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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4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율법의 기능. 律法の機能。
본문: 로마서 3:9-20
롬 3: 9 ○그러면 무엇을 말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유대 사람이 이방 사람보다 낫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다같이 죄 아래에 있음을 우리가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14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 15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16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함이 있다. 17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18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19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9.では、どうなのか。わたしたちには優れた点があるのでしょうか。全くありません。既に指摘したように、ユダヤ人もギリシア人も皆、罪の下にあるのです。10.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正しい者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11.悟る者もなく、/神を探し求める者もいない。12.皆迷い、だれもかれも役に立たない者となった。善を行う者はいない。ただの一人もいない。13.彼らののどは開いた墓のようであり、/彼らは舌で人を欺き、/その唇には蝮の毒がある。14.口は、呪いと苦味で満ち、15.足は血を流すのに速く、16.その道には破壊と悲惨がある。17.彼らは平和の道を知らない。18.彼らの目には神への畏れがない。」19.さて、わたしたちが知っているように、すべて律法の言うところは、律法の下にいる人々に向けられています。それは、すべての人の口がふさがれて、全世界が神の裁きに服するようになるためなのです。20.なぜなら、律法を実行することによっては、だれ一人神の前で義とされないからです。律法によっては、罪の自覚しか生じないのです。
최근에 한국이든 일본이든 뉴스를 보면 즐거운 소식보다 그렇지 않은 소식들이 더욱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험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뉴스를 들으며 나는 그렇게 살지 않고 있는 것이 뿌듯할 때가 있지요. 또한 그런 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서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며 통쾌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법을 어기고 죄를 지은 사람에 비하여 자신은 선량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저토록 파렴치한 죄를 지을 수 있는가… 하며 탄식을 할 때도 많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보는 대부분의 상식적인 반응이지요.
하지만, 그런 범죄 피의자의 가족이나 친구들일 경우에는 입장이 많이 다를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자녀가 그런 범죄에 연루되어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서글프고 낙심이 될까요? 범죄는 자신과 상관이 없을 땐 카타르시스를 느끼게도 하지만, 범죄나 범인이 자신과 직접 연관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의 내면에 품고 있는 죄의 태도에 대한 성경의 고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경이란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인데요. 9절 중반에는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죄 아래에 있다는 점을 다시금 상기시킵니다. 복음의 은혜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반복되고 강조되는 것이 바로 죄에 관한 문제입니다. 인간이 죄의 지배에 있지 않다면 이 세계는 고통이나 고난에서 자유로울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죄로 인해 이 세상의 다른 피조물까지도 고난과 고통에 속박되어 있는 것(롬 8:22)이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10절부터 18절까지 세 가지 영역에서 구약성경이 고발하는 인간의 부조리한 영적, 내면적 태도와 행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10절 중반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은 죄인이 된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고발입니다. 인간 중에는 의로운 존재, 즉 의인이 전혀 없다고 하십니다.
대체로 ‘의인’이라고 말하면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의인’의 정의로운 희생은 그 가족에게도 ‘정의’일 수 있을까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의인의 희생으로 그 가족들이 원치 않는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의인의 가족들은 ‘의인’의 희생으로 주어질 고통과 고난을 감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과연 의인의 의로운 행동은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저런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아무리 의인의 정의로운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 희생과 정의로 인해 누군가 이익을 얻었다면, 반대로 그로 인해 손해와 상처를 보는 일도 있다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곧 올바르다는 것이며, 그래서 정의로운 것입니다. 원어로 의롭다는 말은 ‘디카이오스’인데요. 이 단어의 유사어로 ‘아가도스’라는 선하다는 뜻의 단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정의로운 것과 선한 것은 같은 흐름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선하시다고 할 때 ‘아가도스’라는 단어를 쓴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본문의 11절에도 적혀 있지만, 하나님을 알고, 그 뜻과 그 마음을 아는 것이 곧 정의의 기준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알고, 그 뜻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자기 기준으로 살기 때문이지요. 소위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이지만,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이라는 조어가 있을 정도입니다.
따라서 성경적인 기준에서 의인은 다름아닌 ‘하나님을 찾는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뭔가 희생을 많이 행하고, 정의로운 목소리를 낸다고 반드시 의인인 것은 아니지요. 오직 하나님의 뜻과 그 나라를 위해서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 혹은 만들어진 그 길을 따라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정의로운 행실도 있고, 남을 위한 희생도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저와 여러분은 곧 의인의 길을 가는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의인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가족과 친구와 이웃이 나를 의인이라고 인정할 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의인의 길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의인의 길을 사수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다음으로는 13절부터 14절까지는 말과 혀에 관한 고발입니다. 13절의 전반부에서 의롭지 못한 죄인 곧, 악인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과 같다고 하십니다. 목구멍으로부터 죽음이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이 얼마나 독한 것인지 우리는 일상과 경험을 통해서 이미 잘 알고 있지요.
개그우먼 이성미 집사님의 간증집에 있는 내용입니다.
캐나다에서 살 때 아들이 그렇게 말썽을 부렸다고 합니다. 그런 아들을 보면서 이 집사님은 매일 새벽에 기도를 하면서 아들의 변화를 구했다고 하지요. 그러나 기도를 끝내고 집에 와서는 아들의 한심스런 모습을 보면서 욕을 하고 혼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루는 아들이 학교에 일부러 지각을 하는 것을 보면서 또 욕을 하며 화를 냈다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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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가도 돼!” 아들은 이불 속에서 귀찮다는 듯 툭 내뱉었다. 아들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나는 더 화가 치밀어서 소리 질렀다.
“안 가도 되는데 왜 전화가 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 번! 네가 교장이야? 학교를 네 맘대로 왔다 갔다 하게? 야 이 XX야! 내가 너 땜에 창피해서 못 살아, XX야.”
아들은 귀찮다는 듯 일어나 샤워실로 휙 들어가 버렸고 나는 아침을 대충 차려 놓고 어슬렁어슬렁 내려온 아들의 뒤통수에다 대고 소리쳤다.
“야 빨리 먹고 학교 가. 한심한 놈. 이 XX야! 넌 뭐가 되려고 그러니, 미친 놈! 날 샜다. 병신 같은 XX! 쓰레기 같은 놈아, 너는 아무짝에도 못 쓴다, 이 XX야!”
그때였다. 아무 생각없이 욕을 내 뱉는데 내 마음을 내리치는 한마디가 들렸다.
“네 아들, 네가 말한 대로 만들어 줄까?”
그 순간 너무너무 끔찍한 그림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미친개, 피 흘리며 쓰러진 모습, 엉망진창인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아들에게 밥 먹고 학교에 가라 하고는 방에 들어가 몸부림쳤다. 그리고 울부짖으면 기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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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이성미 집사님의 아들이 변화되었고, 심지어 공부까지 스스로 하게 되었다는 간증을 읽었습니다.
육신의 가치로만 사는 사람의 말은 그 안에 있는 악하고 더러운 것을 그대로 쏟아내는 열린 무덤과 같습니다. 13절 후반절에서는 입술에 독사의 독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입으로 들어 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까지 말씀하셨지요. 의인은 함부로 목구멍을 열거나, 혀와 입술을 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은 될 수 있으면 줄이고, 때에 맞는 말을 하여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라는 것(엡 4:29)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권면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죄인인 사람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저주와 독설 뿐인 것입니다.
15절부터 18절에는 죄인의 행동과 실천에 관한 고발입니다. 피를 흘리는 일에 발을 빠르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 길에는 파멸과 비참이 있어서 평화를 해치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이런 길을 걷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눈이 없지요. 말 그대로 눈이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
옛 어른들의 시중에 ‘踏雪野中去’ 라는 시가 있습니다.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 눈 덮인 들길 걸어갈 때
不須湖亂行 (불수호란행) - 행여 아무렇게나 걷지 말라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이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지금 나의 일상생활이 훗날 뒤따르는 사람의 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격언입니다. 사람은 지금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고, 지금을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에 내키는대로,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그 ‘지금’이라는 시간이 소중한 나의 역사를 만들고, 나와 관련된 사람들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 내린 길을 함부로 걷지 않고 누군가의 길이 될 나의 발걸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을 소중히 여기며 동시에 미래에서 바라볼 나의 과거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나의 ‘지금’이 주님과 동행하는 의인의 길을 걷는 길이라면 미래에 나의 과거를 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고 기뻐하며 행복해 할 역사를 만드는 길인 것을 믿습니다.
지금을 보면서 미래를 함께 볼 수 있는 지평이 열리는 것이 곧 영생의 지평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는 것을 또한 믿습니다. 어떤 분의 격언에 태도를 바꾸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언행이 바뀌고, 언행이 바뀌면 일상이 바뀌고, 일상이 바뀌면 인생이 바뀌고, 인생이 바뀌면 운명을 바꾼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따라서 악인의 태도는 악인의 운명을 따라가기 마련이지만, 의인의 태도는 의인의 운명을 성취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을 입시를 두번째 준비하던 시기에 다니던 학원 선생님이 매우 의미 있는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모두가 재수 아니면, 삼수 이상을 하면서 대입을 준비하던 학원생들이 모의고사를 볼수록 성적이 향상되지 않는 것 때문에 좌절을 하고 낙심을 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 때 저희 담당 교사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대학에 떨어진 것도, 그렇다고 붙은 것도 아니다. 여러분은 지금 대학에 떨어지고 있을 수도 있고, 혹은 붙고 있을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오늘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대학에 붙는 결과를 낼 수도, 그렇지 않은 결과를 낼 수도 있다. 모의고사 몇 번을 갖고 벌써 결론을 내고 합격과 불합격을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판단이다.”
저는 가끔 그 분의 격려가 생각납니다. 그리고 동행일기를 쓰면서, 주님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면서, 그 격려가 매우 중요한 영적인 교훈을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삶을 자주 ‘길’이라고 표현합니다. 매일 하루에 하루만큼의 일상과 인생을 주님 앞에 쌓으며 살고 있습니다. 사실 인생은 한 줄기의 외길입니다. C. S. 루이스의 말처럼 천국을 향해서 얕은 오르막길을 걸어가든지, 혹은 지옥을 향해서 얕은 내리막길을 걸어가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오늘 의인의 길을 걷고 있다면 영생을 향해 가는 운명이고, 그렇지 않다면 멸망을 향해 가는 운명인 것입니다.
17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의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눈길에 찍힌 자신의 발자국 하나 흐트러지지 않도록 사는 것이 곧 의인의 길인 것을 믿습니다. 인생의 지평에서만 봐도 눈길 하나 함부로 걷지 않는 것이 인생의 도리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영생의 지평에서 걷는 복되고 아름다운 일상을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19절과 20절에서 율법의 중요한 기능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간의 존재가 이처럼 의로운 면은 하나도 없이 악한 일만 꾀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율법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이 있었기에 인간은 각자의 내면적인 의지가 사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이 있었기에 우리의 말이 곧 죽음과 멸망을 자초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이 있었기에 우리의 행실과 인생이 멸망과 지옥을 향해 느긋한 내리막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율법이 있었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과 은혜, 그리고 영생의 복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율법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저 자기 소견에 옳은 데로 살다가 그것이 멸망으로 가는 길인지도 모르고 벼랑으로 쏟아지는 물결과 함께 쓸려 갔을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유죄로 드러내는데 사용됩니다. 우리가 본질적인 진노의 자식이었다고 성경은 고발합니다. ‘진노의 자식’이라는 표현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이해할 수 있는데요. 첫째는 ‘진노’에 속한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태생적으로 진노를 받기 위해서 태어나는 존재임을 뜻하는데요. 보통 우리가 이해하는 표현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자식이 아니라, 악마의 자식, 씨알이 악마적인 존재라는 것으로 절대로 변화될 수 없는 존재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진노를 ‘받을’ 자식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원래는 진노나 멸망을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어떠한 경위를 통해서 진노를 받게 된 영생의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탕자가 바로 이런 케이스입니다. 원래는 아버지의 자녀인데 스스로가 벌을 받을 길을 자초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결국 멸망하는데 버려지지 않았고, 다시 돌아와 자신의 신분을 회복합니다.
저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노의 자식’이란 후자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비록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영적 신분을 잊고 살기에 진노 받을 짓을 사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자녀는 진노하심에서 벗어나 영생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는 비록 진노를 받아야만 하는 운명을 자초하여 걷고 있어서 멸망으로 향하는 운명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승리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듣고, 믿고, 영생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반드시 거룩하게 하십니다. 비록 지금은 악인의 길이 더 즐겁고, 악독한 말이 사이다처럼 더 시원스레 들리고, 악인의 마음이 더 후련한 악한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리시며 모두가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가 문제가 많은 것을 알면 알 수록, 우리가 누리는 은혜는 더욱 커지고,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동네의 사채업자에게 어떤 사람이 5억을, 어떤 사람은 500만원을 빚졌습니다. 그런데 사채업자에게 일이 생겨서(복음을 믿고 회심하여) 두 사람 모두 채무를 면제받았습니다. 둘 중에 누가 더 그 사채업자를 좋게 생각할까요? 아니면 누가 더 이득을 얻었다고 생각할까요? 당연히 5억을 빚졌던 사람일 것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어느 바리새인 집에 식사초청을 받으셔서 가셨을 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생에서 저지른 죄의 책임에 대하여 심판을 받는다고 할 때, 과연 우리는 얼마나 큰 은혜를 고백할 수 있을까요? 당장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와 사랑으로 고백할 수 있을까요?
저는 매일 동행일기를 쓰면서 감사의 제목을 곁들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지금까지 제가 저질렀던 수많은 불평과 불만, 비난과 저주를 상쇄하려는ちょうけし 마음이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 남은 인생을 전혀 불평, 불만, 비난하지 않고 감사만 하며 살 수 있다면 조금은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제가 어지럽게 걸어 왔던 언어생활이라는 눈길을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이제라도 더 늦지 않게 나의 일상을 감사로 기록해 놓는 것이 저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언어생활뿐만이 아닙니다. 저의 사소한 일상까지도 율법의 시선으로 볼 때 악하고 죄스럽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하나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율법으로 나의 죄악과 허물은 분명하고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율법을 통해 드러난 나의 죄악을 인식할 때 비로소 우리는 복음의 가치가 얼마나 깊고, 크고, 넓은지를 체감할 수 있게 됩니다. 율법의 기능은 복음의 은혜를 헤아려 볼 수 있는 바로미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육신적인 노력으로는 도무지 한결 같은 의지로 정의롭게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말은 독사의 입처럼 독과 같은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야트막한 오르막으로 되어 있는 영생의 길보다, 그 반대의 멸망으로 가는 길을 더 좋아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죄악과 허물에 대하여 명확하게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감사와 찬송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의 유죄를 인정할수록 우리의 영생에 대한 의지는 더욱 명확해 집니다. 저와 여러분이 율법을 통해 죄를 인식하고 회개함으로 죄사함과 거듭남을 약속하시는 복음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풍성하여 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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