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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라 / 창 9:8-17, 막 1:12-15
지옥에서 천당으로 올라가다가 도로 지옥으로 떨어졌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하늘에 있는 한 천사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지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당하는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그들의 신음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옥으로 내려가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세상에 살동안 비록 작은 일이라도 착한 일을 한 것이 있으면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에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청하여 천당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옥에 있는 사람치고 세상에 사는 동안 내놓을 만한 착한 일을 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한 여인이 한가지 착한 일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뭐냐 했더니 설날에 불쌍한 걸인에게 찰떡 한조각을 준 일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 천사는 하늘나라의 기록보존실에 가서 이 여인의 신상명세서를 뒤져본 결과 그 여인의 말 그대로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천사는 찰떡을 가지고 지옥에 있는 그 여인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 말이 맞았소. 이것이 바로 당신이 걸인에게 준 그 찰떡이오. 이 찰떡의 아래쪽 끝을 꽉 잡으시오. 내가 위쪽 끝을 잡고 하늘로 날아 올라가게 되면 당신도 같이 날아 올라갈 수 있소. 내가 당신을 하나님 앞에 서게 할 것이니 잘 말씀드리시오. 그러면 당신은 천당에 들어가게 될 것이오.’ 그래서 그 여인은 천사가 잡고 있는 찰떡을 붙잡고 하늘로 날아 올라가게 되었다. 몸이 뚱뚱한 이 여인은 체중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찰떡은 그를 붙들어 주었고 신기하게 끊어지지 않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자 재빨리 그 여인에게 몰려와서 그녀에게 매달렸다. 어떤 사람은 그의 옷자락, 어떤 사람은 그의 팔이나 다리를 붙잡고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에게 매달린 사람들조차 하늘로 들리어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 여인은 처음에는 자기가 지옥에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그 감격 때문에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그가 하늘로 날아 올라가면서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매달려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었다. 그를 붙잡은 사람들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도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데 내려다보니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매달려 올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보는 순간 이 여인에게는 이런 생각이 불현듯 스쳐가는 것이었다. ‘아니, 저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붙잡고 하늘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나도 체중이 많이 나가는 사람인데 이 찰떡이 늘어나서 끊어지면 나도 떨어지게 되지 않겠는가?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흉측하고도 형편없는 죄인들이었는데 저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내가 불리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그 여인은 자기 밑에 매달려 올라오고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소리쳤다. ‘이 죄인들아, 너희들은 지옥에 그대로 있어야 해. 너희들은 착한 일이라고는 한가지도 한적이 없는 죄인들이 아니냔 말이야.’ 그리고는 그에게 매달려 잇는 사람들을 모두 밀쳐서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 순간 그 여인이 붙잡고 있던 찰떡이 끊어져서 그 자신도 그들과 함께 도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자신도 죄인이면서 남을 죄인으로 판단하였다는 것이 그 여인의 어리석음이고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 이 이야기의 교훈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교훈과 함께 여러가지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고 본다.
우선 한가지는 우리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죄의 보편성, 또는 죄의 일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독특한 인간론을 가지고 있다. 로마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말한다. 개인과 사회를 향한 기독교의 첫 말씀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특히 오늘 마가복음 본문의 빛에서 볼 때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메시야의 선구자로 왔던 세례 요한은 그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고 도전하고 요구했다. 그의 소개를 받고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메시야 예수 역시 요한이 했던 것과 같은 도전과 요구를 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광야에 가서 40일동안 금식 후 유혹을 받았다. 이를 이겨낸 후 사람들 앞에 나타난 예수님은 그의 첫 선포를 이렇게 말하였다.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 첫 선포는 요한의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과 예수, 이 두 분의 첫 선포의 말이 모두 ‘회개하라’는 것이었다는 사실에서, 죄의 회개가 곧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첫 출발임을 보게 된다. 죄의 회개의 요구는 모든 사람들은 회개할 죄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말임은 물론이다.
예수님이 당시 유대세계에 오셔서 ‘회개하라’고 요구했을 때, 그것이 사람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말씀으로 죄와 죄인을 일반화하여 오늘의 교회가 ‘회개하라’는 선포를 반복하고 있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예수님의이 이 말씀만을 떼내어서, 다시 말하면 그 당시 상황과 단절하여 그냥 죄를 회개하라고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본 뜻에 어긋나거나 그것을 오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선 예수님이 죄를 회개하라고 선포하신 유대사회는 어떤 사회인가를 물어야 한다. 물론 유대교가 지배하고 있던 사회였다. 그것은 무슨 말인가? 유대교가 지배하는 유대사회를 향하여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요구하신 의미와 취지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외치신 그 유대사회는 죄인과 의인을 엄격히 구별하던 사회였다. 어느 누가 계산했는데 구약성서에 있는 율법규정이 670여개가 된다고 하였다. 유대교는 이 율법규정들도 모자라서 거기에다 유대교 당국이 세칙들을 수없이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도록 강요했다. 그 율법들과 규칙들이 마치 그물처럼 촘촘히 있어서 보통 사람들은 다 알 수도 없고, 또 안다고 해도 그것을 어기지 않고는 살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정말 그 율법은 사람들을 꼼짝달싹할 수 없게 만들 정도였다고 한다. 율법학자들은 밥먹고 하는 일이 율법이나 연구하고 따지며 그것을 읽는 것이었으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율법규정이 무엇인지 찾아보기가 어렵고, 또 그 뜻을 다 이해하고 그대로 적용하기란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그런데 율법의 그 어느 규범을 어기면 곧 죄인이라는 것이다. 물론 악의 유혹에 넘어가서 범해서는 안되는 밤죄를 한 죄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교가 지배하는 유대사회에는 그렇지 않는 죄인, 죄인 아닌 죄인들이 많았다. 단순히 가난하기 때문에, 그들이 직업이 천했기 때문에 유대교가 요구하는 율법의 제반 요구를 충족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랬기에 그들은 자동적으로 죄인이 되는 것이었다. 많은 병자들, 특히 피흘리는 병자들, 나환자들, 온갖 신체적 장애자들, 가난하기 때문에 병을 고칠 수 없어 병자로 있어야 하는 사람들, 가난하기 때문에 또는 천한 가정에 태어났기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들 등등. 이런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죄인이었다. 여기에 반하여 제사장,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 레위인들 등은 자동적으로 의인이었다. 그들은 순수하게 율법을 사랑하고 그대로 지키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죄인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으로 생각하고 그들만이 의롭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께,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를 과시하고 자랑하였다.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던 종교 지도자들의 전형적인 자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외친 것이다. 유대사회는 죄인과 의인을 기계적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신학과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회개하라’라는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은 예수님이 요구는 이러한 기계적인 의인 죄인의 이분법적 신앙과 사고방식을 거부하신 것을 의미한다.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다’라고 선언하신 셈이다.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도 죄인이다. 너희야말로 죄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종교적 위선과 종교적 자기 의로움을 혹독하게 비난하고 공격하는 예수님을 곱게 볼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를 올가미에 씌워 궁지에 빠뜨리려 했다.
이 사실은 간음한 여인에 대한 처벌 문제를 둘러싼 사건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들 종교지도자들은 간음하던 현장에서 여인을 붙잡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와서 그 여인을 어떻게 처벌하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율법규정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은 죄인임은 물론이고 그러한 여인은 돌로 쳐죽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유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사형제도이다. 그들은 율법 중 중요한 것을 어기면 그 죄인을 동네 한 가운데에 세우고 동내 사람들이 모두 돌맹이를 던져 죽이는 것이다. 이것을 잔인한 짓이라기보다 거룩한 종교적 의무로 여기고 있었다. 예수님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돌맹이를 들고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온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어떻게 하랴 하고 묻는다. 매우 긴장된 순간이다. 정말 긴장과 두려움의 순간이다. 이때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이 여자에게 돌로 치라.’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다. 예수님의 이 엄숙한 말씀을 듣고 돌맹이를 들고 온 사람들은 모두 돌맹이를 놓고 떠나갔다. 아무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했기에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돌맹이를 들고 온 사람들이 모조리 떠나갔을까?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은 죄없는 자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가? 또 그 여인을 죽이려고 붙잡아 왔던 사람들이 모두 죄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스스로 인정했음을 의미하는 것 이닌가?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가슴에 비수와도 같이 날아가 박힌 것이고, 완악한 그들의 마비되고 굳은 양심을 찔러 죄책감을 일으킨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내적 음성을 들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래 나도 죄인이다.’ ‘내가 저 간음한 여인보다 의로울게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이 여인만 남았다. 이때 여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아 니 충격적인 것이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듣는가? 온 세상이, 유대교의 율법과 제사장과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과 간음한 여인 자신이 죄인으로 규정하고 단정하고 인정하는 이 죄인에게 예수님은 ‘나도 그대를 죄인으로 판결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아닌가? 간음한 여인을 판결하는 예수님의 판결기준은 사람들이 적용하는 판결기준과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간음하다 붙잡힌 현장범에 대한 판결에서 예수님은 전혀 다른 법, 규범,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충격을 금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인이 모두 죄인으로 단정하고 당시 실정법이, 종교법이, 거룩한 율법이, 교회 당국이, 제사장과 율법학자가 모두 이구동성으로 죄인이라고 단정하는 죄인을 보고, 예수님은 ‘무죄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감히 누가 누구를 죄인으로 단정할 수 있느냐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의 취지가 아닌가? 악인 선인, 죄인 의인,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사람을 구별하고서 구원받을 사람들은 선인과 위인만이 아닌가 하는 주장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또 한번 우리를 충격받게 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이렇다. ‘너희들은 사람을 악하다 또는 선하다, 불의하다 또는 의롭다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기준은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선하다 의롭다 판단한다고 하나님도 그렇게 판단하시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씀이다. 인간이 생각한대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율법규정을 비판 거부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믿고 자기의 선과 의를 내세우면서 민중들 위에 군림하고 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을 죄인이라고 비판하셨다. 특히 마 23장에서 예수님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책망하고 있는 말씀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라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다’고 비판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율법규정을 가지고 남을 죄인이다 아니다를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있다고 비판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과 의인의 이분법을 뒤집는다. 그들이 죄인으로 단정하고 있는 민중들이 죄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을 죄인으로 단정하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 죄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선 그들이 남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으로 그들 종교 지도자들이 죄와 죄의 회개의 문제를 가지고 민중들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있는 그들의 위선을 꾸짖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들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위선자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으라!’라고 퍼부었다. 뿐만 아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게헨나의 심판을 피하겠느냐?’라고 퍼붓기까지 하셨다. 뿐만 아니다. 예수님은 죄인 의인의 이분법을 무시하셨다. 그리고 의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나아가서 스스로 그 자신이 그러한 죄인으로 취급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되심으로써 중요한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의인 죄인의 신분을 뒤집은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거룩한 존재인 것을 의미했듯이, 예수님 자신이 유대교가 죄인이라고 단정하고 접촉하지 말라고 낙인찍은 죄인들과 함께 어울렸고 그들의 친구가 되심으로써 그들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선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죄인이라는 열등감에서 또 죄책감에서 해방시켜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유대교가 의인 죄인으로 구분한 것을 거꾸로 뒤집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사회에서 죄인이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라고 생각되는 이들은 의인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죄를 부정하거나 또는 죄인이란 없다고 본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다만 죄인과 의인을 근본적으로 다른 기준에 의하여 판단하여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 것이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뜻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적어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죄인이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임을 말씀하고 있다. 구태여 사람을 죄인과 의인으로 구별해야 한다면 그 기준은 교리를 많이 알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율법의 규정을 문자적으로 잘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의인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뜻이 그러면 과연 무엇인가? 예수님의 교훈에 의하면 하나님께 굉장한 제물을 드리고 열심히 하나님을 에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정의를 실천하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또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통하여 죄와 죄의 회개는 개인의 사적 내면적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의 사회적 삶의 영역에서 죄의 문제가 있다는 것, 그러므로 죄의 회개 역시 사회적인 삶에서 집단적 삶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관심해야 한다고 일깨워주는 것이다.
오늘의 시대에서는 인간이 모두 죄인이다라는 말은 그리 인기가 있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보고 우리는 죄인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 죄인이다.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다. 그래서 여기 모인 사람들은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 앞에와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줄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우리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좀더 경건한 마음으로 생활을 함으로써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