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갔다온 다음날부터 빌비리 했었는데 어제부터 콧물이 나더니 목소리가 잠기고 입안이 마른다.
오늘 녹음하는 날이였는데 목소리 컨디션이 안좋아서....녹음 한것이 맘에 안들지만, NG가 나도 절대
다시 녹음하는 법이 없는 대표님!!!
대본
시그널
박선영의 라디오 시간여행 박선영입니다.
지난방송에서 설화와 재밌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호응이 너무 좋았고
한번 더 해달라는 요청에 이번 방송도 설화와 재밌는 이야기로 구성하였습니다.
우선 음악한곡 듣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현이와 덕이의 너나좋아해 나너좋아해.(큐)
잘 들으셨나요 첫번째 이야기 시작하겠습니다.
왕은 전하, 왕세자는 저하
음양오행이나 유학 등을 근본사상으로 해서 사회의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여 체제를 관리했는데, 사람의 신분서열 뿐만 아니라 사물이나 논리체계에도 서열을 정했습니다. 예를 들면 건물에도 주인의 성격에 따라 서열이 정해져 있다고합니다.
건물의 서열은 대체로 전,당,합,각 그리고 재,헌,루,정 순을 따릅니다.
전殿의 주인은 왕과 왕비급이 되어야 하고, 왕과 왕비가 아니어도
왕실어른이신 대비가 거처하는 곳이나 선왕의 유품을 모신 곳등에
전殿 을 쓸 수 있습니다.
예외적으로 사찰의 부처와 보살을 모신 전각은 "왕즉불" 사상에 의해 대웅전, 극락전 등 전殿 을 쓸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을 지칭할 때 그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이 거처하는 건물의 이름으로 부르는 전통도 있습니다.
왕비를 중전이라 부르는 것은 왕비의 거처가 중궁전이어서
그런 것이고 세자를 동궁마마라고 부르는 것도 세자의 처소가 임금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만약 태백에서 다른곳으로 시집간 여자가 있다면 태백댁이라고불렀겠죠.
이런 전통은 민간까지 퍼져있는데 양반가의 사랑채 이름으로 그
양반가 전체를 대표한다든지 결혼한 여자를 부를 때도 택호(宅號)라고 하여 수원댁, 안성댁 하는 것처럼 친정집의 지역명을 따서 그 사람을 부르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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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 각하라는 존칭을 쓴 대통령들이 있었는데
각하란 경복궁에 있는 동십자각, 서십자각에서 근무하는 사람에게
각하라는 말을 붙이는 호칭이였습니다.
그러니 각하라고 쓴 것은 참 겸손한 행위인듯합니다. 전하라고 쓸수도
있었을텐데요. 멍청하고도 슬픈역사입니다.
두번째 이야기 듣기전에 음악 한곡 듣겠습니다.
음악 / 바람과 구름 – 장남들이 부릅니다.(큐)
장남들이 부른 바람과 구름 들어보셨습니다.
두번째 이야기
에밀레종
★★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은 '에밀레종'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에밀레종'이라는 설화가 처음 기록된 매체는 다음중 어느 것일까요?
(1) 김부식의 삼국사기
(2) 일연의 삼국유사
(3) 동아일보
(4) 조선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 정답은 4번 조선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였습니다.
범종을 주조할 당시 어린아이를 넣었다는 에밀레종 설화는 거의 모든 국민들이 알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설화를 통칭하여 인신공양설화라고 하는데, 중국과 한국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재의 설화입니다.
(예를 들어 심청전도 인신공양설화의 변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에밀레종 설화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가 되어서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1925년 8월 5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창작문예란에
염근수라는 작가가 '에밀네 종' 이란 동화를 발표했는데 얼마 후 이 동화를 뼈대로 하여 현대적인 희곡이 만들어졌고 극장에서 연극으로 공연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 이후에 급속도로 에밀레종 설화가 대중속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이는 아마도 동아시아에서 흔한 소재였던 인신공양설화가 성덕대왕신종이라는 특정 대상물과 결합한 뒤 상호간에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현재 성덕대왕신종은 경주박물관에 있습니다.
세번째 이야기는 잠시 쉬어갈까요?
음악 / 빗물 – 송골매가 부릅니다.(큐)
송골매의 빗물 들으셨습니다.
세번째 이야기
삼천궁녀 설화
에밀레종설화와 비슷한 예로 낙화암의 삼천궁녀설화를 들 수 있는데 이 역시 일제강점기때 만들어진 대중가요 때문에 대중들의 머리속에 각인된 사례입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정사와 야사를 모두 통틀어서도 최소한 조선중기까지는 신라의 삼국통일과 관련된 그 어떤 기록에도 삼천궁녀와 관련된 내용이 전무합니다. 우리가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삼천궁녀 이야기는 조선 중기 문인이었던 김흔의 '낙화암(落花岩)'과 민제인의 '백마강부(白馬江賦)'라는 시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조선 중기는 조광조를 필두로 하여 철저한 성리학(도학)으로
정신무장한 신진사림들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던 때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이유가 어떻든 한 왕조를 지켜내지 못한
군주에게는 평가가 가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의자왕에 대한 평가를
역사서에 직접적으로 기술하는 방식이 아니라, 시의 구절에 상징적인 의미로 수많은 궁녀, 삼천궁녀들 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간접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던 것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중가요 낙화삼천(노래: 김정구) 이 큰 유행을 하게 되었고, 이는 일반 대중들의 머릿속에 '의자왕=삼천궁녀' 라고 각인시켜버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 낙화삼천 후렴구 :
물어보자 물어봐 삼천궁녀 간 곳 어데냐
물어보자 낙화삼천 간 곳이 어데냐
정말 어이없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답사를 다닐 때 낙화암에 가 보았는데 낙화암에는 10명정도
올라가면 꽉차는데 어떻게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었겠습니까?
공양왕에 대하여 말씀 드린적 있죠? 역사는 이긴자의 서사이므로
진자는 억울해도 어쩔수 없습니다.
네번째 이야기는 음악 듣고 진행하겠습니다.
빙고 / 거북이가 부릅니다..(큐)
거북이의 빙고 들으셨습니다.
네번째 이야기
장녹수 이야기
‘연산군’ 하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인물 장녹수는 흥청(興淸)이라는 기생 출신에서 일약 후궁의 지위에까지 올랐고. 그야말로 연산군 시대의 신데렐라였다고나 할까요?
30세의 나이에도 16살 꽃 다운 여인으로 보였다는 동안(童顔) 장녹수는 자식을 둔 후에도 춤과 노래를 배워 기생의 길로 나섰고, 궁중으로 뽑혀 들어와서는 연산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후궁이 되었답니다.
후궁이 된 장녹수는 연산군의 음탕한 삶과 비뚤어진 욕망을 부추기며 자신의 욕망을 채워나갔습니다. 그녀는 무수한 금은보화와 전택(田宅) 등을 하사받았고, 연산군의 총애를 발판 삼아 정치를 좌지우지하였고, 모든 상과 벌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 후 장녹수는 반정 세력에 의해 제거 대상
1호로 떠올랐고, 참형으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장녹수의
파란만장한 삶 한번 살펴볼까요?
장녹수는 충청도 문의 현령(文義縣令)을 지낸 장한필(張漢弼)과
그의 첩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첩의 자녀였기 때문에 천민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장녹수는 가난해서 시집을 여러 번 갔으며, 마지막에는 제안대군(齊安大君: 예종의 둘째 아들)의 노비로 들어가 그곳에서 대군의 노비와 혼인하여 아들을 하나 두었습니다.
이후에 그녀는 가무(歌舞)를 익혀 이름을 떨쳤으며. “얼굴은 중인(中人) 정도를 넘지 못했다"는 표현으로 미루어 뛰어난 미색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나, 춤과 노래에 탁월한 능력을 겸비하여 소문이 자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연산군은 그 소문을 듣고 그녀를 흥청(興淸)으로 뽑아 궁궐에 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녹수는 입궁한 직후인 1502년(연산군 8)에 종4품의 숙원(淑媛)으로 있었는데, 이듬해에는 종3품의 숙용(淑容)에까지 올랐습니다.
궁녀로 들어와 초고속으로 승진한 셈이었죠.
품계가 올라간 장녹수는 더욱 권력을 남용하고, 궁 밖의 사가(私家)를 재건하기 위해 민가를 헐어버리게 하였으며, 모습이
고운 두 여인을 시기하여 두 사람의 부자 형제(父子兄弟)를 하루아침에 다 죽이게도 했답니다.
옥지화(玉池花)라는 기녀는 장녹수의 치마를 한 번 잘못 밟았다가
참형을 당하기까지 했으니, 장녹수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기생에서 후궁의 반열에 올라 연산군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던
장녹수. 독재정치로 종말을 향해 치닫던 연산군의 말년 치세, 그녀는
왕의 광기를 거의 유일하게 제어할 수 있는 존재였지만 그녀의
선택은 연산군의 음탕한 생활과 악행을 더욱 부추기는 것이었습니다. 정국은 독재와 공포로 이어졌고, 반정의 순간 장녹수는 연산군 정권의 실질적인 2인자였습니다.
인과응보였을까요? 결국 장녹수는 길거리에서 돌무더기에 깔려
온갖 비난을 받으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드라마 <장녹수>의 주제가처럼 ‘부귀와 영화도 한 편의 꿈이 되었던’ 장녹수의 삶은 후대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박중훈의 비와 당신 배경으로 하고 나의 멘트끝나면 크게)
박중훈의 비와 당신들으면서 설화 및 재미있는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태백FM 100.5 박선영의 라디오 시간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