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바, 춤추는 사회주의
김창진 外, 가을의 아침 2017.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쿠바의 농업협동조합
지렁이와 쿠바
나를 쿠바로 이끈 것은 그 못생긴 녀석이었다. 쿠바라고 하면 체 게바라, 헤밍웨이, 카리브 해의 백사장, 그리고 살사를 떠오르게 하는 혁명과 낭만의 나라였기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은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만사 소극적인 내 성격에 그 머나먼 쿠바로 꼭 가보아야겠다고 결심하게 한 것은 바로 지렁이 덕분이다.
쿠바의 지렁이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SBS 방송의 다큐멘터리 “쿠바의 농업혁명”을 통해서였다. 소련이 무너지면서 소련의 원조와 교역에 의존하던 쿠바 농업이 붕괴 직전까지 갔던 1991년, 쿠바토양연구소는 별난 연구를 하게 된다. 화학비료를 구하기 어려워 농민들이 억지로라도 유기농업을 할 수밖에 없게 되자, 이 연구소는 유기농업에 필요한 토양을 일구기 위해 지렁이 농법에 착안했다. 전 세계의 지렁이 6천 종을 일일이 분류하여 관찰한 다음 그 중 생산성이 제일 높은 종을 찾는 실험이 시작되었다. 끈질긴 실험 끝에 선택된 종은 캘리포니아산 레드 웜red worm. 번식력이 엄청 좋아 6개월만 지나면 개체 수가 40배에 이르는 초특급 변강쇠란다. 그 출신이 미국 캘리포니아인데 이름은 ‘레드’라니 수상하다. 한국의 국가정보원이라면 잡아다 취조했을 터, 혹시 미국의 지하에 잠입한 쿠바 공산당원? 아니면 ‘적색혁명’, ‘종북좌빨’의 가면을 한 미국 제국주의의 첩자? 여하튼 흥미로운 놈이다.
쿠바정부는 무려 172군데에 지렁이 센터를 만들어 농가마다 이들을 분배하고 손수 돼지 분뇨를 받아와 퇴비 만드는 법도 가르쳤다. 지렁이는 땅 속에서 유기물을 섭취한 뒤 검은 색의 분변토를 만들어낸다. 다른 동물을 이용할 경우 보통 분변토를 만드는 데 한 달이 걸리는데, 이 지렁이를 사용하면 단 이틀 만에 유기성분이 5배나 많은 분변토를 생산해낸다고 한다. 지렁이 농법이 확산되면서 쿠바 농민들은 농장마다 그에 맞는 다른 분변토를 생산해내고 수출도 하기에 이르렀다. 쿠바는 본래 흙의 유기물 함유량이 1퍼센트도 안 되어 유기농업을 하기에는 최악의 조건이었지만, 그 땅에 유기비료와 분변토를 뿌려 넣어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를 바탕으로 쿠바는 친환경 유기농업 보급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이 붕괴하던 1980년대 말~90년대 초에 사회주의 쿠바와 북한은 그들에게 우호적이던 국제환경이 하루 아침에 바뀌면서 고립무원의 지경에 빠졌다. 갑작스러운 원조와 교역 중단으로 에너지원이 차단되면서 공장의 굴뚝에서 연기가 사라지고 교통수단이 멈추었으며 화학비료와 트랙터 등 현대화된 농업기술에 의존하던 농업은 갑자기 석기시대 상태로 돌아갔다. 그로 인해 벌어진 1990년대 초 기근의 시기를 쿠바는 ‘특별한 시기’라고 부르고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기라고 부른다. 쿠바와 북한 둘 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그 시기를 두 나라는 다른 방식으로 헤쳐 나갔다. 쿠바는 ‘궁즉통’의 자세로 도시의 모든 빈 땅에 텃밭을 일구고 유기농법으로 채소 등 다양한 식재료를 생산하며 기근을 극복해냈다. 그 결과 어느 정도 경제력이 생긴 뒤에나 관심을 가지게 되는 유기농 생산물을 가난한 쿠바 인민 전체가 향유하는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화학비료 투입을 중단하고 퇴비 등 유기농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은 북한의 농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북한의 농업은 아직도 생산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자급의 길이 멀기만 하다. 쿠바와 북한의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단지 지렁이 농법이 있고 없고의 차이 때문일까? 북한현대사를 전공하는 필자로서는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 싶었다. 같은 동포인 북한의 주민들도 식량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함께.
쿠바의 지렁이 농법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보면서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지렁이 농법 자체는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니라 친환경 유기농업을 하는 농민들에게는 상식에 속하는 널리 알려진 인류의 지혜라는 점, 쿠바의 농업생산성 회복은 단지 농법만을 바꾼 데 그치지 않고 쿠바인들의 식단 자체를 바꾸는 식생활 혁명을 동반했으며, 이에 더해 국영농장 시스템 자체를 개혁함으로써 실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농법−식단−농업체계 3자를 함께 바꾸어가는 농민−소비자−체제 간 삼위일체의 개혁, 그 개혁은 처음에는 궁지에 몰린 차선책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사회주의를 견지하면서도 친환경적이며 인민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거대한 전환 과정으로 여겨졌다. 그 미래란 과연 어떤 모습의 체제일까? 그것은 주로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좌파가 주장하는 생태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 즉 ‘생태 사회주의eco-socialism’의 길일까? 아니면 쿠바가 개방되고 화학비료를 다시 풍부하게 쓸 수 있게 되면 옛이야기처럼 사라져버릴 그저 과도기적인 현상일 뿐인가? 쿠바의 길과 비교해볼 때 과연 북한은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인가? 그러한 궁금증을 풀고자 나의 쿠바여행은 시작되었다.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아바나
토론토를 거쳐 한밤중에 도착한 쿠바의 심장 아바나. 그 심장은 따스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활기차게 뛰기 시작했다. 고색창연하며 자유분방한 아바나의 아침 풍광은 북한의 심장 평양과는 너무나도 다른 이미지로 다가왔다. 2003년 2월 평양의 보통강호텔에 묵었을 때, 창밖으로 보이는 회색빛 건물에는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라는 구호가 쓰여 있었다. 자본주의 세계 질서 속에 고립되어 역경에 처해있던 북한 인민들의 비장한 현실을 한 마디로 대변하는 구절이었다. 그런데 아바나에서도 빛바랜 혁명 구호와 그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의 얼굴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지만, 평양과 같은 비장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흔하다는 체 게바라의 매력적인 얼굴 모습도 막상 허름한 담벼락에서거나 상점의 선물용 상품으로나 마주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바나는 도시의 건축물 자체가 평양과는 너무 달랐다. 일제의 식민유산을 싹 지워내고 주체의 상징물로 가득 채운 사회주의의 이념의 거대 도시 평양. 그에 비해 아바나는 4백년의 스페인 식민 유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도 마냥 노출되어있는 넓지만 소박한 도시였다. 올드 아바나를 비롯한 옛 도심은 8천 채의 건물들이 몽땅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어 함부로 개조도 못한다고 한다. 이곳 사회주의 쿠바가 얼마나 탈권위적인지는 대통령관저와 의회건물인 까피탈리오를 오랫동안 인민에게 개방해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해왔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바나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적 조건으로 인해 예기치 않았고 그 결말도 불확실하지만 매우 흥미로운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1959년 혁명 이후 쿠바는 미국과 정상적인 관계를 수립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혹하게 봉쇄당했지만 1960년대부터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인민들이 나름 안정되고 여유 있는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소련은 쿠바에게서 사탕수수를 사주고 대신 자신들의 석유와 공산품을 저렴하게 제공했고, 그 혜택 속에서 쿠바의 교육과 보건의료는 세계 최고 수준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그 여유는 냉전 속에서 외국에 의존하며 지탱하던 지속가능하지 않은 생활양식이었다. 소련 붕괴 이후 1990년대 초 ‘특별한 시기’에 쿠바의 인민들은 생사의 기로에 섰다. 1994년 아바나에서는 굶주린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정부가 농민시장을 허용하는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 쿠바의 정부와 시민, 농민들은 지혜를 모아 자급지향적인 생태농업의 나라로 새로 거듭나게 된다.
식단은 고기 위주에서 채소를 함께 하는 건강식으로 바뀌었고, 화학비료와 농약을 수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채소를 생산하기 위해 아바나 도시와 그 주변은 유기농 재배지역으로 바뀌었다. 한 차례 위기가 지난 지금 더 이상 도심에서 큰 텃밭을 쉽게 보기는 힘들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바나 도시 구역 안의 근교 농업지역은 온통 유기농 지대이다. 2백여 만 명에 이르는 대도시 아바나의 인구를 먹여 살리는 거대한 유기농 지대가 만들어진 것은 근대 이후 세계사에서는 초유의 일이다. 처음부터 고상한 친환경 의식이 있어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오직 먹고 살고자 일어난 일이지만, 이제는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고 호주, 캐나다, 프랑스 등 여러 국가의 시민, 전문가들과 협력 프로그램이 늘다보니 제법 친환경 의식이 생기고 유기농법의 지혜가 축적되고 있음을 여러 농장들을 돌아보며 확인할 수 있었다.
쓰레기터를 농장으로
우리 일행은 아바나에서의 첫날, 도시 근교 농장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처음 방문한 곳은 라파엘 형제가 운영하는 농장과 식품 상점이었다. 파라엘 형제는 본래 인근에서 살던 농민 가족이었는데, 쿠바가 식량 위기에 봉착하여 도시농업을 장려하자 근처의 쓰레기터를 활용해 농장을 일으켰다.
쿠바는 1992년에 헌법을 개정해서 ‘콘세호 퍼프랄’(인민평의회)이라는 풀뿌리 권력기관을 설립했는데, 이 기관이 담당하는 일의 하나는 경작 희망자에게 놀고 있는 토지를 빌려주고 국유지를 무상대여하는 등 토지를 알선해주는 일이다. 이를 통해 아바나시에서는 광범한 토지의 유동화가 이루어졌으며, 수백 개의 유휴지와 쓰레기터가 밭으로 변모했다. 그런데, 쓰레기터를 농장으로 일구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토질이 극히 좋지 않기 때문에, 쓰레기터를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콘크리트 벽돌이나 돌, 베니어 합판과 금속조각 등으로 둘레를 친 뒤, 그 안에 퇴비를 섞은 흙을 뿌려넣어 칸테로cantero라고 하는 묘상을 만든 다음 채소를 재배하는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다. 칸테로에는 걸터앉을 수 있어 힘들게 쪼그리고 앉아서 일해야 하는 어려움을 피하는 장점도 있다.
이런 방식으로 경작하는 것을 쿠바에서는 오가노포니코Organoponicis라고 부른다.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이라는 책을 쓴 요시다 타로에 의하면, 오가노포니코는 1997년에 2만 7천톤의 농산물을 생산하여 아바나의 채소·과수·우유·화훼 생산의 30퍼센트를 차지했고, 1998년에는 생산이 50퍼센트 중가하여 채소 생산량이 5만 톤에 이르렀다. 1990년대에 오가노포니코는 아바나 시민의 먹을거리를 책임지는 중요한 농업기술이었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라파엘 형제는 농장 바로 옆에 제법 크고 에어컨까지 갖춘 깔끔한 직판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매장에서 마신 신선한 야채 주스의 맛은 아직도 생생하다. 농장은 협동조합의 형태로 운영되는데, 토지소유권은 국가에 있지만 경작권을 얻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경작권은 후손이 원하면 상속할 수도 있다고 한다. 생산한 농산물은 일부는 세금으로 나가고, 일부는 계약을 맺은 주위 학교 등 공공시설에 저렴한 가격으로 납품한다. 그러고 남은 식품을 조합원들이 매장에서 자유롭게 판매하여 수익을 내는 방식이었다.
쿠바에서 직판장을 운영하는 주체는 가정텃밭, 오토콘스모스Autoconsumos 자급농장, 국영 오가노포니코 등 세 가지이다. 오토콘스모스란 직장이나 학교 식당에 급식용 식품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한 농장인데, 일정 농산물을 급식용으로 제공한 다음에 남는 식품을 직판장에서 일반 시민에게 판매할 수 있다.(쿠춤사115-125)
오래된 미래, 혼작
그 다음으로 방문한 루카의 농장은 더욱 흥미로웠다. 이태리 출신인 루카는 쿠바가 좋아 쿠바 여인과 결혼해서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있었다. 루카가 운영하는 농장은 조합원이 5명에 불과하고 토지 면적은 3헥타르뿐인 작은 협동조합이었다. 사회주의국가에서 이런 작은 농장 운영이 가능한 것은 1993년에 정부가 ‘협동생산 기초단위’UBPC,Basic Unit of Cooperative Production라는 새로운 협동조합제도에 따라 조합을 자율적으로 만들고 국유지를 임대하여 경작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쿠바는 사회주의 이념을 고수하기 때문에 토지사유와 개인 경작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그 대신 소규모의 협동조합을 운영할 수 있게 하여 국가가 통제하는 대규모 협동조합의 한계를 벗어나 자율적이고 창의적이며 수익성을 추구하는 농업생산을 용인하고 있다.
루카의 농장은 작지만 재배하는 작물 종류는 가지, 허브, 체리, 콩, 커피, 바나나, 상추 등 참으로 다양했다. 쿠바 사람들이 약용 식물로 허브를 광범하게 활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허브에 관심을 보이자, 루카는 그런 용도 외에도 동물들이 작물을 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동물들이 싫어하는 냄새를 내는 허브를 심기도 한다고 팁을 준다.
나는 루카에게 유기농업과 관련해서 한 가지 의문점을 질문했다. 화학비료는 퇴비로 대신할 수 있다고 해도 어떻게 농약을 쓰지 않으면서 병충해와 잡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오래전 과천에 살면서 다섯 평짜리 작은 텃밭을 일구면서도 병충해와 잡초와 싸우느라 생고생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 답을 알고 싶었다. 루카가 잠시 망설이자, 안내와 통역을 맡은 빠벨 가르시아가 대신 나서서 그 해결책은 바로 ‘혼작’이라고 알려주었다. 혼작을 해서 여러 식물들이 어우러지면 그 식물들을 좋아하는 다양한 벌레들이 모여들어 서로 조화를 이루며 평형 상태를 이루게 되니, 병충해를 상당부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뒤이어 루카는 그 답이 옳다고 맞장구를 치면서, 덧붙여 그 평형에 이루는 과정이 쉽지는 않다고 솔직히 말해주었다.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며 웬만한 잡초는 뽑지 않고 작물과 함께 자라게 내버려두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져야 함을 알 수 있었다.
아직 쿠바에는 사탕수수 농장 등 단작 농업 형태가 남아있는데 그곳에서는 농약을 쓰지 않을 수 없으나, 채소 농업 중심의 아바나 도시 농업에서는 혼작의 방법으로 유기 농업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렁이 농법에 더해 혼작이라고 하는 인류가 본래 알고 있었으나 근대 이후 성장 지상주의로 인해 잊어버리고 있던 지혜가 쿠바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런데, 농장에서 여러 벌레 이야기를 듣기는 했으나 막상 지렁이 농법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해 아쉬웠다. 그 대신 들은 이야기는 개미 농법, 개미들이 한낮의 뜨거운 햇살을 피해 땅속으로 길을 내면서 흙을 부드럽게 하고 해충들을 잡아먹어 농사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지렁이든 개미든 쿠바 농민들은 땅 속 생물에 관심이 많구나!
‘땅 속’에 대한 관심이라면 북한도 못지않을 터, 다만 북한은 땅굴을 파거나 지하 요새를 구축하는데 열심인 반면 쿠바 사람들은 땅속 생물들이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는데 관심이 많은 점이 서로 다르다고 할까.
루카는 이태리인의 솜씨를 발휘해서 파스타를 파는 개인 식당을 시내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점심을 함께 했는데, 농장에서 재배한 신선한 식자재로 만들어낸 파스타는 독특한 향을 내는 일품 요리였다. 당연히 올리브유는 들어가지 않았는데, 그래서 더욱 특이하고 맛있었다. 영업이 잘되는지 옆으로 벽을 트는 확장공사 중이었다. 루카의 농장 같이 작지만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농업협동조합들은 아바나 근교에서 얼마든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코인시덴시아와 베야마르 – 노동과 예술, 자연과 사람의 조화
쿠바 기행이 거의 끝나가던 날에 우리 일행은 아바나를 벗어나 마탄사스에 있는 코인시덴시아Finca Coincidencia라는 이름의 농장을 찾아가보았다. ‘특별한 시기’에 쿠바의 거대한 사탕수수 농장들은 이제는 무너진 소련 대신 다른 수출 대상을 찾지 못해 황폐화되고 있었다. 그때 마탄사스대학 출신의 엑토르라는 한 젊은이가 허름한 농가와 폐허가 된 땅을 그곳의 협동농장에게서 임대받아 가족과 함께 땀 흘려 일해 기름진 옥토로 탈바꿈시켰다. 현재 조합원은 모두 열여덟 가족으로 이루어져있다. 농장에서는 망고와 바나나, 옥수수, 커피 등을 재배하고 있었으며, 각자 200리터의 꿀을 생산할 수 있는 꿀 탱크가 40개에 이르렀다.
코인시덴시아 농장은 지금도 토지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 지역에 본래 있던 대규모 협동농장이 여전히 소유권을 가지고 있고, 그 협동농장에게서 10년 단위로 토지를 임대하여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소규모 협동조합이다. 이 농장의 사례를 통해 사탕수수 등을 경작하는 대규모 농장의 경우, ‘특별한 시기’ 이후에 일부 토지를 임대해주게 되면서 협동농장의 2중구조가 형성됨을 알 수 있다. 이는 북한의 향후 농업개혁에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준다. 북한 역시 쿠바처럼 사회주의 이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농업의 효율성을 개선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고 있으며, 그 방안의 하나로 협동농장 산하의 작업반 단위에 보다 많은 자율성과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토지 임대의 방식이 허용된다면 북한도 쿠바처럼 보다 활기찬 농업개혁이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 농장이 특이한 점은 한편에서는 세라믹 아트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또 다른 창작으로서 농사를 하며 농업과 예술을 일치시킨 이상향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도자기, 그리고 나무들에 달린 팻말에는 월터 휘트먼, 비틀스를 비롯해 쿠바 독립운동의 영웅 호세 마르티 등의 글과 노랫말이 새겨져 있다. 이 농장은 정기적으로 국내외의 예술가들을 초청하여 도자기 축제를 벌이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제 이 농장은 전 세계적으로 명성이 퍼져나가고 있다.
불교에도 조예가 깊은 엑토르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노동과 예술, 자연과 사람이 일치된 곳, 그래서 농장 이름이 ‘일치’라는 뜻의 Coincidencia일터이다.
코인시덴시아 농장에서 베풀어준 푸짐한 점심을 먹고나서 들린 곳은 베야마르, 이곳에 자연과 사람 재단이 운영하는 농장이 있다. 본래 이 곳은 석유산업에 종사하는 직장인들의 거주 지역으로 개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23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지하 동굴이 발견되자, 이를 보존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탄 사람들이 재단을 만들고 정부를 설득하여 친환경 유기농을 하는 농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들의 모토는 ‘퍼머컬쳐permaculture. 태양전지와 풍차, 빗물 저장고 등을 이용하여 자연 에너지만으로 농사를 지으며 자연과 공존하는 길을 찾는 선구자들이다. 프랑스, 캐나다, 이태리의 학자, 시민, 학생들과 활발히 교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비농업분야로 확산되는 협동조합의 물결
2006년부터 피델을 대신해 쿠바를 이끌고 있는 라울 카스트로는 사회주의를 고수하면서도 세계 시장경제에 적응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 협동조합에 기대를 걸고 있다. ‘특별한 시기’부터 인민들에 의해 밑으로부터 만들어진 농업협동조합의 경험을 참고하여, 라울은 비농업분야에서도 협동조합을 자율적으로 만들도록 허용했다.
아바나 시내 안에는 폐허로 변한 수도원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 들어가 보니 세 명의 젊은이들이 운영하는 ‘스테인드글라스 복원 협동조합’이 있었다. 대학에서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전공한 예술가들 세 명은 졸업 후 변변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아바나 역사‧문화 유적의 보존‧보수를 담당하는 ‘아바나 역사협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협동조합을 만들게 되었다. 처음에는 민간업자들과 경쟁해야 해서 힘들었지만, 지금은 능력과 성실성을 인정받아 꾸준히 일감이 들어오고 있다. 일감이 더 많아지면 점차 조합원을 늘릴 계획이란다. 일감이란 언제든 변할 수 있으니 일단 임시 직원을 두면 안 되나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쿠바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인턴으로 3개월 고용할 수 있지만 그 이상 일하게 하려면 반드시 동등한 조합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국가 사회주의의 비효율성을 극복하되 사회주의 평등의 이상은 포기하지 않으려는 쿠바, 그 쿠바가 주목하며 기대하는 영역이 협동조합 부문이다. 많은 분야에서 협동조합들은 사영업자들과 경쟁해야 한다. 현재 쿠바에는 280여 개의 업종에 민간영업을 허용한 상태이다. 국영기업, 협동조합, 사적 경영이라는 세 개의 섹터가 서로 경쟁하며 쿠바의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쿠바는 ‘생태 사회주의eco-socialism’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쿠바 여행에서 나는 끝내 레드 웜을 만나지 못했다. 그 점은 못내 아쉽지만, 그래도 그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 여행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쿠바의 소박하면서도 자부심 넘치는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사회주의의 미래를 살펴볼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여행이나 답사를 할 때면 이제는 금언이 된 “아는 만큼 보인다.”는 구절을 항상 생각하고는 한다. 쿠바 여행을 떠나기 전에 김창진 교수와 함께 한 세미나를 통해, 그리고 현지에서 쿠바가 안고 있는 고민과 가능성을 허심탄회하게 가르쳐준 빠벨 가르시아를 비롯한 안내자와 한인 교민, 학자들을 통해 쿠바에 대한 많은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혹시 아는 만큼 본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은 아닌지, 쿠바의 밝은 면에만 미혹되지 않았나 자문해본다.
여러 번 자문해보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이 하나 있다. 적어도 내가 만난 대다수의 쿠바 사람들은 돈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인생의 전부는 아니며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는 세상이 되려면 사회주의라고 하는 공동체의 이상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본 쿠바의 이곳저곳은 국가와 당이 좌지우지하는 하향일변도의 닫힌 공간이 아니라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만들어나가는 소박하지만 격동적인 열린 공간이었다. 물질적 풍요에 젖은 한국 사람들에게 쿠바에서 적응하며 살라고 하면 아마 열 중 아홉은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갈 것이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는 풍요롭지 않아도 그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과 지역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이제 한국 사람들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 자본주의적 풍요로움은 환경 파괴와 극단적인 불평등이라는 독소로 인해 결코 영원히 지속할 수 없는 언젠가는 무너질 모래성임을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쿠바 사회주의의 현재와 미래를 결코 낙관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혁명의 시대를 겪지 않은 쿠바의 청소년들 상당수는 외부 세계의 물질적 풍요로움을 동경하고 있음이 사실이며, 이들이 언젠가는 쿠바의 미래를 이끌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웠던 ‘특별한 시기’를 현명하게 견뎌내고 오히려 그 위기를 친환경적 유기농업과 자율적인 협동조합들의 천국으로 쿠바 사회와 경제를 바꾸는 계기로 삼은 사람들이 바로 쿠바인들이기에, 그들이 이루어낸 성과는 하루아침에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쿠바 정부가 화학 비료의 사용을 계속 통제하며 유기농업을 장려하고 토지소유권을 전면 사유화하기보다 다양한 협동조합을 장려하는 방향을 견지한다면, 그 속에서 생태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하는 ‘생태 사회주의’의 미래가 열릴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고 하겠다. 그리고 협동조합을 농업 이외 부문으로도 허용하여 국영, 사영, 협동조합이라는 세 개의 경제 섹터가 상호 경쟁하며 균형을 이루어내는 실험이 성공한다면, ‘쿠바식 사회주의’의 정신은 세계 시장경제 속에서 살아남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런 쿠바의 길에서 한국과 북한도 많은 지혜를 얻어낼 수 있을 터이다.(김성보)(129-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