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활산성과 신라왕경숲
경주에 사는 사람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다. 이 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고 싶은 지역으로 경주가 첫 손가락에 꼽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는 발표에서도 증명이 됨직하다. 그래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사철 이어지고 있다. 쉬고 싶다는 생각, 휴식과 함께 무엇을 채우고 싶다는 힐링에 대한 갈망을 경주에서 어느 지역 보다 훨씬 풍족하게 충족시킬 수 있다.
경주 어디를 가든 역사문화를 통한 힐링을 하기 좋다. 특히 경주보문관광단지에서는 현대적 시설들이 감각적으로 즐기기에 편하게 준비되어 있다. 그중 명활산성과 신라왕경숲은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보면서 새로운 생각들을 울궈내는 흥미진진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명활산성을 둘러보는 일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다.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고, 신라왕궁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반란의 근거지지가 되기도 했던 명활산성, 역사의 터와 현대인들의 힐링을 돕기 위해 조성한 공원 신라왕경숲을 돌아보면서 주변에 조성된 먹거리촌을 더듬어 본다.

◆명활산성
명활산성은 경주 보문단지 남서쪽에 위치해 있다. 명활성의 서쪽과 남쪽에서 신라왕궁이었던 월성은 지금도 육안으로 가깝게 보인다.
명활성은 정확하게 언제 축성되었는지 기록은 없다. 지금까지 남은 흔적은 토성 5㎞에 석성 4.5㎞로 9.5㎞의 연장선이 확인되고 있다. 토성을 비롯한 명활성에 대한 전체 정비복원사업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 북문지 일부가 발굴돼 당시 흔적이 드러나게 복원되어 있을 뿐 신라왕경복원사업 등에 밀려 명활성 복원정비사업은 언제 제대로 진행될지 기약할 수도 없다.
명활산성을 둘러보는 일은 흥미롭다. 명활성이 가진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험하지 않은 산허리를 따라 산책하면 2시간이면 석성구역을 힘들지 않게 둘러볼 수 있다. 석성이 축조되었던 길을 따라 걷다보면 숲속의 맑은 공기가 폐부 깊숙하게 들어와 머리까지 시원하게 정화된다. 6월 산행이라면 가끔 산딸기 복분자를 만나는 행운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명활산성이 가진 역사적 이야기는 여러 가지다. 삼국유사는 신라 육촌 중의 하나인 금산가리촌 촌장인 배씨 시조 지타공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으로 기록하고 있다. 산성 내부에 마을이 있었던 흔적도 더러 노출되고 있지만 아직 규모와 구조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자비왕에서 소지왕때까지 13년간 왕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자비왕 2년인 459년에는 왜적들이 전투선 1백 척을 끌고 동해안으로 쳐들어와 월성을 에워싸고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명활성은 동해쪽에서 침략해오는 왜병에 대비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중원대학교 서영교 교수는 “박혁거세부터 소지왕 22년(500년)까지 삼국사기에 왜와 관련된 기록이 있고, 이중 왜의 침략에 대한 기록이 36회가 있다”고 보고서에서 밝혔다. 삼국사기 기록 이외에 왜의 침략은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이어 431년 왜군이 신라왕경의 동쪽 바다에 상륙해 왕경으로 진군해 명활산성을 포위했다가 아무 성과 없이 물러갔다면서 명활산성은 신라왕경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월성을 수리하는 동안 명활성을 왕궁으로 잠시 사용했다고 삼국사기 등의 역사서에 기록하고 있지만 왜적과 고구려 침입에 왕이 명활성으로 피난했던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아직 명활산성 내부에서 왕궁의 흔적을 발견하지는 못해 숙제로 남아 있다.

◆명활산성과 비담의 난
명활산성은 645년 상대등에 취임한 비담이 염종 등과 작당해 647년 선덕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곳이다. 반란의 주모자가 상대등이었다. 상대등은 신라 최고의 관직으로 지금의 국무총리 격이다. 그래서 반란의 규모가 크고 사태도 매우 위급하게 전개되었다. 반란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즉위하는 등 왕실이 위기를 맞았다. 선덕여왕은 반란군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설과 나이가 들어 숙환으로 자연사했다는 설이 있다.반란은 김춘추와 김유신 등의 도움으로 진압되고, 비담 등 주모자의 구족을 멸했다.
비담의 반란은 단순한 왕위쟁탈전이 아니라 신라 정치사에서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신라는 법흥왕에서 진덕여왕 시대에 들어가면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정치사회이념으로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선덕여왕 이후는 귀족에 의해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와 가야 멸망 이후 신라의 새로운 김씨로 포섭된 가야왕실의 후손 김유신이 손을 잡고 이러한 정책의 중심인물로 부각했다. 이에 비담을 비롯한 귀족은 자신들의 위치가 불안하게 되자 불만을 대대적으로 표출한 것이 비담의 난이다.
비담이 난을 일으킨 원인에 대해 ‘여주(女主)는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주장의 대상을 선덕여왕으로 보고 비담을 의장으로 하는 화백회의에서 선덕여왕을 폐위하려 했다는 견해가 있다. 선덕여왕 11년에 백제로부터 서쪽 변경 40여개의 성을 빼앗기고 대야성마저 함락되자 당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당시 당 태종은 “여자가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이웃 나라가 업신여기고 쳐들어오는 것이므로 여왕을 바꾸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조건을 제시했다. 이러한 당 태종의 발언이 신라에 파장을 미쳐 화백회의에서 선덕여왕의 폐위를 결정하고 난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비담이 난을 일으킨 시기가 당 태종의 발언으로부터 4년이 지난 시점이라는 것과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는 와중에 진덕여왕이 즉위한 점 등을 들어 선덕여왕이 다음 후계자로 진덕여왕을 선정하자 화백회의에서 이에 대한 반발로 보기도 한다.

◆신라왕경숲
사람들은 도시로 길을 떠났다. 도시사람들은 지금 또 다시 농촌으로 회귀하는 성향을 보인다. 도시에는 빌딩이 있고 먼지가 있다. 그리고 돈이 많이 흘러 다닌다. 농촌에는 숲이 있고 맑은 공기가 있다. 그러나 돈의 그림자 보기가 쉽지 않다. 돈을 쫓아 사람들이 몰려갔다가 맑은 공기를 찾아 돌아오는 것이다. 삶의 굴레가 순환하는 과정이 도시와 농촌에서 드러나고 있다.
경주에는 도심기능과 함께 특이한 농촌의 모습을 보이는 아주 오래된 삶의 숲이 있다. 천 년 이상 묵었지만 마음을 맑게 하는 공기가 있다. 오래된 청량제를 찾아 힐링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줄을 지어 경주를 방문한다.
경주시는 맑은 공기를 만드는 작업을 한다. 돈이 흐르는 물꼬를 트는 것이다. 신라왕경숲이라 이름 붙이고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어 벌나비가 날아들게 하는 공정을 보문단지 입구 숲머리마을에 배치했다.
경주시는 2010년 구황동 숲머리마을 약 3만m² 부지에 분수대와 연못, 사각정자, 조형파고라, 벤치 45개소 등의 편의시설을 설치하고, 다양한 초목으로 공원을 조성해 ‘신라왕경숲’이라 이름 지었다. 공원을 조성한지 벌써 7년이나 되었지만 경주시민들도 잘 알지 못해 아직 찾는 발길이 많지 않다. 간혹 점심시간이나 오후 늦은 시간 정자에 몇몇이 둘러 앉아 담소를 나누거나 먹거리로 정을 나누며 힐링하는 사람들이 보일 뿐이다.
왕경숲 동서로 이어지는 끝부분에 주차장도 넓게 조성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서쪽에는 야외공연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공중화장실도 두 곳에 지어져 편의를 제공한다. 산책이라도 나서면 가운데쯤에 허리 비틀기 등의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고 왕복하면 1.5㎞ 정도 거리로 운동하기에도 적당한 코스가 된다. 소풍 나와서 산책 겸 운동을 하거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며 힐링하기에 좋은 곳으로 추천한다.

◆신라왕경숲 주변의 먹거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아무리 훌륭한 경치라도 배고프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경주는 역사문화관광도시답게 식당들도 다양한 메뉴로 특색 있는 곳이 많다. 거기에 걸맞게 조경과 인테리어도 신라천년고도 이미지를 살려 독특하게 꾸며져 시선을 끈다. 주차장 또한 대부분의 식당에 넓게 조성되어 있다. 신라왕경숲에서부터 시작되는 먹거리촌이 딱 그러하다.
경주보문단지로 진입하는 길목에 신라왕경숲이 공원으로 조성돼 있고, 왕경숲이 시작되는 곳부터 좁은 도로를 따라 다양한 먹거리로 무장한 식당촌이 형성돼 있다. 경주 어디에서든 쉽게 맛볼 수 있는 멧돌순두부와 전통 한정식, 한우를 재료로 하는 고기집, 해물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요즘 어디를 가든지 번창하는 분위기 있는 커피숍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숲머리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전통멧돌순두부 입간판이 높게 서 있다. 넓은 주차장을 마당으로 아담하게 지어진 한옥에 방송국 출연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만큼 손님들도 줄을 잇는다. 이어서 오른쪽으로 전국 최고 한우 사육두수를 자랑하는 경주답게 한우암소갈비살, 한우양념갈비살을 주메뉴를 하는 삼도숯불갈비가 있고, 맞은편으로는 민박집들도 평화로운 한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이어 길을 따라 돌솥밥정식집인 마루밥상이 간강게장과 두루치기, 파전 등의 메뉴를 걸어두고 손님을 부르고 있다. 마루밥상 안쪽 골목으로 소백산꼬마동자란 점집이 식당가에 이색적으로 자리하고 있고 그 옆으로 옛고을토속순두부집과 돌솥밥과 영양밥을 메뉴로 하는 달개비식당이 있다. 조선시대 지체높은 양반집 대문처럼 기둥이 높게 선 이조한정식 간판이 멀리서도 시선을 잡는다. 주차장이 특히 넓은 집이다. 또 기와골멧돌순두부집 바로 옆으로 찻집 뭉클은 ‘사랑 뭉클하게 고백하라’는 제시어를 걸어두고 연인들을 손짓해 부른다.

맞은편 민물매운탕 전문점인 포구나무집이 있고, 오리고기전문점인 나현숯불생오리집을 지나면 갓 올린 초가지붕을 연상케 하는 지붕이 특이한 토함이란 식당이 고등어와 갈치구이, 고등어조림정식 등으로 손님을 맞는다. 또 커피에 초콜렛을 곁들인 비천 커피숍, 무진장 한우떡갈비, 한우 명가숯불, 반월매운탕이 줄을 이어 들어서 있고, 닭 코스요리 전문점인 아리랑이 샤브샤브와 백숙, 영양녹두죽의 메뉴를 자랑하고, 그 옆으로 조림명가인 두갈고(두부, 갈치, 고등어)와 이름도 특이한 ‘커피와 춤을 추는 남자’ 커피숍이 나란히 있다. 큰 도로가 접해있는 끝부분에 명활산가든과 한우리가든, 산성갈비가 한우를 메뉴로 사이좋게 붙어 있다.
반대쪽 큰길가에도 이름난 식당이 있다. 경주를 지나는 7번국도에서 보문단지로 접어드는 진입도로를 따라 2㎞ 정도 진행하다 보면 보문뜰, 보문쭈꾸미, 서라벌순두부 식당이 넓은 주차장 안에 한우불고기와 떡갈비, 순두부, 쭈꾸미 등의 대중적이면서 특별한 맛을 선사하는 메뉴로 휴일이면 손님들로 북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