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러분, 애무하세요(caress)” 그렇게 주장하다가 듣는 이들이나 읽는 사람들로부터 의심에 찬 시선을 받은 적이 있다. 그들은 나를 변태로 의심하는 듯했다. 글쎄, 누구나 어떤 은밀한 정서에 있어서 완전히 ‘정상’이지만은 않을 거라는 나의 은밀한 추정에 근거해서 보면 우리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약간씩은 변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missionary’라는 단어는 선교사를 뜻하지만 비속어로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정상’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그게 다소 냉소적이거나 풍자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그런 입장에서 변태와 정상, 즉 특수와 보편이 엄격하게 상반된 관계라기보다는 다소 중첩되고 상호 보완적인 관계일 수 있다. 보편과 특수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에게서 뗄 수 없는, 상호 배타적이면서도 양립할 수밖에 없는 가치 개념이다.
“애무하세요”라고 당부하는 나의 입장이 미묘하게 난처했던 상황은 하필이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나는 그 소설이 결코 외설이 아니라 우수한 문학작품이라고 생각한다—를 수업에서 다룰 때 생겼었던 일이다. 그 당부는 나 자신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본래 그 작품을 쓴 소설가 나보코프가 독자들에게 한 말이다. 나보코프는 문학 애호가들이나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혹은 진지한 독자들에게 “(문학적 독서를 할 때) 너는 너의 가는 등털(small dorsal hairs)이 갑자기 곤두서는 것에 의존하라.”라고 당부한다. 나보코프에게 ‘등털’은 우리말 표현에서는 무섭거나 놀라서 갑자기 신경이 날카롭게 될 때 “머리카락이 곤두서다”라는 표현과 비슷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 같다. 그것은 개념적·관념적 추론이나 이해가 아니라 다분히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경험이다.
나아가서 그는 자신이 말하는 이른바 “심미적 축복”을 얻기 위해서 글을 썼다고 말한다. 그는 문학작품의 생명력이 디테일(세세한 부분, 상세한 내용)에 있으며, 나아가서 “거룩한 디테일”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그 신성한 디테일을 애무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감한 문학 작가는 글을 쓸 때 표현 하나하나에 자신의 감각과 감정, 생각을 세세하게 집어넣는다. 그것들이 문학작품의 디테일이고 그것들이 생명력을 갖게 되며, 그래서 신성하다. 바꾸어 말하면 문학의 생명력은 언어의 디테일에 있다. 그래서 나보코프는 문학에서의 “보편적인 것보다는 디테일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작가가 글을 쓸 때 그런 디테일에 의존했으니—그가 그 표현 하나하나를 마음속에 품어보고 애정을 가지고 어루만지고 다듬고 했으니—독자도 독서할 때 마찬가지로 그 디테일을 존중하고 거기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면 작가와 독자가 서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똑같은 디테일들을 만나고 애무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 디테일을 통해 내밀한 친교가 형성되는 것이다. 문학에서 디테일은 흔히 세세한 묘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그것은 사고의 섬세함이나 정서의 민감성에서 비롯된다. 바로 그 섬세함과 민감성에서 창작이 가능해지고 독창성이 나타나며, 새롭고 특수한 의미가 생겨난다. 즉 그것은 단순히 외부묘사의 구체성이나 세세함에 국한되지 않는다. 외부묘사의 세세함의 바탕에 섬세한 내면 심리 이해가 필수적이다.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우리나라 대학에서 외국어 강의의 열풍이 불었었다. 아마 지금도 그 바람이 잔 것은 아닌 것 같다. 모든 학과—아마도 국어국문학과를 제외하고—에 원어강의 특히 영어강의의 비중이 학과 평가의 중요한 지표로 요구되었다. 실제로 모든 학과에서 원어(외국어)로 강의를 한다. 그런데 나는 영미문학을 강의하면서 나로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영어 강의의 한계를 느꼈었다. 문학 강의는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과 경험을 공감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의 내용을 전달하거나 개념적 이해를 목표로 하는 전공영역과는 거리가 멀다. 영어가 기본 감정과 경험의 밑바탕을 형성하는 언어가 아닌 나와 나의 한국 학생들이 어설픈 영어를 통해 아무리 애써도 영문학이라는 신성한 디테일을 애무할 수 없었다. 영어로 강의하는 나나 그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이나 모두 영문학 작품을 마치 가죽장갑을 끼고 애무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와 학생들은 내 영어강의를 통해서 결코 서로 닿지 못했다.
흔히 듣는 경구로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표현이 있다. 뭔지 분명하진 않지만 뭔가 와 닿는 표현이다. 그 표현은 “하나님은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신다”라는 독일 속담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디테일의 우월성은 왜 문학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가치 영역(악마)에서도 작용하는 것일까? 우리 삶의 첨단에서는 모든 분야에서 디테일이 의미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거기에서 새로운 것과 독창적인 것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악마뿐만 아니라 천사도, 친구와 적도, 아름다움과 추함도, 맛있음과 맛없음도, 당선과 낙선도, 합격과 불합격도, 성공과 실패도 모두 디테일에서 판가름 난다. 신성한 디테일을 만들어내고 접촉하고 경험하는 능력이 개인의 창의력이고 경쟁력이다.
첫댓글 나보코프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애무'라는 표현이 우리말에서는 주로 성적 묘사에 쓰였기 때문에 이상하게 들리긴 합니다. 좀 풀어서 '모든 감각을 동원해 음미하라'고 표현해 보면 어떨까요. 문학 작품을 온전하게 감상하기 위해서는 온 감각을 다해 디테일을 음미해야 한다고요. ^^
저도 작품을 접하면서 작가의 디테일에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문학의 생명력은 언어의 디테일에 있다" 좋은 경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