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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16(수) :
VOA(Voice of America)를 통한 선거 결과를 듣다. 의외라고 할까. 무엇인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 과연 앞으로 우리들의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작용을 할까. 세옹지마 격이나 되었으면-. 더 먼 훗날을 그려볼 수 없을 만큼 절박하게 몰려버린 조국의 현실들은 아닌지. 그 숱한 희생과 뜨거웠던 물결의 대가가 과연 이것이었던가? 여전히 불신의 시대는 걷히지 않으려는가 보다. 얘들, 커가는 그들의 내일이 염려스럽다.
Dec/18(금) :
계속되는 황천. 다행히 順風이래서 제 코스를 유지한다만 Rolling이 심하다. 거대한 자연력과 싸우는 인간의 힘과 그 의지도 결코 자연만 못하지 않다. 발달된 저기압과 본선이 거의 같은 Speed로 같은 방향으로 가는 모양이다. 전형적인 겨울형 저기압의 양 前線 사이에서 연일 고생이다. 내일쯤은 다소 누그려 지려나.
Diaship와 Brunsbuttel Agent로부터의 Cable은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제 내 일만 정리해두면 된다. 지난 10개월에 비하면 남은 60여일은 늘 이렇데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Dec/21(월) :
용케 올라왔다. 자정에 Land End를 지났다. 아마도 지금 이 시간 정화는 그의 인생을 시험지 위에다 놓고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을 것이다. 너의 재능과 꿈은 항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만 네 능력만큼은 해내야 한다. 마음속으로나마 건투를 빈다.
Next Voy가 Grand Canary - Japan으로 Fix됐다고 알려왔다. 어찌 이렇게 빨리 알려주는가? Schedule은 미정이다만 3월이 넘어야 일본에 닿을 것 같다. 2월이 끝나기 전에 가야만 하는데-. 정화와 정주 그리고 아내의 졸업식이 있을 텐데-. 더구나 아내의 방송통신대학 졸업은 정말 귀한 땀의 결과이다. 금년엔 너무 많은 것을 놓친다. OS-1 김 군의 문제는 Hamburg 영사관에 대아에서 연락을 한 모양. Agent에 타전한다만 잘 될는지 모르겠다. 날씨가 차다. 바람이 없는 대신 짙은 안개가 마치 내 속마음처럼 자욱하다.
Dec/23(수) :
지난밤 겨우 3시간만 잤다. 이상하게도 잠을 설쳤다. 그 李炳柱씨의 소설 ‘비창’ 탓만는 아니다. 오늘 입항으로 4명의 귀국이 마치 내가 가는 것처럼 들떠있는 듯한 느낌이다. 오직 기다리는 것은 아내가 보낸 편지와 정성들인 봇다리들뿐인데도-. 지난 몇 개월간 목소리도 듣지 못했고 소식을 받은지도 참 오래됐다. 그간의 궁금증이 겹겹이 쌓인 것은 사실이다.
15:00시 Elbe Pilot 승선. 한치 앞이 안 보이는 짙은 안개 속에서 Lock를 진입했다. 물론 Lock측의 Radar에 의한 유도와 Pilot의 능숙한 교감의 덕분이다만 찬 기운 속에서도 땀이 난다. 바로 Bunker Barge가 붙는다. 우선은 춥고 너무 눅눅하다. 시골장터 같은 번잡함 속에서도 잘도 처리된다. 역시 자유민주주의의 선진국답다. 앞서 도착한 Greece선의 사정으로 본선의 F.O supply가 늦어진 것이 오히려 다행. 그 만큼 시간을 번 셈이다. 4명교대도 했다. OS-1 김 군이 Panama 수첩으로 귀국할 수 있게 선처해주는 Immigration이 고맙다. 역시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독일의 공무원이다. 어차피 떠날 사람인데 본인임을 확인하는 근거만 있으면 된다고-. 무엇보다 5DM(독일마르크)짜리 하나로 공중전화 Box에서 잠결의 아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지금까지, 아니 앞으로의 근심까지 들어가고 용기를 보태준다. 기다리고 애태운 보람이 있다고 본다. 걱정도, 할 일도 많겠지. 심신의 함께 무척 피로하고 의욕도 나지 않으리라. 안스럽고 미안하다. 한발 늦어 찾은 정화와 정주의 편지도 반갑기 그지없다. 무엇보다 정주의 성장이 놀랍다. 그저 기특할 뿐이다. 우선은-. 그 어른스러운 생각이 제 언니와는 또 다른 능력과 사고를 가졌으리라 여겨진다. 그저 성격과 능력대로 제각기 성실하게 열심히만 해다오. 역시 Havana에서 보낸 편지는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다. 주부식이 의외로 비싸다. Ship's Money $14,000이 순식간에 바닥나고 붉은 글자로 메꾸어야 하다니.
Dec/24(목) :
새벽에 서너시간 잔 후. 밤 8시 DOP. 그리고 다시 TSS(통항분리대) 항해를 마치는 자정까지 줄곳 Bridge에서 설쳤다. 처음 지나는 Kiel Canal과 그 주변의 그림 같은 양옥과 불빛. 오늘이 바로 X-mas Eve.아닌가. 800년 묵었단 교회에서도 불을 밝히고 Tree를 만들었다. 내겐 참으로 ‘Rotten X-mas’ 저녁이다. 우선 잠이 퍼붓는다. 며칠간의 괜찮던 허리도 무리라는 신호를 보낸다. 혼자서 보내야 하는 이 밤이라면 아무래도 의미 없기야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너무나 다정하고 조용한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속상하는 밤이다. 새로 구입한 주부식으로 훤해진 식탁이 유일한 즐거움이다. 새로온 김찬익 주방장은 Excelsior Reefer 때 Chief Cook이었던 사람이다. 남은 기간 그의 성의를 기대해 본다.
Dec/26(토) :
어제 자정넘어 00:20시 투묘했다. USSR의 거대한 대륙 서쪽 끝에 붙은 한 연방인 Latvia의 Riga 항이다. 외항의 바람이 세다. Ventspils Radio의 영국식 발음이 강한 아가씨의 중계와 안내로 수월하게 연락이 닿았다. 20:00경 다시 S/B. 21:40시 접안했다. Agent와 Sanitary inspector가 전부 여자다. 그들의 차림새가 넉넉해 보이고 까다롭지는 않다만 肉類의 Seal이 의외의 조치다. “뭘 먹소?” 며칠만 참으랜다. Non-stop으로 해서 새해 새달 3일까지는 마칠 예정이란다. 같은 사회주의 나라라도 역시 종주국이라 그런지 Bulgaria, Albania, Cuba들과는 비교할 바가 안 된다. 과연 이놈의 나라는 크기는 큰 모양이다. 동서 양끝 사이가 몇리나 될꼬? 그 한 끄트머리에 우리나라가 마치 고무신에 껌 붙듯 매달려 있질 않은가. 설렁하고 너무 춥다. 이직 얼어붙지는 않았다만 강을 따라 만든 부두를 벗어날 때까진 얼어붙지 않아야 할텐데-. 여긴 한겨울이면 강이고 바다고 얼어붙는 곳이라고했다.
Dec/28(월) :
역시 춥다. 북위 57도라는 위도치고는 심한 추위라고 볼 수 없다만 모처럼의 겨울이 을씨년스럽다. 노루꼬리보다 더 짧은 낮, 우중충한 습기, 잦은 눈발, 사람들이 음음해질 수밖에 없는 날씨다. 정화가 꿈에 뵌다. 혼자서 갔다더니 실수 없이 잘 했는지? 일관성이 없는 정부의 교육정책 때문에 또 다른 고역을 치른 셈이다. 사회의 첫 출발부터 좌절을 겪지 않길 빈다. Radio을 통한 음악이 차분하게 흐른다. 그 유명한 소설이며 발레단, 문화적 재량이 뛰어난 Russia 人이 어떻게 해서 공산사회를 형성하고 70년 동안이나 유지해오고 있는지 이상스럽기도 하다. 격조 놓은 Concert도 TV에서 가끔 볼 수 있다.
Dec/31(목) :
1987년도여 안녕이다. 이렇게 또 한해가 가는구나. 온갖 事緣과 悔恨, 願과 限도 사그리 뭉뚱거려 꾸역꾸역 집어 넣은체-. 세월이란 본래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을 사람들이 오늘, 내일, 한 해, 두 해로 구분지워 놓았다. 거기에 따라 사람의 삶도 생각도 감정도 달라지고 있다. 저 묵묵히 흐르는 강물과 뜨고 지고 새는 해와 달. 날들을 보자. 그걸 닮아가자.
내 자신은 유한하지만 인간의 삶은 영원할 것이다. 좀 더 크고 넓고 멀리 생각하고 낙관하자. 좀 더 세상의 섭리에 겸허한 마음 자세로 임하자. 이 좁은 세상, 온갖 비리과 협잡이 득실거리는 곳, 생각할수록 내 스스로의 시간과 모든 것이 그냥 죽어갈 뿐이 아닌가. 達觀하는 자세로 새로운 해를 맞자. 지난해를 굳이 여물게 새겨둘 필요는 없다. 내일을 위해서는-. 시내를 돌아보다. 텅빈 시내. 스산한 찬바람과 어둠이 있을 뿐이다. 서성일 틈도 없이 추위에 쫒겨 들어오다. 인구 5만 정도의 도시인데 비해 항구시설이 큰 편이다. 강을 따라 하구가 바다로 시원하게 트여 지정학적으로 좋은 조건을 갖춘 탓이리라. 볼품없는 상가와 상품. 이 너른 땅덩이에 비하면 우리네 사정은 실로 복잡하다 할 수 있다. 4500만이란 사람들이 그 좁은 공간에서 복작대야 하다니. 쓸모가 없더래도 더 넓은 곳을 점지해 주지 않은 檀君할아버지가 원망스럽다. 이 한해 우리 모두에게 무사함을 주신 데는 더 없는 감사를 드린다. Adios! 87년.
1988년
Jan/03(금) :
강한 바람과 비, 그리고 추위 속에 새고 진다. 북해와 Baltic Sea 전체가 강풍속에 휩싸여 있다. 980mb까지 하강하는 기압계. 정박 중인데도 초속 15-20m의 순간풍속을 기록한다. 허옇게 뒤집혀 있을 외항이 눈에 선하다. 무섭다. 성난 듯한 바람이-. 며칠 더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저들 기압배치가 어느 정도 물러선 다음이면 또 며칠간은 조용할테지. Seaman's Club에 가보다. 주3회 Open한다는 Disco텍, 그리고 모여드는 키들이 늘씬늘씬한 금발의 흰 살결의 아가씨들. 백러시아계들이다. 유럽에서도 귀족들인 셈인데도- . 어찌보면 나이들도 듬직하다. 겉보기 보다는 실제 생활이 볼품없다는 걸 실지 확인해 보고도 싶지만 참기로 한다.
공무원이건 술집 아가씨건 스타킹 양망 한 켤레면 안 되는 것이 없을 정도다. 미리 알아둔 정보로 몇 개 가져간 것이 주효, 요긴하게 썼다. 여자를 졸업(?)했다는 자신의 뜻을 꺾고 싶지가 않다. 한국 선원들은 자정까지는 귀선해야 한다는 제약을 그들도 잘 알고 있는 듯 피하는 눈치 같기도 하다. 추위와 함께 오는 다리의 가려움증가 심지어 밤잠을 설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생각보담 추위가 심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이맘때면 항내가 얼어붙는다는데 금년엔 ‘異常暖冬’이란 이곳 사람들의 말에 수긍이 간다. 아내를 꿈에서 본 날이다. 너무 짙게 그를 향한 마음탓인가? 무슨 일은 없는지?
Jan/04(월) :
18:40시 양하완료. 그것과 동시에 Stevedore들이 Whisky 한 병 달라는 요구가 이색적이다. 추운데서 열심히 일하는 그들 역시 가장 밑바닥의 서민들일는지 모르겠다. 22:00시 넘어온 수속관리들과 중년부인의 Agent, 특히 Customs의 외환조사가 까다롭다. 역시 사회주의의 모든 업무의 국유화는 마찬가진 모양. 외항의 강풍으로 Pilot 업무가 중단했다더니 곧 재개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자정은 넘겨야 될 것 같다. 더 넓은 광야는 아니드래도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본 눈 덮힌 땅을 구경하고 싶었는데 뜻 같지 못했다. 그놈의 이상난동 때문이다. 1월인데도 영상의 날씨라니 그들도 도대체가 믿어지지 않는단다.
Jan/05(화) :
자정을 막 지나 출항했다. 예상보다 훨씬 숙어진 Baltic Sea의 바람이다. 천만다행이다. 그나마 순항을 했다. 예정보다 두어시간 일찍 Drogden 도착, Pilot를 태우고 Sound를 지났다. 역시 Pilot 수배를 잘 했다. 예년 같으면 왼 바다가 얼어붙었을 텐데 역시 이상스런 날씨라는 Pilot의 얘기다. 더 없는 행운이다. 조용한 바람과 바다. 그것보다 더 좋은 조건이 항해자에겐 없다.
내일 종일만 좋아 준다면 North Sea도 건너 뛸 수 있을 것이다. 매번 경험에 따르면 Last Voy.(마지막 항차)는 어려움이 많았었는데 금년은 시초부터가 Smooth한 것이 오히려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유종의 미, 지난 한해 동안 각고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계속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아직도 Las에서 20여일간 그리고 26일간의 긴 항해가 남았다. 피곤스럽게하는 Suez Canal 통과를 포함해서-. 이곳의 바다가 얼음으로 뒤덮이고 매서운 북극의 찬바람이 휘몰아 친다면 -. 상상만 해도 아찔하고 큼찍하다. Thonichi(東日), NYK, 대아 그리고 새로운 Fuji. Niki 등에 관계서류를 Pilot편에 편지와 함께 띄웠다. 21:30시 DOP. ‘추위와 다리’ 꼭 무슨 소설이나 영화 제목 같다만 금년도 예외는 아닌 듯 상처투성이만 남긴다. 무슨 병인가?
Jan/07(목) :
간밤을 또 하얗게 샜다. 올라올 때 그렇게 잔잔하기만 하던 North Sea가 미친 듯이 날뛰었기 때문이다. 결국 Hamburg 앞 TSS 지역부근에서는 밤새 Heaving to 하기도 했다. 22:00시 마침내 Dover Strait를 무사히 빠지기는 했지만 피곤하고 괴로운 24시간이었다. 충혈된 눈에 골치마져 지끈거린다. 먼 불빛, 차가운 날씨 속에서도 날카로울 만큼 선명한 불빛들의 명멸 속에서 건너 뵈는 New Heaveng항. 꼭 11개월전 불야불야 출국하여 번갯불에 콩볶듯 본선을 Delivery한 기억이 생생하다. 이제 그날까지의 1년을 40여일 남겨두고 있다. 찬란한 저 육상의 불빛 속에 인간의 삶이 존재하고 아늑한 분위기와 다정한 대화들의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아직도 악명 높은 Biscay Bay이 남았다. 고생없이 건너 뛸 수 있다고는 생각질 않는다. 각오는 되어 있으니까. 尹興吉씨의 ‘바람구멍을 통해 본 세상’을 읽다. ‘결혼기념일 소동’ 가장 평범한 얘기이면서도 가장 멋있는 얘기였다. 금년으로 18년째인가? 나는-. 적어도 그날까진 귀국해야 할텐데-.
Jan/09(토) :
큰 고생없이 Biscay만을 빠졌다. 오랜만이다. 근 20여일이 넘게 보지 못했던 파란 하늘 조각사이로 햇살을 본다. 마치 처음 보는 기분이다. 마음까지 밝아진다. 北歐人들이 남쪽여행을 하는 것은 그들의 생활이 넉넉해서가 아니라 신선한 日光이 일용 양식만큼이나 필요한 때문이다. Ventspils 출항시 온 Agent 부인이 “긴 겨울 그 어두운 시간이 싫다”는 말이 실감난다. 내일쯤은 보다 활짝 개인 그 본래의 하늘과 태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4개월간의 어둡고 칙칙했던 마음의 먼지를 말끔히 털어 버리고 새로운 기분으로 바꾸자. 그 맑은 하늘처럼. 공산권 기항에 대한 전 선원의 감상문을 받았다. 가지각색이다. JRC로부터 Stowage에 대한 Cable를 보면 또 엉뚱한 곳으로 갈 공산도 있군. 아무튼 빨리만 끝내라. Las의 ‘REEFER’로부터는 12일부터 적하 시작하겠다는 회신을 받았었는데-. 늦어도 2월 중으로는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Summit호 시절의 일등항해사 천민홍씨의 부음을 듣다. 海技誌에서 봤기는 했어도 뭔가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갑판장이 확인한다. 참 허무한 생이다. 명복을 빈다.
Jan/11(월) :
예상보다 두 시간 일찍 Las 도착, 바로 접안했다. 역시 시원스럽고 좋은 곳이다. 10여년전 Hiroshima maru시절이 상기된다. 역시 今昔之感이 있다. 이렇듯 10년 세월 속에 강산이 변해가는 데 내 인생은 불변의 고리를 맴돌고만 있다. 전화하다. 정화의 합격, 아내의 졸업시험 통과 등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응어리가 후련히 뚫려 내려간다. 모두들 애 많이 썼다. 그 보람을 안은 셈이다. 축배라도 들고 싶은 밤이다. 정말 옆에 있었으면 안아주고 업어주었을 것이다. 진심으로 축하의 마음을 보낸다. 역시 자유주의 세상이 편하고 익숙하고 마음 푸근함을 절감하다. 근래 도둑과 노상강도가 성행한다고 했지만 며칠간 푹 쉴 수 있을 것이다. 16일경 Mauritania의 Nouadhibou를 들렀다가 다시 Las로 귀환할 예정이란다. 그래도 Cargo가 모자라 Santos 경유를 고려 중이라고도 한다. 너무 오래 걸리는 것은 아닌지. 늦어도 3월8일까지는 귀국하고 싶다만.
Jan/14(목) :
11일 자정 있은 2/O와 C/K간의 술, 싸움, 그리고 오늘 저녁에 가진 징계위원회 결의. 겹쳐서 ITF Inspector의 방선, 다시 올테니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놓으라고 으름장을 놓고 갔다. 침울하고 안타까운 이틀간이었다. 옥 이사와의 오랜 전화통화와 Telex와 Fax로 기본적인 형식은 갖추었지만 과연 납득할는지 의문이다. 기본적인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본선에 맡긴다는 것은 무리다. 2/O건. 과연 내가 숙여주어야 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몇번이고 망설였다. 아무리 봐도 인간되기는 텄다. 그냥 두었다가 데려가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는 것은 백 번 이해한다 해도 우선은 내 자존심이 상한다.
한국행 Cargo를 오늘부터 적하시작한다. 아무래도 Tokyo-Busan행이 유력해진다. 저녁에 해변을 산책했다. Self Service Restaurant에서 모처럼 만복으로 먹었다. 푸근한 기분이다. Las가 10여년 전과는 눈에 띄게 번잡해졌고 한국 간판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도 크게 변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만큼 한국사람들이 많이 산다는 뜻일 것이다.
Jan/15(금) :
Agent에 다시 가다. Owner에게는 Telex. 대아에는 Fax를 보내고 편지를 찾았으나 몇 장 안 된다. Santos행은 Cancel되고 Nouadhibou이후 Las와 Agadil 혹은 Tenelefe행이 될지도 모르겠단다. 늦어도 2월5일까지는 마칠 예정으로 있단다. 그럼 Tokyo 도착이 2월말. 부산 도착이 3월 10일경이 되겠군. 20여일만 빨라도 아내의 일본초청 그리고 동승한 체로 부산으로 갈 수 있는 Chance가 가능할 것 같은데-.
오전중에 ITF(국제노동기구) Inspector 다녀가다. “이틀간 너만 기다렸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생각보다 쉽게 서류를 보지도 않고 가져가는 것으로 끝을 낸다만 전번의 행위를 본다면 오히려 불안하다. 아무튼 이걸로 마쳐야 할 텐데-. 겨우 한 가지를 마치고 나니 Panama Inspector가 나타나는군. 연일 계속이다.
Accomodation Certificate를 만들기로 했다. 그것 때문에 Inspecte 항목은 내가 하기로 했다. 쉽게 넘어야 가겠지만 결국 Cert.를 만드는데 1,000여불의 Cash가 날아갈 판이다. 닥치는 대로 해나가자.
이번의 Las에서는 20일경에 마칠 예정이며 Noua. Tene.거쳐 2월5일까지는 다시 Las를 떠야 한댔다. 그래 Schedule에 맞춰라. 그게 원칙아닌가.
Jan/17(일) :
휴일이다. 매일 한 시간 정도 걷는 것이 무리가 된다. 역시 허리가 문제다. 그냥 푸근히 쉰다. 살이 절로 찌는 듯도 하다. 짧은 작업시간, 완전한 Agent Service, 자유롭고 풍성한 분위기의 시내, 산책과 먹거리가 입맛 당기는 데로 가능한 여건. 죽어나는 것은 돈이다만 그래도 좋다. 역시 자유민주주의와 개인의 능력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가 사람 살맛나게 하는 것이다. 늘어난 한국 Bazar(상점)들이다만 바가지 요금이 눈에 거슬린다. 휘황찬란한 show window의 상품들이 눈과 마음을 현란하게 한다만 참는다. 꼭 필요한 것 한 두 가지로 만족을 갖자. 정작 필요한 것은 서로가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귀하고 뛰어난 것이 아니드래도 마음이 들고 보람이 더욱 큰 것이 되기 위해서는 함께 가서 사는 그 즐거움을 공유해야 한다.
일과 휴식을 철저히 구별하는 이곳 사람들의 정신이 부럽다. 그렇게 잘 살지는 못해도 아득바득 자신의 일부를, 어떤 면에서는 전부를 희생시키며 죽기 아니면 살기로 설쳐야 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낙천적이다. 현재에 만족함으로 편안한 매일을 즐기며 사는 것도 같다. 분명 마음의 여유가 있어 보인다. 잔잔한 관현악 FM이 좋다. 종일을 들어도 싫지가 않다. 여건이 되는데도 붓을 잡지 못한다. 게으름 탓만은 아닌 듯 하다.
Jan/20(수) :
하루 늦은 셈이다. 어제 출항예정이었는데-. 오늘 14:10 Las를 떴다. 三菱의 Mr. Kuni와 CIRSA의 Mr. Barra를 동승시켰다. Noua.의 사정을 짐작할 만하다. 어제 밤 늦게 JRC로부터 대강의 일정에 대한 Telex는 받았다. Tokyo가 2월 26-29일. 부산이 3월 2-4일이랬다. 그러나 CIRSA의 Mr. Antonio에 의하면 좀 더 집하가 된다면 Maximum 2월 5일까지로 내약이 되었다고 했다. EC와 Moroco 사이에 어업협정이 지연됨으로 물량이 달리고 그래서 상승하는 漁價를 노려 반입이 더욱 줄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어쨌든 1월 21일 Last Load Port를 떠날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인생은 어느 때고 늦다는 일은 없다. 하루를 살아도 꽉 차게 살수만 있다면 너절하게 사는 100년보다 낫느리라” ‘낙엽’속에서 한 耕山씨의 말이다.
Jan/22(금) :
어제 오후 7시 Nouadhibou외항 도착. 오늘 아침 Pilot없이 내항 진입 투묘. 16:00에 접안했다. 황량한 사막뿐이다. 아직도 그놈의 가난이 구석구석 남아있다. 철광석과 어류가 유일한 자원이랜다. 무수히 떠 있는 어선군들! 선원들의 급료지불을 하지 않아 출어를 않는다나?
한국에서 온 수출어선 선원들도 보인다. Mr. Kuni와 Barra가 많은 Information을 준 덕분에 쉬이 끝날 것도 같다. 어제가 Mother의 제사였군. Las에서 경산 아버님께 전화한다는 것을 깜빡했다. 후회가 따른다. 참석을 못 한지도 여러 해가 됐다. 방학 중이니 얘들 데리고 갔을지도 모르겠군. 그래도 재미는 없을 거구만. 너무 멀다. 마음이나마 보내기에도 거리와 공간이-.
연일 그냥 서성이다만다. 죠깅, 서도, 음악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자꾸만 3월 초순까지 마음이 앞서 달려간 탓이리라. 한두번이 아니면서도, 그만한 나이를 넘었으면서도 아직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들고 마는 것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人之常情인가?
Jan/24(일) :
Barra군이 얘기한 일정과 실정 사이에 Gap이 생긴다. 자정까지 할 작정이라더니 19:00시경에 그만둔다. 아무래도 내일 밤이라야 끝날 것 같다. 그것도 잘해야 그렇겠다. 바람이 없어 다행이긴 해도 눈에 뵈지 않는 모래먼지가 구석구석에서 버석거린다. 눈알 굴리기가 껄꺼럽다. 80여척의 Trawl선들에 승선중인 한국 송출어부들의 현실이 비참하게 들린다. 그런데도 여전히 교대자가 오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받지 못한 임금, 부당한 대우, 그리고 의지할 곳도 없이 당하기만 하는 일방적인 처우 등등이다. 반면 몇 안 되는 숫자로 교묘히 그들을 독과점. 가격조작 등을 행하는 일본인들이 오히려 부러울 만큼 현실적이고 응집력이 있다. 이성우씨의 ‘겨울비’ 김홍신씨의 ‘大哭’을 읽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