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 준비와 실전 사이 / 송덕희
학교는 개학을 하고, 학생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가득해야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난다. 겨울방학 동안에는 교직원들이 새 학년 맞이 준비로 분주하다.
행정실에서는 교실을 재배정하고 책걸상, 신발장을 학년별로 맞춰놓는다. 교실에 들어갈 기자재와 물품들을 구매하여 설치한다. 이번 방학에는 급식실 현대화사업 공사가 있어서 방학 내내 시공업체와 협의해서 개학일 급식에 차질이 없도록 점검하느라 더 바빴다. 마지막으로 1년간 쌓인 먼지와 때를 제거하는 대청소까지 하고 나면 새 학년 준비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다.
교무실에서는 새 학년 교육과정을 짜느라 바쁘다. 학교 한해살이 학사일정을 짜고 교과별 시수를 배정한다. 각 교과 지도 계획을 수립하고, 학교에서 추구할 교육목표에 따라 교육내용을 자세히 검토한다. 교육부나 교육청의 새로운 교육정책들을 두루 살펴 학교교육계획에 반영한다. 한두 줄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하고 어려운 이런 일들을 해야 한다. 그렇지만 담당 부장들이 머리를 맞대고 수정 보완하는 과정을 거듭해 완성한다.
1학년 입학식도 준비해야 한다. 1학년 선생님들은 반을 편성하고 학생들 이름표, 각종 학부모 안내자료 등도 미리 준비한다. 입학식 때는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올 어린 학생들이 학교는 재미있는 곳이란 인상을 주면 좋다. 그래서 교장으로서 나는 매년 입학식 때 그림책을 읽어주었다. 올해도 '파랑이와 노랑이'라는 그림책을 읽어주기로 했다. 파랑이와 노랑이처럼 친구들과 잘 어울려 지내라는 바람이 담긴 책이다. 우리 학교 신입생이 103명, 그림책을 ppt 자료로 만들어 화면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자료를 만들고 앉아서 읽을 수 있는 마이크와 의자를 배치해 두었다. 부모, 조부모까지 입학식에 참석할 것을 예상해서 의자도 넉넉히 준비해 놓았다.
재학생들 시업식은 학교 방송으로 하기로 했다. 900여 명이나 되는 학생들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은 학교 방송뿐이다. 학생들 각자 새 출발 하는 마음도 다지고, 새로 오신 선생님들 소개도 해줘야 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너를 사랑해, 왜냐하면'이라는 그림책을 읽어줄 자료도 준비했다. 개학일에 처음 대면하는 담임 선생님과 학생들이 책 제목만 보고도 좋아할 책이다.
드디어 3월 4일이 다가왔다. 9시 10분에 있을 시업식을 하러 가려는데, 담당 선생님이 교장실로 달려왔다.
"각 교실로 방송 화면이 송출되지 않아요, 어쩌지요?" 한다.
소리는 들리지만, 화면이 안 나온다니 난감했다. 관리 업체에 연락해도 다른 학교 서비스 봐주느라 못 온단다. 지난주 금요일까지 완벽하게 준비했는데, 어쩔 줄 몰라 하는 선생님께 무슨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처음 업무를 맡아 노심초사했을 걸 생각하니 내 마음이 안타까웠다.
"어쩔 수 없군요. 그냥 시업식은 생략해야지요."
준비했던 그림책 자료는 다음에 쓰기로 하고 그냥 넘어가야지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방송 사정으로 시업식을 할 수 없음을 각 교실에 알려주는 등 학교 시정에 차질을 빚었다. 30분이나 늦게 나타난 업체 직원 말로는 화면 송출 버튼 하나가 켜지지 않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못내 아쉬운 마음을 추스르고 입학식을 하러 강당으로 갔다. 신입생과 가족들까지 300여 명이 앉아 식이 진행되었다. 학교장 인사말을 짧게 끝내고 그림책을 읽는데, 책장 서너 장을 넘겼을까? 거치대에 헐겁게 끼워진 마이크가 툭 떨어졌다. 다행히 바닥까지 떨어지기 전에 잽싸게 손으로 잡아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책을 읽어 나갔다. 속으로는 당황했지만, 괜찮은 표정을 지으면서….
일을 하다 보면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도 작은 것에서 오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긴다. 담당 선생님은 자신이 실수한 거라며 몸 둘 바를 몰라 한다. 나는 그냥 괜찮다며, 앞으로는 더 잘 챙기자고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계획은 완벽했으나 실전은 다르다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행사가 있을 때는 꼭 방송 사고가 난다는 예부터 내려온 학교 전설(?)이 적중하는 개학 날이었다.
첫댓글 우아한 백조의 자태는 수면 아래의 수많은 발길질이 만들어 낸다는 걸 느끼게 하는 글이네요.
학교의 시작은 3월이죠.
책 읽어 주는 멋진 교장님이셨군요.
올 한 해도 무탈하길. 파이팅!
이팝나무님,
좋은 글쓰기 강좌 안내해 줘서 고맙고, 많이 기대됩니다.
입학식, 시업식에 책 읽어주는 교장선생님! 너무 멋지십니다. 자연스럽게 담임선생님들께서도 영향을 많이 받으실 것 같습니다. 또 방송담당 선생님을 배려하시는 모습에서도 깊은 인품이 느껴집니다. 이 글만 보고도 교장선생님께서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네요.
과찬이십니다. 제 부족한 글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디지털 세상의 맹점인 듯합니다. 그래서 계속 배워야 하는, 눈 앞이 캄캄했을 그날이 생생하게 보이네요. 글 고맙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당황스러운데 아닌 척하기도 어렵더라고요.
훌륭한 교장선생님의 일상이 그려집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그리 읽어주신 향라님의 따듯한 마음도 제게 전해집니다.
양선례 전도사님이 이끄신 작가님이시군요. 함께 쓰게 돼서 즐겁습니다. 따뜻한 글을 잘 쓰실 것 같아요.
선례 작가님과 대학동기입니다.
저는 이제 걸음마 단계인데, 부지런히 써볼랍니다.
책 읽어주는 교장 선생님, 멋지십니다.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요? 그래도 무탈하게 끝낸 개학식 덕분에 학교가 활기가 넘칠 것 같습니다.
미숙님, 따듯한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 선생님이 이렇게 수고를 하시는군요. 고마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고맙습니다!
개학 날 학교가 그려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학교를 이해하고 고맙다 하시는 선영님, 저도 고맙습니다.
꼭 중요한 날에 방송이 사고를 칩니다. 준비했던 파워포인트가 안 나오던지. 지난 졸업식에는 준비해둔 태극기를 누가 치워버려서 국기도 없이 경례를 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ㅎㅎㅎ 그렇죠? 백현님도 당황하셨겠군요.
공감 꾹 누르고 싶네요
교장 선생님이 그림책을 낭독하는 입학식, 참석한 모두가 인상적이었을 거 같아요. 멋지세요.
아이구, 미옥님 칭찬 받았으니 더 자주 읽어줘야겠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