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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UME I FANTINE
BOOK FIRST - A JUST MAN(올바른 사람)
CHAPTER XI - A RESTRICTION(하나의 한계)
We should incur a great risk of deceiving ourselves, were we to conclude from this that Monseigneur Welcome was "a philosophical bishop," or a "patriotic cure." His meeting, which may almost be designated as his union, with conventionary G-, left behind it in his mind a sort of astonishment, which rendered him still more gentle. That is all. Although Monseigneur Bienvenu was far from being a politician, this is, perhaps, the place to indicate very briefly what his attitude was in the events of that epoch, supposing that Monseigneur Bienvenu ever dreamed of having an attitude. Let us, then, go back a few years. Some time after the elevation of M. Myriel to the episcopate, the Emperor had made him a baron of the Empire, in company with many other bishops. 그러나 위의 이야기를 가지고서 비앵브뤼 예하늘 가리켜 철학자 주교라거나 애국자 주임 사제로 생각한다면 큰 오해일 것이다. 전 의원 G와의 결합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을 그 만남 이후 주교는 마음속 경이로움을 토대로 더욱 온화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비앵브뉘 예하는 정치적인 면모가 없었다. 그 무렵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그가 만약 어떤 태도를 취했다면 어땠을지 간단히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브앵브뉘 예하는 추호도 정치적 인물이 아니었으나, 만약 당시의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하여 비앵브뉘 예하가 어떤 태도를 취하려고 생각했다면 그 태는 어떠했을까를 여기에 간단히 설명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므로 몇 년 전 일로 올라가보자. 미리엘씨가 주교로 승급한 지 얼마 안 되어, 황제는 다른 여러 주교들과 함께 그를 제국의 남작에 봉했다.
The arrest of the Pope took place, as every one knows, on the night of the 5th to the 6th of July, 1809; on this occasion, M. Myriel was summoned by Napoleon to the synod of the bishops of France and Italy convened at Paris. This synod was held at Notre-Dame, and assembled for the first time on the 15th of June, 1811, under the presidency of Cardinal Fesch. M. Myriel was one of the ninety-five bishops who attended it. But he was present only at one sitting and at three or four private conferences. Bishop of a mountain diocese, living so very close to nature, in rusticity and deprivation, it appeared that he imported among these eminent personages, ideas which altered the temperature of the assembly. He very soon returned to D- He was interrogated as to this speedy return, and he replied: "I embarrassed them. The outside air penetrated to them through me. I produced on them the effect of an open door." On another occasion he said, "What would you have? Those gentlemen are princes. I am only a poor peasant bishop." 세상 사람들이 다 알다시피, 1809년 7월 5일과 6일 사이에 밤에 교황 체포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나폴레옹의 명으로 미리엘 씨는 파리에서 개최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주교 회의에 소집되었다. 이 주교 회의는 노트르담 ㅅ헝당에서 페슈 추기경을 의장으로 하여 1811년 6월 15일에 처음으로 소집되었다. 그러니 그는 단 한 번의 회의와 서너 번의 특별 협의회에마나 참석했을 뿐이었다. 산중 교구의 주교로서 소박과 궁핍 속에서 그렇게 가까이 자연을 살아온 그는 그 고위 인사들에게 회의의 분위기를 바꿀 많안 사상을 가져다 준 것 같다. 그는 이내 디뉴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렇게 빨리 되돌아온 까닭은 사람들이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들에게 방해가 되었소. 바깥공기가 나를 통해 그들에게 갔소. 나는 그들에게 활짝 열린 문 같은 인상을 주었소.” 또 어떤 때는 이렇게도 말했다. “별수 없지 않소? 그 양반들은 고귀한 분들이지만 나는 가난한 시골 주교에 불고하니.”
The fact is that he displeased them. Among other strange things, it is said that he chanced to remark one evening, when he found himself at the house of one of his most notable colleagues: "What beautiful clocks! What beautiful carpets! What beautiful liveries! They must be a great trouble. I would not have all those superfluities, crying incessantly in my ears: 'There are people who are hungry! There are people who are cold! There are poor people! There are poor people!'" Let us remark, by the way, that the hatred of luxury is not an intelligent hatred. 주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일화 중 이런 일이 있다. 최고위층 저택에 초대받았을 때 그는 불쑥 이렇게 내뱉고 말았다. “이 아름다운 괘종시계와 양탄자! 이렇게 멋지고 화려한 하인들의 옷 차림! 정말 수고스러우시겠습니다. 저는 이런 사치는 아예 모르고 사는 데 말이지요. 이런 것들과 더불어 살면 귓가에 이런 말이 들릴 것만 같습니다. ‘수많은 굶주린 자들을 생각하라! 추위에 떠는 사람들을 잊지 마라!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라!” 말이 나온 김에 이야기해 보자면, 사치를 경계하는 것이 지적인 것에 대한 혐오는 아니다.
This hatred would involve the hatred of the arts. Nevertheless, in churchmen, luxury is wrong, except in connection with representations and ceremonies. It seems to reveal habits which have very little that is charitable about them. An opulent priest is a contradiction. The priest must keep close to the poor. Now, can one come in contact incessantly night and day with all this distress, all these misfortunes, and this poverty, without having about one's own person a little of that misery, like the dust of labor? Is it possible to imagine a man near a brazier who is not warm? Can one imagine a workman who is working near a furnace, and who has neither a singed hair, nor blackened nails, nor a drop of sweat, nor a speck of ashes on his face? The first proof of charity in the priest, in the bishop especially, is poverty. This is, no doubt, what the Bishop of D- thought. 그 혐오 속에는 예술에 대한 의견도 있겠지만, 교인들에게 연극 정도를 제외하고는 사치는 맞지 않다. 그것은 애정과 덕망이 결핍된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는 사제가 있다면 모순 덩어리일 것이다. 사제는 가난한 사람편 이어야 한다. 모든 노동자에게 따르는 신성한 빈곤을 헤아릴지 않고서 어떻게 지상의 갖가지 고난과 역경, 가난을 감쌀 수 있겠는가? 활활 타오르는 난롯불 옆에서 따뜻함을 모를 수 있는가? 줄곧 용광로에서 일하는 노동자인데, 머리털도 타지 않고, 손톱도 더럽지 않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얼굴에 재 한 줌 묻지 않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가? 신부에게, 특히 주교에게 필요한 첫번째 증거는 청빈이다. 디뉴의 주교가 생각한 것도 아마, 그러한 것이었으리라.
It must not be supposed, however, that he shared what we call the "ideas of the century" on certain delicate points. He took very little part in the theological quarrels of the moment, and maintained silence on questions in which Church and State were implicated; but if he had been strongly pressed, it seems that he would have been found to be an ultramontane rather than a gallican. Since we are making a portrait, and since we do not wish to conceal anything, we are forced to add that he was glacial towards Napoleon in his decline. Beginning with 1813, he gave in his adherence to or applauded all hostile manifestations. He refused to see him, as he passed through on his return from the island of Elba, and he abstained from ordering public prayers for the Emperor in his diocese during the Hundred Days. 게다가 어떤 미묘한 점에 관해서 주교가 우리들이 ‘시대사조’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들과 공유하고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당시의 시대 논쟁에 별로 개입하지 않았고, 교회와 국가가 연루된 문제에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만약에 의견 표명을 강요당했다면 그는 프랑스 독립 교회보다는 오히려 교회 지상주의의 태도를 취했을 것이다. 나는 인물 묘사를 하고 있고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으므로, 그가 기울어 가는 나폴레옹에게 쌀쌀했다는 것도 덧붙여 두지 않을 수 없다. 1813년 이후, 그는 나폴레옹에 대한 모든 반대 운동에 찬성하고 갈채를 보냈다. 그는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돌아올 때 환영하기를 거절했고, 백일천하 시기에 황제를 위한 공적 기도를 교구 내에서 끝끝내 금했다.
Besides his sister, Mademoiselle Baptistine, he had two brothers, one a general, the other a prefect. He wrote to both with tolerable frequency. He was harsh for a time towards the former, because, holding a command in Provence at the epoch of the disembarkation at Cannes, the general had put himself at the head of twelve hundred men and had pursued the Emperor as though the latter had been a person whom one is desirous of allowing to escape. His correspondence with the other brother, the ex-prefect, a fine, worthy man who lived in retirement at Paris, Rue Cassette, remained more affectionate. 누이동생 바티스틴 양 이외에 그에겐 형제가 둘 있었다. 하나는 징군이고 또 하나는 도지사였다. 그는 두 형제에게 쾌 자주 편지를 썼다. 주교는 한때 전자에 대해 조금 나쁙 생각한 일이 있었다. 왜냐하면 장군이 그가 나폴레옹의 칸 상류 당시에 프로방스 지휘관으로서 천이백 명의 부하를 인솔하여 황제를 추격했는데 그것이 마치 일부러 황제를 도망하게 내버려 두고 싶어하는 사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전에 도지사를 지낸 또 하나의 형제에게 보낸 주교의 편지는 한결같이 애정이 어려 있었는데, 이 착하고 품위 이쓴ㄴ 사람은 은퇴해 파리의 카세트 거리에 살고 있었다.
Thus Monseigneur Bienvenu also had his hour of party spirit, his hour of bitterness, his cloud. The shadow of the passions of the moment traversed this grand and gentle spirit occupied with eternal things. Certainly, such a man would have done well not to entertain any political opinions. Let there be no mistake as to our meaning: we are not confounding what is called "political opinions" with the grand aspiration for progress, with the sublime faith, patriotic, democratic, humane, which in our day should be the very foundation of every generous intellect. Without going deeply into questions which are only indirectly connected with the subject of this book, we will simply say this: 그 비행브뉘 예하도 당파심이 있을 때도 있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고, 근심 걱정이 있을 때도 있다. 영원한 것에만 전념하는 이 온화하고 위대한 정신에도 현재의 정열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물론 이런 살마은 정치적 의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좋다. 내 생각을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나는 이 이른바 ‘정치적 의견’이라는 것을 진보에 대한 커다란 열망과 혼동하는 것도 아니고, 오늘날 모든 고결한 지성의 근봉이 되어야 할 저 애국적이고 민주적이고 숭고한 신념과 혼도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의 주제와 간접적으로만 관계가 있는 문제에는 깊이 들어가지 않고, 다만 한마디만 여기에 적어 두기로 하자.
It would have been well if Monseigneur Bienvenu had not been a Royalist, and if his glance had never been, for a single instant, turned away from that serene contemplation in which is distinctly discernible, above the fictions and the hatreds of this world, above the stormy vicissitudes of human things, the beaming of those three pure radiances, truth, justice, and charity. While admitting that it was not for a political office that God created Monseigneur Welcome, we should have understood and admired his protest in the name of right and liberty, his proud opposition, his just but perilous resistance to the all-powerful Napoleon. But that which pleases us in people who are rising pleases us less in the case of people who are falling. We only love the fray so long as there is danger, and in any case, the combatants of the first hour have alone the right to be the exterminators of the last. He who has not been a stubborn accuser in prosperity should hold his peace in the face of ruin. The denunciator of success is the only legitimate executioner of the fall. As for us, when Providence intervenes and strikes, we let it work. 즉 비행브뉘 예하가 왕당파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가 오락가락 파란 많은 인간사를 초월하여 진리와 정의와 자비의 이 세 맑은 빛이 찬연히 빛나는 저 청아한 관조에서 한시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면 참 훌륭했을 것이라고. 하느님이 비행브뉘 예하를 세상에 내놓은 것이 정치적 직무를 위해서가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정의와 자유의 이름 아래 주장하는 항의이고, 절대적 권력을 가진 나폴레옹에 대한 과감한 반대이고, 위험하고도 정당한 저항이렀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고 찬양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행위라도 상승하는 사람들에게 할 때에는 우리 마음에 들지만 추락하는 사람들에게 할 때에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리는 위험이 있는 동안에만 싸움을 좋아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초기의 투사들만이 막판에 전멸시키는 자가 되는 권리를 갖는다. 흥성할 때에 집요한 비난자가 아니었던 자는 몰락 앞에서 침묵을 지켜야 한다. 성공의 고발자만이 몰락의 정당한 판정자이다. 우리로서는 하느님이 나서서 타격을 가할 때에는 하느님에게 맡겨 둔다.
1812 commenced to disarm us. In 1813 the cowardly breach of silence of that taciturn legislative body, emboldened by catastrophe, possessed only traits which aroused indignation. And it was a crime to applaud, in 1814, in the presence of those marshals who betrayed; in the presence of that senate which passed from one dunghill to another, insulting after having deified; in the presence of that idolatry which was loosing its footing and spitting on its idol, -it was a duty to turn aside the head. 1812년 우리들을 무장해제하기 시작했다. 1813년 꿀 먹은 벙어리였던 입법부는 파국에 용기를 얻어 비겁하게도 침묵을 깨뜨렸는데, 그것은 분개하게 할 만한 것밖에 없었으니 갈채를 보내는 것은 잘못이었다. 1814년 그 배반하는 장군들 앞에서, 전에 신성시하던 것을 모욕하면서 비열에 비열을 거듭해 온 그 상원 앞에서 도망하면서 우상에 침을 맽는 그 우상 숭배자 앞에서 사람들은 마땅히 얼굴을 돌려야 했다.
In 1815, when the supreme disasters filled the air, when France was seized with a shiver at their sinister approach, when Waterloo could be dimly discerned opening before Napoleon, the mournful acclamation of the army and the people to the condemned of destiny had nothing laughable in it, and, after making all allowance for the despot, a heart like that of the Bishop of D-, ought not perhaps to have failed to recognize the august and touching features presented by the embrace of a great nation and a great man on the brink of the abyss. With this exception, he was in all things just, true, equitable, intelligent, humble and dignified, beneficent and kindly, which is only another sort of benevolence. 1815년 마지막 파탄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프랑스가 그 불길한 접근에 떨고 있었을 때, 워털루가 나폴레옹 앞에 열려 있는 것을 어스푸레하게나마 알아볼 수 있었을 때, 운명의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에 대한 군대와 국민의 비통한 호성은 결코 웃을 일이 아니었으니, 이 독재자에 관해 전적으로 찬동하지 않더라도, 디뉴의 주교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파멸 직전에 있었던 한 위대한 국민과 한 위대한 인물의 굳은 포옹 속에는 엄숙하고도 감격적인 것이 있었다는 것을 아마 부인해서는 안 되었을 것이다. 이것을 제외하면 주교는 모든 면에서 언제나, 그 때, 그때마다 올바르고, 진실하고, 공평하고, 총명하고, 겸손하고, 훌륭했다.
He was a priest, a sage, and a man. It must be admitted, that even in the political views with which we have just reproached him, and which we are disposed to judge almost with severity, he was tolerant and easy, more so, perhaps, than we who are speaking here. The porter of the town-hall had been placed there by the Emperor. He was an old non-commissioned officer of the old guard, a member of the Legion of Honor at Austerlitz, as much of a Bonapartist as the eagle. This poor fellow occasionally let slip inconsiderate remarks, which the law then stigmatized as seditious speeches. After the imperial profile disappeared from the Legion of Honor, he never dressed himself in his regimentals, as he said, so that he should not be obliged to wear his cross. He had himself devoutly removed the imperial effigy from the cross which Napoleon had given him; this made a hole, and he would not put anything in its place. "I will die," he said, "rather than wear the three frogs upon my heart!" 그 외에 주교는 어떤 일에든 올바르고 진실하고 공정하고 겸손했다. 그는 자비롭고도 친절했다. 그는 사제이면서 현자였고 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꼭 말해 두어야 할 것은-우리가 앞서 말한 정치적 의견에서도 그는 너그러운 입장이었고 자기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적어도 여기에 그것을 낱낱이 이야기하고 있는 우리보다는 훨씬 침착했다. 디뉴의 시청 수위는 황제 시대부터 그 일을 해 온 사람인데, 근위대 하사로 아우스터리츠 전투에 참가해서 십자훈장을 갖고 있었고 마치 독수리 문장처럼 황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보나프르트파였다. 이 불쌍한 사나이는 가금 금기어에 속하는 아슬아슬한 말을 내뱉곤 했다. 레지옹도니르 훈장에서 황제의 옆얼굴이 사라진 뒤부터 그는 군복을 입지 않았다. 십자훈장을 달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받은 십자 훈장에서 황제의 초상을 손수 경건하게 도려냈다. 그 자리에는 구멍이 뚫렸는데 그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 그러고는 “새롭게 개구리 세 마리(훈장에 새로 새긴 세 개의 꽃잎)를 다느니 차라리 주겠다 고 말하고 다녔다.
He liked to scoff aloud at Louis XVIII. "The gouty old creature in English gaiters!" he said; "let him take himself off to Prussia with that queue of his." He was happy to combine in the same imprecation the two things which he most detested, Prussia and England. He did it so often that he lost his place. There he was, turned out of the house, with his wife and children, and without bread. The Bishop sent for him, reproved him gently, and appointed him beadle in the cathedral. In the course of nine years Monseigneur Bienvenu had, by dint of holy deeds and gentle manners, filled the town of D- with a sort of tender and filial reverence. Even his conduct towards Napoleon had been accepted and tacitly pardoned, as it were, by the people, the good and weakly flock who adored their emperor, but loved their bishop. 그는 가끔 큰소리로 루이 18세를 비웃었다. “영국 각반을 찬 병든 늙은이! 그 선모 머리끄덩이라 같이 프로이센으로 꺼져라!” 그는 가장 싫어하는 영국와 프로이센을 한데 묶어 욕을 하면서 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어찌나 욕이 심했는지 결국은 지위를 잃고 가족을 거느리고 길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주교는 그를 부러 대성당 문지기 자리를 주었다. 주료는 교구 안에서 모든 사람의 친구이자 진정한 주님의 목자였다. 9년 동안 비앵브뉘 예하는 훌륭한 인덕과 태로도 디뉴 민중의 존중을 얻었다. 나폴레옹에 대한 그의 태도까지도 민중에게 반감을 사지 않았다. 선하고 착한 사람들은 그들의 황제를 숭배하는 마음으로 주교를 사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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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FIRST-A JUST MAN(올바른 사람)
CHAPTER XII - THE SOLITUDE OF MONSEIGNEUR WELCOME(비행브뉘 예하의 고독)
A bishop is almost always surrounded by a full squadron of little abbes, just as a general is by a covey of young officers. This is what that charming Saint Francois de Sales calls somewhere "les pretres blancs-becs," callow priests. Every career has its aspirants, who form a train for those who have attained eminence in it. There is no power which has not its dependents. There is no fortune which has not its court. The seekers of the future eddy around the splendid present. Every metropolis has its staff of officials. Every bishop who possesses the least influence has about him his patrol of cherubim from the seminary, which goes the round, and maintains good order in the episcopal palace, and mounts guard over monseigneur's smile. To please a bishop is equivalent to getting one's foot in the stirrup for a sub-diaconate. It is necessary to walk one's path discreetly; the apostleship does not disdain the canonship. Just as there are bigwigs elsewhere, there are big mitres in the Church. 장군의 주변에 젊은 장교들이 모이는 것처럼 주교 주변에도 젊은 성직자들이 많았다. 주네브의 주교, 성 프랑수아 드 살이 늘 ‘젖내도 안 빠진 사내들’이라고 말하는 이들이었다. 어떤 직업이든 그 길을 가려는 젊은이들은 성공한 자 주변으로 몰려든다. 어떻게 권위자 없이 성공을 하고 아첨 없이 지위를 얻겠는가!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사람들은 화려한 현재를 좇으려 든다. 대주교 관구에는 늘 뒤따르는 무리가 있었다. 제 목소리를 내는 주교 옆에는 신학생들이 모여들어 주교관의 질서를 따르면서 안팎을 살피고 주교의 일거수 일투족을 엿보았다. 주교의 총애를 받는 것은 성공으로 가는 지도를 얻은 것과 같다. 그러니 성공하는 길을 스스로 찾아나서는 수밖에. 세속 사회에 지위가 존재하듯이 교회에도 주교관이 있다.
These are the bishops who stand well at Court, who are rich, well endowed, skilful, accepted by the world, who know how to pray, no doubt, but who know also how to beg, who feel little scruple at making a whole diocese dance attendance in their person, who are connecting links between the sacristy and diplomacy, who are abbes rather than priests, prelates rather than bishops. Happy those who approach them! Being persons of influence, they create a shower about them, upon the assiduous and the favored, and upon all the young men who understand the art of pleasing, of large parishes, prebends, archidiaconates, chaplaincies, and cathedral posts, while awaiting episcopal honors. As they advance themselves, they cause their satellites to progress also; it is a whole solar system on the march. Their radiance casts a gleam of purple over their suite. Their prosperity is crumbled up behind the scenes, into nice little promotions. The larger the diocese of the patron, the fatter the curacy for the favorite. And then, there is Rome. 국왕의 총애를 받고, 많은 수입과 윤택한 생활이 보장되며, 사계의 인기를 받고 능수능락하게 인맥을 관리하며, 신께 올리는 기도에서부터 남을 위한 탄원까지 올리고, 또는 교구의 사람들과 친밀히 면담을 나누며 성당 살림을 잘 꾸려 나가고, 사제보다는 대수도원장, 주교보다는 교황청의고위 성직자가 어울릴 만한 주교들 말이다. 그와 가까이 지낸다면 진정으로 행복할 것이다. 그들은 권세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들 주위에, 아부하는 자와 편애하는 자들에게, 자기들의 환심을 살 줄 하는 젊은이들에게, 주교의 지위를 얻기 전가지 풍요로운 교구와 녹봉과 부주교직과 교회사직과 대성당 내의 직책을 흠뻑 내려 준다. 자신이 승급함에 따라 그들은 추종자들을 끌어올린다. 마치 하나의전진하는 태양계 전체라고나 할까? 그들의 빛나는 명성은 그들의 시종들을 붉게 물들인다. 그들의 영달은 배우희 사람들에게 적당한 작은 승급으로 세분되어 뿌려진다. 보호자의 교구가 크면 클수록, 총애받는 사제의 직분은 커진다. 게다가 거기에 로마가 있다.
A bishop who understands how to become an archbishop, an archbishop who knows how to become a cardinal, carries you with him as conclavist; you enter a court of papal jurisdiction, you receive the pallium, and behold! you are an auditor, then a papal chamberlain, then monsignor, and from a Grace to an Eminence is only a step, and between the Eminence and the Holiness there is but the smoke of a ballot. Every skull-cap may dream of the tiara. The priest is nowadays the only man who can become a king in a regular manner; and what a king! the supreme king. Then what a nursery of aspirations is a seminary! How many blushing choristers, how many youthful abbes bear on their heads Perrette's pot of milk! Who knows how easy it is for ambition to call itself vocation? in good faith, perchance, and deceiving itself, devotee that it is. 대주교가 될 줄 아는 주교는 추기경이 될 줄 아는 대주교는 그대를 수행원으로 데려간다. 그대는 최소 법원으로 들어가고, 팔리움을 받고, 배심원이 되고, 교황의 시종이 되고 주교가 된다. 그리고 대주교에서 추기경까지는 한 걸음밖에 되지 않고, 추기역과 교황 사이에는 허망한 투표밖에 없다. 추기경의 붉은모자는 어느 것이나 다 교황의 삼층관을 꿈꿀 수 있다. 신부만이 오늘날 규칙적인 절차를 따라 왕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데, 이건 무슨 왕인가? 최고의 왕이다. 그러므로 신학교는 얼마나 큰 야심의 못자리인가? 신학교는 많은 이의 동경을 한 몸에 받는 곳이다. 얼마나 많은 수준은 소년들이 얼마나 많은 성직자들이 페레트의 우유 항아리를 머리에 지고 있는가! 야망이란 얼마나 간사하게 사람을 속이고 있는가. 그들은 야삼이 그들의 천직인 줄을 까맣게 모르고 있도다!
Monseigneur Bienvenu, poor, humble, retiring, was not accounted among the big mitres. This was plain from the complete absence of young priests about him. We have seen that he "did not take" in Paris. Not a single future dreamed of engrafting itself on this solitary old man. Not a single sprouting ambition committed the folly of putting forth its foliage in his shadow. His canons and grand-vicars were good old men, rather vulgar like himself, walled up like him in this diocese, without exit to a cardinalship, and who resembled their bishop, with this difference, that they were finished and he was completed. The impossibility of growing great under Monseigneur Bienvenu was so well understood, that no sooner had the young men whom he ordained left the seminary than they got themselves recommended to the archbishops of Aix or of Auch, and went off in a great hurry. For, in short, we repeat it, men wish to be pushed. A saint who dwells in a paroxysm of abnegation is a dangerous neighbor; he might communicate to you, by contagion, an incurable poverty, an anchylosis of the joints, which are useful in advancement, and in short, more renunciation than you desire; and this infectious virtue is avoided. 비앵브뉘 예하는 겸손하고 가난하고 소탈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권세를 떨치는 주교과 ㄴ중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는 젊은 사제 추종자가 한 명도 없었다. 파리에 가서도 인기를 끌지 못했다는 건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 바가 있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 늙은이를 앞세워 무엇을 얻어 내려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주교좌성당의 참사회원이나 부주교들은 모두 선량한 노인들로, 그와 마찬가지로 좀 평면적이고, 추기경이 되어 나갈 희망도 없이 그 교구 안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그들의 주교와 비슷하면서도, 그 차이는 그들은 끝장이 났고 주교는 완성돼 있었다는 것이다. 비앵브뉘 예하 옆에서는 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개 때문에, 그에게서 자격을 얻은 젊은이들고 신학교를 나오자마자 오슈의 대주교들에게 추척되어 재빨리 가 버렸다. 왜냐하면 결국, 되풀이하여 말하지만, 사람들을 끌어올려 주기를 바라니까. 극도의 자기 희생 속에서 사는 성자는 위험한 이웃이다. 그런 성자는 고질적인 빈곤과 승급에 유일한 관절의 경직, 그리고 요컨대 여러분이 원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포기를 틀림없이 여러분에게 전염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패더거에서 도망친다.
Hence the isolation of Monseigneur Bienvenu. We live in the midst of a gloomy society. Success; that is the lesson which falls drop by drop from the slope of corruption. Be it said in passing, that success is a very hideous thing. Its false resemblance to merit deceives men. For the masses, success has almost the same profile as supremacy. Success, that Menaechmus of talent, has one dupe, -history. Juvenal and Tacitus alone grumble at it. In our day, a philosophy which is almost official has entered into its service, wears the livery of success, and performs the service of its antechamber. Succeed: theory. Prosperity argues capacity. Win in the lottery, and behold! you are a clever man. He who triumphs is venerated. Be born with a silver spoon in your mouth! everything lies in that. Be lucky, and you will have all the rest; be happy, and people will think you great. Outside of five or six immense exceptions, which compose the splendor of a century, contemporary admiration is nothing but short-sightedness. Gilding is gold. It does no harm to be the first arrival by pure chance, so long as you do arrive. The common herd is an old Narcissus who adores himself, and who applauds the vulgar herd. 여기서 미앵브뉘 예하의 고독이 유래한다. 우리는 암담한 사회에 살고 있다. 성공하는 것. 거기에는 앞으로 튀어나온 부패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교훈이 있다. 말이 났으미 말이지만, 성공이란 참 끔찍한 것이다. 진실한 가치와성공의 허울뿐인 유사성이 사람들을 속인다. 군중에게 성공은 우월성과 거의 같은 모습을 띤다. 재능과 쌍둥이같이 닮은 성공에 속는 것이 있다. 즉 역사다. 오직 유베날리스와 타키투스만이 그것에 대해 불평한다. 오늘날에는 거의 공인된 철학이 하인의 신분으로 성공의 집에 집에 들어와 성공의 사환복을 입고 그 응접실에서 시중을 든다. 성공하라. 이것이 학설이다. 영달‘은 곧 ’능력‘ 이라고 추측된다. 복권에 당첨돼라. 그러면 그대는 재주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승리하는 자는 숭배받는다. 팔자를 타고나라.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행복해라. 그러면 그대는 그밖의 것을 가지리라. 행복해라. 그러면 사람들은 그대를 위대하다고 믿으리라. 한 시대에 빛나는 대여섯 명의 굉장히 이례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시대의 찬미는 거의 근시에 불과하다. 금박이 황금이다. 누가 되었던 벼락부자가 되기만 하면 상관없다. 속인은 자기 자신을 숭배하고 속인을 찬양하는 늙은 나르키소스다. 모세같은 사람이 되고, 아이스킬로스 같은 사람이 되고, 단테 같은 사람이 되고, 메켈란제로같은 사람이 되고, 나폴레옹 같은 사람이 되는 그러한 놀라운 재능을 군중은 목적을 달성한 자라면 누구에게고 대번에 환호하며 갖다 바친다.
Let a notary transfigure himself into a deputy: let a false Corneille compose Tiridate; let a eunuch come to possess a harem; let a military Prudhomme accidentally win the decisive battle of an epoch; let an apothecary invent cardboard shoe-soles for the army of the Sambre-and-Meuse, and construct for himself, out of this cardboard, sold as leather, four hundred thousand francs of income; let a pork-packer espouse usury, and cause it to bring forth seven or eight millions, of which he is the father and of which it is the mother; let a preacher become a bishop by force of his nasal drawl; let the steward of a fine family be so rich on retiring from service that he is made minister of finances, -and men call that Genius, just as they call the face of Mousqueton Beauty, and the mien of Claude Majesty.With the constellations of space they confound the stars of the abyss which are made in the soft mire of the puddle by the feet of ducks. 어떤 공증인이 국회의원으로 변신하고, 어떤 사이비 코르네유가 <티리다트>를 쓰고, 어떤 환관이 후궁을 소유하고, 프뤼돔 같은 어떤 군인이 우연히 한 시대의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하고, 어떤 약재상이 상브르예뫼즈에 주둔하는 군대를 위해 판지 구두창을 발명하여 가죽 대용으로 팔아서 40만 리브르의 연수입을 올리고, 어떤 행상이 돈놀이하는 계집과 결혼하여 칠팔백만의 돈을 낳아 그 아비가 되고 그 어미가 되고 어떤 설교사가 콧소리 덕분에 주교가 되고, 어떤 양가의 집사가 그 일을 그만두면서 거부가 되어 재무부 장관이 되며, 사람들은 그것을 일커ᅟᅥᆯ어 ‘천재’라 한다. 마치 그들이 무스크통의 얼굴을 ‘미’라고 부르고 클로드의 체격을 ‘위엄’이라고 부드듯이. 그들은 바다에 비치는 별자리와 진창의 진흙에 나 있는 오리 발자국을 혼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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