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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사당 앞뜰에서 처음 열린 「제13대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
▲ ‘민의의 전당’인 국회의사당 앞뜰에서 처음 열린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
어떤 행사를 거행하든 그 행사의 선례가 매우 중요하다. 시대 흐름에 따라 행사의 규모나 내용에 있어서 변화를 주어야만 하지만, 여전히 그 이전의 선례는 나름대로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 어떤 의도나 상황에서 결정하고, 또 어떤 절차로 진행하였는지에 대해 반드시 후일 행사기록으로 남긴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대통령 취임식도 여기서 예외일 리 없다. 그 추운 2월의 날씨 속에서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거행했으니 말이다. 행사 장소를 선정할 때에는 대개 그 장소가 갖는 상징성을 매우 중시한다. 그래서 제13대 노태우 대통령취임식의 장소 결정은 한 마디로 도박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국회의사당이 갖는 의미에 방점을 찍고 당시 대통령 당선인과 취임준비위원회는 그 앞마당에서 대규모 야외 행사로 거행하는 것으로 용감하게 결정 내린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다. 어쨌든 정부는 이 결정을 존중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그 전임자인 전두환 대통령과는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로 훗날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후 정무 제2장관, 체육부장관, 내무부장관, 88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장, 민주정의당 대표최고위원 등을 거쳤으며, 1987년 개정된 직선제 헌법에 따라 국민의 직접선거로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1노(盧) 3김(金)’이라고 일컫는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의 단일화 실패로 김영삼, 김대중 양 후보가 각자 출마하고, 또 사상 유례없는 후보자 간의 지역대결(노태우 TK, 김영삼 PK, 김대중 호남, 김종필 충청)이 펼쳐졌는데, 36.6%(약 828만여 표)를 획득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승리를 차지하였다. 이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 28.0%,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 27.0%,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 8.1%를 각각 얻었다.
취임식은 그가 1971년제7대 대통령선거 이후 처음으로 국민 직선으로 선출된 점을 고려해 ‘민의(民意)의 전당’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뜰에서 대규모 옥외 행사로 거행하였다. 당시 개정된 헌법 규정에 따라 법률적으로는 1988년 2월 25일 00:00부터 신임 대통령의 임기가 개시되므로 취임식까지 국정(國政) 공백이 발생한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어, 논란 끝에 여건상 가장 이른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당일 오전 10시에 대통령취임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날 취임식장에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취임준비위원장 명의로 초청된 각계 인사 약 25,000명이 참석하였다.
이날 행사는 국민의례에 이어 김정렬(金貞烈) 대통령취임행사준비위원장(국무총리)의 식사(式辭), 신임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 선서와 축가, 취임사 순으로 거행되었다. 취임 선서가 끝날 때 참석자들의 열띤 축하 박수 속에 21발의 예포(禮砲)가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발사되고, 13대를 상징하는 흰 비둘기 1,300마리가 취임식 상공을 날아오르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신임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제6공화국 개막을 계기로 민족 전체가 한 차원 높게 뛰어올라 ‘민족자존의 새 시대’를 꽃피우라는 것이 우리에게 지워진 시대적 과제이며, 누구든지 성실하게 일한 만큼 보람과 결실을거두면서 희망을 갖고 장래를 설계할 수 있는 상식적인 사회, 즉‘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민주개혁과 국민통합으로 반드시 열겠다고 역설했다.
▲제13대 노태우 대통령 취임선서<사진/대통령기록관>
▲ 취임사를 하고 있는 노태우 대통령<사진/대통령기록관>
대규모 옥외 행사로 처음 거행된 취임식은 그날이 겨울철이라 영하의 날씨 속에 가끔 눈까지 쌓여 취임식단 설치, 일반 참석자용 의자 15,000개 이동 배치 등 준비에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처럼 야외에서 대규모 행사로 거행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처음이었다. 그러나 처음인 만큼 정부와 대통령당선인 측 간의 긴밀한 협의와 정부 측의 치밀한 행사 준비로 취임식을 무난하게 마칠 수 있었다.
국회의사당 현관 앞 계단에 설치된 햇빛 차단용 지붕이 있는 단상에는 노태우 대통령 내외를 비롯해 전두환 이임 대통령 내외와 윤보선 ․ 최규하 전 대통령, 3부요인, 주요 각계 대표 등 70~80여 명이 자리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공식 행사 음악으로 국악(國樂)이 처음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이전까지는 서양음악 일색이었다. 이날 국립국악원의 협조로 국악을 처음으로 국가 의식에 도입해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각종 국가적 의식에서 국악이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민의의 전당’ 국회의사당에서 처음 취임식 선례 남겨
‘보통 사람’이라는 슬로건으로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은 국민의 손에 의해 뽑힌 직선 대통령이라는 자부심이 아주 대단했다. 따라서 노태우 당선인 선거 캠프에서는 그 이전의 취임식과는 차별화가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들은 취임식에서부터 달라진 뭔가를 국민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장충체육관이나 잠실실내체육관과 같은 기존의 체육관이 아닌 의미 있는 제3의 장소 물색에 나섰다. 그렇게 하여 결정된 곳이 ‘민의의 전당’인 국회의사당이었다. 당시에는 여당 후보가 당선된 터라 취임준비위원회의 가장 큰 관심은 새 대통령의 취임식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처럼 국정 현황을 파악해 새 정부의 국정 방향을 틀을 짜는 역할까지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쨌든 취임식 준비를 맡은 총무처(현 행정안전부)는 아주 난감했다. 왜냐하면 국회의사당 앞뜰에서는 대규모 행사를 치른 경험도 없고, 그 공간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큰 어려움은 취임식에 참석인사들이 앉을 의자를 어떻게 확보하여 배치하느냐의 문제였다.
당시 철제 접의자 15,000개를 모으는 일이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서울은 물론 수도권의 인천, 수원 소재 대학이나 공공도서관의 접의자를 거의 반강제적으로 징발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과 같이 행사용역 회사가 없던 시절이라 당연히 그렇게 많은 의자가 있을 리 없었다. 취임행사 T/F에서는 수도권의 여러 기관단체에 협조 요청을 한 후, 물류 운송기업인 「대한통운」으로 하여금 의자를 10개씩 묶어 대형트럭에 싣고 와 추운 날씨 속에서 행사장에 배치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취임식이 끝난 후 반환하는 일도 역시 그리 만만치 않았다.
당시 취임식 시설 분야를 책임진 군 출신인 총무처 소속의 정부청사관리소장(현 행정안전부 정부청사관리본부장)은 직접 나서서 소속 직원들을 독려하여 그 넓은 의사당 앞마당에서 의자 15,000개를 종횡으로 반듯하게 배치하고, 또 참석자들이 편히 앉을 수 있도록 이른 새벽에 내린 서리를 수건으로 닦아 내는 등 어려운 일을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직원들은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아주 힘들었다고 푸념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선 훨씬 이전부터 정부는 취임식 준비에 들어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자인 후임 대통령이 확정되면 사실상 대통령으로서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이 상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달랐다. 퇴임하는 12대 전두환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날까지 확실하게 권력을 행사한 대통령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 취임식 업무를 맡고 있던 총무처로서는 고민이 클 수밖에 없었다.
취임행사 계획을 수립하는 중에 ‘첫 평화적 정권 이양’을 내세우는 현실의 실세 권력인 대통령과 미래의 권력인 대통령 당선인이 서로 충돌한 것이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 하지만 서로 입장이나 지향점에 차이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서로 자리를 마주 앉아 타협안을 마련할 여건도 되질 못하였다. 따라서 취임 행사 준비를 맡은 총무처 간부들이 중간에서 악역을 맡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이들은 타협안을 이끌어내기 위해 청와대와 당선자 사무실이 있던 삼청동의 금융연수원을 분주히 오가야 했다.
사실 대통령취임식 준비를 맡은 총무처는, 역사상 처음으로 맞이하는 평화적 정권교체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대통령선거 훨씬 이전부터, 손관호(孫瓘鎬) 차관이 미국과 유럽에 출장을 가서 선진국의 사례를 수집하는 등 내부적으로는 나름대로 취임식 준비에 들어갔다.
대통령 취임식은 새 정부의 출범을 대내외에 알리는 국가 의식이자 그 규모나 절차에서 볼 때 대내외적으로 상징성이 아주 큰 행사인 만큼,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각오로 준비에 임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총무처 의정과(현 행정안전부 의정담당관실)를 중심으로 외국의 대통령 취임식 사례와 우리나라 역대 취임식 선례를 정리하고, 또 서울 시내에서 취임식이 가능한 건물이나 장소를 답사해 그 공간의 특성, 즉 수용능력, 단상의 위치와 넓이, 신구 대통령의 동선, 초청인사 이동 경로, 주차장 수용 대수 등 취임식 장소로서의 장단점을 꼼꼼히 체크하였다. 아울러 취임식 실무추진단 발족과 그 추진단이 일할 사무공간을 확보하는 등 나름대로 취임식에 대비했다.
이와 함께 유력 후보자의 캐릭터나 선거공약도 체크하고, 대통령 선거상황을 지켜보며, 앞으로 있을 당선자 측과의 미팅을 염두에 두고 관련 자료를 계속해 보완해 나갔다.
진통 끝에 탄생한 취임식 행사계획
12월 16일,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에 정부는 순조로운 정권교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기구 설치방안에 대해 청와대와 대통령 당선인 측과의 물밑 논의에 들어갔다. 당시에 정권 인수 ․ 인계에 관한 전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 기구의 명칭 ․ 역할 등을 놓고 청와대와 당선자 측 간에 신경전을 벌인 끝에, 사상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부이양의 전통을 확립하고 순조로운 정부 이양으로 국정운영의 영속성을 유지하기 위한’「대통령취임준비위원회 설치령」(대통령령 제12378호, 1988.1.18. 제정)을 공포 ․ 시행하였다.
오늘날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전신(前身)이라 할 수 있는데, 위원장에는 대통령취임준비위원장에는 대통령선거대책본부장이었던 이춘구(李春九) 의원(후에 국회부의장)이 맡았다.
이와 한편으로 대통령취임식을 담당하는 총무처는 외국의 사례와 과거 취임식 선례 등을 참고하여 취임식 거행방안을 마련한 후, 현직 대통령의 청와대와 미래 권력인 당선인 측을 오가며 취임식 기본방향을 마련하려고 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먼저 선진 외국의 사례와 과거 취임식 사례 등을 바탕으로 총무처가, 당선인 취임식 위주의 행사계획을 수립하여 청와대에 중간 보고를 하자 바로 제동이 걸렸다. “군대의 사단장 이 ․ 취임식에서도 떠나가는 사람이 먼저 인사를 하고 취임식을 하는 게 관례인데, 왜 이 ․ 취임식을 함께 하지 못하느냐?”며 보고 하러 간 총무처 간부에게 호통을 쳤다. 평화적 정부 이양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이 ․ 취임식을 동시에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총무처는 다시 이 ․ 취임식 동시 진행으로 계획을 수정한 후 노태우 당선인 측에 보고했다. 외무부 출신의 이병기(李丙琪, 후에 주일본대사, 국가정보원장, 대통령비서실장) 대통령 당선인 보좌역은, 나름대로 취임식 거행방안을 구상하던 중에 의외의 계획을 보고받자 크게 당황해하며, “대통령 취임식이 무슨 사단장 이 ․ 취임식인 줄 아느냐?”며 동시 실시방안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이렇게 양측 간에 기본적인 생각이 다른 것을 알게 된 김윤환(金潤煥) 대통령 비서실장이 중재에 나섰다. 그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외국에선 이임식과 취임식을 따로 하고, 취임식은 새 대통령 위주로 진행한다.’는 사례까지 들어가며 사태를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 전두환 대통령의 이임 행사는 퇴임 전에 ‘환송 만찬’형태로 갖고, 취임식은 당선자 위주로 치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실제로 전두환 대통령의 환송 만찬은 퇴임 하루 전에 서울역 앞 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각계 인사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으며, 다음날 국회의사당 취임식에는 이임 대통령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이렇게 하여 제13대 노태우 대통령취임식은 1988년 2월 25일, 추운 날씨 속에 역사상 처음으로 ‘민의의 전당’인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각계각층의 국민과 각국 경축 사절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규모 야외 행사로 열렸다. 이렇게 하여 오늘날 대한민국 제6공화국 시대의 막을 열었으며, 그 이후 역대 대통령 취임식 거행의 전형(典型)이 되었다.
필자는 당시 총무처 의정과의 실무자로서 대통령취임식 T/F에 참여하여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당시 총무처에는 손관호(孫瓘鎬) 차관을 사령탑으로 그 아래 김희태(金熙台) 총무국장, 손정(孫政) 의정과장(후에 대통령의전비서관), 박재택(朴載宅) 의전계장(후에 울산광역시 행정부시장)이 중추적 역할을 하였고,
필자는 의정과의 행사총괄 주무관으로서 취임식을 준비하는데 취임식 세부계획을 수립하고, 관련기관의 협조를 구하는 등 행사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때 쌓은 다양한 경험이 그 후에 역시 같은 장소인 국회의사당 앞뜰에서 열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 등 네 분의 대통령 취임식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오랜 공직생활을 통틀어 아직도 나름의 보람 있는 행사로 기억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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