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wqkNX0Vvk_o?si=TY2mESTB4LR3ZvF-
강성용 교수는 고전 불교를 포함한 인도학을 전공한 교수다.
강 교수는 말한다. 석가세존 시대와 상좌부 불교 시대는 채식만이 될 수 없었다.
출가자는 비 생산자이므로 탁발을 했으니.. 음식을 주는 대로 받아야만 하는 입장인데 어떻게 채식을 고집할 수 있는가.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당시 인도의 불교 신자들이 주로 농사짓는 자들이 되고, 출가자들은 사원에서 생활하면서 점차적으로 채식이 주가 되었고,
그런 전통이 동 아시아에 전해져 동 아시아 불교는 채식주의자 종교처럼 된 것이다.
오리지널 불교를 이어온다는 남방불교는 채식을 고집하지 않는다.
강 교수는 중도는 중간처럼 설명 하는데..
문헌학을 전공한 이들의 문제는 현존하는 문헌의 그 당시 의미 파악에 집착이 있어 말 층간에 있는 의미를 소홀히하는 경향이 많다.
강 교수 중도에 대한 설명을 듣다 보면 역시 언어를 중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거지만.. 지나쳐 언어에 집착되어 있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최초 설법에 나오는 고락중도에서 중도는 고행 또는 낙행 어느 하나에 집착하지 않고 그 중간을 중도라고 하는데..
세존께서는 8정도를 중도라 하셨다.
8정도의 시작은 바르게 본다는 정견인데.. 고행견 또는 낙행견이 아닌 중도견[정견]은 무엇인가?
초전법륜 당시 다섯 사문은 중도를 바르게 이해할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고 가정하면..
중도를 말하지만.. 세존이 말하고자 하는 중도의 바른 뜻이 전해질 수 있었을까?.
예를 들어 정견이란 일체는 존재가 아닌 마음을 연해 생긴 법을 외부로 투사해 그렇게 존재하는 것으로 아는 것이라는 것을
첫 설법에서 제대로 전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다섯 사문은 최초 제자들이 되었고 아라한이라 존경하지만 당시 최고 자리에 오른 수행자는 아니었다.
다섯 사문은 우리들이 이해하는 대로..
중도가 고행이 아니라는 것은 무지막지한 수행이 아니라는 것으로, 낙행이 아니라는 것은 쾌락주의가 아니라는 정도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락이 아닌 중도라고 한 이유는 당시 고행자들이나 쾌락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목적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지 방법의 잘못이 아니었던 것이다.
늘 말하지만 하안거나 동안거가 고행이 아니라 순탄한, 부드러운 수행인가?
중도는 아트만이 없음을 깨치는 것으로.. 아트만이 없음을 깨칠 수 있다면 고행이 문제가 안된다.
쾌락은 문제다. 쾌락을 즐기는 주체인 아트만이 생생해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 선배님들이 닦고 수행한 방법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니 수행 중에는 채식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법을 상책으로 삼으며, 상황에 따라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채식이든 아니든 수행 목적이 몸과 생각의 주체가 '나 아님'을 깨치려는 것임을 잊지 않는다.
나 아님을 깨쳐 나 자신은 물론 사회가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