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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th. Dec.(금)
오늘은 당직과 당번을 겸했다. 아울러 출항하는 날이다. 여러 가지로 바쁜 날이였다. 예정은 오후4시였으나 사정상 5시에 드디어 출항했다. 마침 300여명의 수산개발공사 교체선원을 실고 들어온 서울호의 전송을 받으면서 -. 거기다 아리랑의 구슬픈 가락은 무엇인가 슬픈 이별의 장을 만들어 준다. 잘가오, 잘있오. 뵈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보내는 마음과 가는 마음의 교차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서울호로 온 6기생 성x복의 인편으로 훈련소와 형님의 소식을 들었다. 계속 Centre에 계신다는 것과 집에도 무사하며 정민이가 아프다더군. 심하진 않은지? 제1진달래의 Member가 대폭 바뀌었다는군. 박x재 선장과 C/O박 등이 물러났단다. 그 근본적인 이유가 어디있는지 모르나 예측하기 어려운 어떤 점이 숨어 있는 것만 같다. 아울러 6기생들의 취업상태가 말이 아니군. 훈련소 자체에서도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확실히 전 권소장이 좋은 사람이었음을 느낀다.
10th. Dec.(화)
며칠만에 다시 붓을 든다. 그간 별다른 일없이 그저 순항을 계속하고 있다. Co. 304도. 뒷바람이라 시속 11Knot로 달린다. 부산까지 18일 가량 잡는다. 북위20도를 넘으면 앞바람을 받고 추워지면 다소 늦어지기는 하겠지.
Main Line 정리 작업도 3일만인 오늘 완전히 끝났다. 불필요한 모든 것은 어창안으로 몽땅 집어넣었다. 앞으로 2-3일만 더 있으면 작업은 거의 끝난다. 계획되었던 1회의 귀국조업도 철회한 모양이다. 다행이다. 낮에 일부변경선(Data Line)을 넘었기에 9일에서 10일로 뛰었다. 위치는 동경179도, 남위8도 부근이다. 적도까지는 약 3일 남았군.
저녁에 편승한 3기생 황선장과 Bow Deck에서 얘기하다. 일선에 나가서 Officer로서 할 일과 고충. 위치를 구하는데 필요한 얘기. 천측문제 등등. 유효한 것이었다. 특히 Sextant의 Side error가 생기면 방위가 틀린다는 것도 알았다. 앞으로 많은 참고얘길 나누어야 겠다.
국장님께 일어 교습을 받기 시작하다. 우선 책을 보기 위해서다. 고맙게 친절히 가르쳐 주신다. 염체불구하고 좀 배워야겠다.
12th. Dec.(목)
많은 날짜가 흘러간 것 같다. 앞으로 13일 약 2주일만 가면 된다. 지루한 가운데서도 바삐 돌아간다. 그간 어구정리 및 모든 정비가 완료되고 오늘부터 Scrapping과 Chipping이 시작되다. 내일이면 Painting까지 마치겠지. 거기다 2중으로 겹치는 교육에다 천측공부까지 하자니 바쁠 수밖에 없다. 그전에 기회 있을 때 마다 천측을 해둔 것이 지금에 와서 얼마나 큰 득을 보는지 모르겠다. Sighting하는 것부터 L.O.P 를 긋는 것까지 어느 정도 자신을 가진다. 아직도 못해서 허둥대는 친구들도 있다. 바보 같은 자식들! 누굴 믿고 기다리기만 했었나. 좀 더 안목을 넓혀 미리 자신의 利를 생각하고 익혔더라면 얼마나 좋을 것이냐 말이다. 하루가 여유 없이 돌아가는 것이 오히려 낫다. 기다려지는 마음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코스 304도. 평균항속 10낫트. 잘도 간다. 역시 순풍이다. 더 빨리 가고 싶은 욕심에서 Pitch Angle을 13이상으로 몰래 올리다 난리를 당했다. 얼마나 답답한 심정일까. 부산이 가까워 오니 모두 마음이 해이해지는 모양이다. 생활이 차츰 질서를 잃어가고 있다. 대책이 필요한데-. 알고 있을까? 내일쯤 적도를 지나면 적도제를 올릴 것이고 그게 끝나면 party도 있을 거다. 앞으로 1주일만 가면 추워지겠군. 겨울을 맞을 준비도 해야겠다. 선내의 모든 일도 추워지기 전에 마치자니 자연 바쁠 수밖에 없다. 배가 왜 이렇게 느리다고 느껴질까.
13th. Dec.(금)
오늘 하루도 바삐 흘러갔다. All Painting하다. 나만은 C/O의 부탁으로 아침부터 Crew-List, Passanger List, Store List기타 목록작성 등으로 6시까지 계속 책상을 마주했다. 저녁땐 엄지손가락 끝이 아프다. 연필을 쥐고 글을 씀으로서 손끝이 아프다니 이거 말이 되나? 목욕을 하고 면도를 했다. 적도제를 지내기 위한 마음의 준비인지도 모른다. Bow Deck에서 붉게 물든 서녘하늘을 보는 것이 여간 시원하지가 않다. 앞으로 13일 가량 남았다. Samoa출항한지 1주일. 편지를 받았을까? 영아가 얼마나 기다릴까? 방학이 10여일 남았군. 영아 조금만 참아줘!
거칠어진 손이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군. 아마 영양실조 아니면 일종의 병적인 것 같다. 남해212호 안선장이 준 맨소래담을 바르기로 했다. 이 거친 손을 부모님이나 영아가 본다면 얼마나 서운해 할까? 나도 이런 곳에 나와서 어떤 고역을 해도 좋다. 그러나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심적 염려를 끼쳐드려서는 안 된다. 저녁때 적도제를 올리다. 흥겨운 노래로 막을 내리다. 4번째의 선상 Party. 그럴때마다 Capt의 술취한 취정이 못내 더러운 생각을 나게 한다. 아무리 내용이 좋은 이야기라도 공적입장에서 술 먹고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왜 그런 멋진 얘기를 맑은 상태에서 얘기 못하나. 그것도 병이다. 일제 Asahi Beer 두깡을 먹다. 네 번중 3번은 사회를 맡았다. 스스로가 웃고 싶은 심정이다.
시시각각으로 좁아져 간다. 추위가, 계절이 시간적이 아니고 공간적으로 닥쳐온다. 앞으로 약 1200mile가면 춥다. 1일 240mile. 위도가 북위1도이다. 덥긴 하지만 바람이 시원하다. Painting까지 모든 작업을 완료하다.
14th. Dec.(토)
아침부터 C/O 한테 Report건으로 밑도 대가리도 없는 얘기들을 듣다. 내 예측이 맞았다. 그래서 나는 제출하지 않았다. 나 뿐만이 아니고 대가리가 옳게 뚫린 놈들은 안 냈다. 강요해서 걷어간 보고서가 그런 결과를 그런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더 있나. 좀 더 명확하게 한계를 그어주었으면 괜찮았을 것인데 -. 맹점을 추려 개선할 수 있는 방향으로 만들어 내어야겠다. 반응이 없으면 소장한테 직접 건의할 참이다. 오늘은 무척 지루하다. 남의 속도 모르고 C/O는 그의 list작성을 자꾸 시킨다. 울며 겨자먹기로 해주면서도 욕이 절로 나온다. 개새끼!
18th. Dec.(수)
붓을 잡지 못한지 4일째다. 그간 별 일 없이 지루한 항해뿐이다. 매일 계획도 없는 교육이 가끔 있지만 그것마져 흥미가 없다. 특히 유효한 것은 R/O로부터 배운 Loran은 쉬운 편이라 하겠다. 이번에 들어가면 그간 배운 것을 총정리해서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 Z.D를 넘어 1시간 변경. 한국과 시간차가 1시간으로 줄었다. 편승자가 가진 고성능 라디오로 한국방송이 나온다. 반갑기 짝이 없다. 국내외 10대 뉴우스가 발표됐군. 국내 뉴우스중 “교육제도 개편”이란 것이 있는데 어떤 것인지는 궁금하군. 한국시간 9시. 서울의 기운이 3도라고-. 영아는 지금쯤 뭘 할까?
Report를 제출치 않았더니 Capt의 독촉이 왔다. 3일만에 우물쭈물해냈다. 오후에 그 반응이 왔다. 변명이다. 하지만 할 수 없다. 내 주관과 그의 주관이 다르니까. 그러나 단 한 가지. 새로운 것을 연구하지 않는다. 구태의연한 과거의 낡은 사상만을 들추고 합리화 시키려하는데 미치겠다. 역시 '마구로 뱃놈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그래도 인간이 사는 사회인데 왜 안 된단 말인가. 시대가 변하고 물질문명도 따라서 변하는데 왜 이것은 과거만을 진리로 삼고 답습해야 하나 말이다. 일본놈들을 봐라. 하나의 목적을 위해 얼마만큼 광범위한 연구가 있고 노력이 있나 말이다.
어제 Senyubin Is.를 항과했고, Saipan섬은 2-3일 후에 통과예정. 그때부터 코스가 바뀐다. 앞으로 9일. 약 3일만 더 있으면 쌀쌀해지겠다. 햇빛은 뜨거워도 바람은 차운기를 머금었다.
일등항해사 김x호. 그의 휴대품 목록 때문에 두어번 잔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결국 자기의 무능을 폭로하는 처사다.’ 같은 사관끼리 하는 소리다. 목욕을 하고 새옷으로 갈아입다 이제 하복은 버리던지 빨아서 두어야겠다.
20th. Dec.(금)
08시경 Saipan과 Guam島를 지나다. 여기서 코스변경 325도. 일로(一路) 일본의 下關(시모노세키) 해협으로 달린다. 바람이 세다. 옆바람이다. Rolling이 심하고 파도가 세게친다. 햇빛은 아직 더우나 바람이 찹다. 아침저녁으로 반소매로는 춥다. 이게 몸에 퍽 해로운 모양인가. 앞으로 Iogima가 이틀반. 그래서 27일 오후에는 부산입항이 가능하겠다. 너 나 없이 지루하다. 차츰 밥맛이 없어지나 보다.
Deck에 물이 튀므로 교육도 없어진다. 특히 어로장님의 교육은 재미가 있는데 -. 30년간에 세계 각 곳을 항해하던 그 당시의 상황과 경험담은 충분한 자료가 될 수 있으며 말을 알아듣지 못하나 그 속에서 한 두마디 알아들을 수 있는데 무한한 기쁨이 있다.
입항하면 곧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으나 우선 형님께 내 계획을 얘기하고 며칠 쉬어야겠다. 여유가 있으면 영양보충이라도 좀하고 -. 그 동안 실습기간에 배운 것도 정리해야겠고 -.
엄마 제사가 내일 모래군. 추석 때도 빠지고 -. 지금까지 엄마제사는 안 빠졌는데 -. 모두 모일텐데. 부모님들이 서운해 하시겠군. 엄마도 어쩌면 나무라실 거야.
시간이 있는데도 공부하기가 싫어진다. 왜 그럴까? 배가 심하게 흔들린다는 것이 주원인이 아닌 것 같은데 - .
23rd. Dec.(월)
시시각각으로 날씨가 달라진다. 어젠 의외로 조용하더니 새벽부터 마구 밀어닥친다. 꽝 꽝 하는 소리에 잠이 깬다. 아마 파고 4미터 가량은 되겠다. 계속 이와 같은 상태로 갈 것이다 모두들 내의를 꺼내 입기 시작한다. 서울엔 영하3도라는군. 라디오가 나오기 시작하니 더 한층 그리움도 짙게 한다.
그저께가 동지였군. 팥죽! 엄마 제사는 그냥 북향하고 묵념만 드렸을 뿐이다. Jingle Bell 소리와 함께 X-mas carrol이 울려나온다. 전보치다. 그 때문에 C/O와 말썽이 생겼으나 결국 우리가 이겼다. 아침부터 두 번 그한테 실력으로 이긴 것이다. 통쾌한 날이다. Loran계산을 그 앞에서 무난히 해냈다. 평소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연습한 것이 유효했다.
24th. Dec.(화)
어제부터 다시 조용해진 해면은 이 계절과 지역에 비해서 신기할 정도로 잔잔하다. Bridge의 수은주가 계속 하강한다. 밤이면 새우잠을 자는 경우가 있다. 내일 모래 입항과 더불어 벌어질 환희의 장면들을 그리며 잠 못이루는 모든 선내 사람들이다. 일본의 九州와 四國(시고쿠)가 보인다. 부근을 항해하는 큼직한 선박들도 보인다. 분명히 육지가 다 되었음을 인식하게 한다. 20여일간 지루한 나날들이었으니까. 어제는 어로과 시험을 봤다. 그 결과 저녁11시에 교육이 있었다. 어로과 16명 그기서 2-3명을 제외하고는 정말 내 자신도 답답할 지경이다. 정말 I.Q가 낮은 것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인지?
여기 훈련소 생활 1년 동안 내 자신의 두뇌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은 있다. 지금까진 나는 명석하다는 소리도, 우둔하다는 소리도 들어보지 못했고 또 내 스스로가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기에 해야 할 일도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체험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 작은 노력이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스스로가 좀 더 일찍 터득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물론 노력해서 되지 않는 법이 없겠지만 애쓰는 만큼 효과가 분명의 자신이 인식할 수 있을 만큼 된다는 것이다. 육상 좌학을 마치면서 그랬다. 만약 내가 선장훈련생의 직책을 맡지 않고 남과 같이 공부할 수 있었다면 정상을 차지할 수도 있었다고 믿는다. 그 직책 때문에 받은 영향은 내 생활, 성격, 행동에 지금까지도 미친다. 맡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계속 이런 정신으로 무엇이거나 조금 더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보자. 전 중앙국민하고 박x진교장의 방침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 후회가 된다. 학술적인면에 있어서도 항상 옆에 두고 접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임당교 시절의 이x철교장의 얘기도 생각난다. ‘적은 것이나마 장기간이면 성립된다.’는 것이다.
모든 물건도 정리했다. 헌옷은 모두 버리고 입을 수 있는 것은 접어넣고 -. 그간 입었던 런닝샤스도 Panty도 버렸다. 아껴 두었던 새 샤스를 입고 내의도 입었다. 구두도 꺼내 닦고 작업복에 단추도 달고 -.
모래면 상륙하게 됨과 동시에 새로운 일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어떻게 될것인가? 선 결혼, 후 출항이냐 아니면 선 출항, 후 결혼이냐? 내가 의도하는 대로 좋은 선박과 직책이 해결될 것이냐도 의문이다. 영아의 허락을 얻는 것도 중요하다. 전적으로 내 의사에 동의해 주지 않는다면?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눈앞의 현실이 절박하면서도 항상 마음은 먼 훗날에 가 있다. 엄청나게 큰 것도 아니다. 가장 실현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지난날 어떤 사람들이 걸어간 전철을 생각하는 것이다. 현재가 어떻게 꾸며질 것인가.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뱃놈은 발바닥에 흙을 묻히면서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그만큼 물정에 어둡고 기분에 지우치기 쉬우니까 그런가 보다. 6개월간의 실습을 마친 지금, 땅위에 서는 순간부터 무엇인가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더욱 내 자신을 위해 Plus됐다고 보자. 좀 더 여물게 건실하게 살 수 있는 인간 徐完洙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실습을 마침에 즈음하여 가지는 마음가짐이다.
25th. Dec,(수)
일본 해협에 오후4시부터 항과하기 시작하다. 이 상태로 달리면 24시간 후에는 그리운 고국땅의 내음을 맡을 수 있고 먹고 싶고, 보고 싶고, 하고 싶은 욕심들을 채울 수 있다. 어렴풋이 초엿새 달이 부옇다. Shimonoseki(下關)해협을 통과하지 않고 Anchoring해서 일박한 후 내일 다시 출항예정이라고 일정이 나왔다. 역겹다. 그 이유야 Timming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은 협수로를 통과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묘박지를 찾는데도 애를 먹었다. Light House를 찾지 못해 당황하는 일등항해사 김x호의 모습이 처량하다. Capt만 아니였으면 그냥 두고 싶었으나 부득이 협조 않을 수 없다. ‘Gl. Fl. R. 8Sec'인 것을 8Sec만 찾는 그의 실력에 의심이 간다. 여하튼 속이 답답한 처사다. 연거퍼 그에게 도전하는 것이 유감이나 스스로가 깨우치지 못하는군.
26th. Dec.(수)
비가 온다. 안개도 낀다. 다행이 날씨는 별로 차지 않다. 10시반 Stand by하여 출항. 오후 2시에 완전히 下關해협을 통과. 일로 부산을 향했다. 앞으로 12시간 후면 부산외항에 닿는다. 어서 가자.
Capt가 부른다. 지금까지 실습 기타 모든 의견을 광범위하게 나누었다. 7기생을 대표해서 얼마만큼 표현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자신도 느낀 점이 있었으리라. 어쩌면 나를 진달래 항해사로 잡아둘 것 같군. 잘 될까? 현재의 Member라면 죽어도 안 된다. 그만큼 나 한테 minus 가 될 뿐이다. 어로과 개개인의 신상에 대한 얘기도 나누었다. C/O, 2/O의 처지에 대한 것들도 먼저 얘길꺼냈기에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 수산계에 있는 한 어떤 유대가 필요할 것이라 말하고 계속 7기생에 대한 관심은 가져달라고 얘기했다. 이젠 영 밥맛이 없고 잠이 안 온다. 너 나 없이 다 그런가 보다.
27th. Dec.(금)
새벽 1시반 부산외항에 닻을 내렸다. 불빛이 찬란한 부산의 한밤중. 그간 얼마나 그리고 오고 싶었던 곳이었던가. 8시쯤 검역관이 다녀가고 서서히 부두를 향한다. 영아가 왔을까? 기대했던 것은 아니나 역시 못 올 것 같다. 마침 사업관리인, 후배, 소장 등 아무도 없다. 괫심하지만 할 수 없다. 쓸쓸한 가운데 환영식을 마치다, 형님과 정희 그리고 정아가 나왔다. 일연의 사무절차가 끝나는 동안 아니꼬운 점이 많다. 원래 세상이 다 그런 것이지만 미리 훈련소에서 Cover하지 못하는 것이 괫심하군. 더욱이 C/O의 융통성 없는 외교는 더욱 부채질하는가 보다. 오후6시 상육하다. 자격변경이 안되어 빈 몸만 나갔다. 막걸리를 두어잔 마시다. 술을 끊기로 한 내가 아니냐. 여하튼 술만은 가장 내 스스로가 Control해야 할 일임을 명심한다. 긴머리, 초라한 복장, 시커먼 얼굴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마음만은 자랑스럽다. 이번만은 빈손으로 왔다. 다만 자그만 실력, 앞으로의 경쟁을 위한 밑천을 구했을 뿐이다. 아버님이 와 계셨다. 큰절을 올렸다. 반겨주신다. 또 다시 나가겠느냐고? 나가야지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지금까지 1년을 참고 살아왔지 않느냐 말이다. 목욕을 하다. 만6개월만에 처음으로 온수에 몸을 담그고 박박 문질렀다. 별로 때도 없다. 그러나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을 한다. 영아가 가져야 할 몸인지도 모른다. 그를 위한 내 건강이라고 하자. 회충약도 샀다.
형님이 계신 집안은 전보다 한결 밝고 명랑하다. 정민이도 많이 컸다. 단란한 가정이란 이런 것이겠지.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것 중에 가장 갖고 싶은 것이다. 1년 - 2년. 그게 긴 것일 거다. 그러나 우리들의 단란하고 아늑한 보금자리가 마련되자면 결코 긴 시간은 아니나, 무수하고 몸서리치는 고독한 고생이 있다. 영아는 왜 안 왔을까? 아버님도 보고 싶어 했는데 -. 어서 결혼해서 영아는 경산에 우선 데려다 놓는 것이 어떠냐고 하신다. 사실 집에는 Mother, Father뿐이니까 가볍기야 하겠지만 아직은 두고 볼 일이다. 내일 완전히 하선하면 윤선생님부터 찾아보고 부산으로 옮길 수 있는지 여부를 타진해보자. 승선관계는 아직 미정이다. 형님이 Long line보다 Trawl을 할걸 -. 하고 후회하신다. 모선을 타겠느냐고 -. 그것도 좋다. 좀 더 기다려보며 생각해 보자. 이제부터 내 진짜 인생과 고생의 시작되는 거다.
28th. Dec.(토)
윗 놈들의 솜씨 없는 처리관계로 오후 늦게 자격변경, 저녁에 훈련소로 귀소, 모두 휴가를 갔다. 수료는 1월 13일이란다. 김 부장이 부른다. 역시 진달래에 남아주었으면 한다. 아직은 생각이 없다고 이야기 했다. 이왕 배를 타야한다면 작업선을 타야 한다. 돈도 벌고 많은 것을 배운다. 단 한 가지 일이 많고 고생이 심하며 기간이 긴 것이다. 내 생각은 자주 다니는 것보다 한 번에 오래하고 끝내는 것을 원한다. 내일은 윤 선생님, 진달래 갑판장도 만나보고 편지와 전보 보내준 용길 형과 남해 212호 안 선장과 C/O 최x진한테 엽서도 띄워야 겠다.
29th Dec.(일)
오늘 어쩌면 대실수를 했다. 오후에 진달래에 들렸다가 모두 술이 취했다. C/O 그놈이 붙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는 얘기다. B/sn도 취했다. 얘기의 골자는 같이 탔으면 하는 것이다. 고맙다. 힘끗 협조해주겠다고 했다. 두고 보자. 가능하다면 같이 손잡고 보는 거다. 내 사람으로 만들어 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국장도 은근히 친해 두었다. 한사람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봐서 ‘됐다’고 인정된 사람은 잡아두지 못할 망정 친해두어야 하는 것이다. 고기 두어 토막 얻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그것을 Centre차에 싣는 것이 바로 큰 실수였나 보다. 후회한다. 좀 더 한순간에 생각해서 판단했어야 하는 거다. 영아 전보 받다.
30th. Dec.(월)
오늘 상경 예정인데 실현치 못했다. 영아가 얼마나 기다릴까. 어쩌면 화를 낼는지 모르겠군. 내일은 꼭 가야지. 아침 10시 윤 선생님과 미미제과에서 만나다. 진정 반가워 해주신다. 육친의 오누이 같은 정을 느낀다. 함께 해운대까지 가다. 전x근 군을 만나다. 역시 잡잡한 학교얘기들도 많았다. 윤 선생님 오늘 꽤 많이 소비하셨다. 상당히 발전하셨다. 물론 그 만큼 여유가 있으니까 그런 모양이다. 90여명의 직원 중 그래도 손꼽히는 위치를 확보했으니 얼마만큼 노력과 요령과 수단이 작용했을까? 짐작이 간다. 영아 얘길 했다. 옮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인다. 됐다. 해보는 거다. 저번 내가 직접 하지 않고 남에게 맡겼던 까닭에 실패한 쓰라린 지난날을 생각하고 내 손으로 하는 거다. 윤 선생님! 고향 선배이자, 은사이며, 동료였었다. 이제는 누님이라 부른다. 마음의 누님. 내가 영영 잊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지금끗 잊지 않고 정을 나눈 것이다.
하나 형편이 허락한다면 누가 뭐래도 영아만큼은 내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 내 욕심이기도 하다. 학교라도 직장을 잘 모르고 있지 않느냐 말이다. 오늘도 술을 약간 마셨다. 누님도 맥주는 잘 하시더군. 많이 변했다.
형수와 심각한 얘기가 있었다. 형수의 처지와 얘기의 내용에 대해서 추호도 반감을 갖지는 못한다. 타당하다고 본다. 사실 고생이 많다. 오히려 형님을 나무라고 싶다. 엄마가 있었으면 내 자신도 정희도 그렇지는 않을 것인데 -. 사실 ‘방황’한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몸과 마음의 방황. 이 얼마나 자신의 허망하고 서글픈 것인지 모른다. 나도 정희도 어서 결혼을 해야 한다. 그래서 각자의 마음을 정착시켜야 한다. 내일 밤은 영아 곁에서 푹 마음을 놓을 수 있어야 할텐데. 보고 싶은 마음이 유난히 많은 밤이다. 마음이 괴로웁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영아! 너만은 내 심정을 이해해 줄려나. 너무 괴로운 밤이다.
여기서 일단 끊어진다. 하선 이후에는 붓을 잇지 못했으니까.
◎ No.2 Chin Dal Le 이후
69년 3월 9일 영아와 결혼식을 올렸다. 대구 반월당에 있는 현대예식장. 주례는 서x원씨가 맡아 주셨다. 집안으로 아버님이 부탁하신 것이다. 금 한 돈에 3,000원 하던 때다. 아버님이 빌려주시며 ‘갚아라’고 하신 50,000원으로 혼수감을 마련했다.
시계는 내가 일본에서 산 것으로 떼웠고, 반지는 형님이 주신 자그만 다이아반지로 대신했다. 그리고 친구들 계모임에서 준 50,000원으로 농짝 하나를 샀다. 그러고도 돈이 남아 3돈짜리 금 목걸이를 해 줄 정도 였으니 가히 짐작하고 넘어가자. 평생 마음의 빚이 되고 있다. 혼수함은 忠洙와 甲洙 두 아우 녀석들이 들고 갔었고, 장모님의 서운해 하심도 모른 척할 수밖에 할 수 없었다. 참으로 암담한 시절이었고 철저히 빈털털이던 때였다. 신혼여행은 기차로 부산 해운대 청운각 호텔이 첫 기착지. 그리곤 송도에서 하룻밤을 더 보냈다. 대구역에 도착하니 南姬처제가 마중을 나왔다. 그런데 처가집이 바뀌어 있다.
경산에서 하루밤을 묵었나? 눈 질끈 감고 바로 농 한 짝과 이불 등을 싣고 칠곡군 약목동부국민학교 관사. 방 두칸의 초가삼간 중 그 한 칸에 들었다. 첫 신접살림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곤 빈둥데기만 했다. 그러나 아마도 그 시절이 가장 좋은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여름밤엔 앞강에 나가 아내와 함께 목욕도 했다. 곧 첫 애기가 들어섰다. 그간 아내는 칠곡군 지천면 지천국민학교로 전근했다. 그러다가 내가 먼지 부산으로 내려와 한일호에 승선함으로 떨어져 있기 시작했고 한일호에서의 1년 가까운 허송 세월을 보내고 말았다.
70년이든가 형님이 주신, 누구의 줄인지는 몰라도 권x두 훈련소 소장님의 소개장으로 李x根 당시 교육감을 찾아뵙게 되었고, 덕분에 아내는 다행히 부산으로 내려와 문x국민학교에 첫발령을 받았고, 아버님의 명령(?)으로 고모님이 빌려준 20만원으로 문현동 큰길가 이층집 단칸방을 빌려 다시 시작했다. 거기에서 첫딸애가 태어났다. 그것은 또 하나의 커다란 변화와 자신의 성장을 의미했다. 그 2층 단칸방에 정화와 세 식구에 정화를 키우는 할머니 한 분까지 넷이서 살기도 했다.
형님의 주선으로 통영수고출신의 강x훈 선장이 맡게 된 韓日號에 이등항해사로 승선했지만, 이 배가 불운의 시절이었다. 배는 800톤의 일본에서 신조한 최신형 트롤선으로 도입해 놓고 통관절차를 마치지 못한 체 부도를 만나 회사가 문을 닫았다. 청와대, 농림부, 수산청, 불실기업정리반, 재무부 등등 관계 요로에 수십통의 진정서를 내 손을 써 보냈고 일일이 답장을 받았지만 결국은 엉뚱한 회사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 동안 한성호는 북양 명태잡이로 엄청난 부를 이루었다. 그 2년간 만약에 제대로 한일호가 북양을 뛰었다면 쉽게 쇼부(勝負)가 나고 말았을 것이다.
중. 고교 모자를 쓴 영철, 영길이 처남이 찾아 왔을 때는 결혼 선물로 받은 시계를 잽히고 돈을 빌어 저녁을 사 먹이기도 했었고, 정화를 업은 아내가 출근전에 부둣가에 와서 애를 맡기고 간 적도 있었다. 한심한 나날들이었다.
부둣가에 자리한 양아치(폐품수집)집단과 어울리기도 했고, 낚시로 낚은 장어새끼, 낙지 몇마리에 댓병소주를 나팔 불기도 했었다. 늦봄 멸치철이 되면 멸치 털려고 온 멸치배들에게서 얻은 한 바켓의 생멸치로 회를 만들어 종일 먹고도 남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저녁엔 훤히 불을 밝히고 갑판위에서 바람을 쐬면서 먼 밤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김해상군이 있던 xx국민학교 선생님들이 여름방학을 맞아 부산 여행길에 갑판위에서 신나게 놀고 하룻밤 묵어간 것도 그 때의 일이었다.
각처에 손가락 아프도록 진정서를 낸 탓에 관리은행인 조흥은행으로부터 한 달에 20,000원씩 받으면서도, 그게 문제가 아니라 바다를 누빌 때를 기다리면서 참고 지낸 세월도 보람없이 결국은 금성수산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형님의 동기생인 주x순선장이 새로 오고 실습항해사로 해 주겠다고 가자고 했으나 거절했다. 내가 주체가 아닌 탓이고 모두가 형님의 그늘뿐이었다.
강x훈 선장이 다시 잡은 (주)동방원양을 새로운 터전으로 바꾸었다. 한일호에서 보낸 2여년의 세월은 너무 아깝고 억울한 시간이었지만 그 누굴 원망할 것인가? 아마도 여기서 뭔가 내 水德을 한번쯤 의심을 하고 진로를 바꾸었어야 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 생각하면-. (제2 진달래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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