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의 무게 / 솔향
내게 ‘시작’은 때론 무거움으로, 때론 가벼움으로 다가온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그 무게가 무거웠던 건 대표적으로 연애였다. 감히 ‘시작’할 용기가 없었다. “나는 평생 연애 못 해볼 것 같아.”라고 친구에게 말했던 게 기억난다. 다행히 나를 볼 때 단점은 다 가려지고 장점만 보이는 증상을 얻은 남자가 기적적으로 나타나 첫 연애를 시작한 나이가 스물여덟 살이었다.
내가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던가 그 나이가 되도록 기회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용돈을 모아 손톱깎기세트 선물을 주며 고백했던 교회 친구를 비롯해서 대학 이후에 정식으로 고백했던 두 명의 남자와 은근슬쩍 마음을 비쳤던 서너 명의 남자가 있긴 했다. 게다가, 혼자 숨어서 짝사랑했던 남자도 여러 명 된다. 나를 좋아했던 남자의 마음 모른 척하고, 내가 좋아했던 남자에게는 표현을 못 했다. 그들 중 한 명과도 시작하지 못했던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연애가 실패할까 봐, 끝까지 가지 못할까 봐, 도중에 싫어지면 헤어질 때 불편할까 봐 일어나지도 않을 부정적인 결과를 미리 걱정하며 시작도 못 해 본 것이다. 스물여덟에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밀어내는 나에게 지치지 않고 진심을 다해 적극적으로 다가와 나를 구해 준 그 남자가 아니었으면 나는 결혼도 못 해보고 늙을 뻔했다.
승진 준비를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남들보다 어려운 자리에서 일을 해내야 하고, 수년 간 개인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해도 성과는 담보되지 않은 일이다. 편한 일상을 포기하기가 망설여졌고, 많은 노력을 해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때 내 자신이 못났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겁났을 것이다. 주변 동료들이 열심히 달려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내가 못해서 안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고 자신을 속이며 게으름을 피웠다. 시작이라는 한 발을 떼기가 너무나 무거워 미루고 미루었다. 마흔 살이 되어서야 겨우 망설임을 떨쳐내고 조그만 용기를 내었고 ‘시작이 반이다.’라는 진리를 깨달았다.
어떤 일을 시작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만 내게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배우는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한없이 가벼운 편이다. 배우고 싶은 것이 생기면 잘 덤벼들고 이것저것 시도해 본다. 하지만 호기심과 의욕은 넘치나 습관적인 게으름으로 진득하게 결실은 못 맺는 용두사미 격이랄까. 이를테면 기타, 플롯, 섹소폰, 알토리코더, 피아노, 장구, 꽹가리 등 여러 악기를 야심차게 배우기 시작했으나 짧게는 한 두달, 길게는 일년 정도 하다가 그만 두었다. 영어, 수채화, 퀼트, 수영, 탁구, 테니스, 배드민턴에도 발을 담궜지만 꾸준함이 없어 실력이랄 것을 쌓지 못했다. 그나마 가장 꾸준히 했던 배구까지 최근 목디스크 증상으로 멈추게 되었다.
이런 저런 배움의 시작과 포기를 반복하면서 내가 순발력은 좋으나 지구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운동을 하더라도 빠른 움직임이 필요한 종목은 잘하는데 인내가 필요한 종목은 재빠르게 떨어져 나간다. 기타학원 선생님이 배운 지 하루 이틀 만에 이렇게 빨리 배우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처음 시작은 좋다. 무엇을 배우든지 처음엔 보통 사람보다 빠르게 치고 나가다가 어느 정도 정체기가 오면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포기하기 일쑤다. 이것저것 쑤셔보지 않고 악기든 운동이든 한 가지만 꾸준히 했더라면 지금쯤 돈도 아끼고 고수의 반열에도 올랐을 것이다.
이제 좋아하던 배구도 못하게 된 마당에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글쓰기 공부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배움과는 다르게 글쓰기는 쉽게 덤벼들지 못하고 늘 미루어 왔던 과제였다. 한 강연에서 이슬아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은 인생을 두 번, 세 번 더 풍부하게 사는 것이라고 했던 말을 마음 한 켠에 항상 지니고 있었다. 늘 책을 가까이하고 블로그를 운영하며 생각을 너무 멋지게 표현하는 나보다 세 살 어린 동생이 가까이에 있는데 그 어떤 대단하고 능력 있는 사람보다 더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책읽기와 글쓰기로 자신을 가꾸지 않고 그 오랜 세월 게으름을 피우며 시간을 흘려보낸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작가를 지망했던 문학소년도, 자신만의 소중한 다이어리를 꾸미며 생각을 정리하는 감성적인 소녀도 아니었던 내가 오십이 넘어 글쓰기를 시작하고자 용기를 내본다. 간단한 계획서나 보고서 외에 일상의 글쓰기를 해본 적이 거의 없어 너무나 자신이 없고 미숙한 글솜씨가 탄로날까 봐 두렵다. 재능이 없을까 봐, 노력해도 생각보다 안될까 봐, 성실함이 부족해서 도중에 포기할까 봐, 시작하기에 너무 나이들었을까 봐 계속 미루어왔던 일을 이제 작은 씨앗만한 용기를 끌어올려 도전해 본다.
어렵고 힘들지만 꼭 해야 할 일, 나에게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은 반드시 시작해야 한다. 비록 결과가 좋지 않더라고 그 과정을 겪어내면서 충분히 얻어지는 결실이 있고, 그것이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비결이라는 것을 이제는 깨닫고 있다. 지금 이 나이에 시작한 글쓰기 배움은 가벼움이 아니라 용기 있는 무거운 선택이다. 이제부터는 순발력보다는 지구력을 키울 시간이다.
첫댓글 글이 재미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정희연
글이 술술 매끄럽게 읽힙니다.
심지현.
글쓰기는 옆에 같이 하는 친구가 없으면 쉽게 도전할 수 없는 영역인데 용기 내 도전한 것에 박수를 보냅니다. 최미숙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매력이 느껴집니다.
황선영.
교수님 말씀처럼 기본이 탄탄하셔서 좋은 글 쓰시리라 믿습니다. 함께 공부하게 돼서 기쁩니다.(황성훈)
글쓰기는 무엇보다 가치있는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무소의 뿔처럼 함께 나아가도록 해요.
정선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재미도 있네요. (한권종)
해가 더할수록 재야의 숨은 고수들이 나타나서 위기 의식을 느낍니다. 하하!
같은 길을 걷는 동무가 한 명 더 늘어 기쁩니다.(조미숙)
글감을 보고 뭘 쓸지 한 문장도 생각이 안 나서 당황했는데 교수님 말씀처럼 일단 한 글자라도 시작하니 써지긴 하네요. 생각을 끌어내기도 어렵고, 여러번 고쳐도 고칠 게 또 보이네요. 문장이 너무 긴 것도 고치고 싶은데 처음부터 진빼면 오래 못 할 것 같아서 빨리 올려버렸습니다. 교수님이 고쳐주시겠죠? 선배님들께 배우면서 성장하고 싶습니다.
송향라.
같이 글쓰는 공부를 하게 돼서 반갑습니다. 좋은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김석수)
선생님,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반갑습니다.(박선애)
'시작이 반이다.'이라고 말하지요. 정말 그래요. 잘 시작하셨습니다.
전혀 늦지 않았어요.
호기심과 의욕은 넘치나 습관적인 게으름으로 결실은 못 맺는 용두사미에서 뜨끔합니다.
딱 제 이야기라서요.
글쓰기 늪에 곧 빠질 겁니다. 이 늪이 꽤 수렁이거든요.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