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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구 시집 <양산일기> 작품해설
자연(自然)이라는 신화에 의해 거듭난 시적(詩的) 자아 허순위(시인) 정대구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시인의 산문에서 자신이 시를 쓰는 자세를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나는 나의 시에서 나의 값싼 감상을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나의 시에서 귀골스런 시의 고고한 측면을 배격하려 했다. 나는 나의 시에서 나의 생활을 도피하거나 기만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시를 안이한 감상이나 고정관념에 빠뜨리지 않기 위하여 그랬고, 시기 특수층의 시녀로 향락되는 치욕에서 스스로를 구제받기 위하여 그랬고 시가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양심 잇는 생활인의 현장이 되기 위하여 그래야 했다. 그렇다. 시가 어떻게 뼈아프게 삶을 지켜가는 내 이웃의 많은 선량한 무리들을 배반하고 나의 아픈 현실을 기만하고 고답적인 언어의 유희나 설익은 관념의 세계를 조작해내겠는가. 시는 궁상맞은 것이 아닐 분 아니라 시는 정치적 플래카드도 혁명적인 구호도 도식도 아님은 물론이다. 시의 아름다움은 시의 진실을 꾸미지 않는 데 있다. 어떤 종류의 꾸밈도 시는 용서하지 않는다. 시는 정직한 삶의 진솔한 표현 그대로라야 한다. 여기에 시의 어려움이 잇다. 정대구 시인은 『나의 친구 우철동 씨』를 발표한 젊은 날부터 지금까지 잠시도 시를 중단하거나 시를 떠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도 시는 그의 삶 자체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시를 썼을 뿐만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 삶의 근원을 성찰하고 밝고 긍정적으로 수용하려는 헐렁헐렁하리만치 넉넉한 마음을 끊임없이 시 속에 담으려 했다. 이러한 그가 지난 몇 년간 처음으로 가족을 떠나 양산에서 살게 되면서 많은 시간을 자연과 접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물이 가는 길이 자신이 가는 길이라고 쓴 그에게 양산은 우연한 공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연을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비자연화 되어 가고 있다. 그와 같은 비자연화의 확인 끝은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 자연을 찾게 한다. 오늘날의 시적 자연은 인간에 의해 주관화된 자연이고, 의도된 자연이며, 원거리에 잇는 자연이고, 추억 속의 자연인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역사 발전은 근원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근원으로부터의 해방이며 탈출이라는 근원부재의 동공의식으로 인해 집없음의 자유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잃어버린 근원에 대한 그리움의 중심대상으로 남아 자아의 상실감 극복을 위해 자신과의 일체감을 이룰 수 잇는 공간이며 대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상적 자연이며, 의도된 자연이라해도 근원으로서 자연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잇을 수 없다. 인간의 무의식을 이루는 것은 자연인 것이다. 그런 연유로 자연은 자연으로의 회귀를 권유하는 유인력을 우리 삶에서 행사한다. 정대구 시인의 양산行도 그의 시적 행로에서 우연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젊은 날 문제의식을 갖고 회의하고 번뇌하던 마음의 무거움으로부터 벗어나 시인은 세속을 잊고 자연과 더불어 낙천적인 쪽으로 삶을 즐기려 했다고 『양산시편』의 서두에서 속내를 밝혔다. 자연은 피로에 지치고 상한 삶에 대하여 치유력을 갖고 있으며 결여된 자아를 근원에 자리잡게 한다. 시집 『양산일기』는 지난 해 펴낸 바 있는 『구선생의 평화주의』 이전에 씌어진 시들을 정리한 것으로 그보다 몇 년 전에 발표한 『양산시편』의 속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동일한 공간을 배경으로 씌어진 『양산시편』은 삶의 에너지가 자연과 어우러지며 일체화 되어 순화하는 활기가 넘친다. 자연 속에 파묻혀 자연의 일부분으로 살아가는 개인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문명의 옷을 벗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시인은 무욕의 내면세계를 향하고 자연과 순수합일을 이루고자 한다. 연인과 나누는 성적 교감도 자연에의 몰입에 비유되어 잇다. 시인의 모든 삶의 에너지가 자연의 생명력과 더불어 교감하면서 합일과 통합과 혼연일체를 이루고자 했다. 『양산일기』는 일기라는 제목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독자로 하여금 시인의 내밀함에 친근하게 접근하게 한다. 삶의 역동성 속에 깃든 시인의 보다 정적이고 번뇌하는 내면과 사유의 세계로 독자들을 이끈다. 1.「그녀」라는 적영지(寂影池) 우수수(憂愁愁) 하루종일 흔들리는 11월의 찬비 줄 끊긴 비파 비파비파 아랫도리가 썰렁하다 두꺼운 얼굴의 겨울이 몇 걸음 앞당겨 성큼 성큼 등 뒤에 바짝 붙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재촉하여 빠르게 길을 몰고 가는 저녁 강원영동과 중북부지방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다는데 이곳 경남지방은 웬 비가 비비비(悲悲悲) - 「11월의 비가」 전문 화자는 하루종일 늦가을 찬비 내리는 어느 외로운 저녁 시간에 스산한 우수 속에서 다가올 겨울에 대한 막막하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 있다. 이런 날 대개의 사람들은 창가를 서성이거나 창 밖 풍경으로 시선을 돌리지만 어쩐지 시인이 바라보는 시작적인 사물은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화자의 시선은 “마음”과 “길”을 향하고 있다. 이 저녁 시간은 “마음을 재촉해 길을 몰고 가는 저녁”으로 집중되어 있다. 음영을 지닌 명랑함으로 슬쩍 이 우수 깊은 시간을 들어올려 보기도 하는 것은 외로움조차 즐기려는 해학을 향한 시인의 낙천성의 표출이다. 경주남산엘 올라가다보니까 산 전체가 글자그대로문화유산유적지로 지정된 박물관이었어요. 불교노천박물관, 좀 힘이 들어 쉬어가고 싶은 곳에서 예외 없이 나를 밀어주고 끌어주는 관음불 여래불 삼존불 비로자나불 선각부처 양각부처 음각부처 보이는 바위마다 부처 아닌 게 없었어요. 앉아있는 부처, 서있는 부처 덕분에 468정상까지 힘들지 않게 단참에 올라왔지요. 용장사 족은 다음 일정으로 미루고 하산코스를 삼릉 쪽으로 잡아 내려오는데 놀랍게도 길목을 지키고 있던 목달아난 부처가 불숙 튀어나와 목 찾아내라고 못 찾겠다면 네 머리통을 내놓고 가라고 말없이 목 없이 외치고 있었어요. 어둠 속을 따라오면서 엉겁결에 집에 돌아와 목을 만져봤지요. 목이 없어요. 내 얼굴이, 그에나 경주남산 목 없는 부처가 데려간 걸까요. 경주남산 다시 가서 내 얼굴 찾아봐야겠어요. 그동안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요. 걸어 다니는 얼굴 없는 부처? 내가 경주남산 목 없는 부처? - 「목 없는 부처」 전문 시인에게 다가오는 이 지독한 상실감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한쪽 팔이 없거나 한쪽 다리가 없거나 하는 신체의 일부분이 사라진 듯한 느낌은 강한 상실감에서 비롯된다. 시인으로써 사람으로서 살아온 어느 먼 훗날의 이 상실감은 시인을 때로는 “누구든 편히 쉬시며 시간을 버는 빈 의자”로 세상에 내놓기도 하고 때로는 지금껏 달리고도 이제 더 “누구를 무엇을 태워야 할지 모르는 빈 자전거 한 대”로 때로는 “들내음이 채워주는 텅 빈 가슴”으로 자신을 인식시키고 있다. 시인에게 <비어 있음>은 전부를 내어주고 빈 상태에서조차 아직도 누구를 무엇을 더 내주고 싶어하는 마음의 흔적만이 삶의 발자국같이 남아있는 상태이며 그러한 심상은 <적영지(寂影池)>처럼 투명하고 고요한 무의 세계를 지향한다. 까실까실 잠자지도 깨어 있지도 않는 어떤 의식도 의식하지 않는 무의식 대로는 뭉클뭉클 손에 잡히기도 하는데 내 눈에 잘 보이지는 않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 없는 먼지야 너 얼마나 적으냐 얼마나 가벼우냐. 내가 거대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내 몸의 무게를 먼지 한 알로 줄이는 일 오, 무념무상의 먼지의 자재(自在)로움이여 - 「먼지에 관한 명상․3」 전문 삶과 죽음의 경계가 지워진 세계의 신비한 자리에 속도와 문명에 의해 희생된 새끼고양이의 죽음만이 뜨거운 피를 튕기는 7번 국도 같은, 이 거대한 자본주의라는 세속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시인의 고통과 갈구와 사유는 소유의 허망을 좇아 자신의 육신을 작고도 가벼운 먼지 한 알로 줄여 무념무상의 자재로움으로 빠져나오기를 바란다. 욕망이라는 이 마음의 여로가 끝나지 않는 한 그것이 가능할 수나 있는 일일까? 시인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알면서도 마음을 채우기 위해 무욕의 세계를 꿈꾼다. “소유를 좆같이 볼 수 잇다면”, “그대는 부처가 곧 먼지요 먼지가 부처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가슴 속에 화엄세계 한 채를 짓고자 하는 간구를 드러낸다. 세속이든 자신이든 “물 위에 가볍게 뜬 바위”를 배고 충일하게 삶에 고여 있는 “맑은 고요 그림자”로 한없이 부드럽고 충만한 “적영지(寂影池)”로 만물을 끌어안는 절대세계로 귀의하려 한다. ??? ??? - 「남해 금산 가서」 전문 시인은 남해 금산의 정상에서 “파도 같기도 하고 바위 같기도 한 정상의 저것들”을 만난다. 가슴 속 질펀한 화엄세계 한 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은 절대자와 같은 <당신>의 존재를 사무치게 바라며 그 부드러운 당신의 큰 치마폭에 전존재를 쏟아부으며 울고 싶어 한다. “파도”와 “바위”와 “구름”이 되고 싶다고 한다. 이 시에서 화자는 금산의 정상에서 코 박고 우는 아이의 모습으로 몸부림치는 내적 고뇌를 토하고 있다. 시인에게 자연은 바다도 산도 언제나 여성성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만물을 통합하는 생명의 자궁을 향해 시인의 의식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여기서 화자가 갈망하는 “눈물”이라는 그의 용해된 의식이 파도라는 액체와 바위라는 고체와 구름이라는 물질 사이를 넘나든다는 것에 주목하자. 구름은 물방울 미립자가 군집된 물질로써 열이나 빛에 의해 언제든 액체로도 기체로도 변화될 수 있는 액화와 기화의 양쪽 성질을 지닌 물질로써 시인의 의식 혹은 자아가 시인이 바라는 성화의 세계로 승화하기 직전의 상태라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이 세속이든 자신이든 처절하리만치 자유와 해방을 찾아 괴로워하는 또 한 편의 시를 인용해 보자. 떠 있는 건지 가라앉아 있는 건지 저기가 바다인지 하늘인지 꿈속인지 어머니 뱃속인지 무엇이라 혹 같기도 하고 알 같기도 하고 섬 같기도하고 별 같기도 연꽃 꽃봉오리 혹은 무슨 종양 부스럼딱지 같기도 한 저거 엑스레이로 보는 태중의 한 점 아기, 태풍의 눈 같기도 하고 내가 이거 꿈꾸고 있는 거 아녀 내가 이거 뭔가에 홀리고 있는 거 아녀 저게 뭐여 난생 처음 말로만 듣던 남해금산이란 델 올라와보니 마침 안개인지 햇살인지 아련한 안계(眼界) 안개에 묻히고 햇살에 파묻혀 무극이 태극인지 태극이 무극인지 하늘도 지워지고 바다도 지워져 지워진 원융무애 경계가 없는 천지 조망해 보니 내세인지 전세인지 현실이 아닌 너와 나 나와 너 흰지 검은지 푸른지 만지 남지나해를 통과한 13호 태풍 차바라가 방금 북북동진중이라는데 - 「저게 뭐여」 전문 인용한 시는 마치 시인이 갈구하던 구름의 형상 같은 시가 아닌가. 하늘과 바다도 삶과 죽음도 원융무의 경지다. 경계가 없는 천지를 조망해 보는 곳에서 나와 너의 경계도 없는 그곳은 자연을 통해 바라보는 시인 자신의 내면 속 고뇌의 풍경이 아닐까. 헌데 저 구름 형상의 고뇌 속에서 다시 시인은 혹 같기도 하고 상처의 부스럼딱지 같기도 한 자아가 거듭나기 위한 제의를 받는다. “어머니 뱃속”이라든가 “알 같기도 하고”에서도 그렇고 “태중의 한 점 아기”에서는 더욱 그렇다. 의도적이지 않은 이 자연의 제의에 의해 시인의 의식은 “저게 뭔가”하며 빠져드는 고뇌와 황홀감에 스스로 놀라고 있다. 다가 올 태풍이라는 구체적 현실을 예감하면서. 저렇듯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불이 나게 부리나케 뛰다가 뭇사람의 연호를 받으며 죽는 아쉬운 죽음 정대구, 너도 가능할까 - 「야구장에서」 부분 ???? ???? - 「외발 자전거 타는 시인」 부분 사람의 성격은 단순하지 않다. 삶의 저변에서 일어나는 우여곡절을 너그럽게 감싸고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받아들이며 언제나 ‘나’보다는 ‘너’ 혹은 ‘우리’의 관계로부터 빚어지는 정감을 소중히 여겨 온 정대구 시인이 삶을 향해 이웃을 향해 고통과 상처를 감싸안을 넉넉한 항아리로 시적 자아를 빚는 동안 한편 그의 현실적 자아는 자신을 향해서는 고지식하리만치 엄격한 완벽주의자적 일면으로 스스로를 긴장 속에서 견지해왔음이 읽혀지는 시의 한 대목이기도 하다. “한 번의 실수로 쓰러지면 무대에서 쫓겨나야 하는 외발자전거 타는 곡마단원”처럼 이상적 아자를 추구하는 인간에게서 보이는 완벽주의가 이끄는 정직한 비통함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상주의를 향한 시인에게 시적 자아의 거듭남으로 몰아가는 자연의 제의는 피할 수 없는 죽음 같은 귀거래(歸去來)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2. 원형의식과 신화적 시간 자연은 신화적 시간대와 다르지 않다. 자연으로부터 받은 제의와 더불어 시인의 의식은 어머니 회상이라는 개인적 신화에 이르기도 하고 가족과 유년에 대한 회상으로 가장 순수한 원형의 시간으로 회귀하기도 한다. 자연이라는 우주적 공간 속에서 시간적 공간은 유년으로 퇴행하기도 하고 가족에 대한 추억 속에 머물기도 하면서 “옛날 옛날” 또는 “19세기와 21세기가 공존하는 공간”, “한 300년이 한 공간에서 호흡하고 있는 시간”으로 확장되었다. 상상력의 힘 보다 삶 자체가 힘인 그의 시적 작업은 서정적 자아에 의한 회감의 정서를 담아내면서 자연을 통해 넓어진 시간과 공간적 배경 속에서 새로운 시적 자아로 거듭나고 있다. 시인에게 자연은 신화적 상징이 되어 우주적 생성의 재생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천시 감나무」에서 시인은 홍시를 좋아하시고 “늘 감나무 한 그루를 뜰에 심고 싶어하셨지요”로 생전의 어머니에 대해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산신령과 아이들」에서는 한때 혈기방자했던 한 사내가 산으로 종적을 감춘 뒤 몇 년 후에 “봉두난발 산의 아들이 되어” 산신령 같이 향기롭고 맑은 정기로 가득 차서 세속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만나는 시인의 이상적 자아를 드러내기도 한다. 「천수단풍보살」에서는 자연과 그 이상적 자아가 일체를 이루는 장관을 펼쳐보이기도 한다. 자연은 정대구 시인에게 신화의 대상과도 같다. 「서동요」와 「산할아버지」라는 설화적 소재가 이즈음에 등장하기도 한다. 늦보리타작 도리깨질 휘몰아 걷어치우고 늦은 저녁, 멍석 두서너 닢 자리 펴고 둘러앉아 보리밥 썩썩 고추장에 비벼먹는데 마당귀에 모깃불은 모락모락, 아이들은 댑싸리비 치켜들고 반딧불이 잡는다고 쫓아다니고 마당 끝으로 개구리 기어오르는 <중략> 사시사철 구슬치기 자치기 줄넘기 술래잡기 수건돌리기 땅따먹기 밀어내기 멀리뛰기 오글오글 떼 지어 노는 아이들 어둡는 줄도 모르고 지치지도 않고 이어지고 - 「그리워라 마당사계절」 부분 유년시절의 회상도 신화와 그 맥을 함께 하는 원형의식으로 읽을 수 있다. 유년을 회상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은 친구들과 나누던 즐거운 놀이이다. 놀이는 표현이라는 이상과 공동생활이라는 이상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농촌생활에서 아이들은 일상 속에서 어른의 일손을 도우면서 그 가운데 놀이를 찾아내야만 햇다. 놀이는 동네 사람들과 친구들의 사랑 속에서 함께 나누는 즐거움으로써 화자는 유년시절을 회상하면서 즐거웠던 기억을 더듬으며 현실의 무상감을 극복하려 한다. 시집의 후반부로 갈수로 “향기”라는 말이 자주 언급된다는 사실이 발견되는데 “아카시아 향기”, “백향”, “향기 높은” 등이다. 이 시집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이 기체상태의 물직은 자의식의 소멸이 건강하게 낳은 승화된 물질이 아니겠는가. 시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향기라는 말이 최초로 나타나는 시 한 편을 인용해 보자. 여자들이 은밀히 솥을 걸고 준비한 토종닭을 끓이는 동안, 하늘 네 귀퉁이 추녀끝에서 벌들이 붕붕붕 잔치집인 듯 천국인 듯 풍악을 잡히고 마치 신랑신부 구경하듯 모여들었습니다. 이때였습니다. 신비한 공기에 휩싸여 공중부양 하듯 우리 일행이 부웅 들려서 하늘로 올라간 것은, 어머, 어머 모두들 경악, 어리둥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이 신문기자출신 종백시인이 재빠르게 두 눈을 번쩍 뜨고 카메라를 들이댄 것은 새파란 하늘 속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 걸까요? <중략> 정말 눈 깜짝할 사이, 눈 뜨고 당한 우리들 별도리 없이 주섬주섬 주차한 곳까지 내려오면서 돌아보니 자연은 우리가 앉앗던 공간에 바람만 들이고 별들은 뿅 뿅 뿅 총알처럼 흩어져 하늘 속에 까만 점으로 박히다가 흔적도 없어지고 어디서 날아왔는지 아무도 모르게 노랑나비 한 쌍 꽃잎 같은 두 날개 파닥여 나를 뒤따라오며 쓸 듯이 길을 지우기도 하고 알찐알찐 앞서 가며 새로이 내 다리가 놓일 자리에 걸음걸음 꽃가루 향기를 뿌리는 놈도 있군요. - 「무릉도원에서 생긴 일」 부분 삶을 철저히 사랑한 시인에게 <신비>라는 어휘가 등장하는 것은 웬 일일까. “신비한 공기에 휩싸여 공중부양하듯”이라고 말하는 이 구절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시 다음에 이어지는 시들에게서도 거듭 「무슨 일 났다」라든가 「물금에서」의 첫행 “무슨 일이 있었을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시인에게 특별한 의미로 “무슨 일”이 태풍처럼 다가온 듯 하다. 구체적인 일의 전모는 알 수 없으나 이 “무슨 일”이라는 특별한 의미는 그로 하여금 어떤 커다란 변화에 이르게 한다. 입술 포개지자마자 고목나무에 꽃이 폈어 코피가 터졌어. 부드러운 부드러운 바람 손길 닿자마자 감감했던 내 몸 뜨거워져 바지 속에서 불이 났어. 하늘과 땅 사이에 너를 쓰러뜨렸어. - 「무슨 일 났나」 전문 고목나무에 꽃이 피고 몸은 뜨거워지고 너를 쓰러뜨리는 이 사랑의 행위는 하나의 은유다. “너”라는 시인 자신의 분신과 에로스적 교감으로 표현되는 이 하늘과 땅 사이의 일체감은 그의 작품 속에서 특별한 의미망을 이룬다. 시인과 여인은 자연의 몸 안에서 한몸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자연과 함께 이루었던 한몸은 여인과의 한몸으로 통합되어 만물을 끌어안는 거대한 자궁을 형성하고 있다. 「물금에서」 시인은 이 사랑의 혼연일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절제를 통해 진정한 해방을 느끼며, 자유를 찾은 자의 희열은 향기로 승화된다. 자연이 “바람만 들이”는 자리에 노랑나비 한 쌍이 “길을 지우기도 하고” “새로이 내 다리가 놓일 자리”에 “곷가루 향기”를 뿌리기도 한다. 찬 이슬로 발등을 적시며 산에서 내려오는 여인 깨끗하다 맑고 둥근 이슬 속 환한 허리춤 깨끗하다 아랫도리텐트를 치고 꿀꺽 침을 삼키는 구선생의 무례 깨끗하다 -「아침에 산에서 내려오는 그녀를 만나다」 전문 이 시는 어둠을 뚫고 모든 것이 순수하게 정화된 심상을 보여주는데 마침내 “구선생”이라는 새로운 시적 화자가 등장한다. (이미 펴낸 『양산시편』에서도 시 「입술」에서 여인과의 입맞춤을 하고 있는 순간에 암시적 등장이 있었다.) 이 시집에 처음 등장하는 “구선생”은 자연과 여성성으로 빚어진 넉넉하고 편안한 시인의 이상적 자아가 탄생한 모습이다. 마음의 복잡하고 알려져 있지 않은 부분에서 상징은 만들어진다. 자연도 절대세계도 때로는 결핍되어 잇는 자아에 힘을 공급하기 위하여 ‘거리두기’를 위한 상징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 시인의 시적 자아는 ‘구선생’이라는 새로운 인물상징으로 표출되어짐으로써 해방감을 느낀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신화 앞에서 정대구시인은 삶에 대한 긍정의 힘으로 세계로부터 얻어진 상처와 고통을 자연으로부터 치유받고 타인과 삶을 너그러운 시선으로 맞아들이는 이 시적 자아를 자연을 통해 맞아들임으로 어린아이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으로 삶을 사랑하고 비판할 수 있는 마음의 길을 찾는다. 그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사이」에 존재하는 자연인의 모습으로 남고 자연을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려보낸다. 사실 자연과의 완전일체는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으로 상징되는 이 정결한 화자의 내면의 의식은 자연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자의 이마 위 “번쩍”이며 빛으로 부딪치고, 형형한 “청성산의 눈빛”이라는 암시와 함께 과연 시인에게 또다른 신화가 남아 있음을 예표하는 것은 아닐는지.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참을성 있게 자기 자신에게 다가가는 것, 느리게 다가가는 것”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자신을 향한 정직성과 삶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인해서 시인의 시는 고요의 가락 속에서 더욱 경쾌하게 빛나라로 나아 갈 것이다. |
출처: 창작21 원문보기 글쓴이: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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