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대승보살의 수행 방법
수행 방법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대승보살의 수행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대승경전에서 대승보살이라 말하는 대상은, 가르침을 듣기 위해 한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고, 그 하나의 가르침으로 무리지어 수행하는 사람을 지칭하여 대승보살의 수행이라 말한다. 그러면 왜 대혜대사는 대승보살의 수행 방법을 부처님에게 물어보는가.
대혜대사는 미래의 수행자들은 하나의 가르침으로 모이지 않고 각자의 견해와 관념이 다양한 대중이 모여서 수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미리 알고, 부처님께 여쭈어 그것을 남겨 두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계실 때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의 수행 방법은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것을 너무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처님 당시의 수행은 대부분 홀로 떨어져 가르침을 새기다가, 그 새김이 올바른지를 부처님께 다시 묻는 방법으로 수행의 기본을 삼았다. 그러므로 수행자 대부분은 나무 밑에서 홀로 수행하게 되고, 공동으로 해야 하는 일은 극히 드물어 서로를 제한해야 하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홀로 수행하다 보니 일어나는 번민은 대부분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견해와 관념에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기본으로 알고 있는 것을 불필요하게 따로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하나의 가르침이 훼손되고, 조건이 다른 대중들이 모이고, 그런 대중이 함께해야 하는 일이 생겨나고, 견해와 관념이 다른 대중들의 부딪힘이 생겨나면서, 수행자들 대부분은 자신의 마음 상태를 살펴보기 전에 외부 경계에 나타난 상황에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하나의 가르침으로 새김 되어야 하는 가치를 잃어버리고 혼란을 겪게 된다.
“만법이 모두 자기 마음이 드러난 것임을 잘 아는 것이고, 바깥 사물과 외부 경계에 모두 자성이 없음을 잘 관찰하고, 생겨나고 머물며 소멸하는 견지를 잘 벗어나는 것이고, 자각성지를 얻는 즐거움이네.”
이런 만연한 인식으로 인해 마음의 경계가 계속 일어나고 있다면, 그때는 움직임을 멈추고 고요히 하여, 마음이 무엇으로 춤을 추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물질이 움직인다는 것은 분명 외부의 자극이 생겨야 움직이는 것은 맞지만, 물질이 움직인다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은 마음 안에 두 가지 이상의 견해가 나타난 것인데, 마음 안에 어떻게 두 가지 견해가 나타날 수 있겠는가? 만약 마음에 두 견해가 나타났다고 가정하면, 하나는 허상이고, 하나는 실상이어야 하지만 허상은 모양이 될 수 없으니 나타날 수 없고, 실상은 보는 그대로이니 이미지화하여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에 상이 나타나는 것은 모두 허상인 것이다. 마음에 나타난 상이 허상이라면 일어난 상황에서 옳고 그름으로 분별할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로 나타난 동일한 사안으로 보아야 한다.
삶과 수행은 이 두 가지를 보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삶은 인과성의 의미에서 보면 결과를 중요시한다. 왜냐하면 삶은 반복을 원칙으로 보기 때문에 주고받음이 명확해야 한다. 그러나 수행은 결과가 아니라 원인을 소멸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래서 그 원인을 바르게 알고 원인을 제거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옳고 그름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놓으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모든 일에 모름을 두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리고 수행은 일어난 일에 막연한 인식으로 분별하는 마음을 경계하여야 하고, 그때 분별하는 마음은 견해와 관념에 묶인 상태로 대상을 보기 때문에, 지금 보이는 그 대상은 자신의 마음속에 비친 허상을 꺼내어 보고 있는 것이지, 실상을 그대로 보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생주멸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시공간을 통해 마음이 만들어 놓은 허상임을 알고, 그 현상에서 자성을 찾아 헤매는 일은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찾지 않는 것이 가장 잘 벗어난 지혜이고, 다시는 모양과 소리에 현혹되지 않고, 얻지 않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이때 바르게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면서 수행의 즐거움을 향유하게 된다.
지휴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