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청풍
지금 종로구 청운동은 옛날의 청풍동과 백운동을 합한 곳이다. 도성의 북쪽 인왕산 · 백악 아래에 위치한 이 청풍동 · 백운동 일대
는 깊고 아득한 계곡에 맑은 수석을 곁들이고 주위에는 수림과 화초도 많아, 오랜 옛날부터 문인 · 묵객들이 거닐면서 시를 읊조리
던 곳이었다. 청풍계(淸風溪) · 세심대(洗心臺) · 유란동(幽蘭洞) · 도화동(桃花洞) · 대은암(大隱岩) · 만리뢰(萬里瀨) 등이 모두 이
부근에 있는 명소이다. 그중에도 지금 청운초등학교 뒷쪽 일대는 임진왜란 후에 아우 청음(淸陰)과 함께 청절대신(淸節大臣)으로
유명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복거지(卜居地)가 되기도 하였던 청풍계의 소재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선원연보(仙源年譜)』에 의하면, 선원은 47세 되는 선조 40년(1607)에 수석 청절한 이곳 청풍계로 들어와서 복거하면서 청풍각
(淸風閣) · 와유암(臥遊菴) · 태고정(太古亭) 등을 짓고 부근의 지대(池臺) · 암학(岩壑)도 모두 이름을 지어 불렀으며, 경사스러운
날이나 축복받을 날이면 친척 · 친우들과 함께 자연의 풍경을 관람하며 친지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고 하였다.
또 선원은 처음 임진왜란 때 강화도 선원촌(仙源村)에 피난 우거하면서 아호를 선원이라 하였는데 이곳에 우거하면서는 풍계(楓
溪) 또는 계옹(溪翁)으로 자호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니, 이곳 계곡의 승경이 얼마나 그의 마음에 흡족하였던가를 알 수 있는 일이
다. 그리고 연보 중에 이곳을 청풍계라 하였다는 것을 보면, 이곳 계곡에는 맑고 깨끗한 수석만이 아니라 주위의 풍수의 경치 또한
좋았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청풍(靑楓)'이 '청풍(淸風)'으로 이름이 바꾸어진 데에는 선원이 복거하면서 '청풍각'을 짓고 또 큰 바
위에 주자(朱子) 글씨를 모아 '대명일월(大明日月) 백세청풍(百世淸風)'의 큰 각자를 한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승지에서의 청정생활에도 환란은 에어가지 않아 병자호란 때인 인조 15년(1637) 정월, 강화의 도성과 함께 선원이 77세의
고령으로 강화성 남문루에서 장렬하게 순절하는가 하면 아우 청음은 척화대신(斥和大臣)으로 지목되어 청나라로 끌려갔던 것이
다. 이 때 청음은 심양에서의 3년간 곤고생활(困苦生活) 중에도 이 청풍계의 승경을 잊지 못하여 이런 시를 지어 그리워하는 회포
를 말하였다.
「청풍계 위의 태고정은 우리 형님 사시던 곳
임학(林壑) 승경 한폭의 그림인데, 높은 암벽은 창옥병(蒼玉屛)이 둘러있다네」
(출처 :『청음선생집』 권11 설교전집(雪**前集))
선원(仙源)의 순절 후 70여 년을 지나 숙종 34년(1708)에는, 선원의 늠연한 절의를 추모하는 사우를 이 청풍계에 지어 신위를 봉안
하고 이름을 늠연사(凜然祠)라 하여 이곳을 찾는 후인들로, 승지풍경과 함께 선현의 높은 절의를 추모하게도 하였다.
또 이곳에서 멀지 않은 북악 서쪽 기슭,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복거지 도화동(桃花洞)은 복사꽃이 많아 봄철 상춘객들이 즐겨 찾
는 명소가 되었는데 정조조의 문인 냉재(冷齋) 유득공(柳得恭)은 어느 봄날 이 도화동을 찾아 도화동 춘경(春景)을 이렇게 읊었다.
「비 바람 지나간 시냇가로 봄을 찾아 도화동 들어가네.
도화동의 복사꽃 나무 1천그루는 되는 것이
사람은 나비 따라 가고 나비는 사람 따라 나누나.」
(출처 :『한경지략(漢京識略)』 권2 명승)
도화동과 함께 북악산록에는 또 봄철 꽃 구경의 명소로 유명하던 세심대가 있어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의 싯귀 그대로
'희고 붉은 자두꽃 복사꽃 만가지에 가득 피었네(李白挑紅萬樹開)'의 춘경으로 유명하였다.(출처 :『한경지략(漢京識略)』 권2 명
승,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권2 명승, 열양세시기 3월)
출처 : 서울육백년사 / [ cafe24-board.cafe24.com검색결과 더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