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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문제시
길 위에서 만나는 시
-시문학 9월호를 읽고
김지숙(문학평론가)
인류가 이룩한 문명 가운데 가장 멋진 요소의 하나가 길이다. 인생의 많은 부분이 길 위에서 이루어지고, 길의 형태만큼이나 다양한 삶이 있기 때문에 길의 속성은 흔히 삶에 비유된다. 그리운 길이든 새로운 길든 그 길은 비정착성, 비주거성, 이동성의 의미를 지닌 채, 삶의 내면과 외연을 아우르며 미래를 향한다. 그래서 누구나 길을 나서면 설렌다. 지난 9월호에 실린 시들을 중심으로 ‘길’과 이미지, 성향, 상호 작용 등을 살폈다. 포괄적 개념을 지닌 길은 새로운 존재로 나아가며, 실재와 절대를 향하고, 초월하는 상승의미(Ascent), 구원하는 하강의미(Descent), 내세상징(Passage), 동경(Pilgrim) 등을 의미한다.(진쿠퍼,1994)
붕새도 봉황도 모두 동물병원에 입원을 시켰기에 완행열차를 탔다. <중략>목성역, 천왕성역, 은하철도 간이역마다 죽은 시인들이 마중 나온다. 나이드니 잠 길도 완행이다. 기적이 운다. 자명종이 울어댄다. 박제천, 「완행열차」일부
새벽 별빛 속에 전신주의 불빛이 일렬로 서 있다가 열차가 움직이면 뒤로 한씩 물러나고 어둠을 삼키는 열차가 어둠을 뚫고 지나간다. 간혹 차창 안에서 선잠깬 귀부인의 들뜬 얼굴은 하얗게 부어 있고, 밤새 시달린 듯 저 여인의 치부에서 맑은 샘물이 흘러넘칠 것 같다. <중략> 태양이 높이 떠오르고 열차는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정민호 「새벽차를 타고」일부
우리는 길을 걷지만 길 아닌 것들과 어울리는 과정에서 이전의 삶에서 한 차원 높은 삶으로 성숙하거나 정체성을 확립하기도 한다. 길 가운데서도 기찻길은 비교적 쾌적한 상태로 목적지를 향해 이동 가능한 교통수단이다.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창은 밖의 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이고 안의 시선은 밖으로 끌어내는 통로가 된다.(A.K.Ziolkovksy,1978)「완행열차」에서는 남명 가는 길(현실), 생각 속의 길, 죽은 시인을 만나는 길(꿈), 붕새 봉황을 입원시키는(상상) 길의 4가지 층위의 길들이 꼴라주 되어 낯선 느낌을 갖게 한다.「새벽차를 타고」에서는 귀부인, 안내 방송인 등과 같이 다른 삶을 사는 이들이 ‘기차’라는 동일 공간 내에서 같은 길을 가며 동일한 풍경을 대하지만 서로 어울리기보다 각자의 스마트폰을 꺼내 일출을 찍는 고립과 서로에 대한 무관심이 나타난다. 이 두편의 시는 ‘기찻길’을 달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전자는 한사람이 여러 길을 가는 다층위 구조로 이루어져 복잡한 내면의 심사를 드러내고, 후자는 여러 명이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서 함께 가는 단층위 구조로 단조로운 삶의 방식이 나타나는 점에서 대조를 이룬다.
바다가 파도치지 않으면 물이 썩지 않는다/‘세상살이 파도타기를 어떻게 해왔는지 나도 모르겠다/망망대해를 일엽편주로 앞만 보고 젓다가 칠십에 왔구나‘/‘이모 큰 배를 타야지요. /<중략>/그래도 나는 이렇게 살아온 것만도 감사한다./다만 아이들이 우리 세대의 정신을 닮기를 바랄 뿐이다.’
-이신강, 「파도1」전문
뭣 하러 가는지/어디로 가는지/말하지 않아도 /달리게 하는 너/사람마다 머릿속에/그려진 지도를 토하면서/가는 것일까/보이지도 않고/잡히지 않지만/기억으로 접어두었던 너를 /다시 집어서 오는 이들
그리움의 법칙인지 모른다. -유재봉, 「길」일부
케네스 버크의 말처럼 길은 지향적 본질(directionalsubstance)을 지니며, 동작(motion) 동기(motive) 운동(movement) 등으로 이루어진 장소(Knneth Burke,1955)이다. 길은 중도에 멈추지 못하고 끝없이 걷다보면 희망, 좌절이 숙명처럼 얽힌다. 길은 언제나 누군가의 첫 걸음으로 시작되며, 때로는 애환과 연민으로 이어진다.「파도1」은 바다를 인생길에, 세상살이를 파도타기에 비유한다. 또한 파도는 바다의 방부제이며, 인생을 빛나게 하는 것은 파란(波蘭)이라 한다. 늦은 나이에 조카의 훈계를 듣지만 망망대해를 일엽편주로 올곧게 산 삶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반면, 「길」에서 화자는 동일 공간, 동일, 동선 속을 반복적으로 살아가며 입력된 길을 기억하고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길을 따라 걷는다. 이 두 편의 시에서는 삶을 사는 서로 다른 인생길의 양태가 나타난다. 전자는 묵묵히 혼자 걷는 인생길이자 정신적 의미로 자긍심을 지닌 현실적 삶에서 기쁨을 찾는 길인 반면, 후자는 생활과 직결되는 현실적 길과 내면의 정서를 이끌어내는 생각 속의 길이라는 두 층위가 나타난다. 어떤 길이든 용도에 따른 적절성은 중요하다. 그래서 길은 경우에 따라 새로 만들기도, 고치기도 하는데, 시간과 공이 들여야 멋진 길이 된다.
70세 중반이 되어/고향집이 그리운 걸 어찌할거나/<중략>/팔아먹은 옛집을 찾았다/그 집과 땅이 몇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고 한다.//나는 그 집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밖에서 정원수 사이로 속을 들여다보고만 왔다. -김원태,「죄인」일부
출근길 급히 달리는 도로 위/고양이 한 마리/연분홍 창자 도로 위에 깔려 있다//꺼지지 않은 마지막 숨결인지/다리를 파르르 떨고 있다.//먹이를 찾아 도로에 나왔을까/떠나간 짝을 찾아 6차선 도로에 나왔을까 -강소이, 「바퀴 아래」일부
벤야민은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을 ‘플라너리(flnerie)라고 했다. 도시의 풍경을 향유하면서 뜻밖의 발견으로 기쁨을 느낀 순간을 일컫는다. 우리는 길을 걷고 인생길을 가면서 정서적 육체적 경험을 한다. 첫 출발지이자 삶의 안식처인 고향으로 가는 길이 때로는 슬프고 불안한 장소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고향 길에는 ‘장소의 성질’(Todd Snow,1967)이 나타난다.「죄인」에서 화자는 고향을 찾지만 자기 잘못으로 상처가 된 고향집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딱한 처지에 놓인다.「바퀴아래」에서 화자는 현대인이 진정성을 상실한 채 질주하는 차에 깔려 죽은 길고양이 주검에 냉정함을 꼬집는다. 사통팔달 도로지만 종착점은 어디에도 없다. 이 시에서 ‘길’은 부정적이며 끔찍하다. 화자가 이를 반성하고 자기완성을 이루려는 과정에서 실존의식이 나타난다. 위의 두 편의 시에는 옛길과 새길, 종착지점 유무에 따라 길이 나뉜다. 전자의 옛길은 고향길로 도착점과 자연경관이 있으며 공동체 정신도 남아 있다. 후자의 새길은 인공적 길로 닫힌 공간을 열지만 교통수단에 불과하다. 끝없이 잘 닦인 도로는 효율적이고 질서정연한 이동하는 수단이 되지만 자연경관도 공동체 정신도 도착지점도 사라졌다. 하지만 두 편의 시에서 볼 때 옛길에서는 자신의 잘못으로, 새길에서는 현대인의 욕망으로 하강적 이미지(Descent:진쿠퍼)를 떨쳐내지 못한 채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슬픈 길이 된 다.
헛발을 디뎌 넘어진다/과거와 현재 동과 서가 함께 북적이는 국립중앙박물관 계단/을 오르다가,//(나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으며 어느 나라로 넘어졌는가?)<중략>광개토대왕이 지안시 마센항 강가에서 이국의 어느 농부가/찾아주었다는/자신의 비문을 들쳐 메고 “1600여년 만에야 잠에서 깨어나/니 햇빛이 그립군”하시며/고구려관에서 햇빛 쪽으로 걸어 나오신다<중략>/모처럼 지구라는 행성에 산책 나오신 하나님/추락하는 운석에 맞아 전신 화상을 입은 모습 sns가 뜬다// 황사가 밀려온다//엔트로피! 엔트로피! 엔트로피! 엔트로피!// 외과진료실이 동맹휴업으로 문을 닫았다는 호외가 내 발밑/에서 구겨진다. -송시월, 「엔트로피」일부
붉은 사과 한 알에 갇혀있다. 긴긴 겨울/파미르의 오지 사람들은 멀고먼 험로를 걸어/차(茶)와 밀을 사러 간다./<중략>/분명한 명망의 칼라하리 사막/느릿느릿 지나가고, 먼짓빛 마른 풀마저 귀한 사막에는/둥근 갈색 공에 대가리 달린 작대기를 꽂아 놓은 것 같은/타조 새끼들이 저만치 앞서 가는 어미를 따라/열사(熱沙)의 아지랑이 속을 아른아른 지나간다.<중략>/고행 끝에 살아남은 짐승들이/물가에 다 모인다. 힘센 차례로 물을 먹고 돌아가는 짐승들을/사자들도 언덕에 앉아서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다. 기다림의/빈 물가에 마침내 타조 새끼들이 발을 담근다. -조명제, 「희고 붉은 詩」일부
51년의 시간을 태우고/둥근 지구를 끊임없이 굴린다/흰별이 징검다리를 놓고 있는 플랫폼,/나는 유레일패스를 열고/실크로드 길을 나선다/융단처럼 깔린 풀밭을/말가이 모자를 쓴 유목민들이/눈에 블라인드를 친다/블라인드에 별이 떨어진다./뒤통수에 열린 길, -김금아, 「블랙메탈」일부
서브토피아(subtopia)란 목적이나 관계에 어떤 패턴도 가지지 않고 인위적으로 구조물을 섞어 놓은 곳으로 무작위로 위치한 점과 지구의 집합들이 오직 길과 연결되어 있다(렐프,2005)「엔트로피」에서는 화자가 헛디딘 길, 광개토대왕이 걸어오는 길, 하나님이 지구로 산책 나온 상상 속의 길, 자연에 경종을 울리는 황사길이 나온다. 호외가 떨어진 길로 화자와 하나님이 치료를 받으려 하지만 길이 닫혀 있어 치유가 불가능하다. 「희고 붉은 詩」에서 길은 ‘험로’이다. 사막에서 타조 떼가 걷는 길, 설산야크가 걷는 추운 길, 살아남은 짐승이 향한 물가의 길로 생존과 직결된 길이다. 건너뜀과 단절로 ‘험로’의 이미지는 삶과 죽음의 통로로 ‘살아남은 짐승만이 가는 길’이라는 운명으로 연결된다. 「블랙메탈」에서는 지구가 굴러가는 길, 흰 별이 징검다리를 놓은 길, 실크로드, 그리고 뒤통수에 열린 길 등으로 길의 층위는 다양하면서 모호하다. 비논리적 공상이 현대적 감각에 덧입혀져 각각의 길이 단절성을 지니지만 현실을 초월하는 경쾌한 길이 변화를 주도한다. ‘뒤통수’ ‘징검다리’ ‘유레일 패스’ 등과 같이 주변에 있는 사물들이 ‘흰 별이 놓은 길’ ‘뒤통수에 열린 길’ 등과 같은 상상의 이미지와 연결되고, ‘지구가 굴러가는 길’ ‘실크로드’처럼 지리적 거리는 초월하지만 여전히 연결되는 길이 있다. 위 시들의 각 단위에 나타나는 길들은 대부분 앞으로 나가기 힘들고, 갈라져 어렵고 복잡한 채로 뒤섞여 있다. 혹은 병치구조로 링크되어 과거, 현재, 시간, 공간을 넘나들며 뒤섞이지만 반드시 길로 연결된 채 쉽지 않은 길이라는 중심 의미에 직결된다. 이 시들에서 ‘길’은 서로 다른 색실들이 얽히면서 또 다른 각각의 모습을 나타내는 하레크 지방에서 생산된 카페트나 데리다의 아쌍블라주(Jean Dubuffet, 1954)처럼 함께 기능하는 이질적인 행동을 섞은 혹은 다양한 모듈과 정교함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길’에서 체화된 시간, 장소성을 달리 한 다선적(多線的) 길들이 ‘기표들의 꼴라주 혹은 은하’(조지P랜도우, 2001)의 형태를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층위가 다른 길들이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닌 채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간으로 혹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브르통은 ‘걷기는 집의 반대’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길이 있는 시에 더 이상 집은 없다. 친밀감이든 소외감이든 고향집도 욕망으로 잃어버린 길 위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안락한 집이 없다면 사람들은 용기를 내어 다시 길을 찾는다. 9월호에 실린 시들에서 ‘길’은 외형적으로는 기찻길, 고향길(옛길), 새길, 인생 여정으로서의 길이 나타나고, 의미상으로는 삶의 길과 물리적 길, 생각 속의 길, 상상 속의 길로 나뉜다. 한번 들어선 길은 바꾸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길이 삶과 흡사하다. 길 위에 서면 갈등 양상이 선택의 여부에 따라 달라지며, 정보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친숙하고 또 상처를 치유하는 다중적이며 역동적인 일들이 일어난다. 하지만 어떤 길을 가든, 길이 없으면 스스로 갈 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이 또한 길의 속성이라는 점은 여전히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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