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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공신녹권(功臣錄券)에 대한 고찰(考察)
글쓴이 : 강훈기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는 1392년 7월 17일에 조선을 개국했다. 일개 변방 출신의 무장이 조선을 개국하고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인물들의 협력과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바로 새 왕조 조선을 세운 원동력이었다. 따라서 태조가 그들의 업적을 널리 치하하고 그들에게 일정한 특전을 내리는 것은 군신(君臣)간의 단결과 화합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지만 개국 초 정국의 안정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태조는 조선의 개국에 공을 세운 개국공신(開國功臣) 52인과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1,698인, 도합 1,750인을 포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지금부터 조선을 개국하는 과정에서 태조를 지지해주고 협력한 인물들에게 발급한 공신(功臣) 녹권의 종류와 등급별 선정내역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태조는 문무백관의 관제가 정해진 1392년 7월 28일에 먼저 개국주도세력을 봉작(封爵)했다. 개국공신의 포상에 앞서 개국주도세력에 대한 봉작은 그들을 우대하여 조속히 조직을 정비하고 정치적 안정을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이어 태조는 자신을 지지해주고 개국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공을 세운 인물들을 포상하기 위해 8월 2일에 공신도감(功臣都監)을 설치했다.
태조는 먼저 개국공신(開國功臣) 52인을 직접 선정하고 이를 3등급으로 나누었다. 1등은 좌명개국공신(佐命開國功臣) 16인, 2등은 협찬개국공신(協贊開國功臣) 14인, 그리고 3등은 익대개국공신(翊戴開國功臣) 22인이었다.
태조는 1392년 8월 7일에 신덕왕후를 현비(顯妃)로 책봉했다. 그리고 신덕왕후의 3대 조상도 봉증(封贈)했다.
또한 태조는 잠저(潛邸: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집) 시절부터 30여 년간 자신을 따르며 협력해주던 인물들을 포상하고자 했다. 그래서 1392년 10 월부터 1397년 12월까지 개국공신이 아닌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라는 이름으로 16 차례에 걸쳐 1,698여명을 직접 선정했다.
태조가 직접 공신을 선정한 것은 군신(君臣) 간에 신뢰관계를 구축하고 충성심을 높이기 위한 방편(方便)이었다. 태조가 선정한 공신들은 국왕이 되기까지 30여년간, 죽음을 무릅쓰고 그를 따르며, 협력하고 동조해준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반대세력에 가담했던 인물들도 일부 선정되었는데 이는 그들을 회유하기 위한 방책(方策)이었다.
▣ 개국공신녹권(開國功臣錄券)의 발급사유(發給事由) 및 사급(賜給) 내용
1392년 7월 17일 고려(高麗)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 폐위(廢位)에 가담한 인물들이 개국공신으로 책록되었다. 그들은 대비(大妃)로부터 교서(敎書)를 받아, 이성계의 사저(私邸)에 나가 국쇄(國璽)를 바친 인물들이다. 태조가 52명의 공신에게 녹권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원본이 전해지는 녹권은 의안백 이화(義安伯 李和)에게 하사한 개국공신녹권 뿐이다.
국보 232호로 지정된 이화의 개국공신녹권에 언급된 발급 사유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요승(妖僧) 신돈(辛旽)의 아들 신우(辛禑: 우왕)가 왕위를 훔쳐 황음(荒淫) 무도(無道)하게 살육(殺戮)을 자행했다.
둘째, 신우는 부질없이 명(明)을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이 반대하고 의거(義擧)하여 회군(回軍)했다. 이에 신우가 제 죄를 알고 아들 신창(辛昌: 창왕)에게 그 위를 넘겼다. 고려의 천명(天命)이 이미 끊어진 지가 16년이 되었는데도 왕요(王瑤: 공양왕)로 왕을 삼아 일시 국사(國事)를 맡게 하였으나, 법을 지키지 않아 이내 혼미해졌다.
셋째, 전제(田制)의 문란함으로 공정을 잃었고, 국고를 자서(子壻)들의 사용(私用)에 탕진했다. 군자(君子)를 탄압하고 죄를 씌우려 했으며 아첨하는 자를 가까이 하고 애써 임용했다.
넷째, 원칙이 없는 상벌로 국법이 훼손되고 용도(用度)는 절제가 없어 민재(民財)가 파탄되었다. 우현보(禹賢寶), 이색(李嗇) 등이 권력을 훔쳐 공신을 모함(誣陷)하고 충신까지 해쳤다. 몰래 명(明)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므로 사직과 민생이 거의 멸망할 뻔하였다.
다섯째, 오직 인척(姻戚)들의 말만 듣고 법을 곡용(曲用)하여 사면하고, 직언(直言)한 인사들은 모두 내쫓으니, 백성이 원망하여 환란의 기미가 날마다 끊이지 않았다.
여섯째, 배극렴(裵克廉) 등이 천명(天命)과 대의(大義)로 결단하고 과인(寡人)을 추대하여 대업(大業)을 이루었다. 그 공로는 매우 커 황하(黃河)가 띠와 같이 좁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과 같이 닳아져도 잊기 어렵다.
개국공신에 대한 포상은 등급별로 사급(賜給)하여 주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등 개국공신의 부모와 아내는 3등급을 올려 증직하고, 직계의 아들은 3등급을 올려 음직을 내리며, 직계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사위에게 2등급을 올려 주도록 했다. 또한 7명의 구사(丘史: 말잡이)와 10명의 진배파령(眞拜抱領: 심부름꾼)을 하사했다. 그리고 개국공신 중 1등 1급은 식읍(食邑) 1천 호(戶)와 식실봉(食室封) 3백호, 밭 2백 50결(結), 노비 30구(口)를 하사했다. 1등 2급은 밭 2백결과 노비 25구를 하사했다. 1등 3급은 밭 1백 70결과 노비 20구를 하사했다. 1등 4급은 밭 1백 50 결과 노비 15구를 하사했다.
2등 개국공신의 부모와 아내는 2등급을 올려 증직(贈職)하고, 직계의 아들은 2등급을 올려 음직(蔭職)을 내리며, 직계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사위에게 등급을 올려주었다. 또한 5명의 구사(丘史)와 8명의 진배파령(眞拜把領)을 하사했다. 그리고 2등 개국공신 모두에게 밭 1백결과 노비 10구를 하사했다.
3등 개국공신의 부모와 아내는 1등급을 올려 증직(贈職)하고 직계의 아들은 1등급을 올려 음직(蔭職)을 내리며, 직계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사위에게 음직을 내려주도록 했다. 또한 3명의 구사(丘史)와 6명의 진배파령(眞拜把領)을 하사했다. 그리고 3등 개국공신 모두에게 밭 70결과 노비 7구를 하사했다.
아울러 개국공신 모두에게 전각을 지어 초상을 그려 걸고 빗돌을 세워 공로를 기록하며, 적장자는 세습(世襲)을 시켜서 그 녹봉을 잃지 않도록 하고, 자손들을 정안(政案: 관원의 출신과 이력을 기록한 문서)에다 개국공신 아무개의 자손이라고 등재하며, 비록 죄를 범한 일이 있더라도 사면(赦免)이 영구한 세대(世代)까지 미치도록 했다.
▣ 개국원종공신녹권(開國原從功臣錄券)의 발급사유(發給事由) 및 사급(賜給) 내용
개국원종공신녹권은 김천리(金天理) 개국원종공신녹권 등 16여명의 녹권이 현전하고 있다. 그 중 진충귀(陳忠貴), 최유련(崔有漣), 정진(鄭津)의 녹권이 내용상 서로 같고, 김회련(金懷鍊), 김천리(金天理), 이원길(李原吉), 조병순(趙炳舜) 소장의 녹권이 같다. 한노개(韓奴介)와 장관(張寬)의 녹권은 공적 내용과 수급 날짜는 같은데 공신 명단은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개국원종공신녹권에 언급된 발급 사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태조가 30여년간 장수나 조정의 재상으로 활약하는 동안 죽음을 무릅쓰고 지켜주고 백성을 보호하여 대업을 쉽게 이루게 했다.
둘째, 흉도들이 무리 지어 난을 꾸미고 정변을 예측할 수 없을 때 장상(將相)의 계책에 따라 그 죄책을 성토하고 흉도들을 굴복시키는데 동참했다.
셋째, 신씨(辛氏: 우왕과 창왕)가 왕위를 훔쳐서 정치를 어지럽힐 때 안위를 태조에게 의지하고 그 덕예(德譽: 덕과 명예)를 칭송해주었다.
넷째, 태조가 즉위할 때 일관(日官)으로 하여금 천시(天時)를 점쳐 왕위에 오르도록 권유했다.
다섯째, 즉위식에서 역대의 제도를 참고하여 행사를 원만하게 끝낸 공로가 있다.
개국원종공신도 부모와 처에게 품계(父母妻封爵)를 주고, 자손에게는 벼슬(子孫蔭職)을 주었다. 후대의 자손들이 비록 죄를 범한다 하더라도 처벌하지 않고 사면(宥及後世)하는 특권을 누리며, 비를 세워 공을 기록(立碑記功)하는 영광도 부여했다. 포상은 공신에 따라 차등으로 분급(分給)하여 주었다.
지금까지 개국공신녹권과 개국원종공신녹권에 대한 관련 내용들을 검토해보았다. 그러면 지금부터 신천강씨 문중의 공신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 신천강씨(信川康氏) 문중(門中)의 공신(功臣)
신천강씨 문중에도 조선 개국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녹권을 받은 인물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문중에 현전하는 조선 개국 초기의 녹권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강순룡 봉작왕지(康舜龍封爵王旨)가 유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앞에서 살펴본 현전하는 여러 공신녹권의 공신명단에서 우리 문중의 인물을 찾을 수 있었다.
‘태조실록’과 현전하는 공신녹권에서 찾아낸 우리 문중의 인물은 다음과 같다.
<표 1> 신천강씨 조선 원종개국공신 등재자 명단
| 성 명 | 작 위 명 | 봉작년도 | 비 고 |
| 신덕왕후 (神德王后) | 현비(顯妃) 신덕왕후(神德王后) | 1392년 8월 1669년 10월 | 태조실록 현종 10년에 복권 |
| 강숙재(康淑才) 18세손 | 성근익위동덕좌리공신 특진보국숭록대부 판문하부사 판도평의사 경안백 (誠勤翊衛同德佐理功臣 特進輔國崇祿大夫 判門下府事 判都評讓使 慶安伯) (정1품: 신덕왕후 증조부) | 1393년 3월 (태조2년) 5월 10일 | 태조실록 (太祖實錄) |
| 강서(康庶) 19세손 | 특진보국숭록대부 영삼사사 판도평의사 상산백 (特進輔國崇祿大夫 領三司事 判都評議使 象山伯) (정1품: 신덕왕후 조부) 곡산강씨 파조 | 1393년 3월 (태조2년) | 태조실록 (太祖實錄) |
| 강윤성(康允成) 20세손 | 충성익재좌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상산부원군(忠成翼載佐理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領敦寧府事 象山府院君) (정1품: 신덕왕후 부친) | 1393년 3월 1669년 10월 | 태조실록 현종 10년에 복권 |
| 강순룡(康舜龍) 21세손 | 재령부원군(載寧府院君)-개국원종공신 신덕왕후 오빠: 연기파조 | 1392년 10월 (태조 원년) | 권중화(權仲和) 개국원종공신녹권 |
| 보국숭정대부 검교문하시중 재령백 (輔國崇政大夫 檢校門下侍中 載寧伯) | 1393년 7월 (태조 2년) | 조선불교통사 | |
| 특진보국숭록대부 재령백 (特進輔國崇祿大夫 載寧伯) (정1품) | 1395년 12월 (태조 4년) | 서울대 규장각 | |
| 강계권(康繼權) 21세손 |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使: 종2품) 신덕왕후 오빠, 수안파, 북청·남포·단양파, 숙천파 | 1394년 9월 (태조 3년) | 태조실록 |
| 상산군-개국원종공신 (象山君-開國原從功臣) | 1395년 윤9월 (태조 4년) | 이화상(李和尙) 개국원종공신녹권 | |
| 강중림(康仲林) 미상 | 판사(判事)-개국원종공신 | 1395년 윤9월 (태조 4년) | 이화상(李和尙) 개국원종공신녹권 |
| 강석(康錫) 21세손 | 대장군(大將軍: 종3품)-개국원종공신, 윤휘공의 2자, 신덕왕후 4촌, 영변·운산·개천파, 오산파 | 1395년 윤9월 (태조 4년) | 이화상(李和尙) 개국원종공신녹권 |
| 강우(康祐) 21세손 | 상장군(上將軍: 정3품)-개국원종공신 윤휘공의 3자, 신덕왕후 4촌, 평택파·희천파 | 1395년 윤9월 (태조 4년) | 이화상(李和尙) 개국원종공신녹권 |
| 강택(康澤) 22세손 | 대장군(大將軍: 종3품)-개국원종공신 유권공의 자, 신덕왕후 조카, 함흥파 | 1395년 윤9월 (태조 4년) | 이화상(李和尙) 개국원종공신녹권 |
| 강도(康圖) 21세손 | 선공감(繕工監: 종3품)-개국원종공신 윤휘 공의 4자, 신덕왕후 4촌 | 1395년 윤9월 (태조 4년) | 한노개(韓奴介) 개국원종공신녹권 |
| 강경선(康敬善) 미상 | 우사약(右司鑰: 정6품)-개국원종공신 | 1395년 윤9월 (태조 4년) | 한노개(韓奴介) 개국원종공신녹권 |
| 강언중(康彦中) 미상 | 전 중랑장(前中郞將: 정5품)-개국원종공신 | 1395년 윤9월 (태조 4년) | 한노개(韓奴介) 개국원종공신녹권 |
| 강윤주(康允柱) 미상 | 전 전서(前典書: 정3품)-개국원종공신 | 1395년 윤9월 (태조 4년) | 이원길(李原吉) 개국원종공신녹권 |
| 강후(康侯) 미상 | 전 상장군(前上將軍: 정3품)-개국원종공신 | 1395년 윤9월 (태조 4년) | 이원길(李原吉) 개국원종공신녹권 |
앞의 <표1>에서 보는 것처럼 태조는 1392년 8월에 신덕왕후(神德王后)를 현비(顯妃)로 책봉했다. 그 후에 왕후의 3대 조상도 봉증됐다. 개국원종공신에는 11인이 선정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들 중 신덕왕후의 오빠인 강순룡(康舜龍), 강계권(康繼權)과 신덕왕후의 4촌인 강석(康錫), 강우(康祐), 강도(康圖), 그리고 조카인 강택(康澤)을 신천강씨대동보(信川康氏大同譜, 2007년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신덕왕후의 조부인 상산백(象山伯) 강서(康庶)의 손자와 증손자이다. 여기서 확인된 특기할 만한 점은 강석(康錫), 강우(康祐), 강도(康圖), 3인 모두가 신덕왕후의 3촌인 강윤휘(康允暉)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더욱이 강윤휘의 맏아들은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開京: 개성)을 점령당했을 때, 이를 수복한 공으로 1등공신호를 받으신 분이다. 조선조 태종 때 제주도로 들어가 입도조가 되셨는데 그 후손은 오늘날 우리 문중 가운데 가장 많은 종원수를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개국원종공신 명단에 올라 있는 강중림(康仲林), 강경선(康敬善), 강언중(康彦中), 강윤주(康允柱), 강후(康侯)는 신천강씨대동보(2007년판)에서 확인하지 못했다. 분명 우리와 같은 문중일 것으로 판단되는데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현전하는 녹권의 공신 명단에는 공신의 관작(官爵)과 성명만 기록되어 있어 더 이상 밝힐 수 없는 형편이다. 혹시 북한에 살고 있는 우리 문중의 인물이 아닐까, 아니면 한자 표기를 잘못해서 그런가 하고 여러 생각을 해보지만 훗날 밝힐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고대해본다.
다음은 현전하는 개국원종공신녹권 중에서 우리 문중의 인물들이 등재되어 있는 녹권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 권중화개국원종공신녹권(權仲和開國原從功臣錄券)
1393년 7월 29일 권중화(權仲和) 등 11인이 공신으로 책록되었는데, 이들에게는 밭 30결과 노비 3구씩을 하사했다. 이 녹권에 올라있는 인물들은 모두 고려조에서 2품이상의 높은 벼슬을 지낸 재추(宰樞)들이다. 우리 문중에서도 재령부원군(載寧府院君) 강순룡(康舜龍)이 공신 명단에 올라있다. 1392년 10월에 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되고, 1393년 7월에 검교문화시중(檢校文化侍中)에 올랐다가, 1395년 12월에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재령백(載寧伯)에 봉작되었다. 태조가 내린 강순룡 봉작왕지를 1744년에 영조가 보고 직접 발문(跋文)을 써, 어서각을 짓도록 사액(賜額)을 내렸다. 어서각(御書閣)의 소재지는 세종특별자치시 아름동 산68(충남 연기군 남면 고정리 302)에 있다. 어서각에 태조(太祖), 영조(英祖), 정조(正祖), 고종(高宗)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어서(御書)를 봉안했다. 현재는 강순룡 봉작왕지만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권중화는 고려조에서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낸 권한공(權漢功)의 아들로 1398년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졌다. 태종 때 영의정에 오른 뒤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평생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재령부원군 강순룡이 권한공의 사위이므로 권중화는 처남이다. 이 녹권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고려 말에 태조와 적대관계에 있던 이색(李穡) 등과 협력한 이력이 있는 권중화(權仲和)와 이미 사망한 홍영통(洪永通)을 공신으로 선정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 건국에 반대했던 심덕부(沈德符)도 공신록에 올랐다. 태조실록에는 이들이 개국에 공이 있다고 했지만 이는 조선건국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고려의 고위관료들과 그 후손을 회유(懷柔)하기 위한 방책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이화상개국원종공신녹권(李和尙開國原從功臣)
1395년 윤9월에 이화상 등 105인을 개국원종공신으로 책록하고 공신 모두에게 밭 30결과 노비 3구씩 하사했다. 이 녹권과 동종의 것으로 진충귀(陳忠貴), 정진(鄭津), 최유련(崔有漣)의 원종공신녹권이 현전하고 있다. 이 녹권에는 태조와 인척(姻戚) 관계를 맺은 인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 문중에서도 상산군(象山君) 강계권(康繼權), 판사(判事) 강중림(康仲林), 상장군(上將軍) 강우(康祐), 대장군(大將軍) 강석(康錫), 대장군(大將軍) 강택(康澤)이 공신 명단에 올랐다. 상산군 강계권은 1394년 9월에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使)로 관직에 올랐고, 1395년 윤9월에 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1397년 11월에 태조의 명을 받아 동북면에 있는 경안백(慶安伯)의 묘를 이장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녹권의 주인공 첨절제사 이화상(李和尙)은 조선의 개국1등공신으로 청해이씨의 시조인 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의 장남이고, 재령부원군 강순룡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 한노개 개국원종공신녹권(韓奴介開國原從功臣)
1395년 윤9월에 전 중직대부(前中直大夫) 사재감(司宰監) 한노개(韓奴介) 등 226인을 개국원종공신으로 책록하고, 공신 모두에게 밭 15결씩 하사했다. 이 녹권과 동종의 것으로 장관(張寬)과 문계종(文係宗)의 개국원종공신녹권이 현전하고 있다. 우리 문중에서도 선공감(繕工監) 강도(康圖), 우사약(右司鑰) 강경선(康敬善), 전 중랑장(前中郞將) 강언중(康彦中)이 공신 명단에 올랐다. 이 녹권에는 목숨을 걸고 몸을 바쳐 온갖 고난을 다 겪으면서 태조에게 충성하던 제군사부(諸軍事府) 군관(軍官)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태조가 이들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발판을 굳건히 해준 사람들이라고 녹권에 언급한 것을 보더라도 이 집단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이원길 개국원종공신녹권(李原吉開國原從功臣)
1395년(太祖 4) 윤9월에 이원길(李原吉) 등 699명을 개국원종공신으로 책록하는 녹권이다. 이 녹권과 같은 내용을 수록한 용천기(龍天奇), 김회련(金懷鍊), 김천리(金天理) 개국원종공신녹권 등이 현전하고 있다. 우리 문중에서도 전 전서(前典書) 강윤주(康允柱), 전 상장군(前上將軍) 강후(康侯)가 공신 명단에 올랐다. 다른 녹권들과 달리 이 녹권의 공신들에게는 토지를 사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1395년 5월에 국가의 군량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원종공신에게 토지 지급을 중지해야 한다는 대간(大諫)의 상언(上言)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 녹권에는 정몽주 일당의 모반을 저지한 군부세력 중에 현직을 갖고 있지 않은 인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말단직의 인물들도 다수가 포함되었는데 그들의 공로를 기리고, 그 후손에게 혜택을 주기위한 배려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종합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태조는 역성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52인의 개국공신 외에 30여년의 세월을 자신과 함께 한 인물들도 개국원종공신으로 포상했다. 비록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태조가 이들도 개국공신으로 포상하고자 했던 것만 보아도 그들이 쌓은 공로의 비중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면 태조가 역성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이 무엇인지를 앞에서 살펴본 공신 녹권을 중심으로 검토해본다.
첫째, 태조의 배경(背景)에는 고려왕조를 지키려는 정몽주 일당을 청죄(請罪)한 제군사부 군관 230여명과 같은 막강한 가별초(家別抄: 사병조직)가 있었다. 1391년에 태조는 삼군도총제사가 되어 중앙 및 지방의 여러 원수(元帥)에게 분할되어 있던 종래의 오군(五軍)을 삼군(三軍)으로 편성하고 병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1392년 3월에 태조가 해주에서 낙마사고로 중상을 입었을 때 정몽주 일당이 태조의 측근 세력을 탄핵하여 멀리 귀양 보내는 사건을 일으켰다. 그로 인해 태조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때 제군사부 군관 230여명이 정몽주 일당의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항장서명을 전개했고, 그들의 죄를 처벌하여 줄 것을 청원하는 실력행사를 단행했다. 이 사건은 태조의 역성혁명에 간접적인 명분을 제공해주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 당시 태조의 군부 세력이 고려 조정을 통제하고 있었음을 확인해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태조실록’에는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했기 때문에 위기를 극복했던 것처럼 기록해 놓았다. 이 기사는 부왕을 내쫓고 왕위를 빼앗은 태종이 자신의 반역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태조실록’을 왜곡시킨 탓이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지 않았어도 태조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고려 왕조를 뒤집어 엎을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태조는 이 사건을 그가 발급한 녹권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흉포한 무리들이 편당(偏黨 ; 정몽주 일당을 말함)을 만들어 난역(亂逆)을 모의함에 변란이 예측할 수 없는 데에서 일어날 상황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한두 사람의 재상 및 장수의 계책에 따라 그들의 악행을 성토할 것을 청했던 결과 흉포한 무리들이 처벌을 받게 되었으니 수고한 일로 보나 세운 공적으로 보나 상을 주어야 마땅하다.” <출처: 태조의 공신녹권 발급사유 중에서>
둘째, 태조의 등극에 중요한 역할을 한 세력에는 태조와 인족(姻族)적 관계를 갖는 집단이 있었다. 태조의 친가, 외가, 처가를 비롯해 이들 집안과 줄줄이 혼인관계를 맺은 권문세가까지 감안한다면 그 위세는 막강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그 중에는 부분적으로 반대의 입장에 섰던 일가(一家)도 있었지만 그 세력은 미약했다.
‘조선 건국공신의 연구(朝鮮 建國功臣의 硏究)’의 저자 박천식(朴天植)은 그의 박사논문에서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태조의 인족군(姻族群)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조선 건국을 주도한 세력군을 태조공신의 유력자에서 구하여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성계 가족과 그 인족군(姻族群)을 검토한 결과 개국공신과 유력한 원종공신의 중핵(中核)을 저들이 점유하고 있는 실상을 확인하게 되었다. 특히 이성계가를 포함하여 그 인족가문(姻族家門)은 대체적으로 명문(名門)의 후예이거나 부원기의 신흥세족으로서, 고려왕조의 제1신분층을 형성하는 현관(顯官)으로서 수혜(受惠)를 향유하였던 것이다.” <출처: 조선 건국공신의 연구, 박천식>
다시 말해 박천식은 태조가 연계(連繫)해 놓은 인족군이 개국공신과 원종공신의 중심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나아가 그는 태조에게 협력한 인족 가문을 분석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성계가(李成桂家)와 인족적(姻族的) 유대를 맺으며 정치적 득세를 이루어간 족단(族團)으로는 ◎도조(度祖)의 처부(妻父) 용천(龍川) 조휘가(趙輝家)와 그 인족(姻族) ◎익조(翼祖)의 사위 안천(安川) 주단가(朱端家) ◎환조(桓祖)의 처부 양성(楊城) 최한기가(崔閑奇家)와 그 인족 ◎이성계의 처부 곡산(谷山) 강윤성가(康允成家)와 그 인척 ◎이성계 처부 안천(安川) 한경가(韓卿家)와 그 인족 ◎이성계의 동서(同壻) 신귀(辛貴)의 일문(一門) ◎이화(李和)의 처부 순흥(順興) 안종기가 (安宗基家)와 그 인족(姻族) ◎이화(李和)의 처부 교하(交河) 노은가(盧訔家)와 그 인족 ◎이원계의 처부 경주(慶州) 김광가(金鑛家)가 주목된다. 이들 제가(諸家)의 성장기반은 원(元)의 관직(官職)을 대유한 가족원(家族員)에 인연한 현관(顯官)이 다수 배출된 특성을 갖으며, 고려 말기의 유력한 권문(權門)을 이룩한 공통성을 보이고 있다.” <출처: 조선 건국공신의 연구, 박천식>
일례로 박천식이 언급한 태조의 처부 곡산 강윤성(康允成) 일가와 그 인척, 그리고 태조의 동서 신귀(辛貴)의 일문과 더불어 연계된 그 인척(姻戚)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강윤성의 일가는 앞의 <표1>에서 살펴보았듯이 개국원종공신녹권을 받은 강순룡 등 11인이 있다. 나아가 연계된 인척은 강순룡(康舜龍)의 사위로 개국1등공신에 오른 이지란(李之蘭), 원종공신에 오른 처남 권중화(權仲和), 아들 강희(康熙)의 사위로 개국2등공신에 오른 조영무(趙英茂)가 있다. 또한 이지란의 아들 이화상(李和尙)과 이화영(李和英)도 원종공신에 올랐다.
그리고 강윤성의 사위인 신귀(辛貴)의 아들 신극공(辛克恭), 신극온(辛克溫), 신극례(辛克禮), 신극경(辛克敬)과 동생 신우(辛祐), 조카 신유현(辛有賢), 신유정(辛有定) 모두가 개국원종공신이다. 특히 사위 정희계(鄭熙啓)는 개국1등공신(開國一等功臣)이다. 따라서 강윤성 일가와 연계된 인척만 헤아려보아도 24인이나 되는 인물이 공신녹권에 오른 것처럼 태조의 인족 집단이 중핵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처럼 태조가 잠저 시절 권문세가의 여러 집안과 혼인을 맺어 연계된 족단(族團)의 구성원들이 대거 공신에 책봉된 사실을 확인했다.
이는 태조의 인족 집단이 역성혁명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증거가 된다. 태조가 이와 같은 족단을 만드는 데에는 신덕왕후가 한몫을 톡톡히 했다. 일례로 신덕왕후는 태조의 자녀들이 혼사를 잘 치르도록 솔선해서 주도했다. 신의왕후 소생인 방원(芳遠)과 방간(芳幹)은 어려서부터 개경에서 신덕왕후의 보살핌을 받으며 공부했다. 두 형제 모두 신덕왕후의 노력으로 개경의 명문 여흥 민씨(驪興閔氏) 가문과 혼인을 했다.
변방 출신의 일개 무장이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 개국에 성공한 일은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하사한 공신 녹권을 검토하면서 역성혁명의 주도세력이 태조의 군사 집단과 인족 집단이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더불어 우리 문중의 역할도 조명해보았다. 물론 새 왕조를 열게 한 핵심 단어는 그 당시 긴박했던 국제정세, 신진사대부와의 연대, 전제제도의 문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방원의 정몽주 살해 사건을 추가한다. 그들은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함으로써 태조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역성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주장은 태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태조실록에 기록된 정몽주 살해사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방원에게만 공(功)을 몰아주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 이유는 태조가 직접 공신을 선정하고 발급한 공신 녹권의 기록이 달리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태조는 삼군도총제사가 되어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태조는 1356년에 부친과 함께 2,000명의 가별초(私兵)를 이끌고 고려에 귀화했다. 태조는 이 사병과 함께 30여년간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며 백전백승했고, 불패의 영웅으로 승승장구했다. 태조는 1388년의 위화도회군 이후 자신의 정적인 최영(崔瑩)과 조민수(曺敏修) 등을 제거하고 군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들이 바로 태조와 생사 고락을 함께 하던 막강한 군사 집단이었다. 다시 말해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지 않았어도 그 당시 태조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고려 왕조를 뒤집어 엎을 수가 있었다. 비록 시기는 지연되었을 지 몰라도 태조는 확실한 승산을 가지고 준비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아마도 태조는 왕건이 추대 받아 고려를 개국했던 방식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한 일을 태조에게 보고했을 때 불같이 화를 내며 이방원을 질책했던 태조의 반응에서도 그 의중을 엿볼 수가 있다. 또한 태조는 대간(臺諫)의 상소를 물리치면서, 남은(南誾)에게 이 사건에 대한 실상을 다음과 같이 정확히 토로하고 있다.
"공신은 나와 경(卿: 남은) 등만이 아는 바인데 대간이 어찌 알겠는가? 또 민여익(閔汝翼)이 정몽주가 죽던 날에 손흥종(孫興宗)과 더불어 의논하여 이문(移文)을 급히 만들어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서, 경(卿)과 조준(趙浚) 등을 살게 했으니 그 공이 작지 않은데, 어찌 정몽주가 마땅히 죽어서는 안 된다고 즐겨 말했겠는가? 비록 그런 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신하(이방원)가 임금에게 청하지도 않고서 대신(大臣: 정몽주)을 제 마음대로 죽였는데, 누가 ‘마땅히 죽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또 정몽주가 죽은 후에 제군사부(諸軍事府)의 군관(軍官) 등이 사직(社稷)의 대계(大計)를 위하여 글을 올려 정몽주와 그 일당들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그 글에 서명한 사람들은 위태하고 의심스러운 시기에 있어서도 나에게 뜻을 두었으니, 또한 칭찬할 만한데, 또 ‘하공신(下功臣)’이라 일컫고자 하니, 대성(臺省)에서 가히 이를 그만두게 해야 할 것이로다." <출처: 태조실록 1393년 10월 3일 기사>
물론 조선을 개국하는데 이방원이 공을 전혀 세우지 않았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이방원도 공신에 오를 수 있는 충분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사관들의 반대에도 태종이 강제로 편찬시킨 ‘태조실록’에는 이방원의 공적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이방원의 정몽주 살해가 역성혁명의 성공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고 판단하는 측이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해한다. 그러나 태조의 공신 녹권처럼 다른 역사기록에서 숨은 진실이 드러난다면 그 진실을 수용하고 바로잡아 바른 역사관을 수립하는 것이 오히려 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잘못된 역사서의 기사들은 바로잡아 균형 잡힌 역사교육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소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역사교육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교육을 실시할 때 우리 모두가 원하는 참민주주의의 꽃도 한걸음 빨리 피울 수 있지 않을까 소견을 피력해본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