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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팔팔 솟는 피가 뿜뿌 수도 같을 수밖에……. 여기두 피, 저기두 피, 원통 방 안이 피바다가 됐지. 앉은 데가 다 핏자리야.
홍 주사
이 자리가요……? 으째 으시시허다. 술이 깨는 모양이군, 어거, 으째 듣고 보니 좌불안석인걸…….
김 주사
홍 주사, 인젠 일어서 보지 않으려우? 난 집에 조카놈이 온다구 한걸.
홍 주사
어, 나두 참 깜박 잊었군. 오늘 반상회가 있는 걸.
이중건
홰, 한잔들 더 안하시려우?
김, 홍, 변 주사
네, 다, 다…… 다시 뵙겠슴니다. (왼쪽으로 퇴장)
이중건
어두운데 조심허우.
이중생의 자살 광경을 듣고 황금히 자리를 뜨는 세 주사
그때 다다미방을 거쳐 나오던 맹인 2인, 자기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맹인 1
우리는 어둡고 밝은 걸 별루 가리질 않습니다.
이중건
그야 그럴 테지. 어서들 들어가서 좀 주무시지. 오늘두 밤새 수고허셔야겠으니...
맹인 2
소경 잠자기루, 그것두 별로 가리질 않습니다. (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맹인들의 해학
이중생, 병풍 위로 목만 내놓고 끼웃끼웃 살피더니 슬그머니 미그러져 나온다. 수의에 행건 친 차림이 과연 초현실적이다.
이중건
너, 여기가 어디라구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와!
송달지
손님들이 많으신데! 어쩔실려구…….
이중생
형님, 웬 손님들이 사랑에두 방 방이구, 정자에두 있구, 이러시는 거요? 무슨 잔치집인 줄 아십니까? 누구 쌀을 축내시느라구.
이중건
삼춘댁부터 심이춘, 사둔의 팔춘, 집안이란 집안은 콩나물대가리꺼정 다 모였구나.
이중생
관청에선 아무도 안 왔지?
송달지
아직 아무도…….
이중생
예끼, 고약한 놈들! 올 놈들은아니 오고.…… 엥이, 제 아무리 인정이 백짓장 같기루 내가 죽었다는 통지를 받구도 한 놈 얼씬 않는다? 어디 두고 봐라. 엊그제꺼정두 내 앞에서 알쫑거리구 꼬리를 쳤던 놈들이 오늘에 와서는 딱 돌아선다.? 이젠 알아볼 때가 있으렷다. 내가 다시 살아나구 볼 지경이면……. 에익, 괘씸한지고. 하식이두 아직 안 들어오구?
송달지
네, 하연이가 마중 나갔읍니다만.
이중생
하식이에게두 전후사를 잘 타일러 두게. 탈짐이 나지 않게.
수의를 거친 이중생의 등장
그 때 전화벨 소리. 이중생, 깜짝 놀라 옆방으로 굴러간다. 송달지 전화를 받는다.
송달지
네 네, 잠깐 기다리세요. 아버지 전화…….
이중생
엑끼……. 죽은 내가 전화를 받는단 말이냐?
송달지
아아 참, (전화를 계속 받으며) 네, 네, 알겠습니다.
이중생
(옆방에서) 누구한테서 온 거야?
송달지
임 선생님허구 최 변호사허구 곧 오신다구요. 국회 특별 조사 위원회의 김 의원 한 분이 같이 오신답니다.
이중생
(다시 나온다) 휘유……. 그 좁은델 드러누워 손가락 발가락 달싹 못허구 있으려니 신경이 칼날같이 되는군그래. 그래, 김 위원 한 사람밖에 안온댔어?
송달지
딴 이얘긴 없는데요.
이중건
(중생에게) 너 어서 들어가거라. 수의 입은 놈과 상복한 놈을 마주 놓고 보기가 으째 으시시허구나.
이중생
어 참, 내 잊었군. 형님, 금방 여기 앉았던 것들이 홍 주사, 변 주사,김 주사 아니요?
이중건
글쎄, 초면 인사에 기억이 잘 안 된다.
이중생
얼굴 긴 놈이 홍가놈.
이중건
그래서?
이중생
코 아래 기미 있는 놈이 김가놈.
이중건
그래서?
이중생
대머리가 변가놈.
이중건
그래서?
이중생
다시 오거들랑 아예 술상 내지 마슈. 나 죽기를 기다리던 놈들이야. 홍가놈은 전쟁 전에 오푼변으로 삼만 원 가져가구는 오늘까지 이자 한 푼 안 들여 놨습니다. (달지에게) 자네, 잊지 말구 기억해 둬. 변가놈은 금전판인 종로에 있는 내 가게를 쓰구 집세라군 다달이 오천 환 들여 놓군 시치미를 떼는 놈이구, 변가놈은 어물판 구전 오만 환을 논아먹기루 약속허군 두 달째 얼씬도 않던 놈이라우. 유서에 써넣을 걸 깜박 잊었군. (달지에게) 기억해 두었다가 이후에라도 다시 오거들랑 채근해 받어. 알았어?
송달지
제가……그런걸…….
이중생
그러구 또 한 번 얘기하네만, 유산이니 재산이니 그런 얘길랑 딱 잡아떼구 말 말어. 내가 옆방에서 듣고 있지만서두, 도시 모른 척하구 잠자쿠 있으란 말야. 자넨 그런 것 아랑곳할 리두 없지만 대구허단 큰일 저지를 테니, 알았어?
송달지에 대한 이중생의 당부와 협박
절정 1 : 수포로 돌아간 거짓 자살극
이중건
위잇, 누가 나온다.
이중생
익크! (황급히 옆방으로 가다가 책상에 걸려 넘어진다. 옆방으로 가서 병풍 뒤에 숨은다. 맹인 안방에서 나오며 중얼중얼 경문을 외치며 다다미방을 거쳐 사라진다.)
용석 아범
(왼쪽에서 황급히 나오며)관가 손님이 오십니다.
이중건
응, 벌써 와? 아범은 어서 들어가 주안상을 탐탁히 봐 내 오게. 술은 저 뭐라구 했지? 양인들이 먹는 거 그게 상등이라니 그걸 내 오구, 안주도 성벽해서 입맛에 당기는 거루 챙기라구 쥔 마나님 보고 여쭤.
용석 아범
네, 네, 걱정 마세요. 아침부터 채려 놓구 기다리는 걸요. (안으로 들어가자 최 변호사, 임표운, 김 의원 등장. 이중건, 버선발로 마중 나간다)
이중건
공사간 분망허신데 이처럼 오시니 화송합니다.
최 번호사
어서 올라 가십시다. 돌아가신 분두 퍽 영광으로 생각허실 겝니다. 아참, 소개하죠. 이분이 바루 고인의 친형이신 이중건씨, 이 분은 국회 특별 조사 위원회의 김 선생님. 이 분이 상주되시는 송달지씨.
이중건
잘 보시구 잘 처분해 주십시오. 온, 이 일 때문에 늙은 게 잠도 잘 못 잔답니다. (인사를 바꾼다)
김 의원
망극합니다.
송달지
뭐…… 괜찮습니다.
김 의원
영구 모신 데가……?
송달지
저방이올시다.
이중건
그리 급할 게 있습니까? 우리 술이나 한잔 나누시구…… 게 누구 없느냐?
김 의원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소향을 했으면 좋겠는데요.
송달지
네, 이리 들어오시죠.
김 의원
그럼 잠깐……. (2인 옆방으로 들어간다. 우씨 뛰쳐 나오며)
김 의원의 방문
우 씨
임 선생이 왔다자, 응. 관가에서 나왔다지? 어서 우리들 얘기를 좀 그럴 듯하게 해요. 과히 억울치나 않게 돼야 할 게 아니요? 영감두 돌아가신 거루 됐구.
최 변호사
쉿.
우 씨
에그 참, 정신두 없어라. 영감일랑 완전히 돌아가셨으니 남은 식구들일랑 어떻게 굶주리지나 않게 돼야 할 게 아니요?
임표운
마님께선 들어가 계십쇼. 최 선생님이 요량해서 잘 처리허실 테이니.
최 변호사
쓸데없는 걱정일랑 덮어 놓십쇼, 헛허. 모두가 수완 나름이조. 천재 일우의 기회를 만만히 놓치겠어요, 헛헛.
우 씨
그럼 꼭 믿습니다. 술일랑 얼마든지 있으니 애들에게 일르슈. 삐루두 있구 영감 자시는 양국 술두 아직 몇 상자 남았다우.
임표운
어서 들어가십쇼, 나오십니다.
우 씨
그럼 최 선생님, 꼭 믿구 있습니다. (우씨 들어가자 송과 김, 다시 나온다.)
우씨의 불안한 마음
최 번호사
이리 앉으시죠. 주안상이 나왔으니 목이나 축이시구.
김 의원
아니올시다. 곧, 실례허겠습니다.
최 변호사
상가에 오셨다 그냥 가시는 법이 어딨습니까?
김 의원
그럼 잔칫집처럼 뛰다니구 놀아야 합니까?
최 변호사
헛, 헛, 그런 게 아니와요. 저, 어서 한잔 드십쇼.
김 의원
(마지 못해 술잔을 든다) 고인의 아들루 광복 전에 학도 지원병 간 이가 있었죠? 아직 소식이 없습니까?
최 변호사
그러니 말씁입니다. 영감두 삼대 독자루 눈에 넣어두 아프지 않을 귀여운 자식인데 십 년 동안이나 화태에서 억류되었다가 오늘이야 돌아온다는 소식이 어제서 왔습죠. 며칠만 더 참으셨던들 이런 변이 없었을지도 모를게 아닙니까?
이중건
죽는 순간까지 '우리 하식이, 우리 하식이' 허문설랑 차마 눈을 못 감더군요.
학도 지원병으로 나간 하식에 대한 김 의원의 심문
김 의원
그럼 영감께서는 운명하시는 걸 보셨구먼요?
이중건
그럼요, 내가 눈을 감겼죠. 경동맥으로 면도칼을 싹둑 잘러 버렸는걸.
최 변호사
헛, 헛…… 취하셨군. 면도칼로 경동맥을 끊었지.
이중건
어, 참…….
최 변호사
그래서 여기가 왼통 피바다가 됐더랍니다. 유설랑 고시란히 책탁 위에 놓여 있었죠. 송 선생…… 유서는 벌써 전에 꾸며 놓으셨죠, 네?
김 의원
유언엔 전재산을 송 선생께 양도하기루 됐다죠?
최 변호사
글쎄, 이 점이 또 고인이 대범하시구 촐중허신 점이죠. 보통 인간 같구 볼 지경이면 제아무리 열 사위 미운 데가 없다구 한들 아들 딸을 한 구들두구 어떻다구 사위에게 전재산을 양도헌답니까? 들어 보십소. 돌아가신 어른의 의견이…… 돈이란 건, 그걸 잘 이용할 줄 알구 나라에 유익되게 쓸 줄 아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법이다. 저 혼자 잘 먹구 흥청거리구 놀라구 돈이 필요한 게 아니라 국가적인 사업을 하자구 귀하기두 하구 필요두 한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간 돈이란 벌기보담 쓰기가 힘든 물건이라……. 하식군으로 볼 지경이면 살아 돌아온다 해도 아직 입에 젖비린내 나는 삼십살 풋내기야 나라를 위해 적당히 쓸 줄 알 리 없을 터이구, 백씨 영감이야 실례의 말씀이지만 시골 양반이니 세상 물계를 아실 리 없으니 이루 두말할 필요조차 없구 보니, 예라 모르겠다, 그래두 믿을 만한 위인은 문중을 둘러봐두 여기 계신 송 선생밖엔 없으려니…… 그래서 유서두 그렇게 쓰셨죠. 그렇습죠? 고인의 유지가…… 송 선생……?
송달지
네…… 글쎄, 뭐 그렇겠죠.
이중생의 자살과 재산 상속에 대한 김 의원의 심문
이중생, 병풍 위로 머리를 내밀고 극이 진행하는 동안에 후수막까지 나와 귀를 기울인다.
최 변호사
그나 그뿐이겠습니까? 장 댁입니다. 뭣이? 없어? 그런 사람이 없다니?
이중생; 누구 말인가……
임표운; (전화) 세상에 별일두 다 있지. 통역 최 군이 석 달을 두고 연락한 분이 오늘에 와서 없다니 그래 하늘루 솟았단 말인가? 땅으로 꺼졌단 말인가?
이중생; 아, 누구가 없다는 거야. 최군이 출근 안 했다는 말인가?
임표운; 아니올씨다. 사장님…… 차를 가지고 오․이․씨에 갔더니 오․이․씨엔 애당초 란돌프라는 사람이란 있은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중생; 난도셀 씨라니까……
임표운; 난도셀도, 란돌프도 없고 최군도 어제부텀 영 나타나지를 않았답니다, 사장님.
이중생; 아직 인천서 오지 않은 게 아냐?
임표운; 아니올씨다. 애당초부터 미국 기관에 그런 사람이 없다는 걸요!
이중생; 허, 그럴 법이! 그러면 오․이․씨, 딸라를 사준다고 내 돈을 가져간 놈은 누구야?
임표운; 글쎄올시다…… (심사숙고하다가) 처음부터 란돌프니 최군이 태도가 수상하다 했더니만.
이중생; 예끼 이 사람…… (전화를 들고) 누군가? 나야, 나…… 뭐, 뭣이, 오․이․씨에 갔떠니 우리 회사 명의로 딸라 구입신청을 받은 일두 없다구! 예끼! 이 사람, (전화기를 탁 놓고) 에이 참 어디 회사에 사람 같은 것이 하나라두 있어야 말이지. 여보게 임군, 나와 함께 그 아․이․씬가, 오․이․씬가에 가세, 암만해두 누가 모략을 했던지 최군이 다른 자에게 매수당했던지 했을 거야. 목에 줄을 매서라두, 난돌셀 씨를 끌구 와야지, 그래 통역 최군은 어디 갔어?
임표운; 어제부터 나타나지 않는다구 한다니까요.
이중생; 나타나지를 않어? 그럼 하늘로 솟았단 말인가? 임군, 이중생이가 이만한 일에 물러설 줄 아는가! 천만에 만부당관에, (송을 보고)…… 일부당관에!
송달지; 만부막개……
이중생; 암, 그렇구 말구. 자넨 내가 다녀올 동안에 기생이나 여남은 미리 불러둬, 인물 좋구 노래 꽤나 부르는 걸루, 알았어!
송달지; ……
이중생; 임군, 그럼 나와 함께 가세.
이․임, 하수로 퇴장. 달지, 멍청하니 서 있다가 모자를 들고 상수 안방으로 퇴장.
무대 잠시 비었다가 이윽고 달지와 하주 등장.
하주; 글쎄 당신이 언제 기생을 봤다구 이러구 나서우.
송달지; 그러문 어떡하우, 장인이 가라시는 걸……
하주; 서툰 일 맡았다간 나중에 꾸중이나 듣지 말어요. 이번 연회가 이만 저만한 연회라구 그러시우.
송달지; 친구헌테 부탁하지, 뭐.
달지, 하수로 나가자 그와 스쳐 시경 등장.
하주 안방을 향하여,
하주; 옥순아! 어멈! 어서들 식탁을 좀 날러와요.
옥순이; 소리 네애.
시경; 이 댁이 이중생 씨 댁이죠?
하주; 아이 깜짝이야…… 그렇수.
시경; 주인장 좀 보러 왔는데요.
하주; 안 계십니다. 주인어른.
시경; 안 계셔요? 회사에서는 지금 막 댁으로 왔다는 데요.
하주; 출타하셨어요.
시경; 확실히 출타하셨겠다요. (사이) 틀림없죠?
하주; 아 누구길래 안사랑꺼정 들어와 이 야단이요. 이 댁이 어딘 줄 알고.
시경; 물론 반도임업 관리인 이중생씨 댁이 틀림없으리라 믿구 왔죠.
하주; 젊은 양반이 추근스레 아주 몰상식허구 무례허군 그래. 주인 영감을 만나시려거든 미리 약조를 허구 와야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불쑥 들어선다구 분주허신 양반을 그리 쉽사리 만날 줄 아슈?
시경; 헛 그 참 세도가 당당허시군. 그럼 시간 약조를 단단히 허죠. 들어오거들랑 오늘 저녁 다섯 시까지 경찰서 경제계루 보내주십시오. 기다리구 있겠습니다. 만일 오지 않는 경우에는 체포헙니다.
하주; 체포요?
시경; 달아나진 못할 테니까…… 그럼 시간 약조를 했겠다요?
하주; 저, 저, 잘못 아시구 그러시지 않어요? 아버지 지금 마악 중앙청으로 가신다구 나가셨는데요.
시경; (혼자말로) 그럼 길이 어긋난 게로군, 실례했습니다.
하주; 저…… 무슨 일이 생겼어요. 네? 왜 아버질 체포해요. 네? 오늘 서장께서두 이리 오시게 됐는데요.
시경; 장차룬 서장두 만나구 다 그래야겠지만 우선 나무텀 봐야 할걸요, 참 가풍을 몰라보구 실례가 많았군요. (하수로 나간다. 옥순이와 어멈이 빈 식상들을 하나, 둘 나른다)
옥순; 아씨, 온돌방에서들 잡수시겠죠. 안준 대강 다 됐습니다. 손님들 오시거들랑 말씀하십시오.
하주; (거기는 대답 않고 황망이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 할 때, 임표운 하수로 황급히 등장) 어머니! 어머니!
임표운; 아가씨.
하주; 아, 임 선생. 벌써 손님들 어셔요?
임표운; 손님은커녕 아가씨 놀라지 마십쇼. 아버지께선…… (와들와들 떨면서 하주에 귓속말)
하주; 대체 이게 무슨 변이유? 집에두 금방 왔다갔어요. (우씨 등장)
우씨; 내가 없인 식탁 하나 바루 못 놓느냐. 이래서야 내 몸이 견뎌 배기겠니.
하주; 아녜요, 어머니. (귓속, 우씨의 얼굴 갑자기 변한다)
우씨;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수, 임선생 시원스레 말이나 좀 해줘요.
임, 떨기만 하며 입을 못 연다.
하주; (옥순이와 어멈에게) 뭣들 듣구섰어. 들어가 일거들 생각은 않구.
어멈, 옥순 하수로 퇴장.
임표운; (떨며) 구리개 입구에서…… 저야 뭐…… 그저 깡팬가 했죠. 그랬더니 그게 바루 형사이더군요. 저를 내리우고는 철꺼덕 사장님께 고랑을 채우고는……
하주; 고랑을?
임표운; (여전히 떨며) 네, 그러구는 그 차에 올라타더니 쏜살같이 을지로 쪽으로 가는게 아마 중부서로 가는게 틀림없습니다.
우씨; 그 어진 양반이 뭘했다구, 넌 상서롭잖은 말도 하는구나.
임표운; 그저 제 생각엔 영감이 임업사업을 도맡다시피 했는데다가 또 막대한 원조를 얻어 제지회사까지 차리게 되니까…… 아마 누가 시기해서 고자질 이나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만…… 아, 저 인천 가셨던 작은아씨 들어오시는군요.
하주; 쟤가 또 갑자기 웬일이야.
하연, 양장에 슈우트 케이트를 들고 하수로 등장.
우씨; 넌, 웬일이냐. 온단 말두 없이? 글쎄 집안에 큰 걱정이 생겼구나.
하연; ……
하주; 아버지가, 얘…… (하연, 한곳에 못이 박힌 듯이 서 있다가 케이스를 동댕이치며 히스테리칼하게 운다)
하연; 아버지가 다 뭐야!
우씨; 왜 그러니, 하연아!
우씨; 얘가 미쳤어, 들어서자마자…… 이 집 상갓집인 줄 알았더냐?
하연; 언닌 알지두 못허구 왜 이러우. 어머니, 이 일을 분해 어떻게, 어머니. 언니가 그 봉변을 맞었어두 살지 못해…… 나두 나두 못살어, 어머니.
우씨; 글쎄 왜 그러니. 어서 말이나 좀 허려무나.
하연; 언닌 어쩔 테유. 나, 인, 인천서 내쫓겼어!
하주; 별장에서? 그 무슨 당찮은 소리냐, 왜 널…… 주인아씰 어떤 놈이 나가라구 한 단말이냐.
하연; 가짜야, 아버지는 그 별장 주인이 아냐, 관리인을 속여 뺏은 것이 탄로 났어. 그러구 이것 봐, 아버지가 신주같이 받들던 란돌프도 가짜야. (손에 들었떤 신문을 동댕이친다) 가짜야!
임표운; (주어 읽으며) 뭐…… 국적 없는 외국인 란돌프라는 자는 미국 원조기관 직원을 사칭하고 인천에서 유홍 하다가 체포당했음! 뭐! 란돌프가…… 란돌프가 인천에서?
하연; 가짜예요. 가짜…… 가짜…… (운다)
임표운; 어이구머니…… 그자들이 수상하다 했더니만……
하주; 얘야.
하연; 모두, 모두가 다 가짜지 뭐야. (발악하며 운다)
우씨; 글쎄 무슨 일이 생겼다구 이리들 야단이냐.
임표운; 다른 게 아니라요, 사모님 이거 큰일 났습니다 그려. (귓속)
우씨, 듣고 나서 말문이 막힌다. 사이, 그때 돌연 방안에서 전화 벨. 임, 살같이 뛰어가 수화기를 든다. 일동긴장.
임표운; 네? 네 그렇습니다. 이중생씨 댁이올씨다……
네! 네에. (수화기를 놓기도 전에)
하주; 어디서 왔수. 아버지 나오셨수?
임표운; 아, 아니올씨다. 저, 송 선생께서 기생들허구 곧 온다구요.
2
제 1 장
전막에서 한 달쯤 지난 후 같은 곳.
오전 열시 경. 하주는 전화 앞에 다가앉았고 우씨와 달지는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이따금 다다미방에서 코고는 소리. 누가 자고 있는 모양이다.
우씨; (달지에게) 자넨 학생 때부텀 여러 번 드나들었으니 잘 알겠구먼.
송달지; 뭐, 밖에서 생각하기 보담은 편하죠.
하주; 당신은 자기 생각만 허구 그렇지만 아버지 같은 분이 어떻게 하루 이틀도 아닌 한 달 두 달을 유치장 살이를 한단 말이요. 콧구멍만한 방에 열 명, 스무 명을 구겨넣구 뒷간두 방안에 있다는구려. 그렇죠?
송달지; 그렇지, 거기두 뭐 특등이 있을려구.
우씨; 에그머니, 그 냄샐 다 맡구…… 방안에 헌 버선 짝만 있어두 질색이시든 영감이 그 고린내를 어떻게 견뎌 배긴단 말이냐. (운다)
하주; (따라 울며) 따갯꾼, 사기꾼. 거기다 살인강도, 별의별 인종이 한 방에 이마를 마주 대구 있다는구려. 그렇지. 여보?
송달지; 응.
우씨; 에그머니 그 양반은 내가 옆에 있는 것 만으로두 짜증을 내시는 데……
하주; 또 벼룩은 없구 빈대는 없구! 이는 꼬이지 않구 글쎄 나중에느 심심파적 이 사냥만 한대요, 어머니.
우씨; 에그 가엾어라. 이를 어쩌누, 너의 아버진 파리 한 마리 위잉 해두 못 주무시는 어른인데.
송달지; 조반먹구 점심 들어올 때까지 이 사냥하는 것, 그게 또한 재미야.
하주; 당신은 그때 배운 버릇이 아직 남았구려, 돈 벌 생각은 쥐뿔두 않고, 집안에 들어앉아 바퀴사냥만 허니…… 식은 소리 그만 허구 아버지 나오시게 헐 궁리나 해요.
송달지; 임군이 오늘 내일 나오신다는데 그래.
하주; 임선생에게만 맡기문 그만이에요? 그래두 명색이 장인이라는 이가 유치장에 들어가 달포나 고생허구 계시는데…… 당신 성밀 모르는 밴 아니지만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송달지; 그럼 어떡허면 좋단 말야, 낸들……
하주; 그런 걸 누가 알우. 천둥 갓난앤감. 제가 헐 일두 고쳐줘야 허니.
송달지; 냉정히 생각해서 이번만은 좀 힘들 거야. 뭐, 죄목이 한두 가지야지. 우선 업무보고서에서 십 년을 내려두고 생산량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걸로 보고해놨으니 이게 배임횡령이겠다.
하주; 뭣이 어째요?
송달지; 거기다가 공문서 위조지! 탈세가 되지, 화는 한꺼번에 몰아치는 거야!
우씨; 아니 그래 자네는 장인 갇힌 것이 당연하단 말인가!
송달지; 아녜요, 어머니. 법적으로 따지면 말씀이지. 뭐, 거기다가 은행의 융자신청도 결국 자기 물건 아닌 삼림을 담보로 했으니 이것도 건이 되죠…… 아마 나오시기 힘들 껄요.
하주; 듣기 싫어요! 그럼 나오시지 못하도록 축수라두 허구려, 에이, 어디 저 따위가……
우씨; (다다미방을 돌아보고) 큰소리치지 말어. 큰아버지 깨면 또 한바탕 야단만 나겠다…… 자네야 환자 진찰이나 했지 일 처리하는 게야 모르나만 하두 답답하니 짜증도 내는 게지. 영감은 큰살림 벌여 놓구 유치장살이요, 큰아버님은 제 동생 때문에 집 한 칸 쓰구 살던 것마저 뺏겼다구 날마다 약주 자시구 저 꼴이니 이 성화를 누가 다 겪어내느냐 말이지.
하주; 살림살이 얘기가 났으니 말이지, 아버지두 언제 어떻게 되실지 누가 알우. 일은 틀려먹었어요. 벌써 들창나기 전에 분재두 미리 허구 큰 아버지 집두 어떻게 한 칸 마련해 드려야지 않수. 어머니두 아버지만 믿구 계시지 말구 어머니 몫을 금 그어 놓아요.
우씨; 글쎄 오늘이라두 네 아버지가 나오셔야 할 게 아니냐.
하주; 우리야 장수 쥐변이 있수? 집이 있수? 싣개에 돈이 있수? 일생을 집 한 칸 없이야 어떻게 살아나가우.
우씨; 그야 아버지가 어련히 잘 허실라구, 제 딸년 밥 굶기겠나.
하주; 어머니두 누가 밥 굶는데. 남부럽지 않게 살어보겠단 말이지. 글쎄 아버지 그 재산을 다 어떡허우?
우씨; 쉬…… (다다미방을 경계한다)
하주; (소리를 죽여서) 하연이년은 돈벌이 잘하는 사람에게 주어 버리문 그뿐일 게구 하식이는 아직 생사조차 모르니 문제 아니구 딱한 건 우리 사정 아녜요?
송달지; (역시 소리를 죽여서) 굶게 됨녀 나도 벌지.
하주; (빽 소리 지른다) 입닥치구 있어요, 당신은. (다시 소곤거린다) 아마 우리 억 환 열은 좀 더 되죠?
우씨; 그야 낸들 알겠냐만 값없는 토지지만 전담까지 합치면 여기저기 늘어놓은 세간만 정리해도 열은 될 테지.
하주; 어마! 그럼 반반에 논아두 오억 환? 허기는 살아날갤래문 뭐, 그만큼이야 있어야지. 그럼 우리 몫은……
우씨; 쉿!
이중건 노인 다다미방에서 나온다.
하주; 큰아버지, 인제서 일어나셨어요?
이중건; 응? 응, 그래, 오늘은 무슨 소식이 있느냐?
하주; 아까 임선생 말이 아버지 오늘 나오실 것 같대요.
이중건; 오늘 나와? 누가?
하주; 나오실 것 같대요. 아버지만 나오시문 어련히 좋두룩 처결 안 해드리겠어요?
이중건; 예끼! 네 애비가 나와? 사기, 횡령배임, 탈세범으루 때간 녀석이 그리 쉽게 나올 법이 어데 있으며 나라에서 내준다 쳐두 어떤 낯짝을 들구 어슬렁어슬렁 기어든단 말이냐. 글쎄 일껀 출세한답시구 조업지전문전옥답 다아 팔어 헤쳐놓구 그것두 모자라서 늙은 형놈의 집 한 칸마자 뺏어먹어야 옳단 말이냐?
우씨; 그야, 그인들 이런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어요, 그저 이씨 문중이 다 같이 영광이나 볼까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너무 노여워 마세요.
이중건; 이, 씨, 문, 중, 의, 영, 광? 헛헛…… 장관나리와 낚시질 하는게 영광이요? 계수님, 난 그런 영광 모르구두 고뿔 하나 쇠지 않구 육십 평생을 배불리 잘살었어. 뭐, 그 녀석이 큰 사업가인 이중생 각하의 형이 초가삼간에 살아선 자기 체모가 깎인 다구? 기와집을 지어 줄 테니 지가 증권을 몽땅 팔아버리자구? 내가 기와집에 살구 싶어 조업지전을 판 줄 알어? 조실부모헌 이후론 하나밖에 없는 동기라 그 돈 출입이나 헌답시고 일본 놈이라 기생 년이라 한 무리 몰구 다니며, 소풍이나 천렵이니 닭잡아라 소잡어라 호령 대령 해두 한첩 쓱척 단척 않구설랑 흔연대접했던 게 이 녀석 그런 정리도 은공도 몰라보고 그래 자기 돈도 아닌 내 돈으로 집 한 칸 지면서 슬쩍 자기 명의로 등길 낸다? 달지, 자넨 어떻게 생각하누? 이를테면 이게 생눈 파먹는 날도적이지 안 그런가, 달지. 그놈의 돈 횡령하는 재주는 일정 때부터라네.
송달지; 그야…… 그렇지요, 결국.
이중건; 그렇지, 암 그렇지. 이 집안에선 사람 같은 거라군 자네밖엔 없지.
하주; 큰아버지 인제 들어가 진지 드세요, 네. 아버지만 나오시구 보면 어련히 해결해 주시겠어요.
이중건; 엑키, 앙큼한 계집. 잘 처결한다? 헛, 너희들은 다 한 또래야, 한 또래 그렇지, 달지?
송달지; 네…… 네……
전화 소리. 하주 달려가서 수화기를 든다.
하주; 여보세요, 네. 네? 임선생이셔요. 네어, 어쩌면! 알았어요, 네에. (전화를 끊고 우씨에 귓속) 아버지 나오셨어요.
우씨; 나오셨어?
하주; 어서 큰아버질랑 빨리 안으루 쫓아요. 아버지 고단하실 텐데 까박을 붙이문 어떡허우.
우씨; (중건에게) 어서 들어가서 진지상 드셔요, 제발. 해장 술두 따끈히 디웠습니다.
이중건; (혼자말로) 제발 소리가 나오는 게 또 돈 내야 할 일이 생긴 게로군, 흥.
하주; (달지에게 빽 소리 지른다) 여보, 당신이 모시구 들어가구려.
송달지; 어? 어……
이중건; 헛, 헛! 들어가세. 일일지환(一日之患)은 묘시주(卯時酒)요, 일생의 후화누라라 이랬겠다. 자네 죄가 아니지, 아니야. 암 아니구말구. 시원허구 술 먹는 건 흠이 아니야, 우리 들어가세.
하주; (달지에게 귓속) 아주 취하도록 술을 권해요. 알았어요? 여기 계셨단 괜히 아버지께 생주정이실 테니.
송달지; 나오셨소? 아버지, 야아 이거 기적인데.
이중건; 누가 나와?
우씨; 아, 아니에요. 어서 들어가시지.
2인 퇴장.
하주; (달지에게) 그러구 아범더러 목간물 좀 디래요.
송달지; (무대 뒤에서) 어……
우씨; 얘, 어쩌면 이렇게 쉽게 나오니, 아마 임 선생이 퍽 힘쓴 게지.
하주; 힘 안 쓰들 누가 아버지를 감히 건드리우.
우씨; 어서 보료나 좀 내오구 삐루도 몇 병 가져다 채우구.
하주; 어머닌 어서 새 옷이나 한 벌 가져 오세요. 여긴 내 다 할 테니, 겨울삐루 채지 않으면 어떻수.
우씨; 오냐오냐 그렇지, 참 그럼. 보료만 내보내랴? 그러면 그럴 테지……
우씨, 상수로 퇴장. 하주, 혼자서 방안을 훔치고 의자를 바로 놓고 한동안 수선할 때 하연 하수로 등장.
하연; 언니 또 무슨 연회요?
하주; 계집애가 어딜 아침부텀 쏘다녀.
하연; 내 일루 나댕기는 걸 왜 챙견이유.
하주; 넌 집안의 걱정두 몰라?
하연; 그럼 내가 어떡해야 헌단 말유. 별루 섦지도 않은 걸 섦은 척 하구 청승맞게 거짓 한숨두 내뿜구 그래야 하우? 그 누구처럼, 참 우스워 주 때갈 일이 있었길래 때간 것인데.
하주; 그럼 넌 아버지 나오셔두 기쁘잖어?
하연; 아버지 나오신대?
하주; 그럼 못 나오시는 게 좋겠니? 어서 안에 들어가 어머니 일이나 거들어. 계집애가 주둥아리만 까먹어 뭣에 쓰니.
하연; 언닌 갑짜기 요즘은 효부 열녀가 됐어. 우스워 죽겠지.
하주; 넌 인천서 와서 부텀은 왜 계집애가 비틀어졌어? 누굴 못 먹어 그러니. 내가 언제 축냈더냐? 걱정마라. 때가 되면 나두 너희 집 신세 안질 테니.
하연; 누가 그런 얘기하랬어? 나두 내일부텀은 내 벌이헌다나, 취직했다우.
하주; 취직? 네가 집안 망신을 시킬 셈이냐? 누구 낯에 똥칠을 할 셈이냐?
하연; 에그 언닌 우리 집안이 그렇게두 훌륭해 뵙디까? 아버지 돈이 그렇게두 소중허구……? 세상에선 뭐라구 하는지나 알구 그러우. 전과자 딸년 써주는 것만두 고맙지……
하주; 입 닥쳐, 밥걱정 없이 너무 호강해서 불만이냐?
하연; 그만둬요. 매일 때간다, 가택수색이다, 돈만 있으면 제일이야? 언니 생활이 제일이구 아버지 생활이 제일이야? 세상이 어떻게 돼 가는 줄은 모르구 이러우, 이러길?
하주; 그렇게 잘 알거든 아버지께 왜 말씀 못 드려?
하연; 왜 말 못해! (사이, 용석 아범, 하수로 황급히 등장. 긴장은 일순 풀린다)
용석 아범; 아가씨…… 영감마님 돌아오십니다. 에구 수척두 하셨지. 뵙기가 딱헙니다 그려. 어서 나가 보십쇼.
하주는 하수로 마중 나가고 아범은 하수 안방으로 각각 퇴장. 하연, 멍청이 서 있다가 툇마루에 걸터앉는다. 이윽고 이중생․임표운․최변호사 떠들썩하며 상수로 등장. 우씨는 상수에서 나온다. 이중생에게는 조금도 피로한 맛이 없다.
하연;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버지……!
우씨; 영감!
이중생; 어, 잘들 있었어? 집안엔 별일이 없었구?
우씨; (눈물지며) 영감은……
이중생; (방안을 올라서며) 에에또, 최변호사, 이리 올라오슈. 이번 일만 성사하문 내 톡톡히 갚으리라. 어차피 최선생과 나는 동생공사할 처지니까.
최 변호사; 온 그야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영감 신세가 언제 필지 누가 압니까? 그럼 잠깐 여러분 실례합니다. (따라 다다미방으로 들어간다)
이중생;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삐루나 있거들랑 몇 병 가져 오우.
용석 아범; 네. 삐이루입쇼…… (아범 상수로 퇴장)
이중생 여기저기서 서류 등속을 한 아름 꺼내들고 다다미방으로 들어가서 구수협의.
이중생; 에에또, 이 뭉치가 죄다 대지와 가옥등기구, 이게 공장, 이것들은 아직 되지도 않은 건국제지와 한국 제재 주권이니 어서 치워버리는 게구…… 이게 반도임업이니 쓸데없구…… 여기 있군, 대지니 가옥등기두 명의 변경을 촌수 있는 대루 바삐 옮겨야 헐 게 아뇨.
최 변호사; 물론 그렇습죠. 왜 그자들헌테 영감 재산에 손꼬락 하나 다치게 한단 말씀입니까, 어디 가만 계십쇼. 채근채근 좀 바쳐야 할 공금 총액이 육억 이천만환에 이에 해당하는 세금과 연체 이자라……
옥순과 용석 아범, 삐이루와 안주상을 방안에 들이고 다시 퇴장. 하연이는 임표운과 툇마루에 가지런히 걸터앉았다.
하연; 싱크러운 일루 임 선생만 고단하시죠? 자기 일두 아닌 걸 가지구.
임표운; 온 천만에요, 사장영감 일이니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죠.
하연; 도와드릴 사람두 없는 걸 가지고 애만 쓰셔서, 근데 아버지가 어떻게 이렇게 쉽사리 나오셨어요?
임표운; 놓아 보낸 게 아니죠.
하연; 그럼요?
임표운; 아가씨 놀라지 마십쇼.
하연; ……
임표운; 사장께선…… 사장뿐 아니라 댁 전체의 문제지만 큰 곤경에 빠졌답니다.
하연; 네에?……
임표운; 아버님 명의루 있는 재산은 아마……
이중생; (온돌방으로 나오며) 에― 또 그럼 최 선생, 잠깐 실례합니다. 이리들 올라오너라. 여보, 마누라도 와 앉어. 하주두…… 임 군.
임표운; 네.
이중생; 하연이두 게 있느냐?
임표운; (하연에게) 아버님이 말씀하실 모양입니다.
일동 온돌방으로 들어가 반달형으로 둘러앉는다.
이중생 좌중을 훑어보고 내려다보고 하더니 침통한 어조로 말을 꺼낸다.
이중생; 이런 소문 저런 소문으루 대강 짐작이 갈 줄 안다마는 이번 일이야 말루 이 씨 가문의 부침에 관한 큰 문제이다. 그런 줄이나 알구 들어. 그러구 난 아직 자유로운 몸이 아니니 이번에는 그야말루 일 년 걸릴지 십년 걸릴지 모르는 일이야.
우씨; 네?
하주; 자유로운 몸이 아니시다뇨?
이중생; 내가 집으루 가야 모든 걸 정리할 수 있다는 핑계로 특별 단기 보석으루 나왔으니 오래 지연할 수가 있겠니, 내 한 몸 고생살이 허는 게야 머 대수롭겠느냐마는 자칫하면 내 재산꺼정…… 알어 듣겠니? 할아버지 때부텀 물려받은 이 재산이 하룻밤에 녹아나는 관국이란 말이야. 졸지에 우리 집안이 거지가 되구 만단 말야.
우씨; (임에게) 그럼요, 왜 이유 없이 자기 재산을 다 바칩니까?
하연; 언닌 그럼 아버지가 이유 없이 달포나 그 챙피한 유치장 신셀 졌다구 생각하우? 난 까닭 없이 인천서 쫓겨오구?
하주; 그럼 까닭이 있어서 아버님을 데려갔더란 말이냐?
하연; 그럼 반도임업이니 건국제재는 왜 갖다 바쳐요? 일편 오빠꺼정 갖다 주고 얻은 걸 어데까지라두 싸우시지.
이중생; 하연아, 넌 애비를 힐책하는 게냐? 어디 불만이 있으면 말하렴.
하연; 밖에선 아버질 뭐라구 말하는지 아셔요?
이중생; 그래 뭐라뎌냐…… 왜 말 안 해.
최 변호사는 옆방에서 슬며시 엿본다.
하연; 아버지 너무 하셨지뭐유.
이중생; 입 닥쳐 요망한 년 같으니라구. 딸년에게 낱낱이 고해바치지 않었다구 오늘 와서는 애비에게 항역이냐? 이십 년이나 키워 낸 갚음이 이래야만 헌단 말이냐, 요년.
우씨; 이 계집애야, 잘했건 못했건 네 아버지 아니냐, 부모의 은헬 모르는건 짐생만두 못해, 응. 은혜를 은혜루 생각잖구 되려 부모 앞에서 발악을 해!
하주; 아버지 앞에서 그 말 버르장이가 뭐냐, 넌 성두 없구 부모도 없어?
하연; 언닌 왜 한술 더 떠 야단이유.
하주; 뭣이 어쩌구 어째, 그래 네가 잘했어?
임표운; (하연에게) 아가씨 그만 허세요, 아가씨……
하연; 어머니! 갚음을 바라고 기르셨거든 좋을 대루 하셔요. 오빠처럼 전쟁판에 못 내보내시겠거든 양공주를 만들어 란돌프놈에게 팔아 자시든지……
이중생; 예끼, 여우같은 년. 나가! 썩 못 나가! (후려갈길 듯이 벌벌 뛴다)
하주; 아버지 고정하셔요, 네. 하연아, 어서 잘못했다구 빌어, 어서 빌어.
하연; 언닌 내가 아버지 노염을 풀어두 괜찮수? 그렇지두 않을 걸 뭐.
임표운; (하연에게) 아가씨 이 자리를 피하십쇼. 이게 무슨 챙핍니까.
이중생; 이년, 아직두 도사리구 앉었을 테야? 없어지지 못허구.
이중건 상수로 등장.
이중건; 없어져랴? 내가 갈 집이 어딨어. 하주야, 젊은 녀석이 한 병 술에 곤드레가 되다니…… 엇 한 병 술에 취해 떨어진단 말야. 에잌, 네 남편 놈도 사내 녀석이 못 돼.
우씨; 에그 아저씨가 또 나오시네.
이중생; (우씨에게) 아, 형님이 언제 오셨수?
우씨; 글쎄 영감 때문에 짐 빼겼다구 아주 인젠 여기서 사신답니다.
이중건; 오…… 중생이로구나. 에끼 놈! 네가 요즘은 네가 팔아먹을 게 없어 그런지 원두 쟁이 쓴 외 보듯 하더니…… 잘 만났다. (비틀거리며 방안으로 들어간다)
이중생; (쩔쩔매며) 아 형님, 언제 오셨습니까? 이리 올라오시죠. 얘들 좀 비켜라.
이중건; 언제 왔어? 그래 그건 물어 뭣해. 어쩔 셈이냐?
이중생; 형님 집 말씀이죠? 제가 잘 처결해드릴 테니 근심 마세요. 헛, 헛…… 그런 걸 가지구 형님두 원.
이중건; 네 처결을 기다려라?
이중생; 기다리실 것 없습죠. 여보슈 최 선생.
최 변호사; 네. (옆방으로 나온다)
이중생; 최 선생, 먼저 형님 일부텀 처결해 드립시다. 서린동 집을 형님 몫으루 내놓기루 허지.
우씨; 이렇게 선선히 처결지시는 걸 가지구 입때 영감만 치원하시구 계셨지.
이중건; 그 집이 몇 평이냐?
이중생; 일백오십 평에 건평이 육십 평, 이만허면 만족 허시겠죠.
이중건; 이놈 네가 하늘 무선 줄 아는 모양이구나.
이중생; 아 온, 알 다뿐입니까? 우리가 남부럽잖게 살아온 게 어느 어른 덕 이길래.
이중건; 그러구 소값은 어쩔 테냐? 네가 관청나리들과 댕기문설랑 때려 먹은 게 도합 열두 마리다.
이중생; 열두 마리.
이중건; 닭이 일백구십 마리, 쌀이 열대 섬.
이중생; 가만 곕쇼, 좀 적어야지. (수첩에 적으면서) 소가 십이 두, 암솝니까? 황솝니까?
이중건; 너야 암소갈비 아니군 입에 대었어?
이중생; 암소 십이 두에 닭이 일백오십 수라……
이중건; 일백구십 마리……
이중생; 참, 일백구십 마리, 쌀이……
이중건; 열다섯 가마니에 현금 지출이 이백만 삼천오백환이다.
이중생; 그럼 이것들을 도합 얼마나 치면 좋겠소, 최 선생.
최 변호사; 모르기는 하겠지만 현금허구 집을 제외하구두 사정 가격으루쳐두 삼백만환 하나는 놔야 할 걸 입쇼.
하주; 에그머니나! 삼백만환!
이중건; 왜 사정가격이냐? 시장가격으루 따져야지.
최 변호사; 가만 겝쇼. 그런 셈보다두 좀 더 심각한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이중생; 흠……
최 변호사; 이대루 두었단 서린동 집뿐 아니라 영감 전 재산을 처리함에 있어서 난관이 가로놓였단 말입니다.
이중건; 무슨 난관?
최 변호사; 최후 수단인 동시에 큰 모험이죠. 조용히 말씀드릴 수 없을까요?
이중생; 응. 여보, (우씨에게) 애들 데리구 들어가슈. 임군두 자릴 피해주구 형님두 인제 안심허시구 들어가 쉬시죠.
이중건; 안 된다, 이눔. 끝장을 보기 전에……
우씨와 하주는 안으로 들어간다. 최 변호사, 중생에게 귓속, 중건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
하연; 임 선생인, 뒤뜰루 산보 가셔요, 네? 뒤뜰두 인제 마지막일지 모르잖아요? (임표운 뒤 따라 후원 울바자 길로 나간다)
하연;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구, 목 날자 밥바가지 떨어지구…… 호호…… 이번 통에 임 선생 목만 달아났지.
임표운; 제 목이야 한두 번 달아난들 뭐라겠습니까? 일만 잘 피면요.
하연; 흥, 일이 잘 퍼지다니요. 임 선생님은 그렇게 쉽사리 될라고 생각하셔요. 저…… 내 임 선생 취직시켜 드리리까?
임표운; 이번엔 아가씨께서 비서로 채용하시겠어요? 헛, 헛……
하연; 아유, 농담인 줄 아셔. 내가 취직한 공장에서두 사무원이 모자라서 쩔쩔 맨 다우.
임표운; 아가씨가 취직이요?
하연; 그럼요. 그래서 아까두 언니와 싸우잖았어요. 임선생님두 그럼 반대예요, 그럼?
임표운; 아, 아니요. 그래 어디루……
하연; 건국제재회사 회계과.
임표운; 아버지가 경영하시는…… 제지회사 말씀이요?
하연; (고개를 끄덕하고) 네, 아버지가 경영하시던. (던을 특별히 강조)
임표운; 네에……?
(2인 퇴장)
최 변호사; 결국 저 사람들이 문제 삼는 것은 사기, 배임횡령, 공문서 위조 및 탈세범인 위대한 사업가 이중생이거든요. 그러니까 위대한 이중생만 없어지구 볼 지경이면 문제는 아주 간단허다 할 수밖에 없습죠! 탈세한 돈이며 연체된 이자며 횡령한 공금을 받을래야 받을 길이 없을 것이 아닙니까?
이중생; 내가 없어진다?
최 변호사; 그렇죠. 세상에서, 땅 위에서 없어지구 말아야죠.
이중생; 엑기! 여보, 내가 죽구서야.
최 변호사; 쉿! 헛헛! 그런 게 아니 와요, 일사(一死)면 도무사(都無事)라 아주 돌아가실 수 야 있겟습니까, 온. (귓속을 하고나서) 헛, 헛 법률 적으루 자살이란 그리 어려울 게 아니지, 허허. 상속법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습니다.
이중생; 헛헛, 그야, 최 선생이야 상속법에는 권위자이지.
최 변호사; 저는 그저 영감이 써놓으신 유서…… 유서는 물론 사건 발생 전에 작성된 것으루 하여야 됩니다. 그러구 난 뒤에는 그저 유서의 내용대루 가장 법률적으루 정확 신속히 처리할 따름이죠. 그리니까 영감께선 영감의 전 재산을 가장 신뢰할 수 있고 믿음직허구, 또 차후로 이중생씨 사업에 관여하지 않을, 따라서 사업의 경험내지 야망이 없구 법류 상식두 없는 충직한 재산관리인만 한 분 선택하십쇼 그려.
영감께선 그 뒤에 계셔서 모든 것을 지휘하시면 그만 아니십니까? 말썽 많은 이중생만 세상에서 없어지면……
이중생; 그자가 죽는 경우엔 어떻게 된다? 내 재산이 또 공중에 뜨게…… 안 되지.
최 변호사; 하식군도 좋구 형님두 좋구.
이중건; (깜짝 놀라 잠을 깨며) 뭐, 뭣이. 이번엔 내 이름을 어째?
이중생; 쉬잇?
이중건; 쉬이? (두리번거린다)
최 변호사; 그러구 남은 문제는 살아있는 영감의 사망진단서를 누가 용감히 쓰느냐……
이중생; 그야 내 사위더러 쓰래면 되지만……
이중건; 누가 죽었어?
이중생; 가만 계셔요, 형님은…… (무릎을 치고 일어나며) 옳지! 됐어! 됐어! 최 선생, 아주 적재가 있단 말야. 헛헛…… 개똥두 약에 쓸 때가 있다구.
이중건; 개똥?
이중생; 형님, 누설됐다는 큰일입니다.
최 변호사; 큰일이다 뿐이요. 온 존당의 집은 커냥 이 씨 문중이 큰 봉변을 당허시죠. 비밀, 비밀, 절대 비밀이야.
이중생; 형님의 삼백만환두 내 전 재산두 수포로 돌아가구 말죠. 최 선생, 자, 우리 안으루 들어갑시다.
2인, 상수로 나가려다가 이중생 다시 돌아와서 이중건에게 귓속.
이중생; 비밀입니다. 아셨죠. (나간다)
이중건; 비밀…… 비밀? (뚱그래진 눈으로 겁나는 듯이 주위를어미의 소리였던가 보다. 듬성듬성 잿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