뤽 베송의 <도그맨>을 보고
영화나 한 편 볼까 싶어 OTT 서비스를 검색하다가 제목에 끌려 <도그맨>을 보았다. 다 보고 나니 뤽 베송 감독의 최근작이다. 2024년 1월에 개봉한 작품이다. 1993년에 <그랑블루>를 보고 ‘뤽 베송’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1990년에 <니키타>도 보았지만, 영화가 내 취향이 아니어서 그때는 뤽 베송을 몰랐다. 나중에 <니키타>에 대한 나의 해석과 평가가 달라졌지만, 그때는 그랬다.
<도그맨>이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는 일종의 스파이더맨 같은 것인가 싶었다. 앤트맨도 있으니까. 어쨌든 개들이 많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역시 또 사전정보 없이 제목만으로 영화를 시청했다. 작년에 개봉했던, 유연석과 차태현 주연의 <멍뭉이>도 개들이 많이 나올 것 같아서 본 영화였다. 영화는 흥행에도 실패했고, 소품 정도였지만, 난 개인적으로 만족했다. 개들이 많이 나와서.
암튼 <도그맨>도 그럴 것 같아서 선택했다. 사전정보 없이 영화를 보는 건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정말 그런 영화일지 상상도 못 했다. 결론적으로 도그맨은 스파이더맨이나 앤트맨 같은 존재가 아니다. 즉 갑자기 생긴 초능력을 이용하여 평범한 인간과 다른 존재로서 히어로 활동을 하는 그런 맨이 아니다.
만족스럽게도 개들은 많이 나왔다. 많이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개들이 없으면 영화가 안 될 정도다. 개들이 주인공인 셈인데, 인간 주인공 그러니까 도그맨은 더글라스라는 이름의 장애인이다. 더글라스와 더글라스가 이끄는 개들이 벌이는 서사가 주요 내용이다.
성인이 된 더글라스가 옛 일을 회상하며 자신이 어떻게 개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는지 정신과 의사에게 말할 때 약간 감정이입이 심했다. 마침 그때쯤 내가 문학에서나 접했던 상황을 겪은 내 또래 선생님의 지난한 가정사를 듣고 심란한 상황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어린 더글라스를 핍박하는 인간 같지도 않은(개만도 못한) 가족에게 분노까지 느꼈다.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을 괴롭힌(괴롭히고 있는) 그녀의 가족에게 느꼈던 절망감과 분노가 투사된 것 같다.
1990년에 <니키타>로 데뷔한 뤽 베송은 1993년에 <그랑블루>를 찍었고, 1995년에 <레옹>으로 (아마도) 난리가 났고, 1997년에는 <제5원소>를 그리고 2014년에는 <루시>를 찍었다. 내가 언급한 영화 말고도 그가 감독하거나 각본을 쓰거나 제작한 영화는 많은데, 내가 그나마 괜찮았다고 느낀 뤽 베송의 영화들을 열거해 보았다. 왜냐하면 <도그맨>을 보고 나자, 우리 베송씨가 이 영화를 왜 찍었는지 궁금해졌고, 뭔가 애매한 지점이 생기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업적을 죽 나열해 본 것이다. 조금이라도 이해할 만한 근거를 찾으려고?
어린 시절에 아빠의 총에 맞아 장애인이 된 더글라스는 휠체어 신세가 되는데 생계를 위해 클럽(?)에서 가수로 일한다. 여장을 하고. 이 부분에서 토드 필립스 감독의 2019년작 <조커>가 연상되었다. <조커>에서 호아킨 피닉스는 여장남자는 아니었고 광대였지만, 짙은 화장을 하고 무대에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직업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또 세상에 절망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려고 하는 방식에서도 조커가 떠올랐다.
그런데 토드 필립스의 <조커>는 참 좋았는데, 뤽 베송의 <도그맨>은 왜 이러는 것일까? 설마 아류작인가? 아니, 그건 좀 심한가? 비슷한 소재와 주제로 얼마든지 작품은 양산될 수 있다. 안다. 하지만 뤽 베송이잖아. <그랑블루>를 찍은, <루시>를 찍은 뤽 베송이잖아. 베송씨, 대체 왜 이런 건가요? 물음이 내 머릿속에서 멈추지 않았다.
<도그맨>이 정말 아닌 작품은 아니었다. <조커>의 작품성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작품이었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베송씨. 당신은 베송이잫아요. <그랑블루>의 그 베송은 어디 갔나요? <그랑블루>로부터 <도그맨>까지 11년이 흐르면서 시간이 당신을 어떻게 한 건가요? 이런 전해지지 않을 질문이 나를 힘들게 했다.
나는 <그랑블루>의 베송만 기억하는 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물론 했다. 1993년의 나와 2024년의 내가 거의 다른 사람이듯이 베송씨 또한 마찬가지리라. 그 점을 인정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혼자 괜히 안타까운 것이다. 내가 좋아했던 영화를 찍은 그 사람이 가장 최근에 내놓은 결과물을 보고 뭔가 아쉽고 미진한 느낌을 받으니 말이다. 아마 내 지도교수님들도 내게 이런 감정을 느꼈을지 모른다. 더 좋은 결과물을 낼 것 같은데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날들이 지금도 쌓여가고 있다.
<도그맨>을 보고 얻은 한가지 수확은 주인공 더글라스 역을 한 배우 칼렙 랜드리 존스였다. 이름이 참 어려운 그 배우의 연기가 맘에 들었다. 필모를 살펴보니 내가 아끼는 영화 몇 편에 출연한 경력이 있다. 몇 개만 말하자면 마틴 맥도나 감독의 <쓰리 빌보드>, 션 베이커 감독의 <플로리다 프로젝트> 그리고 조던 필 감독의 <겟 아웃>에 나왔다. 영화를 보는 안목도 있다 싶다.
사실 연기만 놓고 보면 호아킨 피닉스와 비교해서 그렇게 많이 떨어지지 않은데, 배우 혼자 연기 잘한다고 작품이 훌륭하게 뽑아지지는 않는다. 각본과 연출도 중요하다. 그러니까 말이다. 연출이 뤽 베송인데. 왜!
하하하, 그만하련다. 어쨌든 <도그맨>, 발상이 나쁘지 않았고 연기도 출중했지만, 작품성은 좀 떨어졌다. 그래도 보게 되어서 좋다. 아마 내가 견주가 아니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영화였는데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다. 언제 시간이 되면 <그랑블루>나 다시 보고 싶다. <그랑블루> 자체보다는 그 당시, 1993년의 내가 그 영화를 보고 느꼈을 감정선을 추적하고 싶달까.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날을 기대하며 나의 버킷 리스트에 추가한다. 뤽 베송의 영화 <그랑블루> 다시 감상하기!
첫댓글 제 인생 영화도 그랑블루인데요, 물이 쏟아지던 주인공 방의 천정이 생각납니다. 어떻게 그런 상상 혹은 연출을 했을까요..물 속에서 자유를 느끼던, 돌고래와 교감하던 주인공. 슬프고 아름다운 어른의 동화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