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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금자씨 3
씬 101. 거리/저녁.
당황한 박 이정, 뛰기 시작하며 다른 곳으로 전화한다.
이정: 이 인간이 아직 밥을 안 먹었대거든? 내가 가서 빨리 멕일테니까…….
뛰어가는 이정의 뒷모습에서 페이드아웃.
이정: (소리) 이런 남편을 여섯 달이나 산 채로 데리고 산다는 건 정말 참기 힘든 일이었다.
씬 102. 골목/밤.
띄엄띄엄 가로등이 줄지어선 골목, 눈이 내린다.
검게 썬팅 된 밴이 들어와 선다.
백 선생 집에서 보았던 두 사내가 내려 차 옆에 선다.
심드렁한 얼굴들이다.
전조등이 꺼진다.
씬 103. 나루세 앞/밤.
근식이 손을 흔들어 금자 모녀를 배웅한다.
씬 104. 백 선생 집/밤.
TV뉴스를 보면서 밥 먹는 백 선생.
씬 105. 골목/밤.
작업복 사내들, 가로등에 달린 뚜껑을 열고 퓨즈를 자른다.
3개의 가로등이 차례로 꺼진다.
씬 106. 거리/밤.
말없이 걷는 금자 모녀.
제니 어깨에 팔을 두르는 금자, 기다렸다는 듯 몸을 밀착시키는 제니.
씬 107. 골목/밤.
가로등 꺼져 어두운, 골목 끝.
차안의 사내1, 탈지면 봉투에 클로로포름을 붓는다.
베토벤을 크게 틀어놓고 묵묵히 앉은 사내들.
멀리 골목 입구에 들어서는 금자 모녀, 컴컴한 반대편을 보고 멈춰 선다.
잠깐 고개를 갸우뚱했다가 이내 다시 걷는 금자.
모녀의 뒷모습,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멀리 차 문들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베토벤.
씬 108. 백 선생 집/밤.
백 선생, 밥 먹는다.
피투성이가 된 채 맞은 편 의자에 포박된 박 이정을 흘낏 보고 계속 먹는 백 선생.
씬 109. 골목/밤.
사내1이 금자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다.
탈지면이 입을 덮었다.
여자 성우: (소리) 금자는 순간, 호흡을 멈추고 악착같이 참았다. (금자를 밀어 자동차 뒷자리에 태우려 드는 사내1. 차 문짝에 발을 대고 완강히 버티던 금자, 결국 마취된 듯 축 늘어진다. 탈지면을 금자 얼굴에서 떼는 사내1. 기다렸다는 듯 갑자기 덤벼드는 금자, 팔뚝을 물고 늘어진다. 비명 지르는 사내1, 주먹으로 금자의 배를 강타한다. 쓰러지며 차에 기대는 금자. 사내1, 손바닥으로 따귀를 쉬지 않고 다섯 번쯤 갈긴다. 주먹으로 배를 또 때린다, 미친 듯이 때린다. 금자, 바닥에 엎드려 신음한다. 허리를 펴고 숨을 돌리는 사내1, 동료를 돌아본다. 벌써 축 늘어진 제니를 뒤에서 안고 선 사내2. 사내1, 다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벌떡 일어나 마주 서는 금자. 권총이 머리에 와 닿는다. 사내의 심장 뛰는 소리, 이마에 흐르는 땀. 요란한 총성과 함께 머리가 날아간다. 제니를 안은 채 뒷 걸음질치는 사내2, 잭 나이프를 꺼내 제니 목에 댄다. 비틀비틀 다가가는 금자. 사내2, 제니를 안고 뛰기 시작한다. 금자, 따라 뛴다. 갑자기 멈추는 사내, 돌아서더니 제니의 목을 겨누며 칼을 치켜든다. 금자, 멈춰 서지 않는다. 덤벼들어, 사내의 손목에 총구를 바짝 붙이는 금자) 다급한 상황에서도 금자는 자기 총의 유효사거리를 결코 잊지 않았다.
총성이 울리더니, 칼을 든 채 절단된 오른손이 바닥에 툭 떨어진다.
씬 110. 백 선생 집/밤.
백 선생, 식탁에 엎어진다.
피투성이 얼굴로 미소 짓는 박 이정.
씬 111. 아파트 앞/밤.
택시에서 내리는 이 금자, 얼굴이 말이 아니다.
마취된 제니를 업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다.
씬 112. 백 선생 집/밤.
이정이 준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금자, 엎드려 자는 백 선생과 묶인 박 이정을 발견한다.
힘없이 미소 짓는 이정.
백 선생에게 다가가는 금자, 찌개냄비에서 국자를 집어 들고 머리를 민다. 의자에서 굴러 떨어지는 백 선생, 큰 대자로 누워 잔다.
옆에 쪼그리고 앉아 얼굴을 내려다보던 금자, 손을 뻗어 백 선생의 관자노리에 붙은 무 조각을 뗀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려준다.
방에서 가위를 가지고 나와 백 선생 머리칼을 마구 뜯어내듯 자른다.
미친 여자 같은 행동을 지켜보며 한숨 쉬는 이정.
잠시 후.
소파에 누운 제니.
이제 풀려난 이정, 금자를 도와 백 선생의 손과 발을 꽁꽁 묶는다.
여자 성우: (소리) 아무리 십 삼년 동안 계획하고 준비했다지만 금자는 일이 지나칠 정도로 잘 풀린다고 생각해왔다. 무언가 결정적인 순간에 틀어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자주 금자를 사로잡았다.
제니의 옷 주머니에서 삐죽 나온 빨간 편지봉투를 발견하는 금자, 잠깐 훑어보더니 이정을 돌아본다.
금자: 영한사전 어디 있니?
잠시 후.
책상 앞에 앉은 금자, 사전을 펼쳐놓고 편지를 읽는다.
화면 양분된다.
한쪽에 편지 클로즈업, 다른 쪽에는 사전을 뒤지는 금자의 손과 사전의 글씨들.
‘forgive…….을 용서하다’, ‘dump…….를 내버리다’, ‘avenge…….에게 복수하다’, ‘explanation …….설명’ 등의 내용이 보인다.
한국어로 편지를 읽는 제니의 목소리 들린다.
제니: (소리) 내가 당신을 용서한다고 생각하지 마. 난 아이를 버리는 엄마들은 모두 감옥에 가야 한다고 생각해. 어렸을 땐 당신을 찾아가 복수하는 상상을 하곤 했어. 하지만 당신을 죽이는 상상할 수 없었는데 그건 당신 얼굴을 모르기 때문이었어. 기왕 이렇게 됐으니까 복수까진 몰라도 적어도 납득할 만한 설명은 해 줘. 미안하다고 한 번 말하는 걸로는 부족해. 적어도 세 번 이상은 미안하다고 해. 관대하지 않은 당신의 딸, 제니.
씬 113. 국도/밤.
박 이정이 운전하는 승용차, 뒷좌석에 잠든 제니와 백 선생.
무감정한 눈으로 길을 응시하는 금자.
금자: 좌회전.
씬 114. 운동장/새벽.
히터 틀어놓고 차에서 자는 박 이정과 제니.
씬 115. 미술실/새벽.
재갈을 문 채 의자에 묶인 백 선생.
구석 책상 위에 가부좌를 튼 금자, 등을 꼿꼿이 펴고 두 손을 무릎에 명상에 든 수행자 같아 보인다.
백 선생이 꿈틀한다.
눈을 드는 금자, 양손을 깍지 끼고 손바닥이 하늘을 보게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어 몸을 편다.
씬 116. 복도/새벽.
잠이 덜 깬 제니의 손을 잡고, 마루 복도를 쿵쾅쿵쾅 걸어가는 금자.
금자: (소리) 너 가졌을 때가 생각 나, 제니.
씬 117. 미술실/새벽.
검은 커튼이 쳐져 어두운 실내.
재갈이 물린 백 선생, 뒤통수에 총을 겨누고 앉은 금자.
맞은 편 바닥에 우유 상자를 놓고 앉은 제니,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손으로 턱을 받쳤다.
금자 하는 말을 동시통역하는 백 선생.
금자: 배가 불러오니까 지갑이 불룩해진 것처럼 기분이 좋았는데……. 하지만 니가 돌도 되기 전에 엄만 감옥에 가야했기 때문에 널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 너는 아무한테나 웃어주는 헤픈 아이라서……. (턱이 스르르 미끄러지면서 손이 볼을 밀어,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가는 제니) 어느 집에 가든지 모두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단 걸 엄만 알고 있었어. 이제 이 사람하고 볼 일이 끝나면 널 다시 호주루 보낼려구 해. 엄마의 죄는 너무 크구 너무 깊어서 너처럼 사랑스러운 딸을 가질 자격이 없거든. 넌 아무 죄두 없는데, 니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숨을 돌렸다가) 근데 그것까지두 내가 받아야 될 벌이야. (또박또박 말하려고 노력하며) 잘 들어줘.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해. 지만 죄를 지었으면 속죄를 해야 되는 거야. ‘속죄’ 알아? (통역하는 소리를 귀담아 듣고) 어토운먼트. 그래, 어토운먼트를 하는 거야. 큰 죄를 지었으면 크게, 작은 죄를 지었으면 작게, 알았지? 엄마가, 영어 공부 열심히 해서 편지를 쓸게. 테이프를 듣고 학원도 다니고……. 가끔 너 보러…….
말을 잇지 못한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제니: 이 아저씨를 어떻게 하려고 하는 거야?
(대답 못하는 엄마에게) 죽일 생각이야? 왜?
금자: (머뭇거리며) 날 죄인으로 만들었으니까…….
제니: 엄마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금자: 이 사람이 어떤 아이를 죽였는데……. 엄마가 도와줬어.
제니: (‘저런’ 하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내가 걔네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얘기해 줄까? (픽 웃음을 터뜨리는 금자, 울면서 웃는다. 일어나 다가오는 제니, 엄마를 안아준다. 이를 악물고 총을 꼭 쥔 채 내려놓지 않는 금자) 엄마는 내가 마음에 안 들지? 내가 다른 아이였으면 좋겠어?
금자: 그건 아닌데……. 몇 가지는 좀 고쳤으면 좋겠어. 넌 어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또……. 글씨를 좀 예쁘게 쓰길 바래.
제니: 그래도 나랑 있어서 행복하지 않았어?
금자: (끄덕끄덕) 행복했어. 죄지은 사람이 그래선 안 될 만큼. (총을 내리고 제니를 안으며) 제니 아임 쏘리, 아임 쏘리, 아임 쏘리……. 정말루 아임 쏘리…….
엄마를 안은 제니의 손, 미안하다고 말하는 횟수를 손가락으로 하나씩 꼽고 있다.
씬 118. 운동장/아침.
제니를 태운 박 이정의 차가 출발한다.
금자, 몸을 돌려 교사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씬 119. 미술실/아침.
백 선생의 오른 눈에 총을 대고 내려다보는 금자.
재갈이 물린 채 왼눈만 부릅뜨고 올려다보는 백 선생.
금자, 입술을 깨물고 공이치기를 뒤로 당긴다.
금자: 안녕히 가세요.
눈을 감는 백 선생.
시뻘겋게 충혈 되도록 백 선생을 쏘아보던 금자, 힘없이 총 든 손을 내리고 외면한다.
눈을 뜨고 안도하는 백 선생, 금자가 다시 이를 악물고 총을 들이대자 움찔한다.
금자, 또 한참 보다가 총을 내리고 심호흡하더니 다시 올리고, 세 번 반복한다.
가만히 겨누고 선 금자.
백 선생, 애절한 눈빛으로 금자를 올려다본다.
결국 코트 주머니에 총을 쑤셔 넣는 금자, 돌아서서 고개를 푹 숙인다.
백 선생 휴대전화에서 들리는 어린아이의 음성.
“선생님, 일어나세요. 출근해야죠. 선생님, 일어나세요.”
녹음된 아이 음성이 그치지 않자 돌아서는 금자, 신경질적으로 와이셔츠 주머니를 뒤져 전화기를 찾아낸다.
전원을 끄려다 멈추더니 뚜껑을 덮는다.
커튼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 쪽에 대고 휴대전화 줄에 꿰인 단추, 머리끈, 플라스틱 포켓몬, 반지, 구슬을 유심히 살피는 금자.
커다란 주황색 유리구슬을 빛에 비춰본다.
경악한 얼굴로 백 선생을 돌아본다.
눈이 마주친다.
얼어붙은 두 사람, 짧은 침묵.
갑자기 권총을 꺼내들어 달려드는 금자, 권총 손잡이로 머리를 후려친다.
의자에 묶인 채 옆으로 쓰러지는 백 선생.
금자, 우왕좌왕 막 걷는다. 안절부절못한다.
쓰러진 백 선생에게 발길질하는 금자.
두꺼운 커튼 자락을 홱 잡아챈다.
두두둑 뜩겨 나가는 커튼, 백 선생을 덮는다.
찬란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뭉게뭉게 먼지를 비춘다.
무너지듯 주저앉아 천천히 다섯 번 심호흡하는 금자, 겨우 진정하고 일어난다.
커튼을 젖힌 다음 의자를 일으켜 세운다.
울음을 삼키고 재갈을 풀어주는 금자, 휴대전화 줄을 백 선생 눈앞에 내밀고 대답을 기다린다.
백 선생: (입 안에 고인 피를 뱉더니) 금자야, 눈 화장이 그게 뭐냐…….
금자의 손, 백 선생의 코를 꽉 쥔다.
한참 고요하다.
결국 숨쉬기 위해 입을 벌리는 백 선생, 재빨리 도로 재갈을 물리는 금자, 무릎 꿇고 앉는다.
백 선생 구두코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엄지발가락 위치를 확인한다.
오른쪽 구두코에 조심스럽게 권총을 가져다 대고 한 발 쏜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백 선생을 흘낏 올려다보는 금자, 왼발에도 쏜다.
씬 120. 복도/아침.
미술실 문을 열고 나오는 금자, 벽에 기대선다.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기다린다.
두 번 헛기침해 목을 고른다.
금자: 차 돌려.
씬 121. 국도/아침.
운전하는 이정,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핀다.
조수석에 앉은 금자, 입술을 깨물고 생각에 잠겼다.
금자: (혼잣말) 어쩐지……. 너무 잘 풀린다 했어…….
씬 122. 경찰서 앞/낮.
약속이 있는 듯 시계를 보며 외출하는 최 반장.
씬 123. 커피숍/낮.
창 밖 가로수 앙상한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금자 손에 들린 휴대전화 줄이 허공에 대롱대롱.
꼼짝도 않고 줄에 달린 물건들만 쏘아보는 최
반장, 맞은편에 앉아 지켜보는 금자.
금자: (고개를 숙이고 괴로워하는 음성으로) 그때 진범을 밝혔으면 안 죽었을 애들이에요. 그렇잖아요? (고개 들어 뚫어지게 바라보며) 이런 맘 아시잖아요. 네 명이에요.
최 반장, 생각에 잠긴다.
씬 124. 백 선생 집/낮.
이정과 함께 서재를 뒤지던 금자, 휴대전화가 울리자 받는다.
금자: 오늘은 못 나간다. 그랬잖아요.
장 씨: (소리) 그게 아니라……. 누가 찾아왔어.
금자: 누가요?
장 씨: (소리) 그게, 글쎄…….
통화하면서 책상을 뒤지던 금자, 서랍을 길게 빼고 그 아래 눕는다.
올려다보면, 서랍 밑판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놓은 구식8mm 비디오카세트들이 빽빽하다.
금자: 누구라고 말 안 해요?
씬 125. 나루세/낮.
장 씨 고개 돌리면, 케이크를 먹으며 이쪽을 흘끔흘끔 살피는 제니의 양부모.
캥거루와 코알라가 그려진 동물원 티셔츠에 헐렁한 니트 가디건을 입은, 여전히 루저 꼴. 여행용 트렁크 두 개.
장 씨: (답답한 얼굴로) 뭔 말이 통해야지……. (수화기를 막고 양부모에게) 저……. 일본말은 안 되세요?
씬 126. 백 선생 집/낮.
구식 8mm 캠코더와 연결된 모니터.
캠코더에 카세트를 넣는 이정.
최 반장과 나란히 소파에 앉은 금자, 리모컨 컨트롤러를 누른다.
영상이 시작되고, 잠시 후 모니터 하단에 볼륨 표시 줄이 나타난다.
0을 향해 줄어든다.
이정, 최 반장 옆에 앉는다.
아예 처음부터 옆으로 몸을 돌려 앉은 이정, 한눈을 판다.
금자, 고개 숙이고 바닥만 본다. 혼자 화면을 응시하는 최 반장.
이정, 눈길은 다른 방향으로 고정한 채 손만 뻗어 탁자 위 담배와 라이터를 집어간다.
이정이 담배 피우는 동안 조용히 일어서서 나가는 최 반장.
토하는 소리가 들린다.
여전히 모니터를 외면하고 앉은 두 여자.
씬 127. 금자 아파트/저녁.
침대 모서리에 앉아 캠코더를 눈높이로 들고 들여다보는 제니, 고양이 노는 모양이 재생되고 있다.
고양이가 그리워 우는 제니.
꺼져가는 촛불을 새 양초로 옮겨 붙이는 양엄마.
멀리 옷장 앞에는, TV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만 놀려 제니의 짐을 싸는 양아빠.
씬 128. 운동장/저녁.
넉 대의 고급 승용차, 한 대의 SUV가 나란히 주차된 가운데, 경차 한 대가 들어온다.
멀리, 불 켜진 교실 하나.
씬 129. 교실/저녁.
초등학생용 걸상에 조용히 앉은 남녀노소 9명 유족들의 면면.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에 일제히 돌아본다.
씬 130. 복도/저녁.
마룻바닥에 놓인 포터블 발전기.
동화: (소리) 엄마……. 엄마…….
씬 131. 교실/저녁.
동화 엄마의 일그러진 얼굴.
동화 아빠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엎드린다.
동화엄마: (절규) 동화야!
모두 교탁 위에 놓인 TV모니터를 주시한다.
교탁 옆에는 스탠드에 꽂힌 마이크, 앰프.
동화: (소리) 저 좀 데리러 와 주세요, 엄마……. 무서워요…….
모니터 화면.
겁에 질린 얼굴로 의자에 앉은 동화, 단추 달린 옷을 입었다.
동화에게 다가가는 백 선생의 젊은 모습.
흘낏 카메라를 돌아보는 얼굴에서 프리즈 프레임.
사람들 시선을 돌리면, 리모컨 컨트롤러를 든 금자.
금자: (침착하게) 힘드시더라도 이 얼굴을 잘 봐두시기 바랍니다.
잠시 후.
새 비디오카세트를 끼우는 금자.
금자: 다음은 구십 오년에 살해된 세현입니다.
세현이 얼굴이 재생된다.
세현 아빠, 손등으로 눈두덩을 연신 눌러댄다.
독하게 화면을 응시하는 누나.
뒤에서 부루스타에 물을 끓이는 최 반장.
세현: (소리) 아빠, 쌈 안 하고 공부 열심히 할 테니까 돈을 꼭 보내주세요…….
세현이의 음성이 계속 들리는 가운데, 지켜보는 사람들.
금자, 리모컨 컨트롤을 누르자 소리 꺼진다.
모니터 위에 놓인 캠코더에 카세트를 바꿔 끼운 뒤 돌아서는 금자.
금자: 구십 육년, 은줍니다.
은주: (소리, 엉엉 울며) 답답해. 풀어주세요……. 깜깜해요……. 숨 막혀 죽겠어요.
모니터 화면.
실내전경.
의자엣 올라선 은주, 머리에 비닐봉지를 뒤집어썼다.
멀찍이 떨어진 데 앉아, 줄을 잡아당기는 백 선생.
은주 발밑에 의자가 쑥 빠진다.
칭얼대던 소리도 뚝 끊긴다.
경악하는 사람들.
담담하게 보던 은주 할머니,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은주 할머니를 앉히는 사람들.
금자, 카세트를 바꿔 끼운다.
금자: 이천년, 유 재경.
재경 아빠, 포켓용 술병을 홀짝인다.
재경이 울음소리가 이어지다가 재생이 끝난다.
걸상을 들어 책상을 거듭 내리치는 재경 아빠.
말리는 유족들, 결국 한 덩어리로 엉켜 운다.
잠시 후.
모두 금자 하는 말을 경청한다.
금자: (최대한 담담하게) 백 한상은 강남의 영어학원 교사였습니다. 거기서 희생자를 고르고, 사건을 저지른 다음 다른 학원으로 옮겨갔죠. 언제나 자기 반 아이들은 피했기 때문에 한 번도 경찰의 용의선상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아이들을 몹시 귀찮아했던 백 한상은, 유괴하자마자 비디오로 찍어놓고 곧바로 죽이곤 했습니다. 범인과 협상하는 동안 여러분이 전화로 들으셨던 아이들 음성은 이미 죽은 다음에 비디오에서 복사한 것입니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두 가지 있습니다. 법적인 처벌을 원하시면 저기 계시는 최 반장님께 인도할 거구요……. (쟁반에 녹차와 커피를 받쳐 들고 유족 사이를 돌아다니는 최 반장. “커피하고 녹차 있는데요.”) 좀 더 신속하고 개인적인 처형을 원하신다면 바로 여기서 당장, 가능합니다.
재경엄마: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그 놈한테두 자식이 있나요?
금자: 임신시킬 능력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재경 아빠: 그럼 도대체 그 돈을 다 갖다 뭐했대요?
금자: 저축을 했습니다. 물론 그 돈은 여러분께 돌려드릴 겁니…….
동화엄마: (말을 끊으며) 새끼도 없는 놈이 머에쎄다 돈을 쓸라꼬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이고오!
금자: (망설이다) 요트를 사려고 했답니다.
탄식하는 사람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페이드아웃.
씬 132. 운동장/밤.
멀리 보이는 교사.
씬 133 교실/밤.
동화 엄마가 일어선다.
모두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동화엄마: 어짜피 경찰은 머……. 곤봉만 들었지, 그 노무 범인도 몬 때리잡았다. 아입니꺼. 경찰에 넘기바봤자 재판도 끝도 엄씨 할끼고, 마마 그 기자새끼들 하미 온갖 노무 인간들 하미……. 그 노무 호기심에……. 아따라마.
재경아빠: (술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아. 끔찍하다, 끔찍해…….
재경엄마: (조심스럽게) 재판해봐야 어차피 사형일 텐데, 그 재판하고 사형 집행두 다 비용 드는 일이고, 세상에 돈 안 드는 일 없잖아요. 다 국민의 혈세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원모아빠: (말을 끊으며) 금자씨한테 맡기는 게 어떨까요? 감옥도 갔다 왔으니까 상대적으로 쉬울 것 같은데…….
세현누나: 비겁해요! 우리 아이들이잖아요.
원모아빠: 그럼 하고 싶은 사람은 하고, 안 하고 싶은 사람은 안 하고 자율적인 방향으…….
세현누나: 아예 그 새끼한테 여기서 죽을래, 재판 받을래, 물어보죠? 자율적으로?
동화아빠: (원모 아빠에게) 쪼매 전에는 경찰에 넘기뿌자카디이만 고담새는 금자씨한테 맡기자하더니만……. 인제는 마마 혼자 빠지겠다꼬? 도대체 우짜자는 깁니까?
잠시 후.
원모 부모를 뺀 나머지 사람들, 한 팔을 올리고 있다.
금자: 원모네두 다수결에 따라주셔야 합니다, 아시죠?
원모아빠: (아내를 가리키며) 이 사람은 심장이 약해서…….
재경엄마: (답답하다는 듯) 나도 약해요, 심장…….
금자: 그럼 원모 아빠만 하세요, 한 집에서 한 분만 참여하시면 되겠죠. (좌중을 향해) 괜찮으시죠?
세현누나: (냉소적으로) 나중에 원모 엄마가 우리 다 고발하면 어떡해요?
은주 할머니: 자기 남편이 껴있는데 어떻게 그러겠어.
재경아빠: 이혼할 수도 있잖아?
원모아빠: 증거를 남기면 되잖아요. 우리 다 사진을 찍어둡시다. 아무리 나중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구 해두 사진이 있으면…….
동화아빠: (발끈해서 말을 끊으며) 양심의 가책? 저런 새끼 죽이는데 무신 놈의 양심의 가책? 뿌짭아놓고 안 죽이마 그기 바로 양심의 가책이라카는 기라.
금자: 제가 한 말씀 드릴게요. 저는 교도소에서도 살인을 한 사람입니다. 십삼 년 준비해서 백 한상을 잡은 것도 저고요. 만약에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밀고를 한다면…….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원모 부모님은 저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분들이고, 전 이 분들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원모 부모님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저를 믿으시고 이 문제는 여기서 정리했으면 합니다. (조용히 둘러본다. 아무도 반발하지 않자.)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한 사람씩 들어가고 다른 사람은 기다리는 걸로 할까요. 아니면 한꺼번에 들어가는 걸루 할까요?
동화엄마: 머슬 하나씩 해, 짜드르 한꺼번에 해뿌리지.
세현누나: 이렇게 사적인 일을 딴 집하고 같이 할 이유가 없어요. 아빠, 안 그래?
대답 없이 얼굴만 쓰다듬는 세현 아빠.
재경엄마: (옆에 앉은 재경 아빠를 곁눈질하며) 혼자 들어가면 무섭지 않을까요? 위험할 수도 있구…….
은주할머니: 그 정돈 각오해야지.
재경아빠: (약간 취해서) 각자 하구 싶은 대루 합시다, 까짓 거! 뭐 꼭 통일할 필요 있나? 갈비탕 집 온 것도 아니구. (일제히 쏘아보는 사람들. 재경 엄마, 눈물 글썽글썽한 눈으로 오래 노려본다. 잠깐 위축되는 듯해 보이던 재경 아빠, 이내 다시 기세등등해져서 전처에게) 뭐어, 이혼한 마당에 꼭 부부 동반해야 되나? 어차피 인제 남남 아냐? 씨발…….
사람들 시선을 의식하고 고개 숙이는 재경 아빠. 원모 엄마가 손을 든다.
원모엄마: 저기요……. 한꺼번에 하는 건……. 너무 쉬운 거 같아요.
원모아빠: (놀라 돌아보며) 여보?
원모엄마: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나, 우황청심환 가져왔거든? (남편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당신은 그때 금자씨 손가락도 못 만졌잖아…….
다들 놀라 쳐다보는 가운데 카메라, 앰프에서 빠져나온 케이블을 따라간다.
씬 134. 옆 교실/밤.
케이블을 따라 복도로, 옆 교실에 설치된 스피커로 움직여 가는 카메라.
컴컴한 교실, 재갈 물고 의자에 묶인 백 선생.
의자 아래에는 넓게 비닐을 깔아놓았다.
금자: (소리) 그럼, 원모 아버지는 안 하시고 원모 어머니 혼자 하시고 은주 할머니도 혼자 하시고 세현네 따로, 재경이네하고 동화넨 같이 하시고……. 이렇게 하면 됐나요?
“예에…….”
다들 동의하는 소리.
동화아빠: (소리) 가입시더, 고마!
부시럭 부시럭, 퉁탕거리는 소리, 책걸상 끌리는 소리에 흠칫 놀라는 백 선생.
금자: (소리) 잠깐만요, 잠깐만요…….
책걸상 소리 딱 멈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백 선생.
씬 135. 교실/밤.
금자: 들어가는 순서를 정해야 되지 않을까요?
눈만 끔뻑거리며 마주보는 사람들.
책상에는 각종 흉기들.
잠시 후.
창 앞에 선 세현 아빠, 밖을 내다보며 담배 피운다.
길쭉하게 접은 쪽지들이 담긴 종이컵을 들고 다가가는 최 반장.
세현 아빠, 하나 뽑아 펴 본다.
다가와 같이 들여다보는 세현 누나.
원모 엄마, 쪽지를 펼치면 숫자 ‘1’이 적혀있다.
씬 136 복도/밤.
부엌칼을 들고 부들부들 떨면서 우황청심환을 먹는 원모 엄마, 빈손의 원모 아빠, 무쇠 부엌칼을 든 재경 엄마와 군용 대검을 든 재경 아빠, 회칼 든 동화 엄마, 장도리 든 동화 아빠, 쇠막대기를 든 세현 아빠, 긴 과도 든 세현 누나, 아무 것도 안 든 은주 할머니의 순서로 앉아 대기한다.
각기 제비뽑기한 종잇조각을 들었다.
교실에서 못질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비닐 우비와 수술용 고무장갑을 전달받는 사람들.
전 남편이 무뚝뚝하게 내민 술병을 못 이기는 척하며 받아, 한 모금 맛보는 재경 엄마.
아예 들이붓듯이 콸콸 마셔버린다.
당황하는 재경 아빠, 머쓱해져서 세현 아빠에게 괜히 말을 건다.
재경아빠: 세현 아부진……. 그거 갖구 되겠어요? (자기 칼을 보이며) 쓰구 드리까?
세현아빠: 가방을 뒤적거리면서, 우물거리는 말투로 들릴 듯 말 듯) 괜찮은데…….
커다란 날을 꺼내는 세현 아빠, 나사식으로 쇠막대기와 연결해 도끼를 완성한다.
최 반장이 장도리를 들고 교실에서 나온다.
최 반장: 들어가시죠. (하얗게 질리는 원모 엄마, 입술이 떨린다. 남편이 걱정스런 얼굴로 팔을 꽉 붙든다. 손을 힘들게 떼어내고 일어서는 원모 엄마, 차마 못 가는 발걸음을 옮기며 교실 문을 열려다 돌아본다. 슬쩍 외면하는 남편. 최 반장, 원모 엄마의 칼을 빼앗아 들고) 다들 보세요. (칼날을 아래로 향하게 눕혀 잡은 모양을 보여주며) 이렇게 하면, 찌를 때 날 끝이 위로 미끄러지면서 잘 안 들어갑니다. (찌르면서 칼이 손에서 미끄러지는 모양을 보여주며) 그럼 손이 미끄러져서 다치는 수도 있구요. (칼날이 위로 가게 쥔 모양을 보여주며) 그러니까 항상 이렇게 잡아 주세요. (칼끝이 아래로 가게 세워 잡고) 아니면, 아예 이렇게……. 허공에 휘둘러 보이며) 찍으시든지.
씬 137. 옆 교실/밤.
컴컴한 실내, 바닥에 놓인 깃 달린 막대 형광등.
백 선생 곁에 선 금자.
의자 다리에 긴 각목을 두 줄로 대고 못을 박아 마룻바닥에 고정시켜 놓았다.
그 아래 비닐.
손으로 자기 심장을 누르고 백 선생을 내려다보는 원모 엄마, 우비를 입었다.
마주 노려보는 백 선생.
갑자기 원모 엄마가 백 선생 재갈을 풀어주자 놀라는 금자.
원모엄마: (목이 갈라져 겨우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왜 왜 그런 짓을 했어요? 이렇게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왜……. 도대체…….
백 선생: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모님.
씬 138. 복도/밤.
백 선생의 억눌린 듯 낮은 비명이 울린다.
탄식하거나, 외면하거나, 숨을 들이쉬거나, 눈을 감으며 조용하게 반응하는 사람들.
은주 할머니만 빼고 모두 우비를 입었다.
원모 엄마 나오자, 일제히 쳐다본다.
홀가분한 얼굴의 원모 엄마.
고무장갑을 낀 최 반장, 피 묻은 칼을 받아든다.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인 남편에게 다가가는 원모 엄마, 어깨에 손을 얹는다.
원모 아빠, 아내에게 안겨 억제된 울음을 터뜨린다.
서로 손을 붙잡고 일어서는 동화네와 재경네, 들어간다.
씬 139. 옆 교실/밤.
백 선생을 둘러싼 네 사람의 얼굴.
동화아빠: (차분해지려 애쓰며 속삭이듯) 이칸다고 죽은 아가 살아 돌아오는 거는 아이잖아, 여보……. 그자?
아내, 말없이 칼을 들더니 이를 악물고 한 발 나선다.
거의 동시에 나머지 셋도 덤벼든다.
비명이 잇달아 터진다.
백 선생을 에워싸고 흉기를 휘두르는 네 사람의 뒷모습.
무표정하게 지켜보는 금자.
씬 140. 복도/밤.
비명 소리가 연달아 들리는 가운데, 세현 누나가 과장되게 크고 빠른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현누나: 다들 짱짱한 집안이신 거 같은데요. 저거 보세요, 동화 엄마……. 세무 가죽에 피 튈까봐 부츠 벗구 하는 거……. 이 상황에서 이해가 돼요? 저희는요, 그 놈에 영어학원두 엄마가 호텔 청소하면서 보낸 거거든요? 몸값 못 맞춰서, 온데 다 손 벌리구 다녔어요. 결국 은행에 집 넘어가고……. 친척들 사이에서도 왕따되고…….
은주 할머니: 우리 며느리는 자살하고 아들은 이민 갔어.
말문을 닫은 세현 누나.
네 사람 나온다.
벌떡 일어나는 세현 아빠, 누나도 뒤따라 일어선다.
세현 누나, 돌부처처럼 꼼짝도 못하고 선 아빠를 끌고 들어간다.
세현네가 들어가는 동안, 최 반장이 네 사람으로부터 무기를 받아든다.
앞만 보고 꼿꼿이 앉은 은주 할머니.
씬 141. 옆 교실/밤.
딸에게 이끌려 들어오는 세현 아빠, 막상 백 선생을 보더니 순간 멈칫, 얼굴이 시뻘개 진다.
괴성을 지르며 도끼를 치켜들고 덤벼든다.
세현 누나: (아빠를 붙잡으며) 아빠! (도끼 든 팔을 꼭 붙들고) 아빠……. 우리가 끝이 아니잖아. 은주 할머니두 계시니까……. 응? 응?
식식거리면서 핏발 선 눈으로 백 선생을 노려보는 세현 아빠.
씬 142. 복도/밤
백 선생 비명소리, 일을 끝낸 사람들은 앉았지 못하고 각자 이리저리 서성인다.
홀로 앉은 은주 할머니,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는다.
문이 열리면 기진맥진한 세현 아빠, 제풀에 쓰러져 막 운다.
세현 아빠를 일으키는 사람들, 대걸레를 가져와 바닥의 피를 닦는 최 반장. 어수선한 가운데 조용히 일어서는 은주 할머니.
씬 143. 옆 교실/밤.
백 선생을 내려다보는 은주 할머니, 동정의 빛은 조금도 없이 냉정하다.
씬 144. 복도/밤.
조용히 자기 자리에 앉는 은주 할머니.
교실에 들어가는 최 반장.
씬 145. 옆 교실/밤.
최 반장, 조용히 다가가 백 선생의 목덜미에 꽂힌 가위를 뽑아 들여다본다.
빨간 손잡이의 가위, ‘1-3 황은주’라고 적힌 스티커가 붙었다.
무릎에 힘이 빠지는 듯 주저앉는 금자, 심호흡한다.
잠시 후.
의자와 백 선생은 구석에 치워졌다.
세현 누나와 동화 부모, 재경 엄마가 비닐의 네 귀를 들고 섰다.
재경 아빠가 아래로 양동이를 갖다 대자, 가운데 고인 피 웅덩이로 긴 칼을 찔러 넣는 금자.
비닐이 터지면서 양동이로 쏟아지는 피.
비닐을 든 넷, 넓은 담요를 개듯이 둘씩 다가서면서 착착 접는다.
재경 아빠는 양동이를 들고 나간다.
세현 아빠와 은주 할머니는 여기저기 찍힌 피 발자국을 대걸레로 싹싹 지운다.
최 반장과 동화 아빠는 시신을 들것에 옮긴다.
잠시 후.
최 반장, 소형 자동카메라를 들고 앵글을 잡는다.
어두운 실내에 플래쉬가 터지면서 유족들 실루엣이 순간적으로 드러났다 사라진다.
좀 떨어진 데 서서 지켜보는 금자.
씬 146. 운동장/밤.
학교 건물에서 불빛 하나가 흔들리며 나와 앞장선다.
그 뒤로 사람들, 들 것을 들고 따른다.
씬 147. 뒷산/밤.
최 반장이 곡괭이로 언 땅을 찍어 놓으면, 나머지 남자들은 양쪽으로 새끼줄을 연결한 긴 삽으로 힘을 합해 파들어 간다.
땀을 뻘뻘 흘리는 남자들, 한데 모여 오돌오돌 떠는 여자들.
잠시 후.
구덩이 안에 누운 백 선생.
무기 상자와 피 묻은 의자, 우비와 장갑, 비디오카세트 따위도 던져진다.
사람들, 한 삽씩 흙을 퍼 넣기 시작한다.
금자: 저, 죄송한데요. (동작을 멈추고 돌아보는 사람들) 잠깐만 물러서 주시겠어요? (사람들 물러서자 한 발 나서면서 총을 빼드는 금자, 시신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두발을 쏜다. 백 선생 턱과 뺨에 작은 구멍이 난다. 금자 총을 던진다. 메아리마저 사라지자.) 고맙습니다.
잠시 후.
다 덮은 무덤 위에서 천천히 자리를 옮겨가며 발을 굴러 땅을 밟는 유족들의 롱 쇼트.
사람들 입김.
금자, 웃는다.
기괴해 보일 만큼 오래 고정된 미소.
씬 148. 금자 아파트/밤.
방송이 끝나 노이즈만 가득한 TV화면.
좁은 침대에 세 사람.
제니 좌우로, TV보던 자세 그대로 상체만 뒤로 누워 자는 양부모.
우두커니 앉아 천장을 보는 제니.
씬 149. 나루세/밤.
다섯 자루 촛불이 꽂힌 케이크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는 금자.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
세현아빠: (노래) 생일 축하합니다…….
느닷없이 노래를 부르자 당황하던 사람들, 하나 둘 따르기 시작한다.
다함께: (노래):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머뭇거리며 단조로 변한다.
각자 자기 아이 이름을 부르다 흐지부지 노래를 멈춘다.
침묵.
세현아빠: (우물우물) 미안합니다. 꼭 생일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은주할머니: 생일이라고 치지, 뭐. 생일 축하합니다.
사람들, 촛불을 향해 입을 모아 후우.
아무 장식도 없는 검정 초콜릿 케이크를 아홉 조각으로 잘라 나눠주는 금자.
포크로 조금씩 떼어 입에 넣는 사람들.
시큰둥하던 얼굴에 경탄하는 표정이 떠오른다.
놀랄 만큼 맛있다는 눈빛을 주고받는 사람들, 너도 나도 한 입씩 크게 떼어 먹기 시작한다.
조용히 지켜보는 금자.
눈을 감고 맛을 음미하는 사람들. 접시에 포크 긁히는 소리.
옆에 앉은 세현 누나, 몸을 기울여 귀엣말한다.
세현누나: 저기……. 돈은 계좌로 넣어주나요? (무슨 말인가 잠깐 생각한 금자, 고개를 끄덕인다. 세현 누나, 슬쩍 종이쪽지를 내밀고) 저희 번호…….
안 듣는 척하던 사람들, 잠자코 종이와 펜을 꺼내 계좌번호를 적는다.
금자에게 전달한다.
어색한 침묵.
세현아빠: 불란서에서는, 이렇게 말이 끊어질 땐 천사가 지나가는 거라 그러든데…….
재경엄마: 잠깐 기다려 볼까요? 말하지 말구…….
동화 엄마, 주머니에서 단추를 몰래 꺼내 손에 쥔다.
원모 엄마는 주황색 구슬, 은주 할머니는 머리끈, 재경 아빠는 구슬반지를 각각 꺼내, 그리고 세현 아빠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만지작거린다.
모두 안타까운 눈빛으로 허공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아내려 애쓴다.
정적이 흐른다.
딸랑딸랑 종 울리는 소리, 문이 벌컥 열린다.
근식이 들어선다.
놀라서 우뚝 서지만 금자를 발견하고 안도한다.
동화아빠: 와. 눈이 오는 갑네!
사람들, 내다보면 아기 머리 만하게 떨어지는 눈송이들.
부자연스러우리만큼 과장되게 환호하는 사람들.
씬 150. 금자 아파트/밤.
제니도 잠들었다.
창밖에 내리는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