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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질까 조심하라 / 출 3:1-12, 고전 10:1-13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기 바로 전날 저녁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나누는 자리였다. 예수님은 심각한 어조로 ‘너희가 다 나를 배신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끝나자마자 성미가 급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서 고백한다. ‘주님, 모든 사람이 배신할지라도 저는 언제든지 주님을 버리지 아니하고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호언장담했던 베드로였지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다. 이것이 인간이다. 언제 어떻게 넘어질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닌가 생각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까운 인물들이 넘어져서 실패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마지막을 보낸 분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권력을 휘두르던 분들 중에 권좌에서 물러난 뒤 감옥에 간 자들도 있다. 사업을 왕성하게 이룩하면서 부를 향유하던 분들 중에 사업이 망해 끼니를 잇기도 어려운 분들도 있다고 한다. 한때는 나라를 위해 일하거나 독립지사로 할동하던 분들이 어느새 일제의 압잡이가 된 사람도 있었다. 건강해서 자유롭게 활동하던 분들이 갑자기 몸이 약해져서 남은 생을 고생하는 분들도 있다. 행복스럽게 보이던 가정이 사소한 이유로 파탄을 이루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서로 원망하며 사는 분들도 있다. 한때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남들이 모범이 되었던 분들 중에 넘어져서 이단으로 가거나 타락해서 폐인이 된 분도 있다. 이처럼 사람은 어떻게 넘어질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조심하지 않고는 하루를 바로 살기 어려운 것이 인생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산다는 의미인 생(生)이라는 한자를 보면, 소(牛)가 외나무 다리를 걸어가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옳은 말이다. 조심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인생이다. 매일같이 외나무 다리를 걸어가는 것처럼 생명의 위기 속에 살고 있다. 육신의 생명, 땅에서 얼마 살지 못하는 생명도 조심해야 하거늘 하물며 영원한 천성을 향하여 가는 성도의 길은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일생동안 무슨 일을 하든지 넘어지지 않아야 한다. 혹시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땅 위에서 인간의 하는 일에 넘어짐을 당하여 괴로운 때도 있지만 이것이 결코 인간을 망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말이 있다. 물질을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 건강을 잃은 것은 큰 것을 잃은 것, 신앙을 잃은 것은 전부를 잃은 것, 그러므로 신앙에서 넘어지게 되면 인간은 멸망이다.
본문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 시험에 넘어진 일들을 회상시키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면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어떻게 넘어졌는가를 살펴보면서 우리 역시 어느 때에 넘어질 수밖에 없는지를 생각하고,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넘어지지 않기 위해 깨어있고 조심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겠다.
1. 믿음에 의심이 생기면 넘어지고 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눈으로 보았고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서 바로와 대결했었고 열가지 재앙을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나타난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아서 출애굽 하였다. 굶주릴 때에는 만나를, 목마를 때에는 샘물을 얻어 마셨다.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던 사랍들이지만 그들의 생활이 조금이라도 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의심을 품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 하고 믿음이 흔들렸던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시 78:40절 이하에 지적하기를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 그들이 그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 기억하지 아니하였도다.’(개역개정) ‘저들이 사막에서 얼마나 그에게 반역하였던가? 광야에서 얼마나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던가? 하느님을 거듭거듭 시험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괴롭혔으며, 자기들을 원수의 손에서 구해 주시던 그 날, 그 힘을 그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공동번역)라고 할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형편이 조금 어려워지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살 길을 찾으려했다. 그 결과 그들은 비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따를 때에는 바로와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도 있었고, 그들이 갈바를 알지 못했을 때에는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을 수도 있었다. 굶주릴 때에는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었고, 목마를 때에는 샘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에 의심을 품게 될 때, 믿음이 흔들리게 된 그들은 더 이상 앞을 향해서 나갈 수 없었다. 출애굽 한 다음 가나안까지는 한달이면 충분히 갈 수 잇있 거리를 40년 동안이나 머물게 했다. 40년 동안 광야 곧 사막 속에서 고통을 당하게 했다. 믿음이 흔들린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면 결국 넘어져서 고통 속에 살 수밖에 없다는 교훈이다. 믿음이 흔들리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나안에 들여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출애굽한 수백만의 이스라엘 백성들 중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제외하고 광야에서 다 죽은 다음에 광야에서 태어난 2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믿음에 의심이 생기면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살 수가 없다. 결국 고통의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성서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 역시 그렇다. 믿음에 의심이 생기면 예배에 정성이 없어진다. 믿음에 의심이 생기면 신앙이 흔들린다. 기도생활이나 성서를 읽는 생활이 소홀해진다. 믿음에 의심이 생기면 진로나 양심에 대한 확신을 갖기 어렵다. 양심이 마비된다. 야고보는 말하기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라고 가르치고 있다. 믿음이 흔들리게 되면 마귀의 수중에 사로잡히게 된다.
2. 이기적인 욕심이 앞서면 반드시 넘어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신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한때는 황금으로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자신들의 신으로 절을 하고 복받기를 빌었다. 결국 그들은 진노의 채찍을 맞아 넘어지고 말았다. 이기적인 욕심은 언제나 물질을 우상화시킨다. 물질이 인생의 전부인양 착각하게 만든다. 결국 물질 문제로 인간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 마귀의 수법이다. 그래서 성서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물질로 인해서 시험받고 넘어졌다. 아담과 하와는 먹는 문제로 인하여 타락하고 말았다. 아간이란 사람은 금 은 보석이 탐나서 조국을 망하게 하였고, 자기 자신마저 돌에 맞아 죽었다. 게하시는 물질 욕심 때문에 나병에 걸렸다. 가룟 유다는 은 30냥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였다. 초대교회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물질 때문에 거짓말을 하여 저주를 받아 죽고 말았다.
사람은 확실히 돈에 약한 것 같다. 돈 때문에 나라도 팔고, 신앙도 배신하고, 이웃도 배신하고, 친구도 멸시한다. 간혹 이런 말을 듣는다. ‘저 사람은 돈 문제만 깨끗하면 참 좋은데...’ ‘저 사람은 다 회개했는데 돈주머니만은 회개하지 못했어.’ 돈에 대해서 깨끗한 분이 마음도 깨끗하다. 그래서 성서엔 이런 말씀이 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 물질생활이 올바른 사람, 물질생활에 정직한 사람만이 그 자신의 인격을 바로 세운다. 사람들이 물질에 약하다는 사실을 마귀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첫번째 시험이 물질에 관한 시험이었다. ‘돌로 떡을 만들어라.’ 이때 예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사람이 물질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물질 아닌 진리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일이든 이기적 욕심이 앞서면 진리가 왜곡된다. 이기적 욕심이 앞선 것은 그것이 어떤 일이든 반드시 망하고 만다. 12.12사건이나 5.18사건들을 일으켰던 사람들, 그래서 비자금이나 뇌물을 상납받았던 사람들,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혀 있다. 결국 이기적인 욕심이 앞서는 권력이나 이기심이 앞서는 행적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경고한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바르게 살아야 한다. 물질 없이는 살 수 없지만 그러나 물질 때문에 진리를 왜곡하거나 양심을 마비시켜서는 안된다. 비록 가난하게 살지하라 진리와 더불어 올바르게 살아야겠다는 신앙고백을 하면 사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3. 증오나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면 넘어지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원망하거나 증오하는데 익숙했다. 그래서 본문 말씀 10절을 보면 이렇게 말한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스라엘을 지도하던 모세가 열두 정탐꾼을 뽑아서 가나안 땅을 정찰하고 돌아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들 중 열 정탐군의 보고에 실망을 느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께서는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이상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사정이 나빠졌다고 해서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있다. 자기 부인이 조그만 사업을 시작한다기에 처음에는 만류를 했다고 한다. 그래도 부인이 의욕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결국은 실패를 해서 빚을 많이 지게 되었다. 매일 부인을 원망했다. 그 원망으로 인해 가정생활이 파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세월이 흐른 뒤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원망함으로 인해서 그 가정은 두번의 실패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한번은 사업에서 실패하고, 두 번째는 가정까지 실패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성서는 우리에게 말씀한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래야 심판을 면하리라.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라고 가르친다. 특히 남을 증오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은 마귀에게 마음의 대문을 열어놓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남을 향한 시기심이나 증오가 앞서게 되면 이미 그 사람은 넘어지고 만 것이다. 창 4장의 말씀을 보면 가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한 나머지 동생 아벨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다. 증오나 원망은 결국 자기를 파멸로 몰아 넣는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조금도 남을 원망하지 않았다.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에 대해 시기나 증오심도 갖지 않았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외치셨다. 마지막 그 고통의 순간까지도 용서를 구하고 사랑을 외치신 주님이시다.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신 분에게는 마귀가 침노하지 못한다. 증오나 원망은 결국 자신을 넘어뜨리는 마귀의 올무에 스스로 빠지는 것이다.
4. 교만하면 넘어진다.
신앙생활에는 고비가 있는데, 그것은 곧 교만이다. 의심, 낙심, 유혹, 약함 등이 초신자의 고민인 반면, 신앙생활을 오래한 분들은 자신도 모르게 바리새적이고 율법적인 교만에 사로잡히게 된다. 잠 16:18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교만이란 ‘다른 사람보다 내가 조금 더 의롭다. 내가 조금 더 많은 일을 했다. 내가 조금 더 공적을 쌓았다. 내가 조금 더 오랜 경력을 지녔다’라고 자기를 앞세우고,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낮아지고자 하는 자를 높이신다고 하셨다.
모세의 생을 보면 그는 두 번씩이나 교만 때문에 넘어진 경험이 있다. 한번은 그가 40세 되었을 때이다. 그는 40년 동안 애굽 왕궁에서 지식을 쌓았고 무술을 익혔다. 저도자로서의 능력을 쌓았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더 이상 왕궁에 있을 수가 없었다. 유대인 사회로 들어갔다. 그때 노예생활을 하고 있던 유대인들에 비해서 모세 자신은 월등히 높은 신분에 있었고, 좋은 배경 속에서 성장했다는 어떤 우월감, 교만에 빠졌다. 첫 순간부터 유대의 지도자로서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했다. 그래서 유대인들 사이에 분쟁이 있으면 자기가 심판을 해주려고 했다. 혹시 애굽 사랍들이 유대인들을 건드리면 주먹질을 해서라도 애굽 사람을 심판했다. 그 결과 모세는 애굽 사람에게도 배척을 받았지만,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서도 배척을 받았다. 더 이상 애굽 땅에 잇을 수 없었던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고 말았다. 자기가 지도자인체 자기를 내세우려는 그 순간, 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높이고자 하는 자를 치신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끝까지 낮출 수 있는 사람을 높이신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의 생활로 40년을 지냈다. 그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러서 이스라엘 지도자로 삼으셨다.
또 한번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에서 생활할 때였다. 그동안 많은 이적을 행하였다. 그러던 중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어서 목말라 할 때 모세는 하나님께 물을 달라거고 기도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저기 저 반석에게 명하여 물이 샘속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지 않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치면서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샘솟게 하리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내 능력으로 지금 물을 샘솟게 할 것이라고 자기를 내세운 것이다. 이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진노의 채찍을 휘드르신다. ‘너는 결코 살아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광야에서 죽게 될 것이라는 예고이다.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가나안 땅이었지만 모세는 살아서 들어가지 못하였다. 확실히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멀리하시고 그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며 넘어짐의 앞잡이이다.
결론적으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두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번째는 어떤 시험과 고통과 역경이 밀어닥친다 하더라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고전 10: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사실 시험을 받는다는 것, 고통이나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때로는 나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 일을 해결할 수 없는 까마득한 문제로 고민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고통이나 시련이나 역경을 허락하시더라도 반드시 해결할 방법을 별도로 마련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어떤 시험도 이길 수 있는 길이 있다. 두번째는 하나님께로부터 영적 능력을 받아야 한다. 마 26:41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순간이 바로 기도의 순간이다. 기도는 우리의 삶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연결시켜주는 힘이 있다. 우리의 삶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연결시킬 때 우리는 영적인 힘을 얻는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시련과 시험을 이겨나갈 힘이 없지만, 그러나 내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능히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다.
오순절 초대교회를 보라. 120여명의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 성령은 충만히 임하였다. 성령께서 그곳에 모인 성도들에게 믿음의 능력을 갖도록 하셨다. 지금까지 움츠리고 어찌할바를 알지 못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순간 그들은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산 증인이 되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시험을 이겨야 한다. 롬 8: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왜 성령이 탄식하나? 믿는 자들이 유혹에 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자. (1996-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