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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주/낙양 여행기
<사삼클럽 6주년 기념: 2009.3.21~24>
우리 인간에 여행은 참으로 행복과 즐거움을 주는 묘약인 모양이다. 오랫만에 가까운 친구
들과 해외여행을 한다고 생각만 해도 마음이 들뜨고 흥분되니--어린시절 소풍 전날밤에는
잠이 안오듯이 무척이나 기다려졌었다.
사삼클럽 여섯돌을 맞아 국내보다 해외여행을 가자고 합의가 되어 회원가족과 비회원 합해
15명이 3박4일 일정으로 중국 하남성의 정주와 낙양을 다녀왔다.
중국은 이미 한국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관광국이다. 그러나 이번에 다녀온 정주와 낙
양이 있는 하남성은 KAL기가 다닌지 1년반 밖에 안되고 선전도 안되어 최근에야 많은 한국
인들이 찾기 시작한 곳이다. 무엇보다 TV에서 PR을 자주해서인지 1주일에 두번 다니는 비
행기는 완전히 한국관광객 전용으로 만원이었다. 도로도 잘 닦아놓았고 숙박시설도 좋은 편
이었다.
3월21일 10시 정각에 출발한 KE-809 항공기는 2시간30분이 걸려 정주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시차가 한시간 있어서 11시반이 넘고 있었다.
12시에 앞으로 3박4일동안 타고다닐 30인승 버스에 올랐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가이드
이동일씨는 34살의 노총각이란다.정주공항이 있는 신정 신도시에서 소림사가 있는 등봉으로
향해 달리는 버스에서 하남성과 정주시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진다.
정주공항은 10년전에 국제공항으로 오픈되었고 공항도시인 신정시(新鄭市)는 인구 30만이 거
주하는 농촌도시이다. 그러나 공항은 년간 1백만명이 드나드는 명실상부한 국제공항으로
외관규모도 수준급이었다.
하남성은 인구1억의 23개성의 하나로 성도는 정주이고 차로 2시간 거리에 낙양이 있다.
이번 관광의 목적지인 소림사.달마동,황하유람구,운대산이 있는 정주와 용문석굴,백거이묘,
향산사 등을 보게되는 낙양을 오가며 견학하고 공부하게 된다.
정주는 하남성의 성도로 중국 최초의 왕조인 은(상)나라의 도읍이 있던 곳이다..
지형적으로는 북쪽으로는 황하와 인접해있고. 서쪽으로는 오악(五岳)의 하나인 숭산(嵩山)
이 자리잡고 있다. 정주는 3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이고,신석기시대의 주거
지와 은나라의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고 있지만 워낙 오래된 고도라 모두 신개발이 되어 신
흥도시의 면모로 바뀌었고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면적 167,000평방미터의 정주시는 인구가 730만명이나 되는 대도시이다. 자동차가 하루
600대가 증가될 정도로 초고속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교통난이 워낙 심각하여 현재 지하철공
사 건설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소림사(少林寺)
소림사가 있는 등봉으로 가는 차도 옆에는 파란 물결의 밀밭이 한없이 넓게 전개되고 있었
다. 또 대추나무밭이 엄청난 규모로 펼쳐저 있었다. 하남성의 주농산물은 밀,옥수수,목화,
참깨,호두가 유명하다. 지금 밀농사가 한창인데 4월이면 수확을 하고 그 자리에 옥수수를
심어 2모작을 한다. 달리는 도로변에 노랗게 물든 유채꽃이 끝없이 이어지며 우리를 반긴다.
벚꽃과 복사꽃,살구꽃이 피어있어 완연한 봄을 만끽하게 한다.
가는 도중에 영태사(永泰寺)에 들렀다. 영태사 경내의 식당에서 웰빙식 중식을 하기 위해서
이다. 웰빙식이란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스님들이 먹는 식사 그대로란다.
야채나 식물성 나물로 만든 반찬인데 마치 육류로 착각할 정도로 요리비법이 신기했다.
영태사는 비구니 사찰이었다. 경내를 구경하고 소림사로 향했다.
‘천하 제일 사찰(天下第一名刹)’이라고 칭하는 소림사는 선학(禪學), 승병(僧兵), 무술의 영
향이 멀리 우리나라와 일본, 미국 등에도 미쳐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다.
소림사는 하남성 등봉현(登封縣)에서 서북으로 13킬로미터 떨어진 숭산(嵩山 중국의 전통적
인 다섯 명산의 하나) 서쪽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496년 북위 효문
제때 황제의 명령에 의해 이 사찰이 건립되어 인도 고승 발타에게 수행하도록 제공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찰이 소실산(少室山) 숲속에 있었기 때문에 소림사(少林寺)라고 칭하였다.
소림사는 496년에 창건되어 1513년이나 된 중국역사상 세번째의 고찰이며 같은 하남성에
있는 백마사(白馬寺)는 AD 68년에 창건되어 중국역사상 최고찰로 불교성지로도 유명하다.
소림사 경내에 들어가니 벽돌색 무술수련복을 입은 수많은 수련생이 보였다.
소림사가 있는 등봉시는 40~50여개의 무술학교가 있고 어린 소년들이 청운의 꿈을 품고 이
곳을 찾는다고 한다. 열명 이내의 작은 학원도 있지만 2만명의 수련생을 가진 어마어마한
규모의 학교도 있단다. 소림사에서 3~4년 공부를 하고나면 무술공연 배우로 성공하는 경우
도 있지만 대부분 경비,호신직업인 등으로 풀린다고 한다. 소림무술의 시초는 달마대사가
면벽수련을 하는 승려들의 건강을 위해 5가지 동물의 움직임을 본따서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현재는 중국무술의 대명사로 통한다.
3시공연이 있는 무술공연장으로 입장했다. 유연하면서도 깜짝 놀라게 하는 신기에 가까운
여러무술쇼를 한시간 가량 관람했다. 이소룡도 이곳 무술학교에서 무술연마를 했다고 한다.
이조암(二祖庵)
다음 목적지인 숭산 이조암(二祖庵)으로 가기 위해 숭산케이블카를 타게 되었다.
숭산(嵩山)은 중국의 5대명산(五岳)의 하나로 유명하다. 태실산(1512M),소실산(1440M)등
72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다.
*참고로 오악(五岳) 동쪽에 타이산(泰山,산동성 , 1545 m :東岳)
서쪽에 화산(华山, 산시성, 1997 m :西岳)
남쪽에 형산(衡山, 후난성, 1290 m :南岳)
북쪽에 항산(恒山, 산시성, 2017 m :北岳)
중앙에 숭산(嵩山, 하남성, 1494 m :中岳)
두명씩 타는 리프트를 타고 오르는 동안 산에는 노란 개나리와 산벚꽃이 만개하고 있었다.
리프트를 내려 이조암(二祖庵)에 들러 참배를 하였다. 이조암은 혜가가 병을 치료하던 기도
처이다. 초조(初祖)인 달마대사의 제자 혜가(慧可, 487년~593년)는 남북조 시대의 선승이며
선종(禪宗)의 제2대조이다. 혜가는 달마의 제자가 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달마로
부터 '적설(赤雪)이 내리지 않는한 불가하다'며 결코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혜가는 칼
로 자기 팔을 잘라 붉은 피를 눈밭에 뿌려 적설을 만드는 정성을 보이고 이에 감복한 나머지
제자로 받아드려졌다는 전설로 유명하다.
이조암에 들어서면 원나라 때 세워졌다는 6각 전탑과 당대의 4각 전탑이 눈에 들어온다.
중심전각인 20평 남짓한 법당에는 금칠을 한 좌상에 옷을 입힌 혜가 스님이 앉아 있다.
법당 앞에는 단맛, 쓴맛, 신맛, 매운맛의 네 가지 맛의 물이 났다는 우물 사미정(四味井)이
있는데 수행하면서 물이 없어 고생하던 혜가 스님을 위해 달마 대사가 지팡이(錫杖)로 땅을
쳐 물을 솟아오르게 해 만들었다는 탁석천(卓錫泉)이다.
소림사 경내
소림사 경내는 엄청 넓고 컸다. 당나라에서 명나라까지 240여명의 주지,방장의 묘당인 탑림
을 지난다. 한국과는 달리 비석(탑)밑에 시체를 묻는다고 한다. 묘소인 셈이다.
소림사 본당이 있는 경내구경을 하였다. 천하제일조정(天下第一祖庭)이라고 쓴 현판이 눈에
띄었다. 중심에 대웅보전이 높다랗게 자리잡고 있었다. 고루(鼓樓)인 초조암(初祖庵),지장전,
서방성인,비랑(碑廊),입설정(立雪亭),6조 혜능을 모신 육조당(六祖堂)을 구경하였다.
소림사는 소림무술로 더욱 유명하지만 역사나 규모 그리고 중국 선종불교의 산실로서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와 달마동
인도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27대 제자인 반야다라 존자를 40년간 시봉하다 동토(東土)
중국을 택해 전법에 나선 불교 선종(禪宗)의 종조(宗祖) 달마대사.
달마대사는 1500년전 인도 왕세손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달마는 부처(석가모니)로부터 28대
조사이며 중국 선종의 종조이다. 제2조가 되는 혜가를 만나 이입사행과 선의정법을 전했다
고 한다. 당시 ‘불심천자(佛心天子)’라 불릴 만큼 신심이 깊었던 양(梁)의 무제(武帝
·464∼549)와 법 거량을 가졌으나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이후 달마는 ‘아직 이 땅에서 법을
전할 때가 아니다.’라며 일체 중생과의 연을 끊고 9년간의 묵언 면벽수행에 들었다.
일설에 의하면 양무제가 자기의 공덕을 알고싶어 "짐의 공덕은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공덕무"라 했다. 이에 앙심을 품고 달마를 살해한 후 땅속에 묻었다. 몇년후
어느날 서역을 다녀오던 사신이 짚신 한짝을 지팽이에 매달고 가는 달마를 보았다고 한다.
무덤을 파보니 시신은 온데간데 없이 달마는 환생을 하였다 한다.
일반 패키지여행의 코스가 아닌 달마동은 특별히 주문하여 택한 코스이다. 왕복 4km의 돌계
단길은 선선한 날씨임에도 땀이 나고 산을 자주 오르지 않는 여행객에게는 제법 힘든 코스
였다. 달마 대사가 면벽수행을 했던 달마굴은 소림사 뒤쪽 깎아지른 듯한 산 중턱에 있다.
동굴 입구의 돌문에 ‘묵현처(默玄處)’라 음각되었고 벽에는 ‘달마동(達磨洞)’이라 새겨졌는데
3∼4명이 서기에도 비좁은 동굴 한가운데 가사를 입혀놓은 달마대사상이 인상적이다. 면벽
수행 당시엔 벽을 향해 앉았을 터이지만 지금은 동굴 입구를 향해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면벽수행처였던 이 달마굴은 2조 혜가 스님이 팔을 잘라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다는 단비구
법(斷臂求法)의 현장이기도 하다. 구도 열정이 강했던 혜가 스님은 눈이 내려 무릎까지 쌓여
도 꼼짝하지 않고 동굴 앞에 앉아 법을 구했다고 한다. 그토록 제자로 받아줄 것을 간청하는
데도 달마 스님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왼쪽 팔을 잘라 마침내 달마대사의 마음을 얻
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선종의 맥이 시작되는 것이다. 동굴 오른쪽 벽면에 혜가 스님이 잘라
바쳤다는 팔뚝을 생생하게 부조해 놓았다.
달마동을 지나 계속 계단길을 오르면 정상에 달마대사의 석조상이 높이 서 있다.
달마석조상 옆 정자에서 땀을 식히며 석조상 옆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매부리코의 미남
인도사람의 모습이 완연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배뿔뚝이 대머리 달마상과는 전혀 달
랐다. 일설에 의하면 양 무제에게 공덕무라고 하여 살해 당한후 영혼이 못생긴 어느 중국사
람의 육신에 들어가 환생하였기 때문이란다.
중국 선종의 대를 이은 초조 달마로부터 6조 혜능의 모습이다.
초조 달마(初祖 達磨) 2조 혜가(二祖 慧可487~593) 3조 승찬(三祖 僧瓚 ?~606 )
4조 도신(四祖 道信 580~651) 5조 홍인(五祖 弘忍 594~674) 6조 혜능(六祖 慧能 638~713)
제6조 혜능 스님은 절에서 여덟 달 동안 방아를 찧다가 마침내 홍인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고 한다. ‘금강경’ 강론을 듣고 단번에 깨우친 뒤 법을 전수받아 선종의 육조(六祖)가 되었으며
한국 선 불교는 바로 이 혜능 대사 문하의 선법인 남종선(南宗禪)을 따르고 있다.
달마동 견문을 마치고 하산하니 6시40분. 이제 낙양으로 가야한다. 낙양까지는 한시간30분
거리이다. 한국인에겐 불과 1년 반밖에 안된 소림사 달마궁 코스는 KAL기가 취항하고 고속
도로가 닦여지고 나서부터라고 한다. 관광객을 위한 식당도 향을 줄이고 한국인의 입맛을 고
려하였다고- 낙양으로 가는 도중에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진다. 낙양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
그리고 주변의 관광지인 관림,용문석굴,향산사,백거이 무덤인 백원 등--
낙양(洛陽)
낙양은 BC 770년에 주왕조가 현재의 산시성[陝西省]의 호경(鎬京)으로부터 낙읍(낙양)으로
천도한 뒤 동주(東周)의 국도로 번영하였고, 후에 후한(後漢), 삼국(三國)의 위(魏)·서진(西
晉)도 이곳에 도읍하였는데, 후한 때부터 도성의 규모가 남북 9화리(華里:1화리=0.5km),
동서 6화리였기 때문에 구륙성(九六城)이라고 하였다.
수,당 때는 장안 즉 서안(西安)이 정치적인 국도(國都)인 반면 낙양은 부도(副都)겸 경제적
인 국도로 물류와 교통의 요충지로서 역할을 해 왔다.
중국의 7대 고도(古都)로 꼽히며, 성도(省都)인 정주[鄭州]와의 거리는 140km이다.
인구 600만의 대도시로 면적은 7500평방미터. 신흥 아파트군이 대단한 모습으로 서 있다.
50평규모의 아파트는 우리돈으로 1억5천만원이내라 한국에 비해 엄청나게 싸다는 설명이다.
낙양에서 불과 4KM에 있는 관림(關林)을 통과했다.
일반적으로 무덤을 묘라 하나 제후의 무덤을 총,황제의 능은 능이라 하는데 성인의 묘를 림
(林)으로 칭한다. 공자의 묘를 공림(孔林)으로 부른다. 중국사람들이 신성시하는 관우의 묘
도 관림(關林)으로 부른다.
관우는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유비,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평생 그 의를 저버리지 않
았던 무장이다. 자(字)는 운장(雲長)이며, 원래의 자(字)는 장생(長生)이다. 시호(諡號)는 장
목후(壯穆侯)이며, 수염이 아름다워 미염공(美髯公)이라고도 불렸다. 200년에 유비가 조조
(曹操)에게 패하였을 때, 관우는 사로잡혀 조조의 귀순 종용과 함께 예우를 극진히 받았다.
이에 관우는 조조의 대적(大敵) 원소(袁紹)의 부하 안량(顔良)을 베어 조조의 후대에 보답한
다음, 기어이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208년 적벽전(赤壁戰) 때에는 수군(水軍)을 인솔하여 큰
공을 세우고, 유비의 익주(益州:四川省) 공략 때는 형주(荊州:湖北省)에 머물러, 촉나라의 동
방방위를 맡는 등 그 무력과 위풍(威風)은 조조와 손권(孫權)마저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형
주에서 촉나라 세력의 확립을 위하여 진력하다가 조조와 손권의 협격(挾擊)을 받아, 마침내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관우가 피살된 후 목만 베어져 조조에게 바쳐졌다고 한다.
조조는 관우의 피살이후 총력전이 날것을 두려워해서 관우의 몸을 나무로 만들어 제사를 성
대히 해주고 이곳에 묻었다고 하며 이후 역사의 각 왕조에서는 관우를 신봉하고 관우를 왕으
로...황제로...성인으로...칭하여 민심을 잡았다하니...관우는 죽었어도 그 인자한 덕이 세상
을 움직이나 보다. 그래서인지 민가에서는 집집마다 관운장을 모신다. 귀신과 마귀로 부터
보호하고 재물신으로 숭상을 받는다. 코스에 관림을 보는 스케쥴이 없어 아쉬웠다.
낙양시내의 현지식 식당에 도착하니 벌써 8시20분. 늦은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이곳의 명주
(名酒) 라고 하는 두강주(杜康酒)를 석잔을 마시니 취기가 올랐다. 숙소인 취하(聚和,JUHE)
호텔에 도착하여 10시경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새벽 5시반 모닝콜이라니 바쁜일정이 예상
된다.
이틀째 일정은 아침 7시30분 출발로 시작되었다. 도중에 쇼핑을 하는 옥(玉)전시장과 도자
기 전시장을 들렀다. 가이드가 인솔하는 필수코스이다.
용문석굴(龍門石窟)
용문석굴은 돈황 막고굴,대동(大同)운강석굴과 더불어 중국의 3대석굴로 유명한 세계적인
불교문화유산이다.북위 효문제가 494년 대동에서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용문시대가 열린다.
이미 대동시대에 탁월한 석굴조각기법을 자랑했던 북조문화의 정수가 보인다. 이때부터 당
대까지 7왕조 400여년에 걸친 대역사의 결과가 오늘의 용문석굴이다. 1KM에 걸쳐 2345개의
석굴에 110,000개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건너편 향산의 동산동굴은 당 현종이 서산벼랑
이 더이상 채굴할 곳이 없어 강 건너편 동산으로 옮겨와 석굴을 만든 것으로 현재 채굴중에
있으니 또다시 놀라게 할 것이다.
만불동에는 15,000개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고 가운데는 아미타불이 자리잡고 있다. 관세음
보살과 대재지보살이 협시불로 좌우에 위치하고 있다. 마애삼존불,연화동,봉선사,고양동,극
남동 등 많은 석굴이 통로를 따라 구경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백미를 꼽으라면 단연 봉선
사 마애불이다. 본존 대좌불상은 측천무후(則天武侯)의 기부금으로 완성되었다. 실제로 대
불의 얼굴은 측천무후를 모델로 하였다고 한다. 또 연화동의 내부는 많이 훼손되었으나 천
정 연꽃만은 그대로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마애삼존불은 미완성 삼세
불로 가운데의 부처가 미륵불로 시선을 끌었다.
아쉬운 것은 황하의 범람으로 많은 불상이 유실되거나 훼손되었고 불상의 목이 도굴꾼에 의
해 짤려 나갔다는 점, 문화혁명시 홍위병들의 무차별 훼손, 그리고 미국이나 불란서에 도둑
을 맞았다는 점 등은 큰 손실이었다.
희화적인 텃취와 미려한 조각술, 화려한 색상의 사용은 용문석굴만이 갖는 가치있는 보물이
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측천무후의 문화숭상정신을 들여다 보는듯 하여 새로운 인식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용문석굴을 견학하고 황하의 지류인 이수를 만수교 다리로 건너 맞은편 향산사와 백거이
무덤이 있는 백원으로 향했다. 만수교(漫水橋)를 건너니 바로 동산(東山)인 향산이다.
중간쯤 걷다보니 강 건너 봉선사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곳에 예불대(禮佛臺)라는 곳이 있다.
용문서산의 석굴들을 전망하기 위해서는 최적의 장소다.그곳에서 바라보는 용문석굴은 대형
화면처럼 한 눈에 펼쳐져 보이고, 바위산의 벼랑을 깎아 불상을 조성해 놓은 암벽이 마치 벌
집만 같다.그러나, 그 중에 노사나불은 단연 군계일학이다.
측천무후가 아침햇살에 비추인 노사나불을 보고 스스로 흥에 겨워 했다더니 과연 명불허전
이다. 향산사는 급경사의 계단을 딛고 올라야 한다.절에 올라보니 사찰은 산중턱에 계단식
으로 조성되어 있다.
향산사
향산 기슭에 있는 향산사는 북위 희평 원년(516)에 창건된 고찰로 향산사에서 이하(伊河)를
굽어보는 풍광이 너무나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측천무후가 낙양에서 황제로 등극했을 때 향산사에서 군신들에게 시를 짓게 하고 가장 먼저
지은 사람에게 금포를 내렸다는 곳이다.
백거이(白居易)와 백원(白園)
그러나 무엇보다 이 곳 향산사와 인연이 깊은 사람은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백거이(白居
易)다.백거이는 58세가 되던 829년에 낙양(洛陽)에 영주(永住)하기로 결심한 후,태자보도
관(太子補導官)이라는 명목(名目)만의 직책(職責)에 자족(自足)하면서 시(詩)와 술과 거문고
를 삼우(三友)로 삼아 지내고 있을 때였다.
그는 당시 돌보는 이 없어 퇴락한 향산사(香山寺)를 자신의 사재와 주위의 도움을 얻어 증수
를 한뒤,친구인 여만선사(如滿禪師)가 향산사 주지가 되도록 도왔다. 그 후 백거이는 여만선
사 등과 함께 승속(僧俗)의 9명이 향산구로시사(香山九老詩社)를 결사하고 그들과 함께 이
곳에서 시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호를 향산거사(香山居士)로 지었을 만큼 향산사를 좋아했는데,죽을 때까지 이
곳에서 18년간 문필생활을 하였다. 842년 71세의 나이에 형부상서(刑部尙書)의 대우(待遇)
로 퇴직(退職)했으며, 74세로 타계 하였다.
향산사를 뒤로 하며 찾아온 곳은 백원(白園)이다. 천년을 넘게 사랑을 받고있는 천재시인
은 그가 말년에 너무나 좋아했던 향산의 이 숲속에 잠들어있다.
'白園(백원)'이라는 현판이 걸린 입구를 통해 들어서니 대나무 숲과 초목이 무성한 산속 정
원이 나온다. 좁은 산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니 푸른 잔디가 심어진 평평한 정상이다. 이곳
이 백거이의 묘가 있는 비파봉 (琵琶峰)이다.묘는 직경이 10m 안팎이고, 높이는 2.5m쯤 되
며 화강암으로 호석을 두른 무덤이다. 그러나 무덤위는 공자의 묘처럼 잡초가 우거지고 나
무들이 심어져 있다. 무덤 앞에는 일주석문과 거대한 비석이 있는데, 석비에는 '당소부백공
지묘(唐少傅白公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백거이가 은퇴하기 직전까지 태자의 스승인 태자소부(太子少傅)라는 벼슬을 한 까닭이다.
이 밖에 묘 주변에는 싱가폴 백씨와 한국 백씨 대표단의 참배 기념비도 세워져 있었다.
한국 백씨의 시조는 백우경(白宇經)이라는 분으로 원래 당(唐)나라 때 소주(蘇州) 사람으로
인품(人品)이 고결(高潔)하고 학문이 뛰어나 당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관작(官爵)이 첨의사
(僉議事)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 그러나 간신배들의 모함을 당하자 신라 선덕왕
(宣德王)원년(元年)인, 서기 780년, 스스로 당나라를 떠나 신라(新羅)로 건너와 좌복야사공
대사도라는 벼슬까지 올랐다고 한다. 그런데 이분이 바로 백거이와는 사촌간이라고 한다.
백씨들이 자랑할만 하다.
카트를 타고 용문석굴 입구로 와서 용문객잔(龍門客棧)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당삼채(백,
녹,황색의 도자기)상점이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가를 구경하며 산책을 하였다. 이제 버스를
타고 정주로 돌아가야 한다. 용문석굴에서 정주의 황하풍경구까지는 2시간이 소요된다.
차창으로 보이는 진녹색의 밀밭은 끝없이 이어지고 맑은 하늘의 구름과 어우러져 한폭의 수
채화를 그려놓은 듯하다. 3시가 넘어 황하에 도착하였다.
황하구경
버스에 내리니 당장 시선을 끄는 큰 석상이 있었다. 중국사람들이 그들의 시조로 여기는 황
제(黃帝)와 염제(炎帝)의 석상이다. 높이가 106m로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전봇대에 걸린 천
으로 만든 깃발에는 炎黃子孫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삼황오제(삼황인 복희씨,신농씨,여와씨 그리고 오제 황제헌원(黃帝軒轅)
·전욱고양(顓頊高陽) ·제곡고신(帝嚳高辛) ·제요방훈(帝堯放勳:陶唐氏) ·제순중화(帝舜重華:
有虞氏)에 나오는 신농씨가 염제이며 황제헌원이 황제이다.
수륙양용 유람선
황하는 중국의 어머니라고 할 만큼 중요한 수자원의 원천으로 역사상 치수를 잘 하는 왕이
훌륭한 제왕이었다. 홍수와 범람으로 엄청난 재앙을 가져오기도 한다. 비가 많이 와서 넘치
기도 하고 비가 오지않고 가물어 농사를 망치기도 한다. 정주의 황하에는 유람선을 띄어 관
광용으로 이용되는데 유람선이 물위에만 뜨는 배가 아니라 뭍에도 달리는 수륙양용이라 특
이했다. 황하의 특성상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육지에서 시속 100km, 물에서 60km
를 달릴 수 있다고 한다. 누런 황토물을 보면서 황하를 실감하였다. 유람선을 타고 달리면서
보니 강가에는 범람을 막기 위한 제방이 쌓여있고 황하를 다스리는 영웅 대우상도 볼 수 있
었다. 하남성 중류와 하류의 분계선인 협곡도 보이고 인공눈을 뿌려 스키장을 만들어 놓은
곳도 있었다.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이 4년간 싸웠다는 유적지가 멀리 보인다. 산천은
의구하고 인걸은 간데 없다는 사실이 --
황하는 중국의 9개성을 지르며 총 5,460km의 긴 강이다. 회귀점에서 잠시 내린다. 유람선에
서 내리니 말타기를 관광상품으로 내놓고 현지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남성 박물원
유람선 관광을 마치고 하남성 박물원으로 갔다. 마침 하남성 박물원이 수리공사중이라 전시
실 2개만 열어놓고 있었다. 기원전 700여년전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거쳐 당시대까지 토기,
청동기 철기문화와 도자기 그리고 갑골문자 등 훌륭한 역사자료가 많았다. 박물관이나 전시
장에 가면 늘 시간이 부족한 점이 아쉽다.
마지막으로 맛사지를 하러 갔다. 선택옵션이나 전원이 참가했는데 근 두시간 가까이 성의있
는 전신맛사지를 받고나니 한결 심신이 가뿐해진 느낌이다.
2.7기념탑
숙소는 정주 기차역 근처에 있는 홍산호(紅珊瑚)호텔이다. 차를 타고 지나가며 본 2.7기념탑
을 보러 호텔을 나왔다.꼬치구이 포장마차가 이색적이다. 배가 불러 산보를 하면서 구경만
하였다. 2.7탑 앞에는 축포도 터뜨리며 제법 많은 시민들이 있었다.
2.7기념탑은 2·7 노동자 파업을 기념하기위해 지은 탑이고, 1923년 2월 1일 경한철로 직원
들이 철도노동조합을 설립하자 이들의 집결을 우려한 북양군부가 조합을 무력 진압하였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2월 7일 정주에서 전국노동자대표대회가 열리고 대규모 파업이 강행되었
으며, 이를 기념하여 2·7기념탑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5각형 쌍탑 건축물로 1971년 9월29일
세워졌는데 높이가 63m로 13층 높이의 정주시내 가장 번화가의 랜드마크 건물이었다.꼭대
기 5각별은 노동자를 상징한다고 한다.
운대산(雲臺山) 홍석협과 수유봉(茱萸峰) 등반
이번 여행의 가장 하이라이트인 운대산 홍석협(紅石峽)과 운대산 정상에 오르는 날이다.
이미 TV로 홍석협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여 내용은 대강 알고 있지만 실제 현장감을 갖
고 느끼는 감상은 전혀 다르다.
아침 7시15분에 출발하여 2시간을 달려 초작의 운대산 입구에 도착하였다.
운대산 풍경지는 하남성 서북부 초작시 수무현 경내에 위치하고 총면적 190평방키로의 광
대한 관광 면적이나 지금까지 홍석협을 비롯하여 천폭협,담폭협,자방호,수유봉,만산사 등
11개의 협곡만이 개방되어 있다. 운대산은 기이한 산세,절묘한 옥색의 물과 폭포 울창한 숲
그리고 지금과 같은 봄에는 화려한 가지가지 꽃들이 피어 환상적인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봄,여름,가을,겨울 모두 특색있는 산이다. 봄이면 꽃이고,여름에는 울창한 삼림과 폭포,가을
에는 천산만홍의 단풍 그리고 겨울은 하얀 백설이 온산을 덮어 그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키
어렵다고 한다.
운대산은 정부가 관여하지 않고 운대산 자체에서 투자를 하였다고 하는데 규모가 대단하다.
셔틀버스(전동차)를 300대나 운행하고 종업원은 모두 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1년반 전만해도 차도가 없어 트레킹은 모두 걸어서 다녔다고-
셔틀버스를 타고 홍석협에 도착하여 우리 일행은 하차하였다. 대부분 패키지여행객들은 정
상 버스종점에서 하차하여 내려오면서 홍석협을 구경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홍석협을 먼저
구경하기로 했다. 중국에서 산이라면 장가계,황산을 제1로 치고 물은 구채구를 으뜸으로 꼽
는다고 하는데 마침 모두 필자가 다 다녀본 코스라 비교가 되었다. 운대협 홍석협코스는 기
암절벽의 산세와 옥색의 파란 담의 물 그리고 곳곳에 전개되는 폭포가 협동하는 종합풍경이
다. 좁은 길을 따라 가면서 위로 기암절벽에 감탄하다가 밑을 내려다 보면 너무나 고운 물감
을 들인것 같은 아름다운 색갈의 물색갈에 탄성을 지르게 된다. 바위에 붙은 청이끼,하얗게
퍼지며 떨어지는 폭포수-- 폭포는 낙차가 310m로 기나긴 흰 비단이 공중에 걸린듯하여 심
히 장관을 이룬다. 이 모든 경치를 카메라에 담느라 걸음이 느릴 수 밖에 없다.
홍석협외에도 천폭협과 담폭협을 구경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너무 가물어 이 두곳은 물이 없
어 구경을 포기하고 대신 전원이 수유봉 정상까지 산행을 하기로 했다.
홍석협을 감상하고 도로에 올라오니 셔틀버스가 정상아래 버스정류장까지 실어다 준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계속 차가 달린다. 굴을 파서 거리를 많이 단축하였다. 모두 14개의 굴을
지난다. 굴마다 번호가 붙어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보는 경치도 괜찮다.
정상바로 아래의 주차장에 내린 일행은 1,300개의 돌계단을 거쳐 운대산 정상인 수유봉에
오르게 된다. 입구에는 당나라 초기의 시인인 왕유(王維)의 동상이 서 있었다.
"홀로 타향에 있노니 명절이 되면 고향을 더욱 그리네"라는 천고의 절구를 이곳에서 남겼다.
오르는 동안 눈이 호사하였다. 봄철이라 개나리,벚꽃,복사꽃,살구꽃 등이 만개하여 구경거리
가 너무 좋았다. 무릎에 탈이 난 필자는 아예 스틱을 가져갔기에 편리했다.
중간 지점에 쉬어가는 정자가 있고 오르는 길과 내려오는 길을 구분해 놓았다. 여기서 정상
까지는 900m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좀더 오르니 약왕동(藥王洞)이 나왔다. 당나라 때 약
왕(藥王) 손사막(孫思邈)이 단약을 만들었다. 그를 기리는 석상이 모셔져 있다.
정상의 현재궁(玄帝宮)이 올려다 보인다. 정상 현제궁을 배경으로 룸메이트끼리 기념사진을
남긴다.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처럼 우뚝 솟아있다. 걷기가 불편한 좁은 급경사계단이 일직선
으로 이어져 있다. 위험하여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드디어 정상 현제궁에 도착하였다.
본당인 진무전(眞武殿) 앞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남겼다. 운대산 정상(해발1,308m)에 오른
기념사진인 셈이다.
하산길은 반대쪽으로 나무계단길이었다. 뒤에 쳐진 필자는 자항전(慈航殿)에 들러 예를 드
리고 계속 계단길을 내려갔다. 힘은 덜 들어도 급계단길이라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산을
잘 오르지 않던 회원들은 대단한 등산을 한 듯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무슨 일이든 어려운
일일수록 끝낸후의 성취감은 더 좋은 법이다.
하산을 마치고 내려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버스 차창으로 보이는 기암들을 다시 감상하면
서 행복감에 젖어든다. 형상이 동물모양이 많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코끼리봉
도, 마치 곰처럼 생긴 곰봉도 보인다. 하산 도중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벌써 시간은 1시반이
되고 있었다.산행후에 먹는 점심식사는 꿀맛이다. 식사후 운대산 샤틀버스 정류장에 도착하
니 2시20분이 되고 있었다. 운대산에서 정주까지는 2시간이 걸린다. 등산을 하고 늦은 점심
과 반주로 마신 술기운 때문인지 기분좋게 차내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잠을 깨니 황하대교
를 건너고 있었다.
오늘 일정은 모두 마치고 가이드가 인솔하는 상점 두곳을 들렀다. 북한산 약과 자수 그리
고 약재로 담근 술을 파는 가게, 그리고 침대용 고무제품인 라텍스 매장에 들렀다.
라텍스제품이 좋다는 것은 알지만 회원 대부분이 동남아 여행때 단체로 구매한 일이 있어
구매희망자가 적었다. 시간은 좀 일렀지만 저녁을 먹고 온천욕을 하기로 했다.
저녁식사는 모처럼 한국식당 "대장금"에서 가졌다. 돼지삼겹살과 상추쌈 된장 김치를 보니
한층 식욕이 났다. 식사후 온천욕을 하러 교외로 나갔다. 수영복을 입고 남녀가 같이 하는
온천이라 궁금하기도 하고 특히 수영복을 잊고 가져오지 않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 보니 수영복은 공식적으로 빌려주는 제도의 온천탕이었다. 시설도 좋고
규모도 컸으나 원탕의 수온이 너무 낮아 추울 정도였다. 스팀욕과 찜질방에서 몸을 덥히고
나왔지만 그래도 몸은 깨운했다. 내일은 마지막 날로 귀국하는 날이다.
호텔에 들어온 후 몇몇 회원들이 밤산보를 하자고 연락이 왔다. 강풍 동문이 낮에 산 북한술
과 중국 술을 들고 나왔다. 술안주 될만한 꼬지집을 찾기 위해 어제밤에 본 꼬치포장마차 거
리를 찾아갔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아니면 어제는 일요일인데 반해 오늘은 월요일이라서인
지 비교적 거리는 한산했다. 포장마차집 한곳에 자리를 잡고 술안주로 여러가지 꼬지 종류
별로 맛을 보아가며 시키니 금새 꼬지수가 90개나 되었다. 꼬지 숫자대로 계산을 한단다.
꼬지 하나에 1위안. 11시를 알리는 소리를 듣고도 한참을 지나 자리를 떴다. 어제본 2.7기념
탑은 오늘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기념사진을 더 찍고 걸어서 호텔을 찾아
걸었다. 길을 건널때는 위험천만이다. 차도 사람도 교통신호를 제대로 안지키니--
호텔방에 도탁하니 여성회원들이 따로 한방에서 얘기를 하는라 12시가 넘었는데도 그칠줄
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우리도 한방에서 기다릴 수 밖에--
내일은 마지막으로 떠나는 날이므로 짐을 챙겼다. 오늘 밤부터 바람이 불고 엄청 추워지기
시작했다. 여태껏 날씨가 너무 좋아 관광하기에 최상이었는데, 특히 안개와 비가 많다는 운
대산 등산시는 너무나 화창하여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나흘째 귀국하는 날은 시간이 많다. 그래서 아침 9시에 출발예정이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시내 산보를 할 생각이었으나 바람이 불고 날씨가 추워서 그만두고 방에서 빈둥댔다.
관광코스는 고대 상나라(은나라)의 토성이 발굴된 유적지를 들러보는 코스 뿐이다.
공원으로 이용되는데 주로 노인들이 이용한다고 한다. 이날은 합창소리가 요란하여 무슨 일
이 있나 했더니 종종 모여 노래를 배운다고 한다. 여성회원들이 관심을 가지는 농산물 가게
에 들렀다. 참깨 등 곡류와 건과류 약재등이 있었다. 공항에 일찌감치 도착했으나 공항내가
난방이 되지 않아 시간 보내기가 어려웠다. 예정보다 30분가량 늦게 개찰되었다.
3박4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내용은 알찬 코스였다. 마치 중국의 고대역사속을 거닐다 나온
것 같은 착각이 들고, 이름만 들어도 고전의 맛이 나는 낙양,정주 두 도시.
그리고 그 유명한 소림사,달마대사가 9년 면벽수행을 한 달마동, 세계문화유산인 용문석굴,
백거이의 동산에서 시를 음미하고, 상상을 뒤엎은 황하의 수륙양용유람선-- 어느 하나도 뺄
수 없는 추억거리였다. 또 하일라이트인 운대산 홍석협 협곡의 아름다움은 두고두고 잊지 못
할 경관이었다.
사삼클럽 회원가족은 그동안 수없이 많은 여행을 다녀 정으로 얽힌 사이이다.
여행의 첫째 조건은 누구와 함께라는 것이다. 정말 좋은 친구들과 하는 여행은 그 자체가 즐
러움이요 행복이다. 이번에 우리 일행 외에 이종식,이명환,이기조 세분이 합류하여 단독팀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고 필자와는 과거부터 잘 아는 친구들이라 무관하지만, 혹 분위기가 달
라질까 조금의 염려는 했지만 전혀 기우였고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여행의 기획부터 진행까지 혼자서 애를 많이 쓴 박정희 클럽장께 전회원을 대표하여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처음 참가한 강풍회원은 유창한 중국어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었고 특히 부
인 전경순여사는 언제나 처럼 보급담당으로서 김치 깍두기 매실장아찌, 깻잎 등 푸짐을 반
찬으로 식욕을 돋구어 주었다. 고맙게 여기며 마지막으로 노총각 가이드의 수고에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