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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 / 학 2:1-9, 눅 10:1-12
이스라엘이 망해서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하나님이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는 신보다 약해서 이스라엘이 망했나? 하나님의 관심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떠났기에 망했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무지무지 사랑했다. 사랑했는데도 왜 이스라엘이 망했나? 이스라엘이 게약을 어겼기 때문이다. 하나님게서는 일방적으로 아브라함과 계약관계임을 선언하셨다. 죄악 가운데 망해가는 인간들 중에 하나를 지명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계약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후대에 갈수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보다 세상에 눈이 어두워 다시 죄악의 길로 갔다. 참다 못한 하나님이 주변의 강대국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침략하게 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바벨론의 식민지가 되었다. 바벨론에서 산지 60여 년, 이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고국에 돌아와서 먼저 성전을 짓는 일을 시작하였다. 오늘 본문 말씀은 과거 솔로몬 성전에 비해 지금 짓고 있는 새 성전이 너무도 초라한 외형을 보고 낙담하는 백성들에게 위로하는 말씀이다.
1. 과거와 비교하지 말라.
이스라엘이 588년 멸망, 다리오 왕이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므로 귀국하여 520년 새 성전을 짓기 시작했으므로, 멸망한 해 태어났으면 68세이다. 비록 늙었지만 옛 성전인 솔로몬의 성전을 보았고, 알고 있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고국에 다시 돌아와 성전을 짓는 이들에게 나무 초라하다고 비아냥거렸다. 이때 학개 선지자의 소리가 성전을 짓는 백성들에게 들렸다. 여론에 당황하지 말라. 과거의 성전과 비교하여 실의에 빠지지 말라. 솔로몬의 성전(다윗이 성전을 지으려고 모든 준비를 다함)은 7년에 걸쳐 완성했다. 가진 것 없이 짓는 성전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라.
낙심에 대한 좋은 이야기가 있다. 텍사스에서 합창경연대회가 있었다. 포스워스교회의 찬양대도 이 대회에 참가하고 싶었지만, 교회 형편상 비용이 문제였다. 찬양대원들은 생각 끝에 교회 마당에서 세차를 해서 모금을 하기로 결정했다. 모두들 기대를 걸고 준비를 시작했다.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그들에게는 합창경연대회 참가라는 큰 희망이 있었기에 열심히 준비했다. 그런데 정작 모금하는 날인 토요일이 되자 아침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세차를 해야 모금할 수 있고, 또 그래야 그들의 희망대로 합창경연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데 비가 쏟아지는 것이다. 비오는 날에 누가 세차를 하겠는가? 찬양대원들은 모두 낙심하여 경연대회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때 한 여자대원이 갑자기 ‘이 비를 활용해 봅시다’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갔다. 그 대원은 나무판에 페인트로 ‘우리는 씻고 하나님은 헹구신다’라고 썼다. 모두 비가 쏟아지는 날씨를 원망하고 포기했지만, 그 여자대원은 비눗물을 내리는 비가 헹굴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그것을 하나님과 우리가 협력하는 작업으로 사람들에게 알린 것이다. ‘우리는 씻고 하나님은 헹구신다’ 이 간판을 보자 마을사람들은 서로 전화를 걸어 많이 몰려와 즐거운 마음으로 세차를 하고 찬양대를 위해 기부했던 것이다.
본문의 이스라엘 또한 비록 성전은 지었으되, 과거의 성전보다 초라한 새 성전으로 인해 낙심하였다. 그러나 그 낙심을 저버릴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니, 새 성전에 임할 영광, 곧 약속된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모든 성도에게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2. 함께 하시는 하나님
새로 짓는 성전, 말이 많다. 낙심하지 말고 힘을 내서 일하라. 굳세게 하겠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믿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온 세계를 지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교회도 말이 많다. 구경온 사람들이 한마디씩 한다. 교회당을 절간 같다고 한다. 몇 명이 그런 것을 전부가 그런 것 같이 말한다. 절간 같다고 한 사람은 기독교인이면서 여행을 다닐 때 절간만 구경하고 온 사람들인 거 같다. 우리나라 교회 유적지를 보고 왔어야 하는데 안타깝다. 불교의 시초인 인도나 동남아 지역에 가면 절이 우리나라처럼 기와집인가? 아니다. 우리나라 개신교나 천주교가 시작할 때 지금처럼 현대식 건물이었나? 아니다. 모두가 기와집이다. 교회 지붕이 기와 모양이라고 절간같다는 사람은 그러면우리나라 한식집은 모두가 잘간인가? 지나가는 소리로 한 이야기를 사실인 것처럼 생각하고 낙심하면 곤란하다. 불교나 기독교나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포교를 위해 그렇게 지었을 뿐인데, 불교는 그대로 전승되어 기와집을 고집했고, 기독교는 현대식 건물로 바뀌었을 뿐이다. 우리 교회를 전주에 지을 때 이OO 집사님 집을 몇 번 찾아갔다. 왜? 이 집사님 집에 큼직한 청와대 사진이 걸려있어서다. 청와대는 온 국민을 통치하는 최고 권력기관이다. 교회는 영적으로 온 국민을 통치하는 기관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를 청와대를 생각하면서 기와식으로 설계한 것이다. 또한 전주의 한옥 전통을 살리기 위한 점도 있다.
교회는 뭔가 특색이 있어야 한다. 특색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전주에 유명한 교회가 둘 있다. 하나는 안디옥교회이다. 교회당 건물은 깡통이지만, 선교하면 안디옥교회라고 다들 알아 준다. 또 하나는 인테리들만 모이는 교회는 중부교회라고말한다. 요즘 60억을 들여 지은 바울교회가 조금 유명세를 탄다. 이처럼 무언가 특색들이 있어야 한다. 우리 교회도 뭔가 특색을 살려야 한다. 미술 선생님들이나 미술가들, 그리고 현재 목회를 하면서 미술을 취미삼아 하시는 분들도 우리 교회를 와서 보고는 건물이 특색있고 멋있다고들 말한다.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보고, 건물이 특색있는 교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교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 이런 특색을 가진 교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그러니 우리는 남의 이야기를 듣고 실망하지 말자. 그 사람들 이야기에 덩달아 춤추지 말자. 이렇게 지어지든 저렇게 지어지든 하나님이 함께게 하시면 된다.
하나님은 말씀과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5절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애굽에서 나올 때 뿐이겠는가? 그 이전부터 하나님은 언약을 주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다. 창 12:2-3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 계약은 여전히 살아있다. 인간은 지키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신다. 그러기에 ‘언약한 말’이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영’이 이스라엘 가운데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오늘도 이것은 변함이 없다.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영으로 함께 하셔서 오늘도 일하고 계신다. 말씀과 성령이 바로 우리 믿는 성도들의 재산이다.
환난이 와도 하나님은 함께 하신다.6-7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것과 심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역사에 영향을 누가 끼치는가? 세상의 그 복잡한 일들을 누가 만드는가? 마귀? 우연? 아니면 사람? 모두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이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이용하시는 도구들일 뿐이다. 또한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신다. 우선 매일매일의 삶 속에 크고 작은 심판들이 우리 앞에 보여진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일어날 영원한 심판이 있다. 이 모든 심판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일어나는 모든 일 중에 하나님이 모르시거나 관여하지 않는 것은 없다. 비록 내게 힘든 일이 벌어져도 그것도 의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이 그 뒤에서 움직이신다. 그분은 우리를 좋게 하시는 분이시다. 호난이 오더라도 두렵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역시 환난 뒤에서 일하시고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시련과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꾸준히 유지해야 한다.
모든 재물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신다.7절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씀도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복을 말한다. 또 하나는 모든 복을 다 합한 축복 자체를 말한다. 이는 메시야를 가리킨다. 결국은 두 가지 다 같은 것이다. 성전에 메시야가 임해야 영광으로 충만하게 된다. 이스라엘에게는 아직 메시야가 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 ‘너는 복이 될지라.’ 아브라함의 자손에서 메시야가 나온다는 말이다. 결국은 같은 의미이다. 이 약속의 성취가 아주 가까이 이르렀다. 그러므로 성전을 일으키고 마음을 이곳에 합해야 한다. 그러면 모든 나라의 보배가 임할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소망이 된다.
하지만 우리 믿는 성도들은 그 이상이다. 이미 메시야는 오셨다. 성전도 우리 속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성전들이 모이는 외형상의(건물이란) 성전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 사실을 인정하고 믿고 은혜를 기대하는 것이다. 모든 나라의 보배가 오셨다. 그가 온 세상을 지배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속에 계신다. 거기서부터 모든 보배가 흘러나온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나? 새 성전의 외형이 마음에 들지 않고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스스로 굳게 하라고 스룹바벨을 격려하신 하나님, 지금 우리 교회 안에서 하는 일 중에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보잘 것 없어 보여 실망하고 있는 일은 없나? 겉으로 나타난 것으로 실망하지 말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게 하심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3. 더 큰 영광을 보리라.
8-9절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본문은 새롭게 지은 성전을 통해 평강을 주리라, 구원을 베풀리라고 말한다. 이는 모든 나라의 보배로부터 나오는 모든 복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런 내용들은 세상에서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얻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가 말마다 덧붙여서 세 번이나 나온다.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직접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는 성전을 지으라는 명령에 덧붙여서 나온다. 은과 금도 다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은과 금이 나타나도록 기도하고 일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은과 금을 드려서 그것을 씨앗으로 삼아서 큰 일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마치 어린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린 것과 같다. 그래서 수천명이 먹고 남는 큰 기적이 일어났다. 그렇게 성전을 위해, 주의 일을 위해 움직여 보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날 것이다. 나중 영광을 더 크게 하신다.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리라.
우리 교회는 평강과 성도들 간의 사랑이 가득한 아름다운 교회인가? 비록 건축물과 외부 장식이 다른 큰 교회들보다 화려하지 못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없다면 과연 아름다운 교회라 할 수 있겠는가? 사실 성전은 그 건물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성전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라는데 그 의미가 있다. 겉모양이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건물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초라한 곳이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성전인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에 임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성전이다. 앞으로의 더 좋고 아름다운 날들을 기대하기 바란다.
< 축 도 >
지금은 우리를 위하여 평화를 공포하시고 복된 소식을 전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온 우주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구원받음을 믿고 기쁨과 감격을 느낄 수 있도록 하신 성령의 역사와 교통하심이, 오늘 이스라엘을 앞뒤에서 호위하시고 귀환하게 하신 하나님을 굳게 믿기로 결심하고 돌아가는 심령들 머리 위에와 그들의 가정과 일터와 이 민족 위에 영원토록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20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