어시우인막 하태서고절 종족첨의별족 이백순안여야
常曰 我自認主以來 心界不動如山
상왈 아자인주이래 심계부동여산
64. 與健淳同日被斬 年三十二歲 奉敎不久 故來受洗 無聖名
여건순동일피참 년삼십이세 봉교불구 고래수세 무성명
김백순은 그의 말을 듣고 의심이 들어 말하기를 “내가 남보다 뛰어난 견해를 얻었는데 남들이 서양
종교라고 하니 서양 종교에는 반드시 오묘한 이치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침 교우들과 상
종하게 되어 여러 해 동안 서로 토론하다가 굳게 믿고 따라 계명과 법규를 엄격히 지켰습니다. 그의
어머니 역시 열심히 믿었으나 그의 아내는 본래 성질이 억세고 사나워서 늘 남편이 높은 벼슬에 올라
유명하게 되기를 바라다가 하루아침에 장래의 희망이 끊어지니 분하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온갖
욕을 퍼부었습니다. 게다가 일가 친척과 친구들까지 그를 헐뜯고 욕했습니다. 그러나 김백순은 조금
도 동요하지 않았고 또한 그의 외삼촌이 와서 그를 설복시키려 하였으나 끝내 아무런 소득이 없었습
니다. 그러자 외삼촌은 “네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너와 절교하겠다” 고까지 하였지만 김백순은
“차라리 외삼촌과는 절교를 할지언정 우리 주님과는 절교 하지 못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데
되자 그의 친구들은 절교 통문을 보내지 않는 이가 없었고 종중에서는 총회를 열고 문중에서 축출까
지 하였으나 김백순은 태연하 였습니다. 그는 늘 “나는 천주를 인식한 이래 내 마음이 산과 같이 움직
이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김건순과 함께 한날에 참수형을 받았는데 나이는 32세였습니다.
그는 입교한 지가 오래되지 못한 까닭에 세례를 아직 못 받아 세례명이 없습니다.
李喜英路加 若撤法之密友 先居驪州 後移都下 本來工畵 先摹聖像 亦以斬首致命
이희영로가 약철법지밀우 선거여주 후이도하 본래공화 선모성상 역이참수치명
이희영 루가는 김건순 요사팟의 아주 가까운 친구로 먼저 여주에서 살다가 나중에 서울로 이사하였
습니다. 그는 본래 화공으로 성인 상본을 잘 모사했는데 역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洪斐理伯弼周 葛隆巴之前室子也 性本良善 遂母進敎 未能勤謹 陪奉神師之後 一年之間
홍비리백필주 갈륭파지전실자야 성본량선 수모진교 미능권근 배봉신사지후 일년지간
判作異人 人皆驚異
판작이인 인개경이
65. 在家常爲輔際 被捕入獄 官問神父之事 治痢독刑 斐理伯忍受不招 竟至斬決 年二十八歲
재가상위보제 피포입옥 관문신부지사 치이독형 비리백인수불초 경지참결 년이십팔세
홍필주 필립보는 강완숙 골롬바의 전실 아들입니다. 그는 본래 성품이 선량하여 어머니를 따라 입교
하였는데 부지런하거나 공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을 모신지 1 년 동안에 아주 딴 사람이
되어 모두들 놀라 이상하게 여겼고 집에서 늘 미사 복사를 하였습니다.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니 관
리가 신부님의 동정을 물면서 혹독한 형벌로 다스렸으나 필립보는 괴로움을 참아 견디고 불지 않았
습니다. 마침내 참수형을 당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28세였습니다.
姜葛隆巴 一名家女子也 才辨剛勇 志趣高尙 少小閨閤之中 已有作聖之想 而不明門路
강갈륭파 일명가여자야 재변강용 지취고상 소소규합지중 이유작성지상 이불명문로
隨人念佛 十餘歲 知識稍開 見其謊誕難信 不復從事 長爲德山洪芝榮繼室 丈夫庸下不稱意
수인염불 십여세 지식초개 견기황탄난신 불복종사 장위덕산홍지영계실 장부용하불칭의
66. 尋常鬱悒 恒存離麈絶俗之願
심상울읍 항존이주절속지원
강완숙 골롬바는 서얼 출신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그는 재치있게 말 잘하고 강직하고 용감하였으며
뜻과 취미가 고상하여 어려서 안방에 앉아 있을 때부터 이미 성녀가 될 꿈을 가지고 었었으나 그 나
아갈 길을 몰라 남을 따라 염불을 하였습니다. 10여 세가 되어 지식이 약간 열리자 불교가 터무니없
고 허황하여 믿기 어려움을 보고 다시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라서 덕산 홍지영의 후처가 되었는데
남편이 옹졸하고 마음이 맞지 않아서 늘 우울하고 답답하였고 언제나 속세를 떠나고 싶은 생각을 하
고 있었습니 다.
湖中聖敎初開 葛隆把聞天主敎三字 自忖曰 天主者 天地之主也 敎名旣正 道理必眞
호중성교초개 갈륭파문천주교삼자 자촌왈 천주자 천지지주야 교명기정 도리필진
求書一見 傾心信服 其聰明勤敏 熱心克己 卓乎難及 勸化全家 旁及隣里 但芝榮全無主見
구서일견 경심신복 기총명근민 열심극기 탁호난급 권화전가 방급린이 단지영전무주견
其妻勸之 則諾諾而從 惡黨毁之 則唯唯而信 其妻責之
기처권지 즉낙낙이종 악당훼지 즉유유이신 기처책지
67. 則泣涕悔罪 惡友又來 則卽復如前 葛隆巴盡力無灵 知其不可與同事 辛亥之窘
즉읍체회죄 악우우래 즉즉부여전 갈륭파진력무령 지기불가여동사 신해지군
本鄕擾亂 遂付田庄於丈夫 挈子女而上京 池撤巴之行 多所參贊 乙卯領洗 神父一見甚喜之
신해요란 수부전정어장부 설자녀이상경 지철파지행 다소삼찬 을묘영세 신부일견심희지
定爲會長 付以料理女友之任
정위회장 부이요리여우지임
충청도에 처음 성교회가 들어갔을 때 강완숙 골롬바는 천주교라는 세 글자를 듣고 스스로 짐작하기
를 “천주란 하늘과 땅의 주인이라 교의 이름이 바르니 그 도리도 참될 것이다” 라고 하여 책을 구해
한번 읽어 보고는 마음이 기울어져 믿고 따랐습니다. 그녀는 총명하고 부지런하며 날쌔고 열심하고
극기함이 뛰어나서 남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온 집안을 권유하여 교화시키고 이웃 동네까지 전했
는데 오직 홍지영만은 주견 이 전혀 없어서 아내가 권유하면 “옳다,옳다”하며 따르다가도 악한 무리
가 헐뜯으면 “그래,그래”하고 그들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는 아내가 나무라면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
다가도 나쁜 친구가 오면 당장에 다시 전과같이 되었습니다. 골롬바는 있는 힘을 다하여도 아무런 효
과가 없었으므로 그와 함께 일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신해년 (1791년) 박해에 고향이 시끄러워지
자 그녀는 남편에게 농토를 맡기고 자녀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지황 사바의 북경 왕래를 많이 도왔습
니다. 을묘년(1795년)에 세례를 받았는데 신부님은 그녀를 보자 매우 기뻐하고 회장으로 정하여 여
교우들을 보살피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註
- 지황 (사바, 1767-1795) : 1794.2.2 북경을 출발하는 사신 일행을 따라 2.28일 책문에 도착하 여
3.5일까지 머물다가 주문모 신부를 맞이함.
- 지황의 부인인 김영이(안나)는 1794년 주문모 신부를 맞이해 오는 데 드는 비용은 강완숙(골롬
바)이 마련했다고 진술
五月之難 首倡躱避之計 獨自周施 藏神父于本家 盡力防護
오월지난 수창타피지계 독자주시 장신부우본가 진력방호
68, 以致捕差 到門空還 難後神父定居其家 六年之內 敎中要務 咸厥贊助 神父寵任甚隆
이치포차 도문공환 난후신부정거기가 육년지내 교중요무 함궐찬조 신부총임심륭
無人可擬
무인가의
5월 박해에 먼저 신부님을 피신시킬 계획을 주장하고 혼자 주선하여 자기 집에 숨겨 두고 힘을 다해
막아 보호함으로써 체포하러 대문 앞까지 왔던 포졸을 그냥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박해가 지난 후에
신부님은 그녀의 집을 거처로 정하였고 골롬바는 6년 동안 교회의 모든 중요한 일을 도왔으므로 신
부님의 총애와 신임이 대단하여 아무도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註
- 강완숙은 을묘박해시 주문모 신부를 자기 집 나뭇광에 수 개월 동안 숨겨주었고 박해 후에는 시 어
머니를 설득하여 주문모 신부를 사랑채에 모심
葛隆巴內奉神父 起居服食 咸稱其宜 外理敎務 經營酬應 未嘗少懈 多聚童女 訓誨成就
갈륭파내봉신부 기거복식 함칭기의 외리교무 경영수응 미상소해 다취동녀 훈회성취
分行各家 勸人信主 自己亦周巡勸化 夜以繼晝 鮮有安眠之時 而道理貫通 言辭辨給
분행각가 권인신주 자기역주순권화 야이계주 선유안면지시 이도리관통 언사변급
69. 化人最多 處事剛繼有威 人皆畏憚 被捕到官 官問神父蹤跡 周紐六次 不動聲氣
화인최다 처사강계유위 인개외탄 피포도관 관문신부종적 주뉴육차 부동성기
兩旁惡役曰 此神耳 非人也 終以斬首致命 年四十一歲
양방악역왈 차신이 비인야 종이참수치명 연사십일세
골롬바는 안으로는 신부님을 받들되 거처와 의복 음식을 모두 알맞게 하였고 밖으로는 교회 사무를
처리하되 경영과 수응에 조금도 빈틈이 없었습니다. 처녀들을 많이 모아 가르쳣고 마치면 그들에게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천주를 믿으라고 권고하게 하였으며 자신도 역시 두루 다니며 전교
하기에 밤낮을 가리지 않으니 편히 잠자는 시간이 적었습니다. 도리에 통달하여 능숙한 말솜씨로 설
명해 주어 많은 사람을 감화시 켰고 일 처리에 과단성과 위엄이 있어 사람들이 다 두려워하였습니다.
체포되어 관청에 가니 관리가 신부님이 행방을 캐어물으며 주리를 여섯 번이나 틀었으나 음성과 기
색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앗습니다. 양쪽에 늘어섰던 형리들이 “이것은 귀신이지 사람 이 아니다” 라
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마침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는데 나이는 41세였 습니다.
註
- 강완숙은 형조에서“저는 이미 학(學)을 배워 스스로 믿었으니 죽으면 천당에로 돌아갑니다. 그러
므로 형벌을 받아 죽더라고 조금도 후회는 없습니다”라고 진술
- 강완숙이 순교한 다음날 큰비가 내렸는데 아홉 구의 시신은 흙탕속에 있었으나 썩지도 아니하고
썩는 냄새도 없었으며 얼굴빛이 살아있을 때와 같았고 살과 피가 변치 않았다함.
先王有庶兄一人 其子謀逆而死 先王放之江島 擧國請誅 而先王不許 其妻及子婦 留在舊官
선왕유서형일인 기자모역이사 선왕방지강도 거국청주 이선왕불허 기처급자부 유재구관
辛亥壬子之間 有一女敎友 憐而勸化 人此以爲禍機在此 不欲交通 而葛隆巴進之
신해임자지간 유일여교우 련이권화 인차이위화기재차 불욕교통 이갈륭파진지
70. 旣領聖事 又入明會 知其事者 莫不憂悶 至示發覺 賜藥自盡 江島罪人 未嘗奉敎
기영성사 우입명회 지기사자 막하우민 지시발각 사약자진 강도죄인 미상봉교
而因連坐 幷賜藥殺之 兩婦人姓與聖名未嘗 崔伯多祿以下 諸人致命日子幷未嘗
이인연좌 병사약살지 양부인성여성명미상 최백다록이하 제인치명일자병미상
선왕에게는 서형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반역죄로 죽은 뒤 선왕이 그를 강화도로 귀양 보냈
습니다. 그러자 온 나라가 들고 일어나서 그를 사형에 처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왕은 허락하지 아니하
였고 그의 아내와 며느리를 본래 살던 궁에 그대로 살게 하였습니다. 신해년(1791년), 임자년(1792
년) 무렵 한 여교우가 그들을 가련히 여겨 권유하여 감화시켰더니 사람들이 모두 환난의 실마리가 여
기 있을 것이라 하여 그들과 내왕하기를 꺼렸습니다. 그렇지만 골롬바는 거리낌 없이 주선하여 그들
로 하여금 성사 를 받게 하였고 또 명도회에 가입시키니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모두 근심하고 번민하
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발각되어 그들에게는 사약을 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고, 강화도의 죄인
(은언군)은 일찍이 입교한 일이 없으나 연루되어 역시 사약을 내려 죽였습니다. 그런데 두 부인의 성
과 세례명은 자세히 알 수 없고 최필제 베드로 이하 여러 교우들의 순교 날짜도 자세히 알 수 없습니
다.
註
- 은언군: 사도 세자의 서자인 이인(李裀),정조의 서형(庶兄)이 아니라 서제(庶第),1801년 신유박 해
때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인으로 사사(賜死)되자 그도 사사(賜死)/1849년(헌종 15) 그의 손자 원범
(元範)이 왕위에 오름(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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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감곡 매괴 성모순례지 성당 원문보기 글쓴이: 윤재/프란치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