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둘, 입 하나]
언젠가 금언이나 명언 등을 줄줄 꿰고 다니며
마더 테레사의 열렬한 팬이기도 한 후배가 이런 말을 했다.
“테레사 수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간은 ‘말하기’보다는
남의 ‘말 듣기’를 더 중요시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것은 조물주께서 인간을 빚은 모습을 보아도 알 수 있대요.
입은 하나지만 귀는 둘이기 때문이라는 거죠.
귀가 입보다 배나 더 있으니까
듣기가 말하기보다 배나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지요.
정말 정곡을 찌르는 말이죠.“
물론 후배가 마더 테레사의 말씀을 교훈으로 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날 나는 좀 짓궂게 한마디 하게 되었다.
“그런데 말야. 자네 이런 건 관찰해 보지 않았나?
귀는 얼굴의 양옆에 있고 입은 얼굴 정면에 있다는 사실 말일세.
양(量)을 기준으로 하면 입보다 귀가 중요하다는 말이 그럴듯하지만,
질적인 면을 생각하면 변방에 있는 귀보다 중앙에 있는 입이 비중이 큰 것 아닐까?
조물주가 그런 질적 기획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르잖아?”
후배는 순간 할 말을 잃었지만, 훗날 내게
“위인들의 명언도 비판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이 짓궂은 철학자의
조언이 세상사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술 한잔 사기도 했다.
인간의 오관 가운데, 서로 각별한 사이에 있는 것이 두 개의 귀와 하나의 입이다.
입에서 나온 소리는 곧바로 귀에 들리며, 귀로 들은 소리만을
제대로 입으로 발음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선천적 청각
장애인이 자연히 말을 배우지 못하게 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귀와 입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반면에 귀와 입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기도 하다.
귀는 수동적이지만 입은 능동적이다.
귀는 가만히 있어도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지만(오히려 듣지 않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귀를 막아야 한다.) 입으로 하는 일들은
주체의 의지가 확실히 발현되어야 한다.
말을 하든, 먹고 마시든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입으로 하는 일은 하기 싫을 때 의지에 따라 확실히 안 할 수 있지만,
귀로 들어오는 소리는 특별한 기구를 쓰지 않는 한 완벽하게 차단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별로 의식하지 못하지만, 귀는 노동량이 많다.
그래서 나도 -아전인수 격 해석을 하면- 조물주가 귀를 두 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현대 문명이 귀를 혹사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공의 소리를 수없이 만들어낸다.
아름다운 음악에서 자동차 소음에 이르기까지 가만히 있어도
각양각색의 소리가 귀에 침투한다.
여기에 이어폰의 일상적 사용에 전화도 휴대하고 다니는
상황에 이르면 귀는 정말이지 너무도 혹사당한다.
입은 피로감과 과중한 노동에 곧바로 반응하지만(입술이 부르트는 등),
귀는 확실하게 병이 나기까지는 우직하게도 별 반응을 하지 않는다.
더구나 귀는 얼굴의 ‘변방’에 있기 때문에 관리를 잘 안 하게 된다.
입은 얼굴 정면에 있기 때문에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확실하게 통증을 느끼지 않더라도) 거울을 보고 금방 알 수 있지만,
귀의 경우 통증을 느껴야 알 수 있다.
그리고 청각이 약해지면 입의 작동을 변화시키고 입까지 혹사하게 된다.
즉 말할 때, 소리를 높이게 된다. 청력이 약해진 사람은
대화나 통화할 때 마치 상대방도 잘 안 들릴 것이라는 듯
목청을 높이거나 급기야 소리를 지르며 말하게 된다.
흔히 ‘가는귀먹은’ 노인들이 큰 소리로 말하거나 통화하는 것도
대부분 그런 이유에서다.
예를 들어 공공장소에서 휴대 전화를 사용하여 큰소리로 통화를 하는데,
주위에서 다른 사람들이 인상을 써도 본인은 잘 못 느낀다.
그러면 이상의 관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으로는 귀와 청각 관리가 매우 중요해질 것이라는 말이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이에 대비해야 한다.
지금은 잔뜩 볼륨을 높여 이어폰을 끼고 다니고 휴대 전화로
통화하는데 여념이 없어도 괜찮은 것 같지만, ‘불쌍한’ 귀는 점점 약해진다.
더구나 전화할 때는 왼쪽 귀든 오른쪽 귀든 주로 어느 한쪽 귀만
집중적으로 사용하게 되기 때문에 (각자 자신의 습관을 잘 관찰해 보라.)
편중되어 ‘고장’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우리는 컴퓨터와 인터넷 시대에 각종 모니터를 자주 본다는 이유로
시각은 걱정을 하면서도, 청각에는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귀는 얼굴의 변방에 있는 값을 톡톡히 치르는 것이다.
더구나 귀에 병이 생기면 잘 낫지 않는다는 약점도 있다.
문명의 시대에도 인간이 야성을 유지해야 할 부분은 바로 오관이다.
오관이 야성적 민감함을 유지해야 인생이 즐겁다.
나이도 들지 않아서 가는귀먹어 공공장소에서 휴대 전화에 대고
소리 지르는 경우가 생긴다면 주위에서 별로 이해해 주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청각을 비롯한 오관은 21세기에 몸 관리에 중요한 과제로 떠오를 것이다.
그래서 21세기에는 청음문화(聽音文化)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청각에 문명과 야성의 조화를 이루어줄 문화 말이다.
귀를 두 개 만든 조물주의 수수께끼에 대답은 이런 것 아니겠는가.
균형 있는 삶을 살라.
-김용석 『일상의 발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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