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6 주일설교
그 사랑 얼마나 클까요?
마태복음 19:21~35
<인생의 고질병>
저에게는 평생 고치기 어려운 문제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면서, 또 목회하면서 사람들을 대해보니까 이것이 저의 문제만이 아님을 발견했습니다. 조그만 아이부터 80세 넘은 노인까지 누구나 저와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 예수님께 직접 배우고 훈련받은 제자들에게도 같은 문제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문제는 바로 잘난 척하는 것입니다. 남보다 내가 더 잘 났다고 내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잠언에서 분명히 말했는데도 교만을 버린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자기의 모든 자랑거리를 배설물이라고 말한 바울도 그 똥 같은 것을 자랑하고픈 마음을 죽이려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잘난 척하는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아십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남보다 잘났다고, 남보다 착하다고 내세우는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습니다.
사람이 잘난 척하는 이유에는 재산이나 재능, 판단력이나 일 처리 능력, 외모나 지위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자비로운가 하는 성품 자랑도 있습니다.
사람이 자비로운 것은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입니다. 천국 백성은 하나님을 본받아 자비로워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자비로워도 그것을 자랑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요, 물거품이 되더라도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인간은 한심하게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자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랑하는 것은 사는 길이 아니라 죽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이 고질병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성경 속에 해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해결책이 있습니다. 우리 함께 본문 속으로 가 봅시다.
<본문 속으로>
앞에서 예수님은 죄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교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18절에서는 교회의 결정은 바로 하나님의 결정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자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회개하면 용서해주어야 하는데 몇 번까지 용서해주면 좋을까요? 일곱 번까지 용서할까요?”(21절)
사람이 같은 죄를 짓고 계속해서 용서해 달라고 하면 용서해주기 어렵겠죠. 그런데 베드로는 7번까지 용서해주면 굉장히 자비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물었습니다. 한 마디로 잘난 척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22절에서) 7번이 아니라 7번*70번까지라도 하라고 하셨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쓰는 말 가운데 국어사전에는 없는 ‘멘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 mental과 한자어 붕괴(崩壞)의 첫 글자를 따서 조합한 이상한 단어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지요.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베드로가 아마 멘붕이 왔을 것입니다.
칭찬을 받으리라 예상했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되어 멍해졌을 것입니다. 그 분위기를 아신 예수님은 비유 하나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비유의 내용은 여러분이 익히 아시는 내용입니다.
“한 종이 임금에게 1만 달란트를 빚졌다. 신하가 갚은 테니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임금이 종을 불쌍히 여겨 1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다. 그 종이 나가서 100데나리온을 빌려준 사람의 목을 잡고 당장 갚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당장 갚지 않는다고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것을 본 동료가 임금에게 이 사실을 고발하자 임금이 노하여 탕감해준 것을 취소하고 옥에 넣었다.”
이 이야기 끝에 예수님은 무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35절)
이제 우리는 큰일 났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리 노랙해도 100% 용서는 불가능하죠. 그러면 우리도 하나님께 100% 용서받지 못합니다. 우리 죄를 한 가지라도 용서받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안 될 때는 안 되더라도 노력은 해 봐야 할까요?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려고 이를 악물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할까요? 하지만 그래야 한다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은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선 비유의 내용에 대해 좀 생각해봅니다. 종은 임금에게 1만 달란트를 빚졌습니다. 로마 시대 1달란트는 순금 34kg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시세로 금 34kg은 약 53억 원입니다. 1만 달란트는 53조 원입니다.
이 종이 친구에게 빌려준 돈은 100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임금인데 지금 돈으로 21,600원입니다. 100데나리온은 216만 원입니다. 이 정도 돈은 1~2년 열심히 일하면 갚을 수 있습니다.
그걸 당장 안 갚는다고 옥에 집어넣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냥 두면 일해서 조금씩이라도 갚을 텐데 옥에 가두면 한 푼도 못 갚죠. 그러니까 그 사람은 돈 때문에 친구를 투옥한 것이 아니라 화풀이하려고 감옥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1만 달란트 빚진 이 종은 어쩌다가 임금에게 이렇게 많은 빚을 졌을까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유대 전역의 연간 세금은 800달란트였습니다. 1만 달란트는 유대의 연간 세금의 12.5배입니다. 또 임금은 왜 종에게 이렇게 많은 돈을 빌려주었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많은 빚을 왜 그냥 탕감해 주었을까요? 뭔가 이상하죠?
세상에 어떤 임금이 종에게 53조 원을 빌려주겠습니까? 그리고 아내와 자식까지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던 임금이 왜 갑자기 53조 원이나 되는 빚을 탕감해줍니까?
이 이야기는 정말로 발생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23절에서 “천국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53조 원은 개인끼리 주고받을 금액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교훈을 주시려고 그런 상황을 설정하신 것입니다. 어쩌면 그 당시에 생각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이 1만 달란트가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그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겨우 216만 원 빚진 사람을 투옥하는 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왜 용서를 강요합니까?>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에 가면 목사님이 자꾸 거짓말을 하라고 시켜서 괴롭대요. 무슨 말이냐 했더니 예배시간에 옆 사람에게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라고 하는데 거짓으로 말하려니까 너무 괴롭대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괴롭다면 목사님이 자꾸만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는 것은 어떨까요? 죄지은 놈을 야단쳐야 하는데 목사님은 맨날 용서하지 않는 사람만 야단칩니다. 게다가 예수님과 스데반이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했다고 하면서 이런 노래를 부르자고 합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 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 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 된 사람인가?
이 노래는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자책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랑하지 못한 나를 자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노래를 통해 은혜받았나요? 마태복음 18:35을 읽고 이 노래를 부르면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절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받고 천국에 갈 길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한 사람을 7번씩 70번 용서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490번은커녕 7번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마디로 “잘난 척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하신 말씀, 23~34절에 나오는 비유도 같은 교훈입니다. 마지막 35절에서 말씀하신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같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1만 달란트는 임금과 종 사이에 발생할 채무 금액이 아닙니다. 반면에 100데나리온은 개인 사이에 발생할만한 채무 금액이고 노력하면 갚을 수도 있는 금액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용서 문제에 대한 교훈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1만 달란트와 100데나리온을 죄로 표현하면 1만 달란트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반면에 100데나리온은 조금 벌 받고 끝낼만한 죄입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벌금 216만 원을 내면 살려준다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216만 원을 구해올 것입니다. 그런데 벌금 53조 원을 내면 살려준다고 하면 우리는 돈이 없어서 죽을 사람들입니다.
<비유의 핵심>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최선을 다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신자들을 정죄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베드로의 질문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잘난 척하고 싶어서 7번까지 용서하면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7*70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은 우리에게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갈 사람의 조건을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7*70번은 ‘무한히’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한 것입니다. 천국의 모습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 백성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네가 무슨 선행을 했더라도 잘난 척할 것은 없다”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용서받은 죄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네가 그렇게 큰 죄를 용서받았으니 너도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무제한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형제를 용서하는 것에 따라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하신다면 천국에 들어간다면 우리 중에 천국 갈 사람이 없습니다. 천국은 값없이 은혜로 주십니다.
비유의 결론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어 주시는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라는 것입니다. 35절의 말씀의 의미는 너희가 그 은혜의 크기를 진짜로 안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네 마네, 몇 번을 용서했네 하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까 불렀던 그 노래는 이렇게 끝납니다.
어찌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
그 노래에서 나는 어찌 된 사람인가? 라고 자책하는 이유는 내가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의 크기를 안다면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내가 먼저 용서하고, 내가 먼저 웃어줄 텐데 나는 왜 그 크신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가 하는 자책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은 우리가 계산하거나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용서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