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신앙은 중생에 관한 말씀 선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개혁 신앙은 성경의 진리에 가장 충실하다. 그 진리가 선언하는 핵심은 "태초의 말씀이 있었다"는 것이다(요 1:1). 여기서의 태초는 "태초" (창 1:1)와 다른 의미이다. 전자의 태초는 영원을, 후자의 태초는 시간을 의미한다. 후자의 태초는 영원에서 시간을 만드시면서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개혁 신앙은 영원과 시간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영원에서 작정하고 계획한 것이 시간에 이뤄진다는 것이다. 개혁 신앙의 핵심은 성경의 진리인 영원과 시간이다. 두 번째 핵심은 영원에서 이뤄진 구원의 진리인 예정, 즉 선택과 유기이다. 이 진리는 시간에 선택된 자와 유기된 자가 섞여 산다. 이 중 선택된 자를 구원하는 것(to deliver)이다. 예정은 개혁 신앙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나는 이 관점을 하나님 측면과 인간 측면으로 나눈다. 구원의 진리를 영원에서 볼 때 작정이라면, 구속 사역을 시간에서 볼 때이다. 전자를 제1 원인으로, 후자를 제2원인으로 보고자 한다. 이 두 관점을 무시하면, 아르미니우스파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어차피 구원받지 못한 자는 물귀신 작전으로 선택된 자를 괴롭힐 수 있는 한 괴롭히는 것이다. 조심스러운 것은 우리 각자가 정말 선택된 자인지라는 문제이다.
시간에서 선택된 자는 유기된 자보다 선하고, 유기된 자는 선택된 자보다 악한가?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 기준이 하나님 측면에서 볼 땐 그렇지만, 인간 측면에서 볼 땐 그렇지 않다. 이 질문은 성경의 질문이 아니라 일반적 질문이기에 일반성으로 답해야 한다고 본다. 선택된 자가 유기된 자보다 선하지 못하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상업적으로? 가정적으로? 직업적으로? 어느 하나 더 나은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슬프게도 이것은 사실이다. 나 역시 다른 직업인보다 선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교수 사역을 할 때 다른 세속 교수보다 더 나은 윤리관과 가치관을 가졌는지 묻는다면 그렇지 못하다고 말하련다. 다시 말하지만, 일반적 답변이다. 이제 하나님 측면에서 보자. 선택된 자가 선한 일을 할 것이기에 선택됐을까? 유기된 자가 악한 일을 할 것이기에 유기됐을까? 이것은 절대로 옳다고 말 할수 없다. 시간에서 드러난 행위, 드러날 행위로 판단돼 선택되거나 유기된 것이 절대 아니다. 시간 전, 즉 영원에서 일어난 것을 잠시라도 간과해선 안된다. 선택된 자는 자신이 유기된 자보다 선하지 못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기에 더 낮은 자세로 임하려는 것이다. 나은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해선 절대 안 된다. 선과 악의 문제로 선택과 유기는 전적 무관하다.
현실에서 누가 선택된 자인지 유기된 자인지 누구도 모른다. 자신의 구원의 문제는 자신의 양심만이 증거한다. 유기된 자인데 아니라고 말하거나 선택된 자라고 가면을 쓰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중생된 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악하기에 유기된 자라고 주장돼서도 안 된다. 악한 자 모두 유기된 자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만일 선택된 자라면 선한 자가 되려고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 아니,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그것에 적합한 자가 되기 위해 정말 힘써서 격렬하게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설왕설래(說往說來)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중생의 경험을 한 자라면, 격렬하게 노력하라! 그 노력을 위해 훈련받으라! 훈련 받아야 하는 이유는 선택된 자가 선하지 않기 때문이고, 선하기에 선택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악하다고 여기기에 그리스도교를 통해 선해지려는 것도 아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영원에서 선택된 자라는 확신을 가졌기에, 선택된 자로 남아 있고자 하기에, 선택된 자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기에 훈련받는 것이지 선택되기 위해 훈련받는 것이 절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선행의 명령을 지키면서 살려는 자는 선택된 자의 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