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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사의 목적, 용도
은사의 목적이나 용도가 무엇인가?
성령의 은사는 신자들이 사용하는 영적 무기이다. 영적 무기인 은사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첫째, 성령은 교회 전체를 유익하게 하고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신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개역개정판).
“각 사람에게 성령이 계시는 증거를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입니다”(고전 12:7, 현대인의 성경).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시는 것은 공동의 이익을 얻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표준새번역).“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어떠한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롬 1:11).
“. . .여러분을 굳세게 하려는 것입니다”(표준새번역).
“. . .여러분의 믿음을 강하게 하려는 것입니다”(현대인의 성경).
둘째, 성도들을 온전케 하고(훈련시키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주신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하나님이 은사를 교회에 주시는 목적은, 은사자의 유익이나 영광이 아니라 전체의 유익을 위하고, 믿음을 견고하게 하며, 성도들을 훈련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여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게 하기 위해 주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은사의 발견
내가 어떤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첫째, 본인이 잘 안다
어떤 사람은 노래 솜씨가 있어 찬양의 은사로 연결되고 어떤 사람은 전도의 은사가 있어 전도할 사람이 있으면 만사를 덮어두고 전도를 한다. 어떤 사람은 어린 아이들만 보면 귀찮아 하는데 다른 분은 어린 아이들만 보면 귀여워 죽겠다고 한다. 주일학교 교사의 은사가 있는 분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지겹고 힘든 일이지만 본인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한다. 은사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다른 사람이 잘 안다
본인은 잘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먼저 은사를 발견한다. 전도사 시절 잘 몰랐지만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 ‘어려운 것을 쉽게 가르친다,’‘아는 것도 새롭게 되고 이해가 쉽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처럼 다른 사람을 통해 가르침의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그만 구멍가게에서는 사장이 경리사원도 되고 판매사원 역할도 한다. 그러나 회사의 규모가 커지면 전문화 된다. 이때는 인재를 적성에 맞게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회사에 유익하다. 경리 적성을 가진 사람이 판매를 담당하고 판매 적성을 가진 사람이 경리를 맡는다면 그 사람은 곧 사표를 쓰고 말거나 회사에 손해가 될 것이다. 억지로 자리를 지키더라도 능률이 나지 않을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성령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를 잘 개발하여 적재적소에서 섬길 때 본인도 보람과 기쁨이 넘치고 교회도 든든히 서 갈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를 제대로 개발하여 적소에서 섬기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다행히 요즈음에는 많은 교회에서 은사 발견 및 은사 배치사역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셋째, 실제로 여러 가지 사역에 부딪치다 보면 은사가 드러난다
어떤 사람이 전임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바로 전임 사역에 뛰어드는 사람은 없다. 소정의 준비와 훈련의 과정을 거친 후에 전임 사역에 투입된다. 은사 개발도 마찬가지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초신자가 회심하자 말자 바로 어떤 특별한 성령의 은사가 갑자기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자연적인 재능과 관련이 있는 음악, 행정, 섬김 등의 은사는 즉각 기능을 발휘하겠지만 이것들조차 오랜 세월을 거쳐 정화되지 않으면 오히려 교만으로 인해 공동체의 유익이나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여 공동체에 유익이 되기는커녕 말썽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확실하게 자신의 은사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기본적인 의무에 충실하다 보면 자신의 은사를 자연스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도 모든 은사가 한꺼번에 완벽하게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중에 다듬어지고 깊어진다.
<은사 발견표>를 가지고 교인 각자의 은사 발견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믿음 생활을 오래했지만 교회의 부서에서 별로 봉사한 적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은사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었고 활발하게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러 부서에서 활발하게 봉사한 사람은 금방 자신의 은사가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은사가 활발하게 나타났다.
또한 어떤 연로한 원로 목사님의 은사를 점검해 보았는데 여러 가지 은사가 골고루 활발하게 나타났다. 수십 년 동안 다양한 사람을 상대로 목회하는 동안 이전에는 없었거나 미약한 은사들이 사역을 통해 개발되고 강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자신의 심령을 살펴보라
어떤 일이나 사역에 대해 유난히 마음의 부담이 온다든가, 어떤 일을 하면 기쁨이 넘친다든가, 다른 사람은 힘들어 하는 일을 본인은 쉽게 그것도 아주 효과적으로 잘 처리하는 경우 그런 은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자만 보면 긍휼의 마음이 생기는 사람, 힘든 사람만 보면 내 일 제쳐놓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사람은 긍휼의 은사, 섬김의 은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은사는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고전 14:1).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 (고전 14:7).
모든 은사는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덕을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에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나 성경은 몇 가지 기적 행하는 은사는 간절히 구하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사모하다’ 는 말의 헬라어는 ‘젤로’인데 ‘열심으로 탐하다, 열망하다’ 는 뜻이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는 “eagerly desire” (NIV), “earnestly desire” (NASV)로 번역한다. 그러므로 우리 말 성경도 “신령한 은사(들)을 간절히 소망하라, 또는 간절하게 소원하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의도에 더 적합한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사람은 구하라, 나는 방언과 같은 신령한 은사를 구하지 않겠다’ 는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열심으로 구하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방언을 쉽게 받지만 또 어떤 사람은 10년 이상 간절하게 구해서 받은 적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방언에 대해 역설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방언 은사를 받으라’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람은 다른 사람 보다 한참 늦게야 방언을 받았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알다가도 모를 일이 더 많다.
방언의 은사는 쉽게 받았는데 다른 기적행하는 은사-특히 임파테이션의 은사-는 오랫동안 간절하게 사모하고, 이곳저곳 다니면서 많은 사람의 안수를 통해 받았다.
여섯째, 예언을 통해 은사가 활성화 된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딤전 4:14).
어떤 사람들은 자기에게 어떤 은사가 잠재해 있는 줄 모르고 있다. 그러다가 특별한 은사―특히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을 통해 잠재해 있던 은사를 발굴하여 활성화 할 수 있다. 이것은 본인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잘 모르므로 은사 발견표를 통해서도 잘 발견되지 않지만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기도하던 중, “OO 은사가 있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전혀 마음에 와 닿지도 않았고 실제로 그런 은사가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 우연한 기회―엄격하게 따지면 하나님의 섭리이지만―에 갑자기 그 은사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다른 은사자의 임파테이션을 통해 발견된다
특히 기적 행하는 은사들은 은사 발견표를 통해서도 잘 나타나지 않는 데 이런 은사는 은사자의 집회에 참석하거나 안수를 통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행 8:17).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 19:6).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롬 1:11).
마술사 시몬은 자신이 큰 능력을 행하던 사람으로서 빌립이 능력을 행하는 것을 보았지만 빌립을 통해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와서 안수를 하니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 시몬은 성령을 나누어 주는 능력이 탐이 나서 그것을 돈 주고 사려고 했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행 8:19절).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한 시몬을 심하게 책망하고 심지어는 저주까지 했다.(20-25절).
그러나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동기로 성령을 나누어 주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롬 1:11).
“(은사를) 나누어 주다” 는 말은 헬라어로 ‘메타디도미’인데 영어로는 임파트(impart)이다. 그래서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기적행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임파테이선(impartation)을 받기 위해 그런 집회에 참석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도 모르고 “신앙 생활은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어디 거기에만 계시나? 성령은 모든 신자에게 내주하시지 않느냐? ”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신 성령을 나누어 준다는 말인가?”라는 엉뚱한 이유를 같다 붙인다. 이는 성경도 모르고 영적 진리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또 어떤 사람은 여기서 말하는 ‘은사’(헬, 카리스마)는 성령님의 은사가 아니라 (구원의 선물로서의) 은사(롬 5:15-16), 축복(롬 15:29) 및 (이스라엘 민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호의란 의미의) 은사(롬 11:29)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런 의미도 있지만 성경에서 ‘카리스마’는 은사로 번역된 경우가 더 많다(롬 12:6; 고전 1:7; 7:7; 12:4, 9; 28, 30, 31; 딤전 4:14; 딤후 1:6; 벧전 4:10). 그러므로 여기서의 은사를 성령의 은사로 해석하는 것은 하등 잘못된 것이 아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가진 성령의 영감을 받기 위해 엘리야의 택함을 받은 후에도 엘리야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나 따라다녔다. 벧엘, 여리고, 요단으로 따라다녔고 마침내 엘리야가 하늘에 오르기 전에 갑절의 영감을 구하여서 받았다(왕하 2:1-18). 이후 엘리사는 즉시 능력 사역에 임했다.
남미 아르헨티나 부흥운동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클로디오 프레이전(Claudio Freidzon) 목사는 6년 동안 목회했지만 교인은 겨우 5~6명에 머물렀다. 목회를 그만두려고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던 중 어느 날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는데 신학생들이 모두 졸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신학생들은 전날 밤에 카를로스 아나콘디아(carlos Annacondia)라는 부흥사의 집회에 밤 늦게까지 참석하는 바람에 피곤해서 그랬다고 대답했다. “아나콘디아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신학생들이 수업에 소홀할 정도로 밤 늦게까지 참석했을까?”
궁금했던 프레이전은 자신이 실제로 참석해 본 결과 그의 집회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이 강력하게 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신유와 축사가 강하게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다. 레이전은 곧 자신을 아나콘디아에게 소개하고 아나콘디아의 허락으로 교제를 시작하여 매주 한 번 정도씩 정기적으로 아나콘디아와 교제하면서 그의 기도를 받았다.
그러던 중 프레이전은 아나콘디아를 자기 지역에 초청하여 대형 전도 집회를 열기로 했다. 그런데 대회 날짜가 임박하자 아나콘디아가 갑자기 어떤 일이 생겨서 도저히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연락해 왔다. 난감한 프레이전이 간절하게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네가 하라”고 응답하셨다.
“제가요? 별 볼일 없는 조그만 개척 교회의 목사인 내가 그런 큰 집회를 인도하라니?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는 수 없이 순종하여 집회를 인도한 결과 아나콘디아에 버금가는 기사와 이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교회는 성도가 거의 만 명 가까운 큰 교회로 성장했으며 매년 성령대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필자의 경우 이런 기름부음을 얻기 위해 미국에 거주할 때 능력이 일어나는 현장을 십 여 년 이상 쫓아다녔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것을 전폐하고 그런 장소에만 쫓아다녔다는 말은 아니다. 15년 가까이 그런 기름부음을 사모하면서 구했다는 말이다. 물론 필자는 혼자의 기도를 통해 체험을 한 것이 많지만 그런 장소에서 안수를 받고 은혜를 사모한 것이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성령의 기름부음이나 은사는 ‘이미 은사를 받은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흐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기적 행하는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본인의 기도는 물론 은사자를 통해 안수를 받으면 훨씬 빨리 개발되고 활성화되어 실질적인 사역도 할 수 있다.
◈ 은사의 개발과 활용
은사는 사용을 통해 강화된다. 은사를 받았으면 그것으로 끝인 줄 알지만 은사는 사용함으로써 계속 다듬어지고 강화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 1:6).
‘불일듯하게 하다’는 말의 헬라어 아나조퓌레오는 ‘계속해서 타오르게 하다,’‘불꽃을 계속해서 보존하다’는 뜻이다. 이는 디모데가 이미 받은 은사가 소멸되었기 때문에 새롭게 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사를 소멸하지 말고 더욱 분발하여 새롭게 하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적 행하는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 눈치보고 주변 눈치 보느라고 불일듯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사장시켜서 은사를 소멸시키는 경우가 많다.
오랫 동안 이런 은사를 사장해 놓으면, 첫째는 주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 받아서 있는 것도 빼앗길 것이요(마 25:29), 둘째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 된다(살전 5:19).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받은 은사는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더욱 불일듯하게 하고 없는 은사는 사모하고 구하여야 할 것이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고전 14:7).
어떤 사람은 ‘은사보다는 은사를 주신 분이 더 중요하다’면서 은사를 사모하고 구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이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신자에게는 물론 은사를 주신 하나님이 제일 중요하지만 그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그 하나님의 뜻을 더 잘 행하기 위해 그 하나님이 주신 은사도 구하고 또한 받아서 잘 사용해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기적행하는 은사를 많이 가진 고린도 교회를 보라. 가장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가장 많이 책망 받은 교회가 아닌가? 빌립보 교회는 기적의 경험이 없어도 큰 문제는 없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기적 행하는 은사는 말썽만 부리므로 받을 필요가 없다’는 식의 해괴한 주장을 한다.
성경 어디에 그런 주장이 있는가?
사도 바울이 책망한 것은 은사 사용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시정한 것이지 은사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고린도 교회에 많은 은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더욱 많은 은사가 임하기를 기도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 1:4-7).
또한 빌립보 교회는 어떻게 세워졌는가?
바울이 점치는 여종의 귀신을 쫓아내자 주인이 앙심을 품고 바울을 감옥에 가두었고,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찬양 부흥회를 하자 큰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한 곳 아닌가?(행 16:16-40).
그러나 빌립보 교회에서는 은사로 인한 문제가 없었거나, 문제가 있었다면 이미 이전에 기록한 고린도전서(AD 55년경 기록)가 있기 때문에 약 7~8년 정도 후에 기록된 빌립보서에서 별도로 기록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 은사는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 무엇보다 먼저 사랑의 동기로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특히 기적 행하는 은사는 은사자를 교만하게 만들기 쉽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은사를 뽐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업신여겨 교회에 갈등을 초래했다.
성령이 은사를 주신 목적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 개인의 자랑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2장에서는 은사의 종류를 말한 후에 고전 13장에서는 은사를 사용하는 동기나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사랑은 '은사'가 아니라 '열매'
많은 사람들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사랑이 최고의 은사이므로 사랑의 은사를 구할 것을 강조하면서 기적 행하는 은사를 구하지 않는 것을 은근히 정당화한다. 더 좋은 사랑의 은사가 있는데 더 못한 기적 행하는 은사를 굳이 구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멵면, 사랑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 나는 사랑의 은사가 없어서 사랑을 잘 하지 못한다고 변명해도 무난한가?
성경에서 사랑은 은사가 아니라 으뜸 되는 계명이자(마 22:37-40), 성령의 열매(갈 5:22)이다. 사도 바울은 고전 12장31절에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할 것을 강조한 후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동기로 은사를 사용하고 또한 구하라’는 것이다.
바로 다음에 나오는 고전 13장 1-3절이 이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아무리 뛰어난 은사가 있더라도 사랑의 동기에 의해 사용하지 않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같이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본다. 은사가 좀 있다고 하여 안하무인으로 행동하고, 마치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전권대사인 양 착각하고, 교회의 목회자나 권위에 순종하지 않고, 교만한 사람들을 볼 때 “은사가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랑이 있어야지”라는 말을 자주한다. 고전 12장 31절은 바로 이런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전 12, 13, 14장이 카이애스틱 평행구조(Chiastic parallelism) 로 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성경은 많은 경우, 강조하는 것을 중간에 위치시키고((b) 그 주변에 비슷한 것(a, a’)을 포진시킨다. 이런 모습이 헬라어 카이(k)와 같다고 하여 카이애스틱 평행구조, 즉 ‘역평행구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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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조에 의하면, 사랑장인 13장이 중간에 위치하여 강조점이 되고, 12장은 ‘은사의 종류’, 14장은 ‘은사의 사용법’에 대해 기록한다.
여기서 논란의 핵심은 “더욱 큰 은사”(고전 12:31상)와 “제일 좋은 길”(고전 12:31하)이 무엇인가 이다. 고린도전서의 세계적인 주석가인 고든 피 주장. (Gordon D.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The Holy Spirit in the Letter of Paul: Hendrickon Publsher,Inc., 195-197,『성령: 하나님의 능력주시는 임재』).
고든 피의 견해를 살펴보자.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9가지 은사를 열거한 후, 고린도교회에서 가장 말썽을 많이 일으킨 방언과 대조하여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명령한다.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므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고 또한 교회의 덕도 세우는 예언의 은사가 “더욱 큰 은사”이다(고전 14:1-5; 고전 12:7 참조).
(이러한 사실은 고린도전서 13장을 괄호 안에 넣은 후, 고린도전서 12장31절과 고린도전서 14장1절을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즉 “더욱 큰 은사”(고전 12:31)와 ”예언의 은사”(고전 14:1)는 같거나 비슷한 의미이다-필자의 주장.)
그 다음, “제일 좋은 길”(고전 12:31)은?
바울이 사랑을 은사라고 기록한 곳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바울은 은사와 사랑을 대조시키는 것이 아니라 ‘방법’(=좋은 길)을 제시하고 있다. 고린도교회가 방언을 자랑하고 다른 은사를 업신여기는 지금의 ‘방법’을 지속하면 곧 더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제일 좋은 길”(방법)인 사랑의 방법으로 은사를 구하고(고전 14:1), 공동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고전 12:7)고 고든 피는 해석한다.
정리하면, ‘사랑’은 은사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랑의 은사가 없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은사를 구하거나 사용할 때 ‘사랑의 동기로 하라’는 말이다. 아무리 좋은 은사라도 사랑의 동기로 구하거나 사용하지 않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요,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요, 사람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고전 13:1-3).
한편, 은사의 오남용이 있다고 해서 은사를 배격하는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다면 오남용하고 말썽부리는 목사, 장로 및 성도 모두 제명되거나 부인되어야 할 것이다.
* 둘째, 믿음의 분수대로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롬 12:6).
기적 행하는 은사가 많은 말썽을 부리는 또 다른 이유는, 이런 은사는 신앙의 성숙도와는 상관이 없이 주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우쭐대면서 지혜롭지 못하게 사용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런 은사를 받은 사람은 특히 겸손과 지혜의 신앙 인격을 다듬어 가야 한다.
* 셋째, 보다 못한 은사를 가진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 12:22).
어떤 은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귀한 은사이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오히려 사람에게 드러나지 않는 은사가 더 귀하다.
*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해서 받은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마 25-14-30의 달란트 비유 참조)
은사를 많이 받았든 적게 받았든,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교단에서 그런 은사를 좋아하지 않아서,” “교회에서 그런 은사를 좋아하지 않아서”라면서 이미 받은 은사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묻어둔다. 받은 은사를 사용하지 않고 묻어 두면 주님의 책망을 면치 못한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 .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 25:26-30).
한편 5 달란트를 받아서 3 달란트를 남긴 사람은 비록 절대적인 수는 많지만 받은 은사에 합당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3 달란트를 남기고, 2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2 달란트를 남겼다면 주님은 후자를 더 칭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는 받은 대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럴 때 주님은 더 많은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
특별히 기적 행하는 은사는 사람들의 눈치와 압력, 목회자라면 교인들과 상회의 눈치로 인해 쉬쉬하거나 묻어두어서 소멸시키는 경우가 많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을 사람의 눈치에 때문에 사장하거나 소홀히 취급하면 하나님은 있는 것도 빼앗아가시고 담대하게 사용하면 있는 것에 더해주신다는 사실이다.
여러 가지 은사를 받은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런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교회에서 예언 사역 세미나를 개최했더니 성령 체험이 있다는 사람들조차 ‘교회협의회에서 이런 것 좋아하지 않는다,’‘장로교에서 이런 것 하면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면서 무언의 압력을 가해왔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해나갔다. 그 결과 하나님은 기름부음을 더해주시고 이전에 몰랐던 것까지 더 많이 주셨다. 그런데 주변의 일부 동료들이 외부의 압력과 핍박을 의식하여 이런 사역을 하는 것을 쉬쉬하거나 중도하차 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 은사의 조화
성령님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신 성령님의 은사에는 특별 은혜적인 은사-기적 행하는 은사-와 일반 은혜적인 은사-생활의 은사-가 있다. 복음을 제대로 전파하고 교회를 굳건히 세우기 위해 특별 은혜적인 고린도전서 12장의 기적 행하는 은사는 물론 로마서 12장 6-8절의 일반 은혜적인 생활의 은사 등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생활의 은사는 기적행하는 은사에 비해 화려하거나 센세이셔널하지는 못하지만 교회의 건덕과 삶의 향기를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될 소금과 같이 귀중한 은사다.
모든 교인이 방언이나 예언만 하고, 손님을 잘 섬기지 못하고, 잘 가르치지 못하고, 서로 권면하고 위로하지 못하고, 서로 구제하지 못하고, 서로 불쌍히 여기지 못하고, 잘 다스리지 못하면, 그 교회는 얼마 가지 않아서 혼란에 빠지거나 금방 무너지고 말 것이다. 기적 행하는 은사를 강조하는 사람들일수록 생활의 은사를 소홀히 취급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조심할 필요가 있다.
모든 은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성령이 주신 선물이다. 더불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야 한다. 신기하고 센세이셔널한 은사에 치중하는 사람들은 생활의 은사와 더불어 균형을 취해야 한다. 좌로나 우로나 한쪽으로 치우치면 항상 말썽이 나게 마련이다. 너무 신기한 것만 추구하여 ‘작은 일의 날들’(슥 4:10)을 소홀히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
반면에 일반 은혜적인 생활의 은사만을 강조한 나머지 특별 은혜적인 기적행하는 은사를 무시하지도 말아야 한다. '기적와 이적은 사도 시대에 끝났다'는 잘못된 신학으로 인해 특별 은혜적인 은사를 배격하고 심지어는 사탄의 장난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특별 은혜적인 은사들을 무시하면 교회가 형식적이고 율법적이 되기 쉽다. 신앙 생활이 무미건조하고 냉랭하며 전통과 고백 위주의 타성적인 신앙인이 되기 쉽다. 일상 생활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여서 정도 이상으로 학(學)이나 전통을 강조하다 보면 생동감이 있고 기쁨에 넘치고 신나는 신앙 생활을 하기가 힘들다.
신앙은 바른 교리와 신앙 고백의 뼈대 위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역동적이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내가 변하고 교회가 변하고 사회가 변해 가는 것 아닌가? 어느 하나를 강조하고 다른 하나를 무시할 때 교회라는 유기체는 영양 실조에 걸려 절름발이가 되거나 기능 장애를 일으킬 것이다.
◈ 정도의 차이
한 가지 덧붙이는 것은 기적 행하는 은사를 가졌더라도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수영을 하더라도 올림픽 금 메달급 선수가 있는가 하면 겨우 동네 앞의 개울에서 수영할 정도의 실력만 가진 사람이 있듯, 같은 은사를 가졌더라도 기름부음의 정도가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특별하게 강하게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비록 기적행하는 은사를 받았더라도 능력의 정도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특별하게 큰 능력이 나타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약하게 나타나는 사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강하게 나타나면 진짜이고 약하게 나타나면 가짜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존 맥아더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은,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한 방에 기적을 행하거나 병을 고쳤는데 오늘날의 은사자들은 여러 번에 걸쳐 병을 고치므로 가짜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그렇다면 베드로는 성령 받고 한 번 설교로 3000명이나 5000명을 회심시켰는데, 맥아더는 한 번 설교로 그렇게 한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의 설교는 가짜인가?
◈ 나가는 말
결론적으로, 특별 은혜적인 은사만을 강조하면 교회는 불건전한 신비주의와 몰현세적인 개인 중심의 신앙을 낳기 쉽다. 그러나 기적행하는 은사들을 무시하면 전통 바르고 교리는 바르지만 바른 체험이 결핍되어 생동력이 없고 그 결과 바른 삶이 따르지 못하는 죽은 정통의 교회가 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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