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된 삶과 자여교회
2024. 3. 10(교회설립 45주년감사예배) 시편 30:10-12
대성그룹의 수석비서로 일한 전성희 라는 분이 있다.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하고, 남편도 명문대 철학과 교수인 전성희 씨는 65세에도 현역 비서를 성공하는 CEO 뒤엔 명품 비서가 있다는 책을 쓴다. 비서로서 커피를 타고, 또 신발을 닦는 일까지 하면서 전성희 씨는 최고령 비서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성희 씨는 비서로서 프로, 최고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책 p.43-44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나는 회장님께 올릴 보고서를 만들고 기획안을 제출할 때면 항상 무언가 다르게 구상하고 새롭게 발상하려고 애쓴다. 무엇이든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색다른 내용이 없다면, 문서 형식이라도 새롭게 해서 이전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도록 한다. 커피를 타거나, 이메일을 보내거나, 전화를 받을 때도 이전보다 다 더 잘할 수는 없을까를 항상 고민한다. 회장님께 올리는 글은 아무리 사소한 메모일지라도 읽고 또 읽어서 오탈자가 없도록 한다. 내용이 정확한가를 점검하는 것은 필수이다. 이렇게 노력하다 보니 일도 재미있고 오랫동안 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시키는 일만 하면 안 된다. 그것은 적당히 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시키는 일 외에 플러스알파가 나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 프로이다. 명심하라. 이왕 하려면 100%에 1%를 더해야 한다.
전성희 씨는 최고의 비서가 되기 위하여 사소한 일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렇게 사소한 일까지 소중히 여긴 그녀는 명품 비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성도된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가? 열왕기상 5장과 역대하 2장은 솔로몬의 성전과 궁궐 건축이야기를 기록한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히브리어를 보면 성전과 궁궐이 모두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왕기상에서는 큰 건축물이라는 뜻의 헤칼(היכ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역대하 2장에서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바이트(בית)를 사용한다. 쉽게 말씀드리면 솔로몬이 레바논 백향목으로 또 금으로 아주 화려하고 큰 건축물을 지었다. 그런데 어떤 건축물은 성전이 되고, 또 어떤 건축물은 궁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전과 궁궐의 차이는 무엇인가? 역대하 2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대하 2:1) 솔로몬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자기 왕위를 위하여 궁궐 건축하기를 결심하니라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할 때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짓는다. 그런데 궁궐은 자기의 왕위를 위하여 지은 것이다.
이것이 성전과 궁궐의 차이이다. 열왕기상 7장 12절은 마치 여호와의 성전 안뜰과 주랑에 놓은 것 같더라(12절)고 기록한 것을 볼 때 성전이 아름답고 화려했던 것처럼 솔로몬의 궁궐도 역시 아름답고 화려하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솔로몬의 궁궐은 13년동안 지어졌고, 그 크기는 무려 4배나 더 컸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성전보다 궁궐이 훨씬 더 화려하고 웅장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의 궁궐에는 사용하는 모든 그릇은 정금이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금을 쳐서 만든 큰 방패 200개(금 600세겔)와 작은 방패 300개(금 300세겔)를 보관하는 곳이었고, 또 거기에는 왕이 앉은 상아에 순금을 입힌 보좌도 있었다. 한마디로 엄청나게 웅장하고 화려한 궁궐 안에는 엄청난 것들이 가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솔로몬의 큰 건축물은 성전이 아니라, 궁궐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니라, 솔로몬을 위하여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삶은 성전을 건축하고 있는가? 궁궐을 건축하고 있는가? 그런데 성전과 궁궐의 가장 큰 차이는 우리의 노력에 있지 않다. 솔로몬이 7년동안 건축한 건축물이 성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열왕기상 8장 10절-11절에서 알 수 있다.
(왕상 8:10-11)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11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솔로몬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였다. 이 성전은 회막과 비교할 때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성전에 여호와의 임재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아니 궁궐은 솔로몬이 앉아서 백성을 다스릴 수 있지만, 성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건축물이 되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성전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다고 말씀한다. 그리고 우리가 성전이 되려면 성령이 임재해야 한다고 말씀한다. 우리가 성전이 되려면 얼마나 잘 생겼는가? 착하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와 함께해야 성전된 공범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자여교회가 성전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은 많은 사람이 모이고, 많은 사역을 해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우리의 모임이 성전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우리 자여교회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가? 성경을 보면 초대교회 안에 할례를 받아야 하나? 받지 않아도 되나?하는 문제가 제일 중요하였다. 그래서 교회 안에 할례파와 무할례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아니 고린도교회를 보면 내 편이 누구인가?가 제일 중요했다. 그래서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 파로 나뉘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도 있었다.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과부가 구제에서 빠지는 것을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왜 교회에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였겠는가? 교회와 내 삶에 가장 소중한 것이 할례이고, 내 편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가 아니라, 다른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길 때 교회는 분열되고, 교회다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빌립보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난 5일(화)에 김종혁 강도사님이 목사고시를 치루었다. 주해, 논문, 교회정치, 예배학 등 많은 과목으로 시험을 치루었는데, 그 과목 중에 하나가 설교였다. 목사고시를 치루는 강도사님들은 모두 빌립보서 2장 1-11절을 본문으로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였다. 그때 강도사님들은 모두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빌 2:3)의 말씀을 하였다. 그런데 왜 바울이 다툼이나 허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왜 바울은 다툼이나 허영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겠는가? 빌립보서 1장을 보면 바울이 감옥에 갇힌 소식을 듣고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혔으니 우리라도 열심을 내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었으면 참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없어도 우리 빌립보교회는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서 열심을 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로 인하여 속이 상한 바울을 따르는 사람들은 분노가 가득했던 것이다. 이렇게 빌립보교회 안에 투기와 분쟁이 가득하였을 때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빌 2:3)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빌립보교회는 전도라는 선한 행위를 하고 있는데, 그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수고가 되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빌립보교회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바울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다툼이 있는 사람을 나보다 낫다고 인정하는 것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사람을 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라고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중심이 되면 성전인 빌립보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의 교회가 아니겠는가? 이제 오늘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인 시편 30편은 성전낙성가로서 유대인들은 하누카(수전절)때 불렀다고 한다. 로마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이집트 전쟁 중일 때 예루살렘에서는 안티오쿠스에게 심각한 사고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들린다. 그 소문에 예루살렘은 반란을 일으켜 로마군인들을 쫓아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안티오쿠스는 군대를 파송하여 수많은 유대인을 죽이고, 성경을 불태우고,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피를 뿌리며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그 당시 가장 존경받던 랍비 엘리에셀에게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한다. 그때 90세의 엘리에셀은 단호하게 거절하여 죽임을 당한다. 이렇게 안티오쿠스에 의하여 죽은 유대인의 수가 100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때 유대인들은 마카비 혁명을 일으켜서 로마군을 몰아내고, 성전을 청결케 하였는데 이것을 기념하여 하누카(수전절)라는 절기를 지키게 되었다.
로마가 세워놓은 제우스상을 부수고, 또 뿌려진 돼지피를 다 닦아내면서 성전의 기구를 정리할 때 유대인들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그런데 시편 30편은 다윗이 지은 시이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인구조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을 때 하나님은 그 땅에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어 전염병으로 7만명의 사람이 죽게 하였다. 그때 그 모습이 얼마나 참담했던지 하나님은 전염병을 내린 것을 후회하였다고 기록할 정도이다. 이렇게 처참한 심판이 이어지고 있을 때 다윗은 장로들과 함께 심판하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엎드린다. 그리고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사서 거기에서 제사를 드렸을 때 여호와의 사자는 칼집에 칼을 꽂는다. 하나님의 심판이 끝난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이 끝났을 때 다윗은 시편 30편으로 하나님 앞에 찬양을 한 것이다. 다윗이 뭐라고 하나님을 찬양하는지 11-12절을 읽기 바란다.
(시 30:11-12)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12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다윗은 자신의 힘이 얼마나 강한 지를 나타내고 싶었다. 그래서 춤을 추며 기뻐하고자 하였지만, 자신의 힘은 한순간에 다 무너지고 슬픔과 베옷을 입게 만들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자기 힘을 중심으로 한 다윗은 철저하게 무너진 것이다. 그러한 다윗은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베옷을 벗겨 기쁨의 띠를 띠우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중심이 되었을 때 다윗은 찬송하며 기뻐하는 삶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참된 성전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참된 성전은 나의 수고와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복과 기쁨 안에서 춤을 추며 기뻐하는 것이 바른 성전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 자여교회는 이런 아름다운 성전으로 세워져 가고 있는가? 어제보다 오늘이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오늘보다 내일이 하나님이 더 좋은 그러한 교회로 세워져 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45년동안 인도하신 하나님 앞에 기뻐하는 오늘 이 예배가 다음 주에는 더 큰 감격으로 드려지는 그런 복된 교회로 나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