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군(益山君) 묘표(墓表) 번역문(제13세)
우리 선조 양대 익산군(益山君) 휘(諱) 운수(云遂)의 묘소는 다 같이 해주(海州) 마산 간지원(艮之原)에 있었는데 실전(失傳)된지 오래 되었다.
산 밑에 사는 간악한 백성들이 섬돌을 파괴하여 버리고 산소의 뇌두(腦頭)를 눌러서 저희들 마음대로 범장(犯葬)한 것이 십여 무덤 이였는데 홍씨들에게 발각될까 두려워서 익산군 묘소 비석(碑石)을 두들겨 부수고 옛 못 가운데 집어 던진 후 흙을 날라다가 메꾸어 버렸다.
영조(李朝 英祖) 기묘년(서기1759년)에 신천의 종친 되는 성요(聖堯) 성덕(聖德)두 분이 촌 노인의 전설을 듣고 지성을 다하여 찾아내 가지고 동종(同宗)되는 승지(承旨) 언철(彦喆)과 더불어 여러 번 관가에 소장(訴狀)을 올려서 타성의 무덤을 다 파내 버렸다.
갑신년(1764년)에는 관력(官力)을 얻어서 그 옛 못을 파내가지고 부서진 비(碑) 한 토막을 얻어내었는데 거기 첨의평리(僉議平理)란 넉자가 있었고 또 거기서 익산군(益山君) 석자를 얻어냈고 또다시 중대광 (重大匡)석자를 얻어냈다. 그 때 족대부(族大父)인 지사(知事)공 성(晟)이라 하는 분이 풍천 임소에 있으면서 동심협력하여 곧 묘소봉축을 거사하였고 묘전(墓田)을 두고 관리인을 정한 후 이내 해마다 한 차례씩 향사를 봉행하였다.
갑신년으로 부터 오늘 까지 묘비를 다시 세우는 역사를 못하고 있다가 정해년(1767년) 봄에 족종(族從)인 진사 원건보(元健甫)가 그 아들 연학(淵學)으로 하여금 이 선대 묘소에 가서 성묘하게 하고 달원(達元) 학종(學宗)등과 더불어 석비 세우는 의논을 주창해서 각 도에 통문을 내고 널리 종친들에게 고해서 재정을 마련 한지가 오늘까지에 삼년이 되었다. 그 역사를 준공함에 있어서는 해서(海西)종친들이 자못 홀로 담당하다시피 하는 수고가 많았으니 그것은 그 묘하에 살고 있었던 관계라 하겠다.
슬프도다! 예로부터 어진 재상들의 장지가 숱하게 잃어버려져 초목이 무성하여 숲이 된 것이 얼마든지 있으되 홀로 우리선조 양대 묘소가 수백녕동안 실전되었다가 이제 다시 찾게 되었으니 이 어찌 사람의 힘만으로 미칠 것 이리요.
자못 양대 익산군의 영험(靈驗)하고 밝으신 영혼(靈魂)이 어두워지지 않고 끼치진 덕택이 오히려 뻗어 내려온 것이리라.
불행이 간사한 백성들의 두들겨 부서진바 되어 마침내 후대에 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어찌 자손들로서 통탄치 않으리요.
가승(家乘)과 산도(山圖)에 기재된 것으로써 미루어 보건대 첨의평리(僉議平理)공의 분묘전면 서쪽 십 오보쯤 거리에 큰 무덤이 있으니 이것은 필시 밀직당성군(密直唐城君)으로서 휘자로 운형(云衡)이라고 하는 어른의 묘소임이 틀림없고 동쪽으로 삼십보 거리에 또 한 큰 무덤이 있으니 이것은 참판(參判)공으로서 휘자로 유룡(有龍)이라고 하는 어른의 묘소인 듯하니 이미 표석과 비갈이 가히 증빙할만한 것이 없음으로 아직 감히 증거 할 수 없으니 한심스러운 일이로다.
남양홍씨는 고려 초에 태사(太師) 벼슬하신 휘자로 은열(殷悅)이라고 하는 어른으로 시조(始祖)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조로부터 육세(六世)에 좌복야(左僕射)벼슬하신 충평(忠平)공 휘자로 관(灌)이시고 구세에 우복야추밀부사(右僕射樞密副使)벼슬하신 휘자로 사윤(斯胤)이시니 공의 증조이시다.
아버님은 벽상공신(壁上功臣)충정(忠正)공으로서 휘자는 자번(子藩)이시다. 드높으신 훈공이 있어서 경흥군(慶興君)을 봉하시고 어머님은 영천이씨(永川李氏)로 총랑(摠郞) 손무(孫茂)의 따님이신데 공 그 둘째 아드님이시다. 공의 휘는 순(順)이시니 첨의평리(僉議平理)로서 첫 번엔 첫 번엔 당성군(唐城君)에 봉작을 받으셨다가 뒤에 익산군(益山君)으로 봉함을 받으셨다. 배위는 용인이씨(龍仁李氏)로 평장 벼슬을 한 세제(世제)의 따님이신데 아드님 두 분을 두셨다.
그 맏아들은 휘자로 운수(云遂)이시니 중대광(重大匡)에서 익산군을 세습해 봉함을 받으셨다. 운수(云遂)공의 배위는 청주한씨(淸州韓氏)로 전교시령(典校寺令) 보(譜)의 따님이시고 둘째아드님은 운형(云衡)이시니 보리(輔理)공신으로서 당성군에 봉함을 받으셨다.
아조(我朝) 이씨 조선시대에 있어 익산군(益山君) 순(順)의 손자 유룡(有龍)은 참판(參判)으로서 찬성(贊成) 벼슬을 증직 받으셨고 유구(有龜)는 판개성윤(判開城尹)이시요. 유원(有黿)은 남양군(南陽郡)이시다.
증손 덕윤(德潤) 덕안(德安)은 다 전서(典書)벼슬을 하셨고 덕보(德輔)는 의영고사(義盈庫使)로서 영추(領樞)벼슬을 증직 받으셨고 희정(希正)은 좌윤(左尹)이시다.
현손 심(深)은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서 좌상(左相)의 증직(贈職)을
받으셨고 전(淟)은 사정(司正)이시오.
오세에 긍(矜)은 상례(相禮)이시오. 응(應)은 좌상으로서 충성공(忠貞公)이시오. 칭(偁)은 첨정(僉正)이시고 항(恒)은 직장(直長)이시고 흥(興)은 대사헌(大司憲)이시다.
육세에 걸(傑)은 판관(判官)이시고 상(常)은 당양위(唐陽尉)시고 사부(士俯)는 시정(寺正)으로서 판서(判書)의 증직을 받으셨고 질(侄)은 승지(承旨)시고 귀진(貴珍)은 감사(監司)시다.
칠세에 백경(伯慶)은 참판(參判)이시고 팔세에 윤우(允祐)는 별좌(別坐)시고 호(浩)는 병사(兵使)시고 윤문(允文)은 별좌(別坐)시고 익영(翼英)은 지추(知樞)로서 찬성(贊成)의 증직(贈職)을 치(治)는 승시랑(承侍郞) 참봉(參奉)이시다.
구세에 순조(順祖)는 부위(副尉)이시고 인수(仁壽)는 정랑(正郎)이시고 덕수(德壽)는 군수로서 참판(參判)의 증직을 받으셨고 순각(純慤)은 동추(同樞)로서 판서의 증직을 받으셨고 윤석(潤碩)은 통정(通政)이시고 윤안(胤安)은 충열부사(忠烈府使)이시고 범조(範祚)는 판서이시다.
십세에 사효(思斅)는 판결사(判決事)로서 찬성(贊成)의 증직을 받으셨고 십일세에 욱(勗)은 참봉이요, 득일(得一)은 감사요, 이일(履一)은 목사요, 유일(有一)은 현감이요, 위(葳)는 감사요 경정(景艇)은 한림(翰林)이시다.십이세에 우평(禹平)은 직장(直長)이시고 세형(世亨)은 감정(監正)참판의 증직을 받으셨고 제형(濟亨)은 현감이요 이우(以佑)는 판관이시다.십삼세에 천령(天齡)은 현감으로서 참판의 증직을 받으셨고 서우(叙禹)는 상소한 선비로서 기사년에 입절하셨다.
시담(時潭, 상담(相潭), 하담(河潭)은 모두 벼슬이 판관이시었다.
십사세에 태두(泰斗)는 병사요 언철(彦喆)은 승지이시다.십오세에 성(晟)은 지사(知事)이시고 담(曋)은 정라(正郎)이시고 구서(九瑞)는승지시고 십육세에 종신(宗藎)은 사간(司諫)이시고 성조(聖肇)는 장령(掌令)이시다. 십팔세에 엄(嚴)은 총령이고 그 외에 모든 후손들로서 벼슬이 미관(微官)인 자들은 이루다 끌어내어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역시 많이 번성한 일이로다. 모든 후손들이 다 같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유표(遺表)하게 새겨진 석비(石碑)가 없으면 후손들에게 잘 전해 내려갈 수 없다 하므로 내 비록 심히 미력하고 또한 자신은 이미 광정공(匡定公)파로 출세하였다 할지라도 그 선조를 위하여는 일에 어찌 사양(辭讓)하리요.
드디어 원건(元健)군과 더불어 상의하여 문자를 찬성하고 그 전말(顚末)을 우와 같이 대략 서술(敍述)하노라.
십칠세손 통훈대부(통훈대부) 전행사간원(前行司諫院)
백의(백의) 근기(謹記) 병서(並書)
숭정(崇禎)기원후(紀元後)오(五) 기사(己巳)십월(十月) 일(日)
서기 1869년 10월 입비(立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