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3./금요일 혜린이와 함께,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전시명 : 혁명, 그 위대한 고통
‘20세기 현대미술의 혁명가들‘ 야수파 걸작전
명절 연휴에 미술관 가는 것은 큰맘 먹고 가야 된다. 전시회를 좋아하지 않는 가족들과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가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일을 실행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집에서 쉬고 큰 아이와 함께 집에서 2시에 출발했다. 생각해보니 도슨트 시간을 확인 못했다. 3시는 놓치고 5시 타임을 듣자하고 길을 나섰다. 버스타고 전철을 세 번 갈아타서 내린 곳이 광화문역이었다. 오랜만에 와본다. 지하에 있는 미술관입구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줄을 서서 감상을 하고 있었다. 미술관이 상대적으로 큰 규모는 아닌 것 같았다.
야수파에 입체파까지 소화를 시키기에는 좁다. 좁은 공간을 둘로 나눠서 관람하니 좀 답답하기는 했다. 사람물결 따라 밀려가듯이 보아야 했다.
현대미술의 창시자 하면 마티스, 앙드레 드랭, 파블로 피카소가 가장 떠오른다.
현대미술에 대해 좀 더 공부를 하고 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세시간 동안 돌면서 보는 감상은 시간가는 줄 몰랐다. 테마별로 적힌 글귀들은 나의 뇌를 때리기에 충분한 감동과 충격 그 이상이었다. 정치적인 혁명이 아니라 예술의 세계에서 혁명이었다. 그 혁명을 이끌었던 젊은 작가 청년들, 화상들의 앞서가는 생각, 예술의 세계는 그야말로 창작의 산실이었고 철학적으로 자신의 생각들을 그림 속에 녹아들게 했다.
마지막 검은 휘장을 제치고 나오니 그림 그리는 코너가 있다. 도록 파는 전시판매장도 카메라사용을 금지했다. 멋모르고 몇 컷트 건져오기는 했지만..
에디션 컬렉션의 한정판매인 드랭의 300장의 282번째 ‘빅 벤’과 마티스의 300장의 126번째‘모자 쓴 여인’을 2만오천씩 두 장, 냉장고 자석을 구입했다. 전시회가서 최고로 많이 지출했다. 같이 간 아이가 내게 준 큰 선물이었다. 나에게 준 건 곧 너희들의 것이니 가보로 물려주겠다는 우스갯소리도 했다.
못내 아쉬운 발걸음을 떼고 밖으로 나오니 어느 새 어둠은 짙게 깔리고 과거로의 시간여행에서 2019년의 9월 현재에 내렸다. 한바탕의 꿈을 꾸고 나오는 듯 몽롱한 시간이었다.
현대미술의 창시자들
마티스
앙드레드랭
파블로 피카소
드랭
시대를 알아야
미술이 보이고 미술을 알아야
미래가 보인다.
나와 아내의 평생에 걸친 수집 활동의 모든 노력을 전부 기증합니다.
그리고 박물관들을 위한 것이 아닌 모두의 미술관이 되길 바랍니다.
피에르 레비
라코스테부부
현대사회의 문맹은 글을 못 읽는게 아니라 이미지를 못 읽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 독일철학자 1892-1940
20 세기이전은 보이는 세상을 탐구하고 재현
20세기이후로 보이지 않는 세상을 탐구하고 재현
사람들이 못보는 움직임을 잡아낸 독립적인 인상주의화가
에드가 드가1834-1917프랑스
서 있는 두 남자
조르주 쇠라 신인상주의 창시자
제목 : 교회, 낚시꾼들
예술은 표절 아니면 혁명이다 -폴 고갱-
젊은 타히티인-서양복장을 한 한 어린 혼혈소녀를 그려 자본이 짓밟는 시대를 보여줌
자네는 회화를 단순화 시킬 걸세
귀스타브 모로(앙리 마티스에게)
코르시카풍경.1898년작
빛과 색채를 삼킨 야수파 창시자
책 읽는 여인.1922.3년작
루이발타.바닷가의 여인과 아이들
펠릭스 발통.실내에서 바느질하는 여인
피에르 보나르.최후우 인상주의 화가, 작품-양귀비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다
정신혁명 - 지그문트 프로이드
과학혁명 - 아인슈타인
미술혁명1야수파 - 앙리마티스
미술혁명2입체파 - 피카소
패션혁명 - 샤넬
건축혁명 - 르 코르뷔지에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야수파화가의 그림은 르네상스시대부터 이어온 미술의 철저한 규칙이었던 원근법. 명암법이 무시 된 것은 물론이고, 사물들이 눈에 보이는 고유색채가 아닌 전혀 다른 색채로 칠해져 있었다. 세상의 없던 색들의 향연이었다.
앙드레 드렝.야수파 창시자
나는 혁신하지 않는다. 전염시킨다.
피카소-나는 어린이처럼 그리기 위해서 평생이 걸렸습니다.
모리스 드 블라맹크, 야수중의 야수
나는 코발트색과 주황색으로 에콜 데 보자르(국립 미술학교)를 단숨에 불태워 버리겠다.
내가 그림에 재주라도 없었다면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나는 폭탄을 던질 게 뻔하고 교수대에 보내졌을 게 뻔하다
모든 것이 빛나고, 모든 것이 색이고, 모든 것이 빛이었어요. -앙리 마티스
화가들의 성지 콜리우르
드랭 의 아버지를 설득한 마티스
우리는 콜리우르에 찬란하게 '빛' 아래에서 도저히 조용하게 변화를 실행하기란 불가능 했어요.색채들이 곧 다이너마이트 뇌관이었니까요, 앙드레 드랭(마티스와 콜리우르를 다녀온 것에 대한 회상)
하늘은 왜 반드시 파란색이어야만 하나?
고독하고 우아한 야수 알베르 마르케
왜 나무는 '붉은색'이면 안되는 거지?
사물의 고유색을 바꿔버린 청년들
나는 내 시간과 활기차고 몹시 흥분되는 내 삶을 열렬히 사랑한다.
이, 삶은 그림보다 아름답다. -키스 반 동겐
내면의 관능미를 깨운 야수
샤임 수틴. 모딜리아니가 가장 아낀 화가
모리스 마리노의 그림 속에는 우리의 아름다운 기억이 살아 있다(피에르 레비)
빟을 사냥하는 야수-라울 뒤피
뒤피는 행복과 즐거움 그 자체이다(거트루드 스타인)
현대미술의 주인공들에게 조명을 비춰준 결정적인 조력자 '화상' 스타인 여사
화가들의 실험대상이 되어준 화상
화가들을 키워낸 최고의 비책
사교계의 여왕-여왕이 펼친 현대미술
혁명적인 화상,칸바일러
입체파를 키워낸 큰 손
전쟁은 예술가들에게 지옥보다 더 깊은 고통이었습니다.
피카소 우리가 아무리 싸울 때 싸우더라도, 가능하면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해
만약 우리 중 하나가 죽으면 남은 사람은 어느 누구와도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는 걸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지-앙리 마티스
치열하게 경쟁하고 함께 성장한 세기의 라이벌
그들은 경쟁하면서 서로의 '성장'을 이끌어내고 있었다-거트루드 스타인
“피카소! 내가 화단에 발 들이게 해줬더니 이렇게 내 뒤통수를 쳐? 이 벌레같은 놈!”
“마티스, 착각하지 마세요. 이제 당신의 시대는 갔다고요!”
“피카소는 못 말리는 도둑이라네”-마티스
마티스의 후원을 가로채는 야심 강한 피카소
사교계의 여왕 거트루드의 집에서 피카소와 마티스는 처음 안나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20세기의 미술을 변화시킨 혁신적인 화풍에 대한 영감을 서로 주고받았고, 나중에는 열띤 경쟁을 하며 서로의 성장을 이끌어낸 역사적장소이기도 했다. 스타인가는 대중의 싸늘한 비판을 받았던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을 단번에 구매해 피카소를 자극했다
그림이 다 상자네?
그들은 괴상한 사각형을 그려놓고 그림이라 우긴다
우리 이제 혁명을 시작하는거야-조르주 브라크
낙선작의 주인공, 조르주 브라크
전쟁이 가져온 통찰
독자적인 입체파를 확립한 브라크
야수파, 입체파 이름을 만든 바로 그 사람
비평가 루이 복셀
'욕'에서 시작한 큐비즘이라는 이름
'비평'과 '익명'이 만들어낸 '브랜드'
영혼우 두려움을 극복하는 힘-프리미티비즘
마티스에게 가면을 소개받은 피카소-큐비즘의 시초가 되다(아비뇽의 처녀들)
예술이 아니었지. 그건 바로 마법이었어.
가면으로 숨기고픈 인간의 '두려움' 두려움을 극복하는 '힘'
20세기 형태혁명
입체파 세상의 형태를 바꿔버린 미술의 혁명가들
화상들은 화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착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그들과 함께 고마하고 두려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변화하지 않으면 곧 외면 당하는 세상의 규칙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헨리 하이덴,세잔의 지성과 사무엘ㅈ베케트의 성찰을 보여주는 화가.
인물이 있는 정물
작가가 두 가지 큰 욕망. 진실과 거짓 사이에 있는 갈등에서 견뎌낸 작가 자신의 삶, 그 자체를 말하고 있다
시점이 어긋난 세잔의 영향을 보여줌
레오폴드 쉬르바주
앙드레 마르
조르주 카스
앙드레 보댕
야수파를 지나 입체파 미술사에서는 아이러니하게 드랭 의 가치를 배제해왔지만, 실제로 드랭은 피카소 이전에 입체주의를 창안한 위대한 예술가이다. -오장팡, 르 코르뷔지에
드랭은 세잔 이후 나를 가장 자극했고 열광시켰으며, 나를 깨우치게 한 예술가이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드랭은 창조자, 발견자, 호기심으로 가득 찬 그리고 선천적으로 문화적 사명을 가진 예술가라고 나는 감히 얘기하고 싶다. 하지만 드랭은 자신이 발견한 것을 스스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지도 못했다. 그는 현대미술의 모험가이며 콜럼버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 발견한 것들로 이득을 얻었던 사람들은 정작 다른 사람들이었다, -거트루드 스타인
작품 : 무고한 사람들의 학살.브뤼겔
아미엥
앙드레 드랭은 내 인생의 최고의 친구였습니다. -피에르 레비-
죽어서도 지켜내고 싶었던 볼라르의 비밀유산
<빅 벤 특별관>
산업화의 상징인 ‘빅 벤’
야수파 최고의 걸작을 탄생시키다.
빅 벤, 그 위대한 시작
20세기 초 당시 예술가들에게 시대의 상징이자 새로움의 상징인 ‘빅 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화폭에 담아내는 것이 화두였다. 원래 궁전으로 사용되었던 영국의 ‘빅 벤’은 세계 최초 의회로 바뀌었고, 높은 시계탑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시대적 변화를 상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런던은 산업혁명으로 폭발적으로 인구가 늘고 있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쏟아지는 태양은 시대의 강렬한 에너지를 의미하며, 강조된 시계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말하고 있다. 앙드레 드렝은 전에 없던 시각으로 20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빅 벤’의 시대적 메시지를 탄생시킨 것이다. 속도를 내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현재와, 미래의 찬란한 기대가 녹아져 있는 이 작품은 야수파의 최고의 걸작으로 남았다.
‘화가에게’ 풍경이 아닌 ‘새로운 시대’를 그려달라는 ‘혁명적인 화상’
‘세상의 시간’을 ‘깨우는’
‘빅 벤’의 종소리
1884년 미극 워싱턴 국제회의에서는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하는 ‘그리니치 표준시의 개념을 도입해, 지금까지 런던 그리니치가 ’기준 시간‘으로 사용되고 있어. 전 세계 모든 국가가 같은 시간 속, 하나의 영역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또한 과거에도 울렸고 지금 현재와 미래에 울릴 빅벤의 종소리는 늘 시대의 ’새로움‘을 상징하고 있다.
시간이 곧 ‘생명’
시간과 꿈의 상징 ‘빅 벤’
과거 농경사회일 때는 일상생활에서 ‘시간’의 개념이 비교적 엄격하지 않았지만, 19세기 이후 산업시대에 들어와 철도가 놓이고 선박산업이 활발해진 시대가 되어 ‘시간’의 개념은 매우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지역별, 국가별로 표준 시간이 단 0.1초만 차이가 나도 철도와 전기통신의 운명에 막대한 차질이 빚어져 막대한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부정확한 시간 측정으로 인한 인명피해 또한 끊이지 않게 되자 세계 시간의 표준화는 더욱더 ‘절박’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불타는 궁전이 ‘산업화’의 ‘상징’이 된 사건
1529년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궁전은 큰불이 났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궁전을 다시 새로 설계하게 되면서 그곳은 세계 최초의 국회의사당으로 바뀌어 새로운 옷을 입었다. 이후 1834년에 또 한 번의 큰 화재를 겪어 ‘궁’의 대부분이 불타버리는 바람에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재건’하면서 1859년 북쪽 끝에는 ‘빅 벤’이라는 이름의 커다란 시계탑이 세워지게 되었고 그때부터 현재까지 빅벤의 종소리는 160년간 쉬지 않고 울리고 있다. 2016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에 맞춰 ‘엘리자베스 타워’로 개명을 했지만, 여전히 ‘빅 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세상의 모든 ’종소리‘
‘빅 벤’이 바로 그 주인공
빅 벤에는 13톤에 달하는 커다란 종이 15분마다 울려 시간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 소리는 기차나 자동차 경작소리만큼 크게 울린다. 전 세계적으로 영화에서 나오는 종소리나, 학교에서 수업종으로 익숙하게 들었던 그 종소리가 바로 빅 벤의 종소리이다. BBC 라디오에서는 아직도 12시, 6시, 9시마다 빅 벤의 종소리를 틀어주며 세계의 시간을 알려주고 있다. 신데렐라에게 12시가 되면 알려주는 종소리도 역시 빅 벤의 종소리다.
역사를 품은 위대한 ‘빅 벤’
전쟁의 ‘슬픔’속에서도 쉴 수 없는 ‘종소리’
과거, 빅 벤의 종소리가 울리면 런던 시민들과 런던을 여행 중인 사람들 모두가 일제히 시계를 다시 맞추곤 했다. 세상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빅벤의 종소리, 빅 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이 폭격당하는 그 참혹한 순간에도 정시가 되면 더욱 큰소리로 울어가며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것을 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