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能爲第十
제10장,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일삼음의 공능功能에 대해 논한다.
載營魄,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이 일삼음으로써 신령스러운 하늘의) 혼魂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이 일삼음으로써 신령스러운 땅의) 백魄을 싣고,
營魄, 魂魄也. 人載魂魄之上得以生, 當愛養之. 喜怒亡魂, 卒驚傷魄. 魂在肝, 魄在肺. 美酒甘肴, 腐人肝肺. 故魂靜志道不亂, 魄安得壽延年也.
“영백營魄”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가 없이 일삼음으로써 신령스러운 하늘의) 혼(魂; 自然)과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없이 일삼음으로써 신령스러운 땅의) “백(魄; 自然)”이다. 사람은 “실은” 혼魂과 “백魄”, 곧 얻은 바를 높임으로써, (저절로 그러하게) 살아가게 되기 때문에, 마땅히 그것을 아끼고 (먹여서) 길러야 한다. (따라서 마땅히) 혼魂을 망가뜨림에 대해 성내기를 즐겁게 여기고, “백魄”을 어그러뜨림에 대해 놀라기를 분주하게 해야 한다. (이른바) 혼魂은 (사람의) 간肝에 자리하고, “백魄”은 (사람의) 폐肺에 자리한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맛있게 빚은 술과 달게 만든 안주는 사람의 간과 폐를 썩게 한다. 따라서 (사람의) 혼魂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가 없이 하늘처럼) 고요함으로써, 도(道; 自然)에 뜻을 둠이 어지럽지 않게 되고, (사람의) “백魄”이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없이 땅처럼) 평안함으로써, 목숨을 얻음이 새해를 이끌게 되는 것이다.
抱一, 能無離乎,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크게 조화되고 아주 면밀한) 하나一를 품은 채, (몸에서) 떠나가지 않게 할 수 있는가?
言人能抱一, 使不離於身, 則長存. 一者, 道始所生, 太和之精氣也. 故曰 : 一布名於天下,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寜, 侯王得一以爲正平, 入爲心, 出爲行, 布施爲德, 摠名爲一. 一之爲言, 志一無二也.
이른바, 사람이 “하나(一; 自然)를 품은 채”, 몸에서 “떠나가게 하지 않을” 수 있으면, (몸이) 오래 자리할 수 있게 된다. “하나(一; 自然)”는 (이름으로서의) 도道가 시작되는 바이자, (뜻으로서의 도道가) 생겨나는 바로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無欲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크게 조화되고 (아주) 면밀한 (음陰·양陽의) 기氣이다. 따라서 이른바 “하나(一; 自然)”가 펼쳐지자, (‘하나一’이라는) 이름이 천하에 지어 불리게 되었는데, (예를 들면) ‘하늘은 하나(一; 自然)를 얻음으로써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가 없이) 맑아지게 되었다’, ‘땅은 하나(一; 自然)를 얻음으로써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없이) 평안하게 되었다’, ‘제후와 군주는 하나(一; 自然)를 얻음으로써 (천하의) 바름과 곧음을 일삼게 되었고’(이상 제39장), ‘안으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가 없는) 마음을 일삼게 되었으며, 밖으로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없는) 행위를 일삼게 되었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나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없는) 덕스러움德을 펼치며 베풀고 일삼게 되었다’(등)인데, (이) 모든 지어 불린 이름(으로서의 ‘하나一’는 (모두 뜻으로서의) “하나(一; 自然)”를 (근원으로) 일삼는다. (이른바, 뜻으로서의) “하나(一; 自然)”가 (‘하나一’라는) 말言로서 일삼아졌지만, 뜻으로서의 “하나(一; 自然)”는 (본래 말言로서의 ‘하나一’) 와 (서로 다른) 둘이 아닌 것이다.
專氣致柔,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크게 조화되고 아주 면밀한 음陰·양陽의) 기氣를 온전하게 지키게 되고, (몸의 형체가) 부드러워짐에 이르게 되며,
專守精氣使不亂, 則形體能應之而柔順.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無欲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면밀한 (음陰·양陽의) 기氣를 “온전하게” 지킨 채, 어지러워지지 않게 하면, (몸의) 형체가 그것을 말미암을 수 있게 되고, 따라서 (몸의 형체가) “부드러워지게 되고”, (따라서 몸의 형체가 그것을) 따르게 된다.
能嬰兒.
어린아이와 같아질 수 있게 된다.
能如嬰兒內無思慮, 外無政事, 則精神不去也.
“어린아이”와 같아질 수 있으면, 안으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생각을 없앨 수 있게 되고, 밖으로 (일부러 일삼는) 다스림의 일을 없앨 수 있게 되는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無欲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면밀한 신령스러운 바(神; 自然)가 (몸에서) 떠나가지 않게 되는 것이다.
滌除玄覽,
(따라서 마음을) 씻어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없애게 되고, (일부러 일삼는 바가) 어렴풋한 채 (세상의 온갖 일들을) 살피게 되며,
當洗其心, 使潔淨也. 心居玄冥之處, 覽知萬事, 故謂之玄覽也.
(따라서) 마땅히 그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가 있는) 마음을 씻어서 깨끗하고 맑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른바) 마음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가)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한 자리에 머물게 되면,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없이 세상의) 온갖 일들을 “살피게 되고” 알아차리게 되는데, 따라서 그것을 일컬어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어렴풋한 채 (세상의 온갖 일들을) 살피게 된다”라고 한 것이다.
能無疵.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는 일삼음이 만들어 내는) 흠을 없앨 수 있게 된다.
不淫邪也, 淨能無疵病乎.
(마음을 “씻어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를 없애면, 일삼음이 그것에 의해) 어지러워지거나 (그것에게로) 치우치지 않게 된다는 말로서, (마음을 “씻어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를) 깨끗하게 하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는 일삼음이 만들어 내거나 일으키는) “흠”이나 병病을 “없앨 수 있다”는 뜻이다.
愛民治國,
(따라서 군주와 제후가) 백성을 아끼게 되고, 나라를 다스리게 되며,
治身者, 愛氣則身全 ; 治國者, 愛民則國安.
(이른바) 몸을 “다스리는” 사람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無欲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크게 조화되고 아주 면밀한 음陰·양陽의) 기氣를 “아끼면”, 몸이 온전해지게 되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백성”을 아끼면, “나라”가 평안해지게 된다.
能無爲.
(백성이) 일부러 일삼도록 명령하는 바를 없앨 수 있게 된다.
治身者, 呼吸精氣, 無令耳聞 ; 治國者, 佈施惠德, 無令下知也.
(이른바) 몸을 “다스리는” 사람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無欲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크게 조화되고 아주) 면밀한 (음陰·양陽의) 기氣를 내쉬고 들이쉬게 되면, 귀가 (일부러 일삼아) 듣도록 명령(令; 命)하는 바가 “없게 되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나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없는) 은혜로움과 덕스러움(德; 自然)을 펼치고 베풀면, 백성(下; 民)이 (일부러 일삼아) 알아차리도록 명령하는 바가 “없게 되는 것”이다.
天門開闔,
(따라서) 하늘의 문이 (저절로 그러하게) 열리고 닫히게 되며,
天門謂北極紫微宮. 開闔謂終始五際也. 治身 : 天門, 謂鼻孔開, 謂喘息闔, 謂呼吸也.
(비유컨대) “하늘의 문天門”은 (자식의 근원인 어미가 지니고 있으며, 어미의 가장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자궁子宮으로서) 이른바 (만물의 근원인 상제上帝가 살고 있으며, 세상의) 북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자미궁紫微宮이다. “개합開闔”은 이른바 (“하늘의 문天門”이 저절로 그러하게) 닫히고 열리는 다섯 번의 때이다. (비유컨대) 몸을 다스리는 일은 “하늘의 문天門” 이른바 코가 벌어져 (들숨이) “열리는 일”이고, 이른바 (날)숨이 쉬어져 (코가) “닫히는 일”이며, 이른바 (코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일이다.
能爲雌.
(군주와 제후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암컷됨을 일삼을 수 있게 된다.
治身當如雌牝, 安靜柔弱, 治國應變, 合而不唱也.
(이른바) 몸을 다스리는 일은 마땅히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나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없는 “하늘 문門”의) “암컷됨”이나 어미됨과 같이 한 채, (일부러 일삼는 바欲나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있음에 대해) 평안하고 고요하며 부드럽고 연해야 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마땅히 백성의 저절로 그러한) 삶의 모습을 말미암은 채, (그것과 더불어) 어우러진 채, (그들에게 일부러 일삼은 삶의 모습을) 주장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明白四達,
(따라서 도道가 천하의 동·서·남·북) 네 방위를 (두루) 밝히고 비추며 (그것에 두루) 미치게 되고,
言達明白, 如日月四通, 滿於天下八極之外. 故曰 : 視之不見, 聽之不聞, 影布之於十方, 煥煥煌煌也.
이른바, (도道가 천하의 동·서·남·북 “네 방위”에 두루) “미치고”, (그것을 두루) “밝히고 비춘다”는 말은 (비유컨대) 해와 달이 (천하의 동·서·남·북) “네 방위”에 (두루) 미치고, 천하의 (동·서·남·북·북동·남동·북서·남서) 여덟 방위를 (가득) 채운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노자는 제14장에서) 일컬었다. “그 모양을 살펴보더라도 (또렷하게) 살필 수 없고”, “그 소리를 들어보더라도 (뚜렷하게) 들을 수 없다.” (왜냐하면, 비유컨대, 도道는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有欲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한) 그림자로서 (동·서·남·북·북동·남동·북서·남서·상·하) 열 방위에 펼쳐진 채, (천하를 두루) 밝히고 비추는 바이기 때문이다.
能無知.
(도道에 대해 일부러 일삼아) 알아차리게 하는 사람을 가지는 바를 없앨 수 있게 된다.
無有能知道滿於天下者.
(이른바,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나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없는) 도道가 천하에 (가득) 차 있음을 (일부러 일삼아) “알아차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을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生之, 畜之.
(따라서) 만물을 (저절로 그러하게) 살아가게 하게 되는데, (이른바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으로써) 그것을 기르게 된다.
道生萬物而畜養之.
(이른바) 도道는 만물을 (저절로 그러하게) “살아가게 하는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無欲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으로써) 그것을 “기르고”, 먹인다.
生而不有,
(따라서 만물을) 살아가게 하지만, (자신의 공功이) 있음을 취하지 않게 되고,
道生萬物, 無所取有.
(이른바) 도道는 만물을 (저절로 그러하게) “살아가게 하는데”, (따라서 자신의 공功이) “있음”을 취하는 바가 없다.
爲而不恃,
(만물을) 일삼지만, (그 보답에) 기대지 않게 되며,
道所施爲, 不恃望其報也.
(이른바, 저절로 그러한) 도道는 (만물에게) “일삼음”을 베푸는 바가 있지만, 그 보답에 “기대거나”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長而不宰,
(만물을) 자라나게 하지만, (그 그릇됨을) 주재하지 않게 되는데,
道長養萬物, 不宰割以爲器用.
(이른바, 저절로 그러한) 도道는 만물을 “자라나게 하고” 먹이지만, (만물의) 그릇됨이나 쓰임새를 “주재하거나” 분별(分別; 割)하지 않는다.
是謂玄德.
이것이 이른바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어슴푸레하고, 일부러 일삼는 바가) 어렴풋한 (도道의) 덕스러움德이다.
言道行德, 玄冥不可得見, 欲使人如道也.
이른바, (이 문장이 뜻하는 바는 저절로 그러한) 도道가 일삼는 “덕스러움德”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가) “어렴풋하고”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어슴푸레하며, (따라서 도道가 일삼는 모양을 또렷하고 뚜렷하게) 살펴볼 수 없다는 것이자, 세상 사람들이 도道와 같아지고자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