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이해와 선교
과목명: 현대선교론 세미나 Th. M. 2차
교수명: 박영환교수님 이 동 현
목 차
Ⅰ.들어가는 말............................................................2
Ⅱ.오늘날의 이슬람 세계.........................................2
1.세계 속의 무슬림의 형편
2. 무슬림의 지역적. 언어적 구분....................................3
3.이슬람교의 확장
4.중동지역의 이슬람교........................................................4
5. 한국교회 해외선교의 문화권별 사역분류
Ⅲ.이슬람의 의미와 근본.........................................5
1.이슬람이란 무엇인가?
2. 이슬람의 의미와 무슬림
3.이슬람의 역사적 전개.....................................................6
4.이슬람법의 성립...............................................................7
5이슬람교의 신앙
6. 이슬람의 근본..................................................................8
IV.모하메드를 중심으로 본 이슬람교의 성립 배경과 과정
1. 이슬람 이전의 아랍부족사회.....................................12
2. 이슬람 발흥시기의 메카..............................................13
3. 모하멧드
4. 박해
5. 히즈라..............................................................................14
6. 바드르 전투와 우후드 전투
7.한다꾸(참호) 전투와 모하메드의 말년.....................15
V.이슬람세계의 발전............................................16
1. 이슬람권의 확대
2.현재의 세력....................................................................17
3.한국에서의 전래와 현황
4.이슬람과 서방세계와의 갈등
5.이슬람 부흥운동...........................................................18
Ⅵ. 효과적인 이슬람 선교전략...........................24
1.선교사의 파송과 그의 삶...........................................25
2. 기존선교의 대열에 끼어 듬.....................................26
3.중동지역에서의 선교전략............................................27
4. 장기선교활동을 위한 선교의 기지확보.................30
5. G.C.C. 국가에서 가능한 선교전략
Ⅶ. 미래를 향한 이슬람선교의 비전..................31
1. 세계선교의 흐름을 통한 아시아 교회의 선교시대
2. 무슬림 장벽을 넘어서서............................................32
3. 아랍종족 선교의 희망
4. 회교원리주의와의 영적 투쟁...................................33
Ⅰ.들어가는 말
슬람은 단순히 종교적 신념자체를 넘어서 인간의 삶의 양식인 동시에 사회. 종교. 정치. 예술. 철학. 문학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문화 복합체인 것이다. 게다가 8세기부터 10세기 초반까지는 서구의 기독교 문명을 능가하는 당시 인류사의 최고 황금기와 문화수준을 이루었던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슬람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고 피상적으로만 만족한 이유는 서구인들의 입장에서 평가한 열등한 이슬람을 그대로 받아들인 데 원인이 있다. 이러한 이슬람교가 우리에게 생소한 종교라 할지라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슬람교도들의 단편적인 신앙생활만 들여다보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들도 나름대로 1,350여년이 넘는 종교생활을 영위해 온 만큼 우리는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속성과 그 역사적인 변천, 발전 및 전개과정을 올바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3-4)".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16)".
비록 많은 심판들이 모슬렘들에게 다가서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지금 이 세계에는 11억 5천 4백만명 이라는 숫자의 모슬렘들이 있으며 그들은 세계인구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의 80%는 47개 국가에서 다수 그룹을 형성하고 있고 그들의 20%는 다른 나라들 가운데 소수 그룹으로 살고 있다. 한국에도 한국동란에 참전한 터키군에 의해 이슬람교가 전파된 후 1970년대의 중동 붐을 타고 이슬람교가 급속히 팽창 이미 전국에 5개의 모스크와 4만명이상의 신자들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90년대 초반부터 밀려오기 시작한 외국인 근로자의 수가 96년말 현재 20만 명에 이르고 있는데 이들 중의 상당수가 모슬렘들이다.
본 소고에서는 오늘날의 이슬람세계의 현실과 이슬람에 관하여 알아보고 이에 대하여 이슬람 선교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앞으로의 선교전략과 방향들을 제시해 보도록 하겠다.
Ⅱ.오늘날의 이슬람 세계
1.세계 속의 무슬림의 형편
1900년대부터 급속히 성장해온 이슬람교는 1990년도에 이르러 그 수효가 1934년에 2억명에 불과했으나 그 후 56년동안 500%이상 증가하여 11억의 신도수로 기독교를 바짝 쫓아오고 있다. 같은 기간동안 기독교는 47%의 증가율을 보였을 뿐이다. 이슬람교는 발생초기부터 선교적인 종교로 무서운 속도로 급부상하고 있다. 근래에까지는 주로 중동,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지로 진출해 왔지만 최근에 이르러 유럽과 미주 등지에도 소리 없이 늘어가고만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최근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136,000명인데 비해 무슬림 선교사는 1,760,000명이나 된다. 이것을 비율로 따진다면 기독교는 한 사람이 개종할 때 무슬림은 144명이나 증가하는 셈이다. 현대 세계에서 가장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종교가 있다면 바로 이슬람교이다. 비공식적인 통계상으로 약 12억을 넘어서고 있다.The Church Around The World의 통계에 의하면 지난 50여년 동안에 기독교는 47%의 성장을 보였고 불교는 63%,힌두교는 117%의 성장을 보였는데 이슬람교는 500%의 성장을 가졌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무슬림이 급성장 하는 이유는 거의 대부분 지역 인구 증가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교의 성장 요인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첫째가 자연적 증가인 출생률에 따른 성장이요, 둘째는 유럽과 북미에서의 이민 성장이요, 셋째는 아프리카 지역과 인도네시아 지역에서의 개종이다. 여하튼 이슬람교 인구는 세계 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선교 전문가들은 이 같은 추세가 계속된다면 2천 년대에는 이슬람교가 전세계의 인구 26.9%를 차지하게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2. 무슬림의 지역적. 언어적 구분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세력 중 기독교에 대적하는 가장 큰 세력은 바로 이슬람교이다. 현재 조사에 의하면 무슬림 인구는 매년 5천만명씩 증가하고 있고 이들은 유럽 및 미주 지역에서도 탄탄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무슬림 지역은 대개 아랍어권과 터어키어권,이란어권 등 3개 지역으로 나눌 수가 있다. 먼저 아랍어권은 20여개 국가에 사는 인구 2억 명 이상이 되며 터어키어권은 아제르바이잔, 서부 중국 등 몇 개국에 불과하지만 인구는 1억 5천만명이 되며 이란어권은 타지크스탄,아프카니스탄 등의 지역으로서 인구는 7천만 명에 달하고 있다. 물론 이 지역 외에 기타 언어권으로 인도 동부 방글라데시의 1억, 인도네시아의 1억 7천만,말레이지아 등 아시아 전역과 유럽에도 무슬림은 상당한 세력을 확보하고 있다. 크게 나누어 볼 때 3개의 언어 지역으로 볼 수 있으나 다양한 민족, 수많은 언어를 가진 무슬림 종족은 약 천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무슬림은 선교의 대상국으로 언어의 장벽이 가장 높은 미전도 지역의 핵심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 터어키와 페르시아 진영 - 이 지역의 모슬렘들은 주요종족권으로 나누어진다. 터키족이 대다수를 이루고있는 나라는 터어키와 중앙아시아의 4공화국들 즉, 카작스탄, 우즈벡스탄, 커드스탄, 터크메니스탄과 코카서스족의 아저바이잔이다. 소수 그룹의 터키족으로는 이란, 아프카니스탄, 불가리아, 싸이프레와 여러 나라의 이민자들을 포함하고 있다. 페르시아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나라들은 이란과 타직스탄이다.
2) 인도, 말레이와 아랍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 인도대륙에는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 지역권에는 3백만명이 넘는 사람들로 구성되있다. 극동 쪽에는 말레이지아, 브르네이와 인도네시아의 소수족이있다. 말레이족들은 싱가폴,필리핀,파푸아뉴기니아 등으로 흩어져있다. 중동 지역과 북부 아프리카에는 아랍어를 사용하는 21개 나라들이 있다. '모로코,마우리타니아,알제리아,리비아,튀니지아,이집트,수단,소말리아,지브티,요르단,레바논,시리아,이라크,쿠웨이트,바레인,콰타,아랍연합,오멘,예멘,사우디아라비아,이스라엘 영토인 가자와 웨스트 뱅크가 추가된다.
3) 사하라 지역의 아프리카 사람들 - 여기에 속한 나라들은 나이제리아,니거,체드,세네갈,말리,기니아,시에라 레온,감비아,코모로섬,프랑스 영토인 마이욧이다. 여기에 추가되는 그룹은 이디오피아,탄자니아,버르키나,파소,아이보리 스코트,말라이토고,베닌,카메룬,리베리아,기니아,비사우,마우리 티어스섬에 많은 수의 모슬렘 소수족들이 살고 있다.
3.이슬람교의 확장
역사적으로 이슬람교가 성장한 시기를 분석해 본다면 세 시기이다. 첫 번째 시기는 마호메트가 죽은 직후 유럽이 정복되었을 때이며,두번째 시기는 터키를 통하여 다시 한번 유럽을 정복한 중세기이고, 세 번째 시기는 오일 위기를 가져오면서 그들의 세력이 확장되는 때라 할 수 있다. 이슬람교는 더 이상 중동 지역의 종교만은 아니다. 대표적인 기독교 국가 미국에서도 이슬람교는 주요 종교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슬람 연구소의 이산바그비는 그의 조사에 의해 현재 미국의 이슬람교도는 4백만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의 수도 1천 2백여 개에 달하고 있는 실정이다. 메사추세스 대학 이슬람학과 교수인 이븐 하다드는 이슬람교의 성장률이 이 같은 속도로 지속될 경우 유대 교도들의 수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영국 왕립 지리 학회가 최근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유럽내의 이슬람교도들은 모두 7백 50만 명 정도이다. 프랑스에서는 가톨릭에 이어 이슬람교가 제2의 종교로 자리잡았고 영국의 경우 국교인 성공회와 가톨릭에 이어 제3의 종교로 부상하고 있다. 프랑스 마르세유시의 경우 인구의 4분의 1 가량이 무슬림이고 그들이 유럽 선교의 교두보로 삼고 있는 영국의 경우 수도 런던에만 4백여개의 모스크가 있다.
최근에는 소련이 무너지면서 러시아 공화국 내에 슬라브계 민족국가가 공동체를 이루며 5-6개의 새로운 이슬람국가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 우리 나라에도 서울, 부산, 전주, 안양, 경기, 광주에 5개의 이슬람 사원이 설립되었고 약 4만 명의 한국 무슬림이 있어서 다양하고도 구체적인 활동을 가지고 포교하고 있다. 전세계의 무슬림은 '무슬림 세계 연맹'.'이슬람 기금 재단'등 중동 석유 부국들로 이뤄진 기구들로부터 엄청난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유럽 및 아프리카 지역의 이슬람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회교 사원 유럽 위원회는 유럽 전역을 가청취권으로 하는 무슬림 방송국 건립을 계획 중에 있다. 공산권이 무너진 현대 이슬람 지역은 기독교 선교의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4.중동지역의 이슬람교
중동은 지리적으로 독특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3대륙이 교차하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이는 과거나 오늘이나 세계 전략상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는 길은 중동을 통하여야 한다. 이는 유럽 세력의 관심이 대상이 되었으며 특히 영국은 생명선인 인도를 지키기 위하여 중동에 대한 관심이 컸었다. 러시아는 흑해를 통하여 지중해로, 인도양으로 가기 위한 남진 정책을 취하여 왔다. 유럽 세력들은 아시아로 가기 위하여,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하여 오늘날의 폴란드가 유럽을 지키는 방파제 역할을 하듯이 중동이 필요하였다. 영국은 인도의 안보를 위하여 중동을 전략 개념으로 인식해 왔다. 이처럼 중동은 언제나 대륙 세력인 소련과 해양 세력인 유럽의 각축장이 되었다. 오늘날은 유럽의 역할을 미국이 하고 있다. 이러한 중동은 4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는 지역이다.
1) 세계 무슬림 12억의 중심지
2) 이슬람 성지의 지역
3)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서 이슬람 종교철학 대 기독교의 지역
4) 석유의 생산지
위의 네 가지 특성을 보았을 때 모든 국가가 외교정책에서 중동을 외면할 수가 없게 된다. 또한 기독교 선교 전략적 측면에서 볼 때 중동 지역은 기독교 선교의 저항적인 지역(resistant belt)으로서 주로 이슬람교 국가들로 형성되어 있다. 선교적 의미에서 미복음화(unevangelized)지역이요, 미전도 (unreached)지역이요,10/40창의 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중동의 이슬람국가는 선교사들의 비자를 제한하는 나라들로서 기독교 선교 활동이 금지되어 있다. 회교 이외의 어떤 종교의 예배나 종교 활동도 종교법에 의하여 금지되어 있다. 기독교 활동이 전면 금지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외국인에 의한 선교활동이나 외국으로부터의 종교서적 반입 및 반포 활동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이슬람교 국가군인 중동 국가들은 오직 이슬람교만이 유일한 종교로 생각하고 있는 반기독교적 세력 국가들이기 때문에 번거로운 법률적인 조문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들 국가들의 헌법에 나타난 종교 관계의 조문의 특성은 헌법 제1조에 "이 나라의 종교는 이슬람교이다"라고 밝히거나 신앙의 존중, 예배의 자유로운 행사를 보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항 바로 뒤에 다음과 같은 조항이 반드시 뒤따른다. "누구든지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민적 통일, 공화국의 제도와 국민의 일체성의 원칙을 이해하면서 위의 제 권리와 제 자유를 행사할 수 없다"라고 한다. 바로 이러한 금지법으로 이루어진 이슬람교 나라들이 중동 지역이다.
5. 한국교회 해외선교의 문화권별 사역분류
한국교회 해외선교의 사역을 문화권별로 분류해 보았을 때 설문에 응한 선교사의 49.6%가 기독교 문화권에서 사역한다고 대답했으며, 그 다음으로는 불교권 22%, 회교권 21%등의 순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한국 선교사의 다수가 미전도 지역의 개척선교보다는 이미 교회가 있거나, 복음을 들을 기회가 있는 지역에서 사역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선교지가 개방지역(선교사의 입국을 허용하는 지역)인가, 아니면 제한지역/창의적 접근지역(전통적인 개념의 선교사의 입국을 제한하는 지역)인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50.4%가 비기독교 국가에서 선교하고 있음은 대단한 선교의 열풍이다.
Ⅲ.이슬람의 의미와 근본
1.이슬람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슬람은 종교가 아니다. 사람들이 곡해하는 바와 같이 개인의 생활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도 아니다. 이슬람은 인간이 완전하게 사는 방법이고 인간 존재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것이다. 이슬람은 세상만사에 걸친 즉, 개인생활에서부터 사회, 물질, 도덕, 경제, 정치, 법률, 문화, 국가문제에 이르는 안내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슬람은 종교. 세속 쌍방에 걸쳐 전적으로 합일된 생활방식이며 신앙의 자세임과 동시에 예배의 방법이고 거대하며 완전한 법체계이며 문화, 문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교의 역사는 6세기경 아랍에 살고 있었던 모하메드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이슬람교인들은 주장한다. "태초에 하나님이"로 창세기에 시작되어 있으며 코란경도 이에 동의하고 있다. 성경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라"라고 쓰고 있다는 것이다. 학문적으로 "알라"는 단일신을 의미하며 유일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코란은 결코 무하마드에 의해서 쓰여진 성전이 아니다. 코란이란 말의 뜻은 "읽는다"는 것이고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신이 무하마드에게 계시한 말을 그가 읽었던 것이다. 근대 이슬람 학자로서 뛰어난 사상가인 퍼즐러 라프멘은 코란에 대해서 "순수하게 신성한 말씀이며 신이 예언자 무하메드의 마음속 깊이 말하신 말씀이다. 그 성스러운 말씀은 예언자의 마음을 통해서 솟아난 것이지만 예언자 자신은 한낱 인간일 따름이고 신성한 존재는 아니다" 라고 말했다. 코란이 아무리 신성한 것이라 하지만 그것이 성서일수는 없다. 그 말씀 자체가 신성한 것이고 신격의 일부이다.
2. 이슬람의 의미와 무슬림
이슬람이라는 어휘는 평화, 순결, 순종 및 복종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아랍어의 "쌀라마"라는 동사 어근에서 파생된 것이며 종교와 샤리아(이슬람법)의 차원에서 본 이슬람의 개념은 창조주 절대자의 목적과 의지에 순종하고 창조주의 법칙에 복종한다는 뜻이다. 언어적 측면에서 본 이슬람의 의미와 그리고 종교와 샤리아 측면에서 본 이슬람의 의미가 제시하듯이 인간의 진정한 현세의 평안과 영원한 내세적 평온은 창조주의 의지에 순종하고 창조주의 법칙에 복종함으로써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이슬람의 근본핵심이다. 한편 무슬림이라는 의미는 이슬람을 믿고 따르는 인간, 즉 창조주 절대자만을 믿고 순종하며 창조주의 법칙에 절대 복종하는 인간들을 가르킨다. 그 가운데서도 아담을 비롯하여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그리고 모하메드는 창조주 한 분만을 경배하였고 창조주 법칙을 가장 잘 준수하고 따랐기 때문에 가장 훌륭한 무슬림이었다고 볼 수 있다. 7세기초 아라비아의 예언자 마호멧에 의해 완성된 종교. 전지전능한 알라의 가르침이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마호멧에게 계시되었다고 하며 유대교, 그리스도교등 유대계의 제종교를 완성시킨 유일신을 믿는 일신교이다. 유럽에서는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마호멧교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위구르족을 통하여 전래되었으므로 회회교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슬람교 또는 회교로 불린다. 그리스도교, 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3.이슬람의 역사적 전개
1) 이슬람교의 탄생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육적 장자 이스마엘의 직계후손 모하메드(570-632)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는 570년 메카의 세력을 잡은 쿠라이쉬 부족의 가난한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아라비아 거민은 유목민이었으며 신앙은 미신과 함께 360개나 되는 각종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다. 그 지역에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으나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모하메드는 그들로부터 약간의 유대교 및 기독교 가르침을 받았다. 연상의 부호 여인 카디야와 결혼한 후 그는 인생에 대해 명상에 잠기곤 했는데 40세때 마침내 히라동굴에서 천사의 계시를 받아 최후, 최대의 선지자로 자처하고 알라의 메시지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메카에서 포교에 성과를 올리던 중 박해를 받아 메디나로 피신했다.(622년-헤지라,이슬람의 기원) 그후 10년간 그는 종교적 군사 세력을 형성하여 아라비아 지역을 통일하기에 이른다.
632년 그의 사후에 후계자들이 정복과 회심의 전쟁을 개시하여 사막에 흩어져 살던 아라비아 부족을 정복하더니 그 여세를 몰아 다메섹과 안디옥, 예루살렘, 기이샤라, 알렉산드리아, 페르시아 제국까지 정복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지나 에스파냐까지 정복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 왕국까지 쳐들어갔으나 프랑크 왕국의 칼 마르텔이 이끄는 군사에게 패함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슬람 세력은 북아프리카, 남부유럽,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등지로 세력을 확장했는데 722년의 남불란서 투우르에서의 전투,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1529년의 비엔나 침공 등이 두드러진 사건이다.
2) 고대 중동종교의 통폐합
겉으로 볼 때 이슬람은 기독교와 다소 비슷하고 또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듯하다. 그러나 내면으로는 적그리스도종교이다.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홍수처럼 사방으로 전파될 때 사탄은 그때까지 세워 놓은 다양한 이방종교(바벨론종교, 애굽종교, 헬라, 로마종교 등)의 무능력을 절감하고 복음과 기독교에 맞설 고도의 종교를 조작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사탄이 그 고도의 지성을 이용하여 500여 년 간 연구한 결과가 바로 이슬람교다. 이슬람교는 인간적으로 수준 높은 종교,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이 하나님을 최고로 경외하며 숭배할 수 있는 방법이다.
3) 근동 기독교의 부패가 이슬람의 온상
우리는 이슬람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우리가 반성하며 지적할 수 있는 요인은 6세기 후반 기독교의 영적 무능과 무지이다. 초대교회 이후 박해받던 교회는 4세기초 기독교 공인과 국교화 이후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안일하고 가부장적인 자세를 취하고, 영적 세력의 확장보다는 의식의 개발과 교리논쟁만을 일삼았다. 각종 이단에 대한 방어적 변증신학을 주된 사업으로 삼고 공격적 전파신학과 실천을 뒷전으로 미루었다.
아라비아와 애굽 등지를 지배하던 비잔틴제국정권은 교회의 수호자로서 피지배민에게 중과세로 수탈했고 교회는 지배자의 한 부분이 되어있었다. 따라서 이슬람군대가 처들어왔을 때 애급등지의 민중은 이슬람정권의 지배를 오히려 반기기도 하였다. 또한 동방기독교회는 말씀의 교훈을 떠난 연고로 성경을 가르치지 않았고 성경을 번역. 보급하지 않았다. 모하메드는 문맹자이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다. 성경이 아랍어로 간행되기는 그 나중의 일이었다. 그는 결국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왜곡된 기독교 교리와 성경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4.이슬람법의 성립
무하마드의 후계자들은 그의 사후 25년 이내에 탄생된 광대한 이슬람 제국의 통치를 위하여 이슬람법의 제정을 해야만 했다. 그 때문에 예언자의 의도하는 바를 더욱 깊이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을 무하마드의 친척, 친구, 초기의 지지자들의 회상록에서 찾아냈다. 이 회상을 '허디스'(전승)라고 불렀는데, 예언자가 이야기한 것과 행한 것의 두 종류로 분류된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슨나'(예언자가 걸러온 길)라 하여 하나로 모아졌다. 예언자의 언행은 코란의 계시와는 달리 이슬람교도의 경건한 생활규범으로 간주되었다. 허디스는 그의 사후 약 50년 후에 기록되기 시작했는데, 본격적으로 예언자의 언동이 모아지면서부터는 다분히 의도적인 창작도 생겨났다. 따라서 여러 가지가 가미되면서, 예언자의 인물 자체 이상으로 과장되어 버렸다. 이에 대해서 9세기에는 「학식을 가진 자는 전승을 창작해서 허위를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참다운 문제를 피하는 방법으로서 창작을 하고 있다」고 하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후계자들은 7세기초의 메카, 메디나 시대의 상황과는 다른 9세기 중엽의 이슬람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에 적합한 허디스를 찾아내어야 했다. 후계자들은 허디스의 이 따위 엉성한 집록을 그대로 방치해 버리지는 않았다. 870년에서 915년 사이에 사망한 몇몇 이슬람 법학자에 의해서 6종류의 허디스 선집으로 정리되었다. 그 중 붓하리와 모슬렘에 의한 두 선집은 「두 가지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며 신뢰를 받고있다. 거기 수록된 일화나 이야기는 1명 내지 2,3명의 증언에 의해서 입증된 무하마드 자신의 언동을 바탕으로 한 문답형식으로 되어있다. 붓하리의 조사로는 60만 점의 허디스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진실이라고 간주되는 것은 7천 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에 의하면 신뢰도가 높은 허디스는 5백 점 정도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숫자가 근대 이슬람 학에서는 더욱 감소해간다. 그러나 비록 수효가 적다고 하더라도 석가나 그리스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무하마드의 성격이나 행위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 있다.
5이슬람교의 신앙
1) 알라와 코란
다신교 시대부터 알라는 메카에서 최고신으로 숭배되어 왔으나 마호멧은 한걸음 더 나아가 다른 모든 신을 허위라하여 부정하고 오직 알라만을 유일신으로 내세웠다. 알라는 만물의 창조주이며, 이와 동등하거나 비교될 존재는 없다. 모든 피창조물과는 엄격한 거리가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경동맥보다도 더욱 가까이 있다. 알라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주지만 아무것도 대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까지나 관대하고 자애에 넘쳐 잘 용서하고, 잘 들어주고, 잘 보아준다. 알라는 진리이며 빛이며 모든 곳에 존재하시며 모든 것을 알고계신다고 한다. 알라의 계시를 모은 것을 코란이라 하는데 이것은 물론 마호멧이 전한 것이며 그가 죽은 후 신도들에 의하여 수집 정리된 것이다. 현행의 코란은 650년경, 제 3대 칼리프인 오스만이 명령하여 만들게 한 표준본이다. 이 경전은 이슬람의 교의, 제도, 마호멧의 생애와 사상을 알 수 있는 근본적인 문헌이며, 무슬림 들은 이것을 독송할 때마다 법열의 경지에 빠져 감격의 눈물을 흘릴 만큼 힘과 미를 갖춘 것이지만 그 진가는 아랍어로 된 원전에 의하지 않고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또 코란은 마호멧에 계시된 바를 해설이 없이 모은 것이므로,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후세의 학자들이 서술한 많은 주석서에 의지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이슬람의 법학, 신학의 최고 근원은 역시 코란에 있는 것이다.
2) 이슬람의 근본신조
이 가르침의 정식 명칭은 '알 알이슬람'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유일절대의 신, 알라의 가르침에 몸을 맡긴다는 말이며 귀의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 가르침은 모두 명확한 아랍어로 계시되었으며 마호멧도 이것을 아랍어로 전달하였다는 점이 중시되고 있다. '알라이외에 신은 없다'는 것이 이슬람교의 근본신조이며, 후에 '마호멧은 알라의 사자(라수르)이니라'가 추가되었다. 이 성구를 외는 일은 신도의 중요한 의무로 되어있다. 알라의 가르침을 모은 코란에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여 '믿음이란 그대들의 얼굴을 동으로 또는 서로 돌리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란 알라와, 최후의 날(최후 심판의 날)과, 천사들과, 여러 성전과, 예언자들을 믿는 사람이다.' 라고 적혀 있어 이 모든 사항을 받는 것을 '이만'이라고 한다. 또 오로지 알라만을 믿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숭배하지 않고, 예배, 희사, 재계 등의 근행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만이 알라에 귀의하는 길이라 하여 이것을 '이슬람'이라 칭한다.
3) 이슬람신앙의 요소
이슬람 신앙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음의 셋으로 분석된다. 첫째는 '지(知)'로 이것은 알라의 계시를 잘 이해함을 말한다. 둘 때는 '언(言)'으로, 마음에서 알고 또한 믿는 바를 말로 표현하는 일이다. 셋째는 '행(行)'이며 이슬람교도로서의 의무를 열심히 실행하는 일이다.
6. 이슬람의 근본
1) 이슬람과 이념
이슬람의 근본에서는 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창조주의 창조에 의한 것임으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창조주의 목적과 계획을 배울 기회가 선택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보다는 창조주의 창조 목적에 의하여 의무적으로 주어지되 주어진 의무를 다한 신앙인 에게는 천국이 약속되어 있고 그 의무를 포기한 인간에게는 지옥이 약속되어 있어 양자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곧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지에 있다고 보는데 이는 코란에서 "라 이크라하 피딘" 즉 '종교에는 강요가 있을 수 없나니' 라는 절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창조주의 존재는 의무적으로 믿되 천국과 지옥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
2) 이슬람의 6신(六信)
이슬람의 근본은 믿음(IMAN)과 실천(AMAL,DIN)으로 믿음은 여섯 가지 믿음으로 구성되어 있어 6信또는 믿음의 기본 6가지라 하고 실천은 다시 다섯 가지로 5柱 또는 이슬람의 기본 5가지라 한다.
(1) 6가지 믿음의 첫째는 창조주 유일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자비로우시며 긍휼하신 하나님의 이름 안에서 너희는 그를 유일신이라 고백하라. 영원한 요새인 신은 독생자를 두거나 또는 독생자라 칭한 자도 없거니와 동등 되게 견줄만한 자는 아무도 없다.'(수라112)
모슬렘의 첫째 의무는 그가 믿는 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알라(Allah)이외에는 신(여기서 '알라'란 단어는 모슬렘들이 유일신을 말할 때 쓰는 낱말이며, 또한 아랍에 사는 기독교인들도 이와 동일하게 사용하고있다.)이 아니며 모하메드는 신의 전달자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유일성, 즉 알라가 유일신이라는 신앙고백은 이슬람의 기초적인 신앙(칼리마: Kalima)으로 알려져있다. 그래서 GOD, 여호와, 하나님, 알라는 서로 다른 개체의 신이 아니라 하나의 유일신 창조주 절대자로써의 완전한 믿음이어야 한다.
(2) 둘째는 천사들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다.
신이 특별한 목적으로 창조한 천사들은 신성한 빛을 신으로부터 받은 몸을 지닌 피조물들이다. 이들은 먹거나 마실 수도 없으며 성을 구별할 수도 없다. 또한 그들은 자유의지가 없으며 주된 임무는 신의 의지에 전적으로 복종하고 주야로 신을 찬양하며, 그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도록 되어있다.
(3) 셋째는 성서들에 대한 믿음이다.
이슬람에서 말하는 성서는 하나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일부 예언자 및 선지자들에게 계시된 말씀이 기록된 책들을 가르킨다. 모든 무슬림들은 신이 때떄로 신적인 영감을 지닌 책들을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전해왔음을 믿는다. 이들은 사도들이나 선지자들로서,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신성을 지닌 책들을 기록하였다. 이들 코란에 명시된 책들은 모두 다섯권이다.
* 아브라함에게 준 두루마리 책(수흐프-분실되었다고 주장함)
* 타우라트(Tawrat: 토라(Torah)-모세오경)
* 자부르(Zabur: 시편-선지자인 다윗에게 줌)
* 인질( Injil: 복음서-선지자인 '이사'(예수)에게 줌)
* 코란(Quran- 선지자인 모하메드에게 계시함)
(4) 넷째는 선지자 및 예언자들에 대한 믿음이다.
이슬람에서 정의하는 선지자 및 예언자에 대한 개념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인류에게 설명하고 해석하는 임무만을 받은 인간을 나비(Nabi)라 하고 이 나비는 아담을 비롯해서 모하메드을 최후의 예언자로 각 시대 각 민족에게 보내어진 예언자의 숫자는 약 124,000명으로 전하여지고 있으며 이름이 밝혀진 나비는 코란에서 25명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창조주의 말씀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임무 외에 그 복음을 인류에게 전달하며 가르치는 것과 인도하는 임무까지를 부여받은 선택된 인간들을 라술(Lasul)이라 하며 모세와 예수와 모하메드가 그 대표적이다. 이슬람에서는 예수를 동정녀 마리아에서 하나님의 기적으로 태어난 인간의 아들 곧 인간으로 본다.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서 하나님의 기적으로 태어난 것은 아담이 아버지와 어머니 없이 그리고 아담의 아내 하와가 어머니가 없이 전지전능한 창조주의 능력에 의하여 태어난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이나 신약 그리고 코란에 언급된 예언자 및 선지자들이나 언급되지 아니한 그들까지도 모두가 인류의 지도자로써 창조주의 선택을 받은 훌륭한 인간이므로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 이슬람의 보편적 견해이다.
(5) 다섯째는 심판과 부활을 믿는 것이다.
인간의 생은 현세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도 생이 계속 된다는 것이다. 현세의 생명이 유한적 생명이라면 사후의 생명은 영원하며 이 생명은 창조주의 심판을 통해서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생명과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생명이라고 믿는 것이 이슬람의 다섯 번째 근본이다.
(6) 여섯째는 하나님의 법칙과 定命을 믿는 것이다.
인간의 현세 생활을 영위하고 규정하며 제한하는 창조주의 법칙에 대한 완전한 순종과 어떤 특정한 기간에 특정한 방법에 의하여 어떤 물체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창조(알까다르)를 믿는 것이다. 존재하고 있는 어떠한 사물은 물론 인간이 선택하여 행하는 모든 행위까지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알기 전에는 발생하지 아니하므로 창조주의 법칙과 까다르 그리고 계획을 믿는 것이 이슬람 근본의 6번째이다.
3)이슬람의 5行
6가지 믿음을 인간의 골격에 비유한다면 5가지 실천사항은 골격을 채워 완전한 인간의 형상으로 부각해주는 살과 세포와도 같다. 그래서 믿음의 6가지가 인간으로부터 받을 창조주의 권리라면 5가지의 실천사항은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의무이기도하다.
(1) 신앙의 고백(쉬하다타-니 또는 칼리마 따이이바)
두 가지 증언, 또는 두 가지 고백이란 언어적 해석으로 첫 번째의 고백은 하나님 외에는 어떠한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일신론이다. 두 번째는 모하메드는 하나님이 선택한 최후의 선지자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나는 알라이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합니다. 또 나는 마호멧이 알라의 사자임을 증언합니다.'하고 입으로 왼다. 신도는 어려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하루에도 몇번씩 이 증언을 행하게 되어 있다.
(2)기도 또는 예배(쌀라)
일반적으로 이슬람의 기도의 종류는 세 가지로서 의무적인 기도, 정규 집회시 기도 그리고 선택적인 기도 등으로 구별된다. 또한 특별한 이유 없이 이들 기도 시간을 어기면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하루의 의무적인 기도는 다섯 번 행하게 되는데 새벽이후 해뜨기전 사이에 드리는 이른 아침기도, 남중한 태양이 기울기 시작하여 저녁하는에 질때까지의 중간을 잡아서 그 사이에 드리는 정오기도, 정오기도 시간이 끝난 직후에 시작해서 해질녘까지 계속되는 이른 오후기도, 일몰직후에 시작해서 서쪽 지평선에서 저녘 놀이 사라질 때까지 한시간 이십분내지 삼십분 동안 계속되는 해질녘기도, 서쪽 지평선에서 저녁놀이 사라진 후(일몰후 약 한시간 삼십분 뒤)에 시작해서 새벽 조금 전까지 계속되는 밤기도 등으로 칭한다.
일정한 시각에 규정된 형식에 따라 행하는 예배를 말하며, 개인적으로 수시에 행하는 기도는 '두아'라고 부른다. 예비는 하루에 다섯 번을 행한다. 일출, 정오, 하오, 일몰, 심야의 다섯 면이며 특히 금요일 정오에는 모스크에서 집단 예배를 행한다. 또한 예배를 할 때는 메카쪽을 향하여 행한다.
(3) 구제(자카트)
구제의 문자적 의미는 순결이란 뜻이다. 모든 무슬림은 매년 말 약 15달러, 또는 그 이상을 소유했을 때 헌금이나 이에 상응하는 것을 수입에서 최소한 2.5%를 구제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코란은 자발적인 형태의 구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 자선이라 칭한다. 라마단 기간 중 금식을 마치고 무슬림들은 자선을 행하도록 하고 있다.
국가재정의 기본이 되며 비이슬람국가에서는 선교기반이 이루어지는데 필요 불가결한 무슬림의 의무중의 하나이다.
(4) 금식(싸움)
이슬람에서는 싸움 또는 씨암이라 하는데 절제(節制) 또는 단절(斷絶)한다는 언어적 의미와 함께 샤리아에서는 창조주를 경배하겠다는 의도로서 아침 새벽부터 시작하여 태양이 질 때 까지의 기간동안 음식을 섭취하지 아니하고 음료수를 마시지 아니하며 부부생활을 단절하는 행위이다.
금식은 의무적 금식(파르드)과 임의적 금식(타따위의)의 두 종류가 있는데 전자는 라마단 달 (月)에 행하는 금식을, 후자는 선지자 모하메드가 그랬듯이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날 임의로 행하는 금식이 있다. 라마단의 시기는 이슬람 달력 중 제 9월에 행한다. 라마단 기간 중 병자, 여행자, 임산부와 어린이들 이외에는 모두 금식에 참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성년인 무슬림은 매년 라마단 월간, 주간에 음식, 흡연, 향료, 성교를 금하고, 과격한 말을 삼가며 가능한 한 '코란'을 독송한다. 단 음식은 흰 실과 검은 실의 구별이 안 될 만큼 어두어진 야간에는 허용된다. 라마단 월간이 끝나고 다음 새 달이 하늘에 떠어르면 단식 완료의 축제가 시작되는데, 화려한 의상을 입은 군중들이 거리고 쏟아져 나와 서로 축하하는 풍습이 있다.
(5) 성지순례(하지)
모든 무슬림은 일생동안 한번은 성소로 여기는 메카를 순례여행 하도록 하고 있다. 성지순례는 대순례(Hajji)와 소순례('umrah)가 있는데 하지란 사우디 아라비아 성지 메카도시안에 소재하고 있는 하람성원(마쓰지둘 하람)으로 가서 똬와프와 싸이를 행하며 아라파트 지역에서 체류하면서 그밖의 순례의식을 근행함을 성지순례라한다.
모든 무슬림은 매년 하즈달 (12월)에 카바 신전부근 또는 메카북동쪽 교외에서 열리는 대제에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참가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 능력이 없는 자는 순레를 못해도 죄가되지 않는다. 해에 따라 일정하지는 않으나현제도 매년 약 200만 명에 달하는 신도가 하즈에 참가하고 있다.
(6) 聖戰(지하드)
지하드는 이슬람의 신앙 실천 가운데 다섯 가지 덕목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코란과 전통집에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지하드란 인간과 우주만물을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불신자와 공격자에 대항하여 聖戰한다는 뜻으로 '지하드'는 파르드 키파야(Fard Kifayah)이며 이는 코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지하드의 형태는 창조주의 존재를 부정한 불신자 및 공격자에 대한 지하드, 윤리적 비행에 대한 지하드, 사탄의 유혹에 대한 지하드, 자신의 욕망에 대한 지하드가 있다.
(7) 코란
모하메드가 히라 동굴에서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받기 시작한 계시를 모하메드 사후에 정성껏 수집하여 만든 책이 코란이다. 모하메드는 쓰거나 읽을 줄 몰랐으며 계시 받은 것을 암송하면 추종자들이 받아썼다. 코란의 최종 편집은 사후 12년이 지난 제3대 칼리프인 우트만에 의해 완성되었다. 무슬림들은 코란을 알라의 말씀으로 믿고 있다. 코란은 이슬람의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진리로 인정된다. 무슬림들은 코란의 언어인 아랍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 코란이 외국어로 번역되는 것을 불경하게 여겨 왔으나 1930년에 터어키어로 번역된 이래 여러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코란은 114장으로 되어있으며 각장에는 많은 절로 구성되어있다. 크기(양)은 신약성경의 2 3정도이고 각장은 3~280절까지 다양하며 절수는 총6,236절이다. 코란은 신약성경과 결정적으로 충돌한다. 그 내용은 코란의 유일신 알라와 신약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유사하지만 다르며 코란의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와 충돌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죽음과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로 확증됨에도 코란은 이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8) 교도의 일상생활
이슬람세계는 많은 이민족을 포함하고 있어 그들은 각각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사회의 요소는 지극이 복잡하고 또한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지역에 분포하는 수많은 무슬림은 하나의 형으로 통일되어 공통의 생활방식은 취하고 있다. 그것은 샤리아 (이슬람법)로써 공통되어 있기 때문이며 사리아는 코란과 하디스에 입각하여 제정된 이슬람법이다. 무릇, 무슬림된 자는 출생에서 사망까지 샤리아에 따라 생활할 것이 요구된다. 인간의 행위는 5가지로 크게 나누어진다.
1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을 하면 보상되고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
2 가상(可賞)할 행위로 이것을 행하면 보상받으나 행하지 않아도 벌받지 않는다.
3 허용된 행위로 이것을 행하여도 보상받지 못하고 벌도 받지 않는다.
4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이것을 행하여도 벌을 받지 않으나 그래도 행하지 않는 편이 좋은 것
5 금지된 것으로 이것을 행하면 알라의 벌을 받는다. (하람) 예를들어 돼지고기를 먹거나 음주하거나 하는 일은 하람이다. 그러나 후자에 대하여는 시대에 따라 또는 지방에 따라 의견의 차이가 있어 약간은 허용되는 경우도 있다.
중세 이래 모스크는 교도의 생활중심이 되어 있었으나 11세기 투르크가 각지에서 지배권을 장악한 후로부터는 오로지 예배의 장소가 되었고, 그 밖의 기능은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를 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샤리아에 의하여 규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이슬람교도의 일상생활이라고 할수 있다.
IV.모하메드를 중심으로 본 이슬람교의 성립 배경과 과정
1. 이슬람 이전의 아랍부족사회
이시기를 자할리야시대 또는 무명시데, 영웅시대라고하며 6∼7세기초 까지를 지칭한다. 이 시기의 특징은 아랍 유목부족의 생존경쟁, 부족적 혈연집단의 연대의식으로 요약할수 있다. 이 당시 아랍인은 까흐탄및 아드난이란 두 조상에 기원을 둔다고 여겼다. 까흐탄은 구약의 요그탄에, 아드난은 이스마엘의 자손으로 여겨지며 전자는 남아라비아의 예멘의 여러 부족으로 아라비아의 서남부, 후자는 북부 아라비아 출신이라 한다. 그러나 이런 인종상의 차이는 현실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제로 아라비아 반도의 주민은 크게 유목민과 정주민으로 나뉜다. 유목민(베드윈)은 방목생활과 수렵, 전투, 약탈 등으로 생계를 꾸려갔고, 반면 정주민은 중부 아라비아의 오아시스나 해안가에 살며 농업과 상업으로 생계를 꾸렸다. 당시의 부족은 대개 경우 생각하는 그런 커다란 집합체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비교적 작은 집단이었다. 집단의 기본은 혈연을 유대로 하며, 노예와 해방노예가 있었고 차별을 받고있는 비 자유민인 미왈리, 그리고 다른 부족 출신의 자유민인 할리프가 있었다. 즉 혈연이 바탕이나 그 내부에는 동족이외의 자유민이 스스로의 의사로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유목부족은 풀과 물을 찾아 이동하는 데다 때때로 인근의 다른 부족과 싸우기도 했다. 그들에겐 약탈을 받았다 생각되면 받은 만큼 되갚는 동해복수(同害復讐)가 행해졌다. 부족내에는 뚜렷한 정치적 제도나 조직이 없었고 정치적 권력을 가진 자도 없었다. 물론 부족장이 있긴 하나 그의 영향력은 그가 부족 민에게서 어느 정도의 존경을 받는가에 의존하며, 자우민인 부족민은 부족내의 중요문제를 부족집회를 개최하여 결정했다. 그러나 같은 부족민은 같은 조상을 갖고있다는 강한 부족의식인 아사비야-집단 연대의식-를 갖고있어 부족내에선 서로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혈연은 모든이가 복종해야하는 유일 절대의 권위로 여겼다. 이것이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것과 연계되어 부족정신을 이뤘다. 이런 부족정신은 자신의 부족민이 살해당하면 가해자가 속한 부족에게 같은 수의 복수를 행하는 것-피의 복수: 이를 피하기 위해선 배상금으로 낙타 100마리-을 의무로 여기게했다. 한편 그들에겐 지와르란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찾아온 손님을 환대하는 유목 베드윈의 관습으로, 보통의 경우 부족밖의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약탈하는 것을 허용하나 이 지와르관계에 있는 사람의 재산에 손을 대는 것은 수치스런 행위로 여김으로 그의 재산을 보호하게 했다. 앞에서도 말했듯 유목부족은 방목과 약탈로 생계했으므로 재산에대한 소유권도 극히 유동적이었고 (강한 부족은 언제든 약한 부족의 재산을 뺏을 수 있다.) 따라서 그들에겐 빈부격차도 크지않아 부족내 개인은 평등하고 상당한 정도의 자유를 누렸다.
2. 이슬람 발흥시기의 메카
그러다 이슬람이 발흥하기 직전, 6세기 후반 히자즈 지방의 메카에 경제적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메카는 대상 교역의 교통 요로에 위치했고 또 성소 카바신전-오늘날 이슬람이 가장 신성한 신전. 코란에 의하면 카바의 건설자는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로 되어있다. 카바란 입방체를 의미-이 있어 아라비아의 유목민은 매년 일정시기 이곳을 순례했으며 순례기간인 신성월에는 성역으로서의 메카 및 그 주변에서 모든 전투행위가 금지되었다. 이시기(6세기 후반)아라비아 반도의 각 부족사회는 각기 숭배하는 우상신 갖고 있었는데 이들은 메카이 카바신전에 두고 매년 특정달에 희생을 바치고, 또 매년 많은 사람들이 순례했기 때문에 메카는 언제나 축제의 분위기였다. 이런 신앙은 (우상신) 메카의 중요 소득원이었다. 즉, 땅이 척박해 농사를 할 수 없는 메카는 목축을 했는데 양, 산양, 낙타 등을 순례자에게 팔고, 가축의 생산물, 양모, 가죽등 제사에 남은 것은 상품화하여 타지방의 특산물과 교환하는 것이다. 메카는 교통요충지였기 때문에 상업의 중심뿐 아니라 금융의 중심으로 경제활동이 왕성해졌고, 이 결과 유목내지 반유목경제에서 상업경제로 이행하게되며 급기야 6세기후반엔 아라비아의 최대도시로 성장한다. 그러나 사회조직 및 그들의 의식면에서는 부족적 연대성이나 동해복수와 같은 유목생활에 적합한 사회제도나 의식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었다. 메케의 대다수 주민은 쿠라이쉬라는 부족에 속해 있었다. 쿠라이쉬부족은 스스로 대상을 조직하고 교역을 하면서 전에 가졌던 유목부족적인 부족연대의식은 희박해지고, 개인주의적 이기주의의 풍조에 물들어 부족내 유력자들은 약소자를 돕는 부족적 의무를 망각해갔다. 부족적 집단 지향형에서 개인적 이익 지향형으로의 이런 변화는 유목적 의식구조와 새로운 상업경제적 환경의 모순과 갈등을 가져와 이슬람이 발생하는 사회적 경제적 요인이 된다.
3. 모하멧드
모하멧드는 쿠라이쉬부족의 일원으로 570년경 메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역시 6살 때 잃은 그는 할아버지의 보호하에 있다가 그의 숙부 아부 앗딸리브에게 위탁되어 성장한다. 그의 청년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않으나, 메카의 대상활동에 참가하여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25세엔 약 15세 연상의 거부 미망인 카디자와 결혼한다. 그후 40세 정도되었을 610년경 그는 처음 알라의 계시를 받아 최초의 3년간은 그에게 찾아오는 특정인을 상대로 전도를, 614년에는 대중전도에 나서게된다. 그는 예언자로서의 스스로를 자각한 후 13년간을 메카에서 10년을 메디나에서 지냈는데 코란의 2/3가 메카에서, 1/3메디나에서 받은 계시이다. 코란은 예언자 모하멧드에게 계시된 유일신 알라의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그가 처음 계시받은 610년경에서 623년 타계할 때까지 약 23년에 걸쳐 간헐적으로 계시된 장구(章句)를 모은 것이다. 그가 처음 계시를 받은 것은 라마단(9월)말 히라동산에서 명상을 하다 대천사 가브리엘로 부터라고 전승-모하메드의 언행록-은 전한다. 초기계시는 ①신의 은총과 권능. ②부활과 최후 심판. ③절대자에 대한 감사와 예배. ④베품과 너그러움으로 요약된다.
4. 박해
모하메드에 대한 메카 반대자들의 주된 이유는 이 종교와 교리를 수락함으로 발생되리라 예상되는 정치 경제적 영향때문이었다. 코란은 내세에 궁극적 가치를 둠으로 현세적인 것을 상대화하면, 부의 적대적 가치를 부정하고 신앙과 선행을 강조했다. 이 선행은 부적적 연대의식의 발로가 아닌 오히려 종교적 개인주의의 가치기준에서 나온 것으로, 비록 메카가 변화과정에 있었다해도 부족조직은 여전히 강했던 당시로선 종족의 전통을 파괴한다고 여겨 반발이 더했다. 그러나 어떤의미에선 코란의 상부상조원리는 사라져가는 옛 부족적 윤리의 좋은점의 재생이라 할수 있다. 암튼 코란의 종교적 개인주의는 부족적 집단주의와 정면으로 대립하게 됐고, 코란의 내세주의는 아랍부족의 현세주의를 부정하며 지상의 모든 권위를 상대화하고 대상인(大商人)층을 정점으로하는 메카 사회 체제의 기반을 허물어 뜨리는중대사였다. 모하메드와 대상인층은 사이가 나빴지만 당시 그를 양육한 숙부의, 족장으로서의 비호로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615년경 자신들이 제시하는 교리를 첨가하면 입교하겠다는 메카 대상인층의 제안을 거절함으로 둘 사이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게다가 그를 비호하던 숙부 아부 앗딸리브가 619년 별세하고, 잇달아 부인 카디자도 사망한데다, 또다른 숙부 아부 라하브가 씨족장으로서의 그의 보호를 취소하자 모하메드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메카 동쪽 약 60㎞ 떨어진 고원도시 띠아프로 가나, 거기서도 배척당한다.
5. 히즈라
620년경 야스리브-현재 메디나-에서 메카를 방문한 여러명의 순례자들이 모하메드의 설교에 감명을 받고 다음해엔 다른 동료를 데려와 아까바에서 모하메드의 가르침에 따를 것을 맹세했다.-아까바의 맹세. 야스리브, 즉 메디나는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농업을 주요생업으로 삼은 도시이다. 경제적 실권은 유태족이 장악했고, 그 외 두 아랍부족 아으스와 하즈라즈가 있었는데 둘의 계속적인 상쟁으로 메디나의 정국은 불안정했다. 즉, 여기서도 새로운 정주사회에 적합치 못한 관습에 대치할 새로운 윤리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이를 확립치 못하는 괴로움이 있었다. 모하메드는 그의 이상을 실현코자 알라를 궁극의 주권자로, 자신을 지상의 대리인으로 인정하는 공동체인 움마를 현실세계에 건설해야한다고 생각하여 메디나로 이주(이를 히즈라라고 함)한다. 한편 그를 초청하는 메디나 사람들은, 물론 그를 예언자로 인정하는 자들이지만 또한 모하메드가 아랍부족간의 분쟁조정자 역할을 해주길 기대했다. 메디나출신은 공정한 입장을 취하기 힘들며, 보통사람으로는 사람을 설득시키기 힘들것이나 모하메드는 메카의 망명자이고, 알라의 사도이므로 적격자란 생각에서였다. 이렇게 모하메드의 히즈라와 함께 메디나로 이주한 메카의 이슬람교도들은 무하지룬, 메디나의 아랍인으로 이슬람교로 개종한 자를 안사르라 불렸으며 이들은 하나의 신앙 공동체 움마를 형성했다. 또 메카에 삶의 기반을 다 두고 와야했던 무하지룬을 위해 모하메드는 안사르의 자택에 무하지룬을 생활하도록 했다.
6. 바드르 전투와 우후드 전투
안사르의 도움으로 생활하던 무하지룬은 그들의 생활보장 방법으로 "대상 습격"을 택한다. -당시 아랍 유목부족에게있어 대상 습격은 합법적이며 명예로운 생활수단이었다. 모하메드는 메카의 쿠라이쉬 부족이 파견하는 대상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메카측과의 전면대결을 의미한다. 메카측에선 상업활동이 방해받는 것은 사활의 문제이고, 쿠라이쉬 부족의 체면과 권위에 관한 일이기도 했다. 반면 메디나의 이슬람교도측에선 약탈은 경제적 자립의 토대가 될 수있고, 또 그들을 박해했던 불신앙자들에 대한 성전(聖戰-지하드)이라는 대의명분도있었다. 유목민이 아닌 모하메드가 약탈을 결의한 것에는 경제적 이익뿐이 아니라 쿠라이쉬 부족의 세력을 약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습격은 무하지룬이 주를 이루나 곧 안사르의 참가도 늘어나 바드르 전투에선 무하지룬 86명 안사르 238명이 참여했다 한다. 이 전투는 두배에 달하는 쿠라이쉬 부족의 대군을 완전격파하여 이슬람 교도에겐 자심감을 심어주고, 모하메드는 예언자적 위치가 고양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 실제로 "예언자"란 칭호는 바드르 숭리의 후로, 바드르 전투에 관한 코란 계시인 8장에 처 음 나온다. 그 이전까진 "알라의 사도"로 칭한다.)
코란 8장 전리품의 장에선 이날을 "구제의 날"로 부른다. 이 승리로 이슬람교도들은 알라가 모하메드와 이슬람교도의 편임을 확신하게 된다. 더구나 전리품의 1/5을 모하메드의 집안의 경비와 이슬람교도의 궁핍한 자의 구제비로 모하메드가 취할 수 있게한 것은 그가 일반 신도와는 다른 특수한 지위에 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으로, 가장 원초적인 형태이긴 하나 교단국가(교단國家)의 통치와 비슷한 정치가 시작됐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르드 전투의 승리로 이슬람 세력은 메디나에서 자리를 굳히고 모하메드와 그의 공동체는 확고부동해지나, 메카는 전쟁에서 패배한 후 잃어버린 위신 회복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625년 3월 유목민을 포함하는 메카군 약 3천명이 메디나를 공격해왔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이슬람군은 메디나의 교외 우후드 언덕에 진을 치나 전투가 개시되기 얼마전 일부의 신자들이 전열을 떠나고, 또 메카 기병대의 활약으로 이슬람군은 이 우후드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다. 메카의 이전투의 중요목적은 모하메드가 메디나에 건설한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를 파괴하고, 바드르 전투에서의 손실의 몇곱을 갚아주는 것이었다. 이런 메카군은 우후드 언덕에서 돌연 전투를 중지하고 메디나로의진격 대신 메카로 회군한다. 이것은 메카의 사상자도 많았거니와 메디나의 이슬람군 이탈자인 사이비 이슬람 신자의 세력증대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드르 전투의 승리로 알라의 도움을 확신하던 이슬람교도둘은 우후드 전투의 결과를 자신들의 불신앙에 대한 알라의 처벌과, 신앙의 견고함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내린 시련으로 받아들였다.
7. 유태교도와의 대립과 이슬람교의 확립
메카 후기 메디나 초기 이슬람 법은 유태교도나 기독교 및 다른 일신교도에 대해 종교상의 관용을 베풀었다. 모하메드는 자기에게 계시된 것이 자기 이전의 일신교 예언자들에게 내려진 계시를 확인하는 것이라 믿어, 유태교도를 계시 받은 경전의 백성으로 생각, 그 신앙을 유지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다른 일신교도들도 자신을 예언자로 인정해 줄 것으로 예상한 결과이다. 메디나로 이주한 모하메드는 처음 유태교도와 맺은 협약인 <메디나 헌장>으로 유태교와 이슬람공동체인 움마의 공존을 인정했다. 또 유태교의 제도를 채택하여 메디나 초기시대엔 이슬람 교도가 예루살렘을 향해 예배토록 하고, 유태교의 1월 10일(속죄일) 단식일의 종교행사도 받아들인다. 또 예배일이 금요일인 것도 유태교의 안식일(토요일) 준비와 상통된다. 이런식의 친유태교 정책은 모슬렘의 계전 백성의 여자와의 결혼을 허용하고 (여자의 경우 비이슬람교와의 결혼은 금지됨) 그들이 먹는 음식도 먹을 수 있게 허용한다. 이런식으로 모하메드는 유태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유태교는 정치적으로는 이에 동의한 흔적이 있으나 종교적 문제에선 거부했다. 유태교의 반대는 모하메드의 유일신 사상 때문이 아니라, 그가 참으로 신의 계시를 받은 존재인가, 예언자인가 하는 부분에서 그들의 성서해석 결과 그를 인정치 않으려 한데 있다. 결국 메디나 이주후 2년째인 624년 유태인이 모하메드를 그들의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 계통의 한 예언자로 인정치 않자, 모하메드는 그때까지 예루살렘을 향하던 예배방향을 메카의 카바로 향하게 하고, 바드르 전투 후엔 1월10일 행하던 단식을 대신해 라마단(9월)달에 1개월간 단식을 실시케 한다. -라마단 단식은 아바다드(종교적 의무 행위)의 하나로 그달에는 일출에서 일몰까지 모든 음식의 섭취를 금한다. 이렇게 유태교로부터 거부를 받게 되자 모하메드는 유태교에 반격을 가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세운 카바신전으로 예배방향을 바꾼 것은 이슬람교를 아랍의 전통위에 확립시켜 세계적 종교를 이룩하려는 것이고, 유태교와의 결부를 부정하는 것이다. -카바를 향함은 아랍 다신교의 신전으로서가 아닌, 알라의 집으로서의 카바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바드르 전투 후 카바신전의 건설자로서의 예언자 아브라함의 의의가 코란에 강조되어 계시되는데 내용은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카바신전을 건설하고 이를 알라께 봉납했고 그자손(아랍인) 가운데 한사도가 나오길 간청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하메드가 일어난 것이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수 있게 만든다. 아브라함은 유태교도 기독교도 아닌 하니프-순수한 종교의 신도, 순수한 일신교도-이며 그의 신앙은 이슬람이었고 모하메드의 가르침도 아브라함이 믿는 일신교의 부활이라 여기며, 코란은 그 계시가 모세나 예수의 가르침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이슬람의 뜻은 신에대한 절대복종이란 아랍어에서 나왔는데 이 어휘가 코란에 처음 나타난 것은 바드르 전투 이후의 일로, 유태교와의 대립이 시작되면서이다. 순수한 아브라함의 종교복원으로서의 이슬람이란 성격은 모하메드의 구약성서에 관한 역사적 객관적 지식에서 도출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대신 코란은 유태교와 기독교가 본래 옳은 성전을 잘못해석하고, 그 일부를 조작하거나, 감추었다고 비난함으로써 유태교의 성서의 전통적 해석에 의거한 비난을 다른 차원에서 되받아 쳤다. 카바신전을 알라의 집으로 간주하고 아브라함을 그 건설자로 여기는 것은 당시 메카와 그 주변 주민의 일반적 통념이었다. 모하메드는 이런 통념을 이용하여 이슬람교를 아랍의 민족감정과 민족적 전통 위에 정착시키는데 성공하여 이슬람에 의한 아랍 민족의 통합과 모하메드 자신에 대한 쿠라이쉬 부족의 적의를 약화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슬람에 애니미즘의 요소를 남겼다는 오해와, 8세기 중엽까지 이슬람을 아랍 민족종교로 곡해하게 한 중요원인이 되었다.
7.한다꾸(참호) 전투와 모하메드의 말년
627년 3월 쿠라이쉬 부족은 우후드전투에서 일단 바드르 전투의 복수를 했지만 모하메드와 그 움마를 지상에서 말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시 약 7천 5백명의 부족연합군으로 메디나 대 포위작전을 행한다. 이에 대응하여 모하메드는 약 3천명 정도의 군사를 모집 메디나의 적의 공격에 노출되는 모든 곳에 참호를 팠다.- 한다꾸 전투연합군은 2주나 포위를 했으나 참호를 못넘고 메카로 돌아간다. 쿠라이쉬 부족은 모든 재력을 원정에 소비하였으나 포위작전의 실패로 그 위신을 상실하고, 메카와 메디나의 균형은 메디나로 기울게된다. 모하메드는 연합군이 철수하자 곧 유태교도인 꾸라이자 부족을 처형하고 628년엔 1천 4백명의 이슬람교도를 이끌고 카바신전 순례에 나섰다. 쿠라이쉬 부족은 2백명의 기병대로 이를 저지하려했다. 결국 후다이비야에서 향후 10년간의 휴전과 다음해의 메카순례를 약속함으로 둘은 타협을 한다.-후다이비야 조약 모하메드는 주위 여러부족을 제압하거나 우호관계를 수립하는 한편 유태교도를 메디나로부터 완전 추방한다. 그후 630년 1월 일만 대군을 이끌고 메카에 진격하여 전의를 잃은 쿠라이쉬 부족으로부터 항복을 얻는다. 무혈입성한 이슬람군은 카바신전의 우상과 메카시내의 모든 우상을 파괴하여 이교(異敎)의 시대를 종식시킨다. 아랍의 유력한 쿠라이쉬 부족을 정복한 소문이 퍼지자 많은 부족이 메디나에 사절을 보내 맹약을 맺고 이슬람교를 수용한다. 630년 모하메드는 3만 대군을 인솔하여 타부끄 원정을 감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슬람의 북방정책의 일환으로서, 이슬람교의 위용과시가 목적이었다고 추정된다. 그후 632년 모하메드는 순례를 마치고 수개월후 세상을 뜬다.- 이별의 순례라 한다.-코란에 순례에 대한 규정은 자세히 나오지 않으나 이때의 선례로서 순례양식이 답습되고 있다.
V.이슬람세계의 발전
1. 이슬람권의 확대
마호멧의 사후, 교단은 신도의 장로들 중에서 교통(敎統)의 후계자인 칼리프를 선출하였다. 그 후 아라비아 반도 밖으로 진출을 개시하여 633년에서 644년까지 시리아, 이라크, 북부메소포타이아, 아르메니아, 이란, 이집트 등을 정복하여 여러 곳에 기지도시(基地都市)를 건설하였다. 그 후에도 정복사업은 계속되어 우마이야조 시대에는 서쪽은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다시 711년부터는 이베리아 (스페인)반도에 침입하영끁고, 동쪽은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서부까지 그 지배하에 두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의 중추부까지 진출한 군은 732년 포아티에 북방의 싸움에서 패퇴하였으나, 동방에서는 751년 여름 탈라스강의 싸움에서 중국의 당나라 군을 괴멸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아바스조의 초기 100년간은 칼리프정권의 전성기였으나 그 후 이베리아는 우마이야가의 일파에 의하여 독립하고, 이어서 모로코, 튀니스, 중앙아시아, 이란 동부, 이집트 등에도 독립정권이 출현하여 칼리프의 직할지는 점차 축소되었다. 10세기에 들어서자 921년이후 볼가강중류의 불가르족이, 이어서 960년이래 텐산남북로의 투르크족이 다같이 대량으로 이슬람교를 받아 들였다. 그때까지 아랍족, 이어서 이란인이 중심이었던 이슬람 세계는 이 무렵부터 투르크의 패권밑으로 옮겨지는 경향이 생겨, 10세기 말부터는 투르크계가즈나왕조의 마흐무드왕은 자주 인도에 침입하여 이 지방의 이슬람과가 확고한 기반에 놓여졌다. 한편 동아프리카에는 740년 무렵부터 이슬람교가 퍼지기 시작하여 1010년경에는 사하라 사막을 넘어 니제르 강변의 서수단 지방에 있는 흑인왕국에까지 이슬람의 물결이 미쳤다.
1071년 아르메니아의 만지케르트 싸움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은 비찬틴군을 격파하였다. 이때부터 서아시아의 이슬람과, 투르크화가 시작되었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거의 2세기에 걸친 십자군운동이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그리스도 교도의 역정복이 진행되어 1493년에는 무어인의 최후의 거점인 그라나다가 함락되어 아침내 이슬람은 북아프리카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와는 달리 셀주크조와 교체된 오스만조는 발칸 반도로 진출하여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공략 비잔틴제국을 멸망시켰다. 또 인도에 세력을 부식한 이슬람교도는 이 곳을 기지로하여 말레이, 인도네시아, 필리핀 방면의 포교를 행하여 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는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광범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2.현재의 세력
현재의 이슬람교도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세계 인구의 약 25%인 10억 전후라고 유엔통계조사국에서 밝힌 바 있다. 지역적으로는 북아프리카, 아라비아반도와 이란에 이른 소위 중동지역과 동부소련, 터키, 아프가니스단, 파키스탄서부, 중국, 인도에 이르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기타 한국, 일본 등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예를 들면 남,북미지역과 유럽지역에도 오랜 이슬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수백만의 무슬림들이 있다. 특히 독일과 프랑수 지역에서의 이슬람 문화, 역사, 종교학에 관한 연구는 그 역사도 오래거니와 또한 수준에 있어서도 높다.
3.한국에서의 전래와 현황
불교와 그리스도교 문화 속에서 살아온 한국민에게 생소한 이슬람교가 그 두터운 벽을 뚫고 한국에 전래된 것은 1955년이다. 이슬람교의 한국 전파는 1955년 9월, 6.25동란때 유엔군으로 참전하였던 터키 부대의 압둘 라흐만 중군이맘(성직자)과 주베르코취 종군이맘에게 한국 포교를 위하여 지도와 협조를 요청한 고 김진규와 윤두영에 의하여 포교가 시작되었다.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한국 이슬람교 협회를 발족, 초대회장 김진규, 부회장 겸 사무국장 윤두영과 신도 70여명으로 시작되었다. 초창기 10여년간에 포교운영의 고난을 극복하고 65년 한국 이슬람교 중앙연합회로 재발족, 67년 3월 재단법인 한국 이슬람교로 인가되어 신도 7,500의 교세를 갖게 되었다.
76년5월 현재의 용산구 한남동에 중앙성원을 건립하고 (사우디 아라비아, 기타 6개국의 원조로) 80년 항도 부산에 제2 성원, 81년 경기도 광주에 제 3서원을 건립하였다. 또한 해외교포를 위하여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인도네시아에 지회가 설립되어 국내의 신도수 약 32,000의 교세를 가지게 되었다. 80년 5월 최규하 대통령의 사우디 아라비아 방문시 고 칼리드왕과의 공동성명을 통해 한국 이슬람 대학교 설립 공사비 일체의 제공을 확약받았으며 경기도 용인에 13만평의 대지를 확보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한국 이슬람교는 70년대의 중동 붐을 타고 두드러지게 교세가 확장되어 근래에 매년 중동 각국에서 무슬림이 되어 귀국한 1,700여 명의 기능근로자 신도들을 핵으로 삼아 신도 배가 운동을 펴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이슬람교는 한국인의 습성 및 기호와의 차이점을 비롯하여 예배의식의 용어 및 교리의 토착화 등 숱한 난제를 안고 있다.
4.이슬람과 서방세계와의 갈등
만일 이슬람의 발상지가 인도네시아이고 그 신앙의 주요지역이 동남아시아였다고 한다면 이슬람의 역사는 불교와 비슷한 조용한 역사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발상지가 3대륙의 교차지점이었기 때문에 정력적이고 또한 끊임없이 영토확장을 꾀해왔던 서구세계의 공세로부터 이슬람은 잠시도 쉴 겨를이 없이 자기를 방위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신흥세력인 이슬람은 근접하는 보스포러스 해협이 아닌 멀리 떨어진 지브랄타 해협으로까지 그들의 방위선을 뻗쳐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슬람교도는 프랑스 진공을 감행하여 그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었고 그 이래로 그리스도교도는 12세기 간에 걸쳐서 이슬람을 증요하고 비난 공격했다.
왜 이 2대종교는 중립 완충지대라고 볼 수 있는 지중해를 가운데 두고서도 평화공존을 하지 못했는가? 사실은 그러한 평화공존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마저 양 종교는 서로가 살아있는 신앙의 기본적
본질을 무시하는 일이라고 비난했고 서로의 입장이 진리임을 확인하려고 상대방에게 비난을 퍼부을수밖에 없었다. 이슬람과 그리스도 양 종교의 싸움은 그것이 비슷한 일신교의 경쟁인 만큼 더욱 심했다. 그밖에 암흑속에 꿈틀거리는 이교도들은 나무나 돌을 숭배하고 있는 형태였으므로 보호할 필요도 배척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일신교인 이슬람교도는 같은 일신교이지만 그리스도교가 걷는 길은 잘못된 길임을 알려주어야 했다. 두 종교는 신앙의 시대에 있어서 완전히 상반되어 있었다고 할밖에 없겠다. 둘 사이의 다름이란 한쪽이 내면적인 신앙임에 비해서 한쪽은 보편적인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와 이슬람교의 항쟁은 서로가 상대를 설득해야 한다는 종교상 혹은 정신상의 문제에서 발단된 일인데 그것은 서구 그리스도교가 전도를 위해 이슬람세계에 도전을 한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독립하기 전부터 서구의 압력을 받아온 이슬람 세계의 대응은 1947년부터 1962년에 걸쳐서 나타났다. 그 대응의 방법은 서구의 압력을 그대로 밀어제쳐서 되돌려 버리는 반작용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해방전의 이슬람세계는 서구세력에 대해서 동등한 보복의 힘이나 압력을 뿌리칠 만한 힘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레벨의 차이는 심한 것이었고 이슬람 세계는 외부세력의 물리적 압력을 일방적으로 뒤집어쓰고 있었을 뿐이었다.
순수한 종교적이 면에서 이슬람이 서구의 공세에 대응한 전법은 두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그리스도교 선교활동에 대한 반론이고 또 하나는 서구문명과 서구적 근대화에 대한 대결이다. 그리스도교 선교활동에 대한 반론도 크게 나누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물리적으로 선교활동에 대항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교 선교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던 예언자 무하마드의 인격이나 이슬람 교의에 대한 비방과 중상에 대한 반론이었다. 물리적인 선교활동에 대한 반응, 즉 미션 스쿨이나 진료원을 통한 선교 활동은 이슬람 국가가 독립을 하자마자 즉시 그 반응은 끝나버렸다. 제국주의 세력이 물러감과 동시에 선교사들도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5.이슬람 부흥운동
소련 연방의 붕괴와 탈냉전 시대의 도래는 서방 자본주의 세계 뿐만 아니라 이슬람세계를 크게 고무시켜 이슬람 부흥운동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물론 이슬람권 일부에서는 이러한 국제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편승하여 '이슬람 원리주의'로 지칭되는 과격하고 급진적 형태의 무장투쟁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러한 오도된 성격의 움직임과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하고 있다. 즉, 이슬람 부흥운동은 오랜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의 적절한 대응으로 생성, 발전해 왔다. 그것은 제국주의열강의 침탈에 대항한 총제운동으로 반외세, 반세속을 공통분모로 이슬람의 정통성과 이슬람권을 보호, 발전시키자는 근본 취지를 담고 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에 본격적으로 태동된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슬람 국가의 대부분이 서구 유럽의 식민통치하에서 경제적 수탈과 민족적 차별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각성을 요구하는 계몽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개혁성향의 교육받은 부흥운동가들은 서구문물의 적대적 배척으로부터 앞선 과학과 제도를 발전적으로 수용하는 이슬람식 사고의 과감한 발상전환을 시도하였다. 이슬람 세계의 최고의 지적 엘리트였던 이들 개혁론자들은 이슬람 율법에 대한 맹목적 추종보다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재해석을 강조했으며, 이를 통해 유럽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이슬람을 보호하고, 나아가 이슬람 본래의 힘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연과학과 군사기술, 그리고 유럽의 정치, 경제 제도 및 복지 정책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구적 요소를 이슬람 체제에 도입하고자 하였다. 한마디로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슬람식 전통과 현대화 사이의 모순과 갈등을 합리적이고 조화롭게 극복하려는 지적고뇌의 표현이고,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이슬람 개혁론자들의 노력은 화려한 옛 이슬람 부흥이라는 궁극적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각 지역별로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잠재된 욕구로 무슬림들의 가슴속에 내재해 있다.
이러한 개혁성향의 이슬람 부흥운동은 근년에 들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이슬람권 지배력 강화와 세속주의와 서구화에 따른 도덕적 가치관의 혼란, 이슬람권 국가들의 민주주의 부진, 부정부패나 경제 정책 실패로 인한 빈부격차의 심화, 이스라엘에 대한 서방의 일방적인 두둔자세, 보스니아와 캐시미르 같은 분쟁 지역에서의 무슬림 대량박해에 대한 서방의 방관자적 태도 등에 의해 젊은층과 소외계층의 공감을 얻으면서 북아프리카, 중동 아랍국가, 이란, 터키, 파키스탄, 동남아시아 등 이슬람권 전역에서 더욱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그 양상은 지역에 따라 상이한 형태로 진행, 발전되고 있다.
우선 이슬람세계는 "Islamic Fundamentalism"의 우리말 번역인 이슬람 원리주의 혹은 근본주의라는 용어는 없다. 원리주의라는 용어는 1920년 미국에서 과격한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극단적인 세속화반대운동에 처음 붙여졌다. 이런 맥락에서 이슬람원리주의는 1940년대 서구식 정치질서와 세속주의에 반대하는 일체의 이슬람 운동에 서방세계가 갖다부친 용어이다. 그러나 서구세계가 사용하는 이슬람원리주의는 일반적으로 반서구 노선을 표방하거나 세속정부에 저항하는 일련의 모든 이슬람 운동을 악의적이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용어는 최근 지구상의 거의 모든 이슬람 부흥운동에 적용시되어 '이슬람은 반문명적이고 비인도적이며 위험하다'는 논리의 비약으로 발전되고 있다. 결국 무슬림들의 절대다수가 이슬람 원리주의자이고 그들의 대부분이 응징되어야 할 위험한 존재임을 부각시켜 이슬람 세계에 대한 부당한 침략을 정당화 하기 위한 고도의 수법이라고 많은 무슬림들은 믿고 있다.
한편, 이슬람권에서는 단지 서구의 가치체계에 대항해서 이슬람정신에 입각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고자 하는 일련의 움직임에 이슬람부흥운동, 이슬람개혁운동, 이슬람화운동 등의 표현을 쓴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진 채 정신적 가치의 존중, 코란과 하디스(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에 철저히 근거한 이슬람식 삶의 확립이라는 대전제하에서 줄기차게 지속되어 왔다. 그러다가 아랍과 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 지배를 경험하면서, 종교적 민족주의의 형태로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까지 본격적으로 발아되었다. 그것도 중세의 찬연했던 이슬람문화를 회상하며, 이슬람 세계가 서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앞선 과학과 기술의 습득을 받아들이되. 이슬람 정신의 강화와 이슬람식 사회체제의 구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절충적인 개혁운동이었다.
다만 이슬람운동권의 극히 일부가 서구의 끊임없는 경제적 착취와 이슬람 가치체계에 대한 흠집내기에 극단적으로 반응하면서 과격주의와 폭력주의가 생겨났다. 그리고 소수의 폭력적인 성향의 배경에도 다른 저항의 수단을 앗아가 버린 서구자신의 책임이 엄연히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보전에만 급급하면서 한 공동체의 고유한 사상과 가치틀을 짓밟고 자신의 것만이 지고선이라 생각하는 이슬람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 국가에서 보다도 이슬람을 철저히 박해하고 있는 곳에서 급진적이고 과격한 이슬람 운동이 호응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도 명백하다. 걸프해에서 철저한 미국의 경찰국가로 자처했던 팔레비샤 정권이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이란에서 이슬람 정권의 태동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오랜 일당 군부독재와 프랑스의 지원이 알제리에 FIS(국민구국당)의 집권가능성을 만들어 주었다. 튀니지나 이집트에서 무슬림 형제단이 끈질긴 저항을 계속하는 것도, 무슬림국가중에서 서구화와 세속화가 가장 성공했다고 하는 터키에서 조차 최근 이슬람을 정강으로 표방하는 복지당이 이스탄불과 앙카라 등 대도시의 시장선거를 석권하고, 세속공화국 75년만에 처음으로 집권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 부흥운동을 통해 실현해야 하는 이슬람 국가의 개념을 잘 정리한 대표적인 학자는 마울라나 마우두디였다. 이슬람 정치체제에 대한 서구의 다양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마우두디는 아주 명확하게 이슬람 국가개념을 정의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현대적 의미의 이슬람 국가형태응 이슬람 성법에 기초한 완전한 神政主義국가여야 한다. 물론 이러한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원칙과 개념이 확립되어야 한다.
첫째로 이슬람 정치 이론의 기본 원칙은 일원전 유일신관(tawhid)과 신의 절대권력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여 예언자 무함마드에 의해 건설되었던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신(알라)만이 절대적 주권의 주인이고 행사자이다. 동시에 신만이 진정한 입법자이며 절대적 사법권을 갖는다. 따라서 국민은 신의 종복에 불과하고, 국가는 그 운용이 신법인 이슬람법의 테두리를 벗어날 때, 통치의 정당성을 상실한다.
둘째, 이슬람 국가의 본질과 성격은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세속적인 서구 민주주의 원칙과 부합되지 않는다. 서구 민주주의의 철학적 기조는 주권재민에 있다. 이슬람 국가체제는 대주권의 원칙에 절대성을 주지않고, 신의 주권 원칙에 입각한다. 국가를 운용, 통치하는 자는 갈리프(신의 대리인)로 존재한다. 국가 원수는 스스로의 권위로 법을 제장할 수도, 함부로 폐기할 수도 없다. 대중은 그들의 주장이 신의 규범틀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내에서만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다. 신법에 대한 해석이 명확하지 않을때는 이슬람 학자들의 전원 '신정민주주의(theo-democracy)'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셋째, 이슬람 국가의 목적인 대중이 예언자 무함마드가 설정한 이상적인 조건에서 금기된 사항을 멀리하고 권장된 사항을 적극적으로 이행함으로써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구축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의무는 따라서 외적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분쟁과 갈등을 해결하는 표피적인 업무 이외에 대중을 도덕적으로 함양시키는 교육과, 신의 뜻에 걸맞는 사회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조성하고 유지하는 데 있다.
넷째, 이슬람 국가의 통치목표는 보다 공동체적이다. 모든 행위는 개인 차원이 아닌 공동체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지며, 사회 도덕률이라는 전체적인 가치관을 항상 염두에 둔다는 의미이다.
다섯째, 이슬람 국가는 통치자나 국민 모두가 이슬람이라는 공통의 이데올로기에 기초를 두고 이슬람 국가내에서의 이질적인 이데올로기의 소유자는 전체 공동체로서 이슬람의 가치를 파괴하거나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들 나름의 문화와 이데올로기가 존중되고 보호된다.
이슬람 국가에서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은 동등한 사회적, 법적 지위와 권리를 향유하고, 민족, 종족, 신분, 직업, 출신성분 등의 차이에 의한 어떠한 불이익도 당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사상은 일인의 권력 독점에 의한 전제주의나 독재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이것이 이슬람 국가의 근본체제이고, 이슬람식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이슬람 부흥운동은 몇가지 전제에서 오랜 역사적 배경과 시대상황의 적절한 대응으로 생성, 발전해 왔다. 첫째, 종교적으로 이슬람은 처음부터 완성된 최종의 종교였기 때문에, 변질된 이슬람으로부터 순수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한다. 즉, 코란에 기초를 두면서, 예언자 무함마드가 실현한 초기 이슬람 공동체(Ummah)을 재건하자는 것이다. 둘째. 이슬람은 근본적으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것이 아닌 정교일치의 단일유기체이기 때문에 이슬람 부흥운동이 정치성을 강하게 띠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대항한 문화적 총체운동으로 반외세, 반세속을 공통분모로 이슬람의 정통성과 이슬람권을 보호,, 발전시키자는 근본 취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넷째,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슬람의 전통을 토대로 하면서 앞선 서구의 과학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즉 '전통과 근대화'의 이상적인 조화를 목표로 삼고 있지만, 그 양상은 국가나 시대, 투쟁의 대상이나 목적, 방법론 등에서 매우 다양하며 이를 획이로하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슬람권에서 최초로 개혁을 통한 이슬람 정통주의의 강화를 시도한 움직임은 9세기 중엽 아흐마드 이븐 한발이었다. 그는 코란의 창조설과 같은 당시의 비생산적인 교리논쟁을 종식시키고 이슬람의 신학체계를 바로잡았다. 이로 인해 이븐 한발은 후일 완고한 이슬람 율법주의와 청교도적인 이슬람 부흥운동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14세기에도 이븐 타이미야라는 신학자가 '살라피(salafi)'운동을 주도하여 신비주의, 범신론, 사변적 신학, 미신적인 요소로부터 이슬람의 정화를 주장하였다. 위의 두 학자의 맥을 잇고 등장한 것이 18세기 중엽 '와하비(wahabi)'운동이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 와하비운동을 이슬람부흥운동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중동연구자들의 일반적이 견해이다. 이 운동은 이슬람이 성립된 후, 1200년 동안 누적되어 온 신학적 변질과 사회적 악습에 대한 반발로 출발하였다. 특히 당시 이슬람 사회에 만연하던 이슬람 신비주의가 공동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위주의 기복신앙으로 흘러가자 압둘 와합은 이를 배척하고 청교도적인 순수한 이슬람을 회복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그는 이슬람 사회가 쇠퇴하게 된 이유는 이슬람 차체의 문제가 아니라 반대로 무슬림들이 이슬람의 정신에서 멀어졌기 EOans이며, 따라서 이슬람 본연의 정신과 고유한 전토을 부흥함으로써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와하비 운동은 이슬람의 요람지인 아라비아 반도에서 태동하여 사우디 아라비아를 건국하는 사상적 기둥이 됨으로써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서구열강이 중동.아랍세계를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이전 이슬람 사회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와하비 운동은 큰 의미를 갖는다. 동시에 이 부흥운동은 19세기 중엽까지 이슬람세계의 개혁 움직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리비아에서는 사누시아 운동이 일어나 정권을 잡았고, 인도에서는 무슬림 각성운동이, 수단에서는 무하마드 아흐마드가 마흐디운동이 각각 변질된 이슬람의 타파와 참된 이슬람의 부흥을 주창하였다.
18세기 말엽부터 시작된 유럽열강의 동진은 와하비 운동에 고무되어 있던 이슬람 세계의 부흥 움직임을 더욱 촉진하였다. 더욱이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유럽의 근대문화가 중동에 소개되는 전환점이었고, 이로 인해 중동의 근대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프랑스 혁명의 이상은 아랍 지식인들에게 외세의 통치에서 아랍을 해방시키려는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서구의 발전 사이에서 번민하던 사상가는 알 타흐타위였다. 그는 이슬람권 밖에서도 행복과 풍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슬람 체제의 합리적이고 현대적인 해석을 강조했다. 알 타흐타위의 온건한 개혁사상은 후일 세속적 근대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지만 전통적인 이슬람 부흥론자들의 견해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이 시기의 이슬람 부흥운동의 주류는 오히려 이슬람 개혁운동으로 불릴 정도로 진취적이었고 부패하고 무능한 기존질서를 무너뜨리고 이슬람의 가치를 통하여 유럽침탈에 대비하고자 했다. 따라서 종교적 동기에서 출발한 이 운동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에서 기성세력과 그 후원 세력인 유럽열강의 탄압을 받아 실패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처음부터 정치 사회적 동기에서 범세계적인 흐름을 이해하면서 시작된 근대적 무흥운동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이 시기의 운동은 종교적 순수성 강조는 물론, 사회전반에 걸친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변혁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이슬람 개혁운동이라는 표현이 보다 적절하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본격적으로 태동된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슬람 국가의 대부분이 서구 유럽의 식민통치하에서 경제적 수탈과 민족적 차별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각성을 요구하는 계몽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개혁적 성향을 띤 이 시기의 이슬람 부흥운동은 추구하는 목표와 방법론에서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서구의 도전에 대한 무슬림들의 보다 직감적인 반응으로 당시 서구의 급격한 발전
양상을 애써 외면하면서 영광스러웠던 이슬람의 과거를 재현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집약된다.
두 번째 단계는 서구식 방법으로 이슬람을 재해석하고 발전시키는 시도였다. 그들은 서구과학의 우수성에 크게 감명받았음에 틀림없지만,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았으며 서구식 교육으로 새롭게 습득한 방법론으로 이슬람의 서구 기독교 이데올로기에 대한 우위를 증명해 보였다. 그들은 서구가 이슬람을 공격하는 주된 내용인 여성의 지위, 노예제도, 비무슬림들에 대한 태도, 계시와 이성간의 상충등과 같은 문제에 대해 명료한 논리로 반박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영국식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들에게 무슬림으로서의 자긍심과 이슬람문화의 위대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강력하게 심어 주었다.
세 번째 단계는 반식민지 분위기가 고조되자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사회운동이 행동화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의 행동철학은 서구의 도전에 대한 대응은 그것을 회피하여 과거 전통이나 영광속으로 숨어드는 것도, 상대의 문물을 받아들여 소화하는 것도 아닌 강력하고도 공격적인 자기확신을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운동을 주도해 나간 부류는 ;흔히 원리주의자라 불리는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이슬람의 정치적 영광과 원래의 순수성을 재건하는데 확신에 찬 모습으로 논의를 단순화시켰다. 물론 원리주의자들은 이슬람의 전통과 순수성을 고집한다는 면에서 앞선 율법학자와 비슷한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구의 발전 상황과 문물의 우수성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낡은 이슬람의 과거에 연연해 하지도 않았다. 나아가 그들은 스스로 서구의 지적, 정치적 지배에 대항하는 이슬람의 수호자로 자부하였다. 자마티 이슬라미의 창시자인 파키스탄의 마울라나 마우두디가 바로 이부류의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였다.
20세기 이슬람 개혁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후대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이는 이란 출신의 자람루딘 아프가니였다. 그는 이슬람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유럽의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는 이론적 당위성을 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슬람권의 대동단결을 위해 범이슬람주의를 설파하기도 했다. 탁월한 선동가였던 아프가니는 외교와 설득으로 각 국가 권력층을 계몽하고, 일반 서민과의 대중적 접촉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술탄을 정점으로 한 이슬람세계의 단결을 호소했다. 그의 실천적 정치전략은 영국치하의 인도대륙과 프랑스치하의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무슬림들의 부분적 자주투쟁을 유도하기도 했다.
그의 정치이론을 계승하여 더욱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킨 이가 무하마드 압두였다. 그러나, 압두는 아프가니와는 달리 정치적이고 개별국가 중심의 애국주의와 아랍민족주의를 배척했다. 그는 이슬람을 총체적으로 부흥시켜 유럽의 비평과 공격에 대항할 수 있도록,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는 이슬람 원리와 가치체계의 적절한 재해석을 시도했다. 더욱이 그는 이슬람의 정통교리가 확립된 후 1000년만에 처음으로 이슬람 신학의 영역에 이성을 끌어 들였다. 이슬람과 과학을 자유롭게 접목한 것이다. 그의 사상적 토대위에 방법론을 달리하는 수많은 이슬람 개혁론자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개혁에 앞장섰다.
1차대전 이후 이슬람 부흥운동가들의 노력과 이상과는 반대로 이슬람세계의 세속화는 급속히 진전되었다., 서구의 침탈과 정치, 경제적인 예속상태도 갈수록 심화되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개혁론자들의 입지는 좁아졌고, 분노한 급진주의가 점차 세력을 얻어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이집트의 악명높은 '무슬림형제단'이 태동하였다. 1928년 이집트의 청년교사 하사 알 반나는 이슬람식 생활양식에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이론을 적용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감지하였다. 그 대안으로 그는 도덕과 윤리의 틀로 이집트인을 이슬람 정신으로 교화시키기 위해 무슬림형제단 운동을 시작했다.
무슬림형제단 운동으 핵심은 1930에 작성된 하산 알 반나의 서한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서한에는 서구문명의 기만성을 규탄하고 이슬람의 우월성을 온화한 문체로 설득력있게 논술하고 있다. 특히 이슬람 국가와 서구열강과의 외교관계 수립이나 이슬람권내의 소수 기독교도 및 유대교에 대한 처우와 문화적 자주성에 대해 관용을 보이고 있다.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자연과학은 이슬람의 존귀함을 증명해 주는 필요한 정치, 사법 및 행정체제의 개혁, 모든 세속정당의 해체, 세속법령의 개정, 관료의 이슬람화, 부패의 청산, 삶의 질 향상, 윤리교육, 기술연마, 군사력의 강화 등과 같은 전략적인 방책도 제시하였다. 예배와 단식과 같은 전통적인 이슬람 관습은 당시 사회적 여건 아래서는 구사력 강화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대체로 이 운동은 제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는 무슬림들의 실질적인 사회경제적 상황에 관심을 두면서 계몽적 성격을 분명히 했다. 1947년 유엔이 아랍인의 영토인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활하고 이듬해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자 형제단은 당시 폭발직전의 아랍대중들의 분노를 대변하면서, 극단적인 노선으로 돌아섰다. 반제국주의와 반이스라엘타도를 외치며 그들과 결탁한 기존 정치세력들에 대한 극렬한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결국 1948년말 형제단은 이집트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그들의 지도자인 하산 알 반나 마적 암살되었다. 이제 형제단은 지하로 숨어 들면서 극단주의의 상징으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들을 급진적원리주의자라고 부른다.
이처럼 근대화를 주창했던 이슬람 부흥론자들이 한결같이 이슬람의 수호를 외쳤지만 방법론은 서로 달랐다. 종래 개방적 근대주의자들이 학문적인 접근을 통해 주로 서구식 교육을 받은 식자층을 대상으로 서구화데 치중했던 반면, 원리주의자들은 대중을 상대로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방법을 택했다.교육기회의 확대, 대중매체의 보급, 새로운 고용창출, 새로운 사회계층의 성장등에 힘입어 20세기 중반까지는 개방적 근대주의자들의 역할과 입지가 강화되었다.한편 세속적인 근대주의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원리주의 개혁사상의 대중성은 2차대전 이후 독립시기에 이르러 본격화된다. 즉,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시도되었던 제3세계의 근대화가 모순 덩어리로 가시화되고 난 후였다. 즉, 이슬람의 정통성이 회복되기는커녕, 세속적 민족주의자들이 소위 타락한 서구주의를 지향하면서 승리를 거두는 시기였다. 터키의 케말 아타투르크, 이란의 레자 샤 팔레비,파키스탄의 아유브 칸, 이집트의 가말 압둘 낫셀,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에 의해 추구되었던 세속화와 서구식 근대화 정책은 오히려 원리주의 개혁론자들의 대응과 활동반경을 넓혀주었다.
개혁성향의 이슬람 부흥주의자들은 이제 서구식 조직개념을 도입하고, 출판과 매체의 첨단 매커니즘을 극대화하여 서구식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과 젊은 세대들에게 그들의 사상을 전파하고 홍보하였다. 그들의 전략은 서구제도의 모방이 아니라 서구로 부터의 독립과 최소한 대등한 관계를 이룩하기 위해 서구의 앞선 기술을 활용하는데 있었다. 그들은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원했고 권력의 쟁취를 위해서는 급진주의를 채택했다. 그러나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이슬람의 가치가 상처받고, 무슬림들의 자존심이 유린당하는 시기에 이슬람 개혁론자들은 조직적이고 분명한 태도로 이슬람의 정통성 부흥을 부르짖으며 대중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석유가 자원화된 이후 중동의 근대사는 한마디로 서구가 엮어내는 배신과 아랍 저항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특히 1948년 아랍의 독립을 보장해 준다던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심장부에 이스라엘의 건국을 지원하자 서구와 아랍의 씻을 수 없는 반목과 불신의 씨앗은 갈수록 나쁜 열매를 맺어갔다. 2천년간 살아온 고향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저항운동 조직을 결성하여 고토회북과 독립이라는 당면 목표를 위해 처절한 생존의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난 서방세계는 아무도 그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들의 고통에 동정적이지도 않았다. 1967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의 포기는 이스라엘의 점령지에서의 즉각 철수를 결의했지만, 국제사회의 결의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켜지지 낳고 있다. 무장되지 못하고 서방의 지지를 받지 못한 아랍인들은 저항하였다.그 납치와 인질 테러의 배후에는 항상 이슬람원리주의라는 이름이 문명세계를 괴롭혔다. 1970년 대 이후 이슬람화운동은 사상적인 투쟁에서 급진적인 이념과 정치투쟁으로 선회하면서, 과격이란 이미지를 강화하였다.
이슬람의 급진사상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파키스탄의 뛰어난 정치 이론가 마울라니 마우두디였고 이를 더욱 정교하게 체계화한 사람은 무슬림형제단 소속의 사이드 쿠트브여사. 그는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의 무지시대의 상황을 오늘날의 세속화 현상으로 확대해석 하면서 절대신에게 속한 고유한 권한들이 적대적인 비이슬람적 세속정부의 수중으로 넘어 갔음을 개탄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빼앗긴 이슬람의 고유한 가치를 도로 찾는 것은 무슬림들의 신성한 의무로 규정했다. 서구의 비호를 받는 세속정권이 장악하고 있는 이집트, 이란, 알제리, 튀니지, 터키 등 이슬람세계 도처에서 급진주의는 반정운동으로 변모되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1979년 중동의 가장 서구화된 석유부국 이란에서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이슬람 혁명이 성공했을 때, 서구는 경악하였다. 서민과 중산층을 껴안은 아래로부터의 이슬람 혁명은 50년 에 걸친 근대화의 과정에서 빼앗긴 대중의 울분을 한꺼번에 풀어주었다. 그들은 조금 덜 고유한 전통과 문화의 바탕위에 꽃피는 첨단과학의 낙원을 그들은 꿈꾸었다. 이란의 이슬람 정권이 지난 18년간 서구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무역제재에도 그 기반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것은 빠른 템포의 서구화보다는 이슬람의 전통과 가치가 변질되지 않는 사회를 선호하는 이러한 민중의 뜻을 업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정권의 많은 문제점과 경제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란에서 쿠데타를 통한 정권교체의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만약 그런 사태로 발전하더라도 친서방적인 정권의 출현은 더욱 기대할 수 없다는 중동전문가들의 지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슬림 형제단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성향의 이슬람 부흥론자들의 약진은 아랍국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시리아에서는 무슬림 형제단의 반정 투쟁이 극렬하게 전개되었으나 아사드 정권에 의해 잔혹하게 소탕당하였다. 1981년의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암살도 형제단의 행위로 알려져 있다. 요르단에서도 1989년 총선세서 원리주의 세력의 의회 의석의 45%를 차지하여 주목을 끌었다. 더욱이 수단에서는 군부쿠데타가 일어나 국민이슬람전선이 집권함으로써 이란에 이어 두 번째로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이 등장하였다.
원리주의 성향이 이슬람부흥운동이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 것은 90년대였다. 동유럽과 소련연방이 붕괴되고 자본주의의 모순과 함께 서구 강대국들의 중동각국에 대한 침탈이 더욱 가속화 되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 무너진 사회주의의 축을 이슬람이 대신하리라는 기대와 함께 노골화된 서구의 침략에 대한 이슬람세계의 단결이 어느때보다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신원리주의 운동으로도 불리는 이슬람 부흥운동은 양차대전중 이슬람 세계의 지적 그리고 사회정치적인 분야에서 태동된 근대적인 현상이며 2차대전 후 더욱 중요성을 띠며 발전해 왔다. 이 운동은 이슬람이 완전한 삶의 방식으로서 만연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비종교적 이념에 대해 생명력 있는 대안을 제공할수 있다는 믿음과 오늘날의 왜곡된 세계질서를 재편하고 수정하는 중요한 역할이 이슬람이 담당할 수 있다는 믿음과 오늘날의 왜곡된 세계질서를 재편하고 수정하는 중요한 역할이 이슬람이 담당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슬람 개혁운동은 상호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두 개의 상이한 측면, 정치이념적인 그리고 문화 종교적인 성격을 띤다. 우선 정치이념적인 면에서는 외국의 정치적 지배와 경제적 착취 나아가 서구의 자유주의와 구소련의 맑시즘의 문화적영향과 이념적 간섭에 대항하는 투쟁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문화적이 면에서는 독특한 이슬람 문화의 동질성 주창과 본래적인 이슬람의 믿음, 규범, 의례에 기초한 신앙심 회복을 표현하고 있다.
이슬람 부흥론자들은 이슬람의 신학적 질곡에 머무르지 않고, 뚜렷한 정치 이념을 가지고 단계적으로 정치투쟁에도 참여했다. 그리하여 지난 50년 동안 이슬람 헌법의 제적와 샤리아의 실시, 민주주의와 이슬람 세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정치투쟁을 전개 했다. 중대한 정치쟁점이 있을 때마다 이슬람을 근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정책적인 수정과 반대집단과의 정치적 제휴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개혁론자들은 활발하고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통해 이슬람국가의 수립에 매진해 왔다. 동시에 대중을 선도하고 정신적으로 고양시키기 위한 노력도 병행하여 교육의 이슬람적 개혁, 성적으로 천박하고 외설적인 공공매체의 정화, 무신론적인 이념서적의 금지, 남녀공학교육의 폐지등을 주장하였다.
이슬람 부흥운동의 대두는 흔히 탈식민지시대의 무슬림 사회에서 세속적 정치 엘리트에 의해 주도 되었던 이슬람의 근대화 움직임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났다고 묘사된다. 그러나 많은 개혁적 부흥그룹은 서구화와 근대화를 명확히 구분하면서 근대화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근대화를 한 사회의 사회경제적 기술적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제도적 혁신과 그 과정이라는 용어로 정의한다. 근대적 발전들이 종교의 소외화 세속화 전통적 가족념의 몰락, 성도덕의 문란과 같은 현상을 동반하는 것에 동의하지않고 특히 신의섭리보다 인간의 이성이 우위에 서는 이념적 혼란에 대해서는 단호한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해, 흔히 현대화란 이름으로 통용되는 근대화의 사회문화적 요소를 무슬림 사회의 기술적, 경제적 발전은 이룩하는 필수 가결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슬람 복고주의 지도층은 무슬림 사회가 그들 자체의 방식으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도모해야 된다는 원론적인 입장외에 근대화에 대한 뚜렷한 견해를 갖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부흥주의 이론가들은 다른 이슬람국가의 엘리트 집단과 마찬가지로 근대화의 외적 발전과정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한다. 즉, 근대화의 논쟁이 과학, 기술, 발전이라는 외적측면을 벗어나 다원주의, 민족주의, 서로 다른 견해에 대한 관용,사고와 양심의 자유등의 문제로 확대되면 그들은 매우 모호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그러나 주어진 사회경제적 여건에서 개혁성향 그룹의 절대다수는 종래와 같은 판에 박힌듯한 이념적 해석과 사회적 저항을 극복하려 노력했다. 그리하여 근대화 과정의 다양한 변화의 요소들을 능동적이고 생산적으로 재해석하면서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풍요와 복지를 이룩하려는 목표에 동참하려 했다. 새로운 사회질서의 재편과 급격한 변화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입지를 확보할려는 노력과 요구가 어느떄보다도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들이 이슬람의 화려한 과거를 복구하고 이슬람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강화하려는 시도는 새로운 사회에서 무슬림으로서의 삶을 확보하려는 다수 대중의 민의의 수렴으로 앞으로도 강도 높게 지속될 것이다.
다만 일부 이슬람 세력들은 급진주의적 양상을 띄면서 서구가 빚어낸 배신과 약탈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렬한 대응을 하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흔힌 이슬람 원리주의자로 지칭되는 이들 부류는 전체 이슬람 세계에서 본다면 극히 일부이고 이런 방식의 투쟁을 바라보는 이슬람 대중의 반응도 냉담한 편이다. 그러나 이런 이슬람 원리주의세력의 발화에 대한 근원적인 책임은 서구와 결탁하여 지배층의 이익보전에만 급급하는 부패한 세속정권과 복리민복이라는 기본적인 정책의 실패,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는 이슬람 가치관의 타락에 대한 반발이고 힘으로 지배하는 서구강국들의 논리에 순응하지 못하는 자의식 강한 무슬림들의 응어리의 표출이다.
Ⅵ. 효과적인 이슬람 선교전략
오늘의 이슬람 사회 및 움바(모슬렘 공동체)를 복음선교의 대상으로 이슬람교의 역사를 검토하고 그러한 역사적 배역을 생각할 때, 이슬람권 선교 방법이 한 두가지로 단순히 제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또 지난날의 서구 교회를 통한 선교의 접근과 선교 형태들을 연구하여 볼 때 그것들을 그대로 모방해서는 안된다는 사실도 논의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현재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이슬람권 선교 현황에서도 역시 앞으로 교회사가 의미있게 평가해 줄 수 있는 뚜렷한 하나의 방법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현재의 여러 선교 노력들이 먼 훗날 어떻게 인정받게 될 것인지를 지금 이야기하는 것도 무리이겠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얻은 지식을 가지고 정리하려 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많은 선교현장들에서는 하나의 영웅같은 선교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그것만이 유일하게 선교결실을 맺을 수 있는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하나님이 주신 상황에 대한 경험과 지식 그리고 노력을 가지고 검토와 계획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그 계획을 받아주고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런 신앙적 자세에서 다음의 몇 가지를 제시해 본다.
1.선교사의 파송과 그의 삶
기독교의 복음이 교리나 도덕적 행위를 위한 율법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에게 근거한다는 점은,이슬람권 선교에서도 강조되어야 한다. 예수의 오심과 우리 가운데 거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의 출발이며 내용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영광스런 자리를 떠나 낮은 곳의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하여 왔다. 구원을 위한 예수의 사역은 일정 거리를 두고 글과 강연으로 체계있게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 있는 곳에 함께 해주는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를 출발점으로 하여,찾아나가 같이 있고, 함께 걷고,자청해 음식을 나누는 삶을 선교의 방법으로 삼았다.
엠마오로 가던 두 종 등 남자들에게 예수는 가까이 먼저 동행을 청하고 말을 건네며 그들로 하여금 자기를 바로 볼 수 있게 하였다. 여기에는 오늘의 모슬렘을 위한 선교를 위하여 배울만한 것이 있다. 선교사를 지원하는 이들은, 사무실과 자료실 또는 교회와 강의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슬렘이 있는 곳에 찾아 나가야하며, 그들이 제일 관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예수는 엠마오의 두 사람이 예루살렘의 뉴스거리인 자신에 대해 대화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모슬렘이 살고 있는 지역에 나가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 들어가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두려움과 의심의 대상이 아니며, 불신자나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대화의 대상이며 서로 이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상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예수를 청하여 저녁식사를 함께하고 더 거하기를 원했던 것처럼, 선교지에서 선교사는, 그들에게 끌림을 주고 함께 말하는 것이 있어야 하고,가르칠 수 있어야 하며,가르침은 그들이 이해하는 언어로전달되어야 한다. 서울 시내에도 오가는 이슬람이 상당히 있다. 이슬람선교를 생각하는 자는 먼저 이들이 있는 곳, 걸어다니는 곳,관심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봐야 할 것이다. 환영받을 수 있는 분위기로 그들이 있는 곳을 찾아나선적이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다. 여기서 한명의 모슬렘을 찾아나서지 않은 선교사 지망자는 그의 이슬람선교 소명을 다시 확인해야 할 것이다. 선교는 예술의 세계보다 더 예민하고 창조적이고 신비한 것이다. 이슬람 선교는 신중하게 연구하는 과정없이 막연히 믿음으로 하면 된다라는 무지와 자만으로 접근할 수는 없다. 모슬렘들을 만나고 싶고 그들에게 끊임없이 마음이 열리며, 찾아가고 싶고, 주고 싶고 또 복음의 의미가 어떻게 해서라도 전달되게 하는 것이 선교사의 모든 소망일 때 그의 나감은 인정되며 거기에 선교의 참된 출발이 있는 것이다. 그러고 그런 선교사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메신저인 것이다.
1) 이해와 긍휼, 영적인 무장: 기도와 성령충만 - 무슬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크시다.(요3:16),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여 영생을 주고 싶어하신다.(딤전2:4),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셨다.(롬1:6), 그들의 종교는 하나님과 복음에 대해 거짓개념을 주기 때문이다. (고후4:3-4),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이 없다.(행4:12),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이 나에게 증거 하도록 강권하시기 때문이다.(고후5:14-15)
2) 1919년에서 1962년까지 43년간 이란에서 감동적인 헌신을 바친 미국 장로교 선교사 William M. Miller는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할 10가지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 무슬림들과 이슬람교에 대해서 친밀감을 기지라. ⓑ 무슬림들을 사랑하라. 무슬림은 타파해야할 원수가 아니라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이다. ⓒ 쉬지 말고 기도하자. ⓓ 관심을 가진 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자. ⓔ 개종하는 신자들을 기독교 우정 속으로 영접하자. ⓕ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알려주자. ⓖ 개종자들을 환영해 줄 교회를 소개해 주자. ⓗ 복음의 유일성이 무엇인지 강조해 주자. ⓘ 가능한대로 논쟁을 피하자. ⓙ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그리스도를 시인하자.
3) 성육신적 선교, 사랑의 봉사를 실천할 것- 선교사의 인격과 생활모습을 통한 선교. : 전호진교수도 이슬람선교는 인간적인 접촉과 사랑의 봉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슬람교에서도 자비와 사랑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점에서 이슬람교를 능가하여야 하며 의료, 구제, 개발, 교육 등을 통한 간접 선교로 길을 연후에 직접 전도를 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서정운 교수 또한 순수한 사랑의 봉사를 강조한다. "기독교. 특히 외국 선교사들의 봉사기관은 무슬림들의 경계를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순수한 사랑의 봉사는 언제 어디서나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교수, 기술자, 의사, 간호원 등은 때때로 목사인 선교사보다도 더 편리하고 효과적으로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4) 은혜의 복음을 선포할 것- 이슬람교는 은혜의 종교라기 보다는 율법의 종교요, 구원의 종교라기 보다는 행위에 따라 심판하는 행위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이슬람교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움과 자비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엄격한 법인 코란, 샤리아 법의 지배를 받고 있는 무슬림들에게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가장 효과적이고 적절하다고 본다.
5) 현장에 맞는 선교 방법을 사용할 것- 이슬람교 안에는 여러 분파가 있다. 그리고 그 분파마다 특성이 다르다. 또한 지역적으로 아프리카의 이슬람과 중동의 이슬람, 중앙 아시아의 이슬람은 그 성격이 다르다. 특별히 근본주의 이슬람, 민속 이슬람, 정통 이슬람은 매우 다른 특성을 지니기에 선교적 접근도 달리 해야한다. 정통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선교 방법으로는 대화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 민속 이슬람교도들은 샤머니즘화 된 신자들이기 때문에 '대화'의 방법보다는 '능력대결'(Power Encounter)의 방법을 취해야 할 것이다. 민속 이슬람은 일반적인 과학으로는 풀 수 없는 일상 생활에 나타나는 인간의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천사, 성스런 동물들, 부적, 예언, 점보는 것, 마술등이다. 그들의 관심은 매일 일어나는 삶과 죽음에 대한 대답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속 이슬람 교도들에게는 능력 대결을 통해 초 자연적인 힘을 공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기독교인이 되려는 마음을 갖게 해줄 수 있다. 근본주의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선교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 속에서도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역사하신다.
6) 토착 교회와 현지인 지도자를 육성할 것- 어느 곳이든 현지인이 중심이 된 토착교회의 육성과 현지인 지도자의 양성에 따라 선교의 성공과 실패가 좌우된다고 하겠다. 특별히 이슬람권 선교에서는 그렇다. 이슬람권 안의 현지인들로 이루어진 교회를 육성하지 않고, 현지인 지도자를 양성하지 않고는 이슬람권 선교가 본격화 되지 않을 것이다.
7) 한국 교회의 역할
8) 방송전도 전략
9)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선교전략에 앞서서 이슬람교를 대하는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슬람교를 대하는 자세로서 Donald Mccurry교수는 '하갈과 이스마엘 그리고 그들의 후손인 무슬림 영혼들을 구속 못할 이방인들, 더 나아가 기독교의 적으로만 취급한다면 이러한 태도는 온 세상보다 한 영혼을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라는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행위일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사랑의 자세를 강조하는 바 '우리는 기독교 선교전략을 이야기할 때 모하메드를 사탄의 도구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피해야한다.' '복음전도는 사상은 강하게, 방법은 부드럽게 시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청춘을 파키스탄 선교에 바친 전재옥교수 또한 무슬림에 대한 자세를 중시하면서 '두려움과 의심의 대상이 아니며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대화의 대상이며 무슬림들을 만나고 싶고 끊임없이 마음이 열리며, 찾아가고 싶고, 주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선교의 참된 출발이 있는것'이라고 하였다.
2. 기존선교의 대열에 끼어 듬
이슬람권 선교에서는 이미 한국보다도 더 역사가 오랜 선교의 배경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에 선교지가 한국 선교사에게는 개척 선교이며, 첫 출발이지만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한국 선교는 아주 마지막 단계에 끼어든 것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한국 선교사는 그 오랜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참여라는 생각과 뒤늦게 선교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는 인정은 한국 선교사로 하여금 엄숙하고 겸허한 자세를 갖게 하 ㄹ것이다. 지난 날의 서구 선교와 앞서간 선교사의 선교는 다 잘못되었다고 평가하고,서구 선교는 식민정책으로 순수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부정적 자세는 한국 선교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한 비판은 선교사가 그들에게 맡기고 한국 선교사는 서구 선교사와 서구 선교부 그리고 앞서간 한국 선교사가 그 특정 지역에서 해온 사역을 연구하여야 한다.배우는 것은 개방적이며 솔직하고 겸손한데서 가능하다는 원칙이,선교를 하려는 첫 임지의 선교사에게 필요한 것이다.
이미 나와있는 선교부를 파악하고 그 선교부 때로는 여러 선교부가 그 지역에 활동을 하고 있을 것으로 보아,앞으로 서구 선교부의 그곳에서의 인기 및 장기 책임이 어떠한지 배우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한국 선교사와 선교부 행정 담당자는 때로는 공식적으로 서구 선교부의 담당자를 만나고 선교부의 총회와 협의회에 참관할 수 있는 것이 좋다. 기관뿐만 아니라 개별적으로 서구 선교사와 만남을 갖고 그들의 선교지 이해,그들의 선교지 사람들에 대한 평가와 기대, 투쟁과 발전에 대해 들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의 고민과 해결 방법에 대해 들을 때 그들이 어떤 형태로 선교지에서 보여지고 있는지를 알며, 현지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그곳 교회에서 하고 있는 다양한 선교의 실제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곳의 교단 교회의 구조, 지도력,가장 잘 받아들여지고 있는 목회형태, 가장 저항과 오해를 받고 있는 선교정책을 연구해 보는 것이다. 선교지 교회의 목회자들과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먼저 찾아나가고, 그 문화에서 좋아하는 방법으로 인사를 하며, 사귀고 자문을 받을 수 있는 겸손과 여유는 중요하게 인정되는 것이다 .예를들면 파키스탄의 씬드 지역에는가장 큰 교단이 파키스탄 연합교회이며,그중에서도 성공회가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씬드 지역에 나가서 선교활동을 하려고 한다면,그곳의 성공회 감독을 만나고,그의 후원과 조언을 구하여,더디더라도 충분히 감독과의 관계를 맺지 않고는 장기적으로 그 지역에서 선교하기는 어렵다. 비록 독립적으로 해나간다 해도 언제 출국지시를 받을지 모르며 행정면에서 강한 저항을 받게될 것이다. 1년이 더 걸리더라도 공식관계를 다지고 출발하는 선교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비록 그 곳 교회의 지도자들이라고 하여도 문화의 거리와 서로 다른 가치관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한국적 사고방식과 한국적 목회경험으로 통하지는 않는 것이 있다. 모슬렘 문화권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특유의 세계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전개되어온 선교사역에 대한 성급한 평가에 앞서 먼저 그 실제에 대한 예리한 관찰을 하고, 관찰만이 아닌 몸으로 경험해보는 과정을 가져 볼 필요가 있다. 파키스탄 교회에서의 목회자의 위치와 고독한 그의 사역, 전도에 대한 두려움과 모슬렘을 교회에 초청하지 않는 배경,작은 헌금, 선교사에 대한 인식에는 그 목회자가 개인적으로 어쩔 수 없는 충분한 문화적,역사적,종교적 요인들이 있는 것이다. 즉 선교현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경험과 지혜가 요구된다.
3.중동지역에서의 선교전략
이슬람권 국가에 선교목적으로 들어갈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인가? 당연히 회교라는 종교의 교리와 관습 그리고 전통에 대한 깊은 통찰과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선교 대상국의 역사적, 문화적 인종적 배경과 현정권의 성향과 종교정책,과거 선교사들의 그 나라에서의 선교경험 등도 면밀히 분석하고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타문화권 타종교권 선교에 있어 시행착오를 전혀 없앨 수는 없어도 적어도 이를 극소화하려는 노력과 지혜는 있어야 할 것이다.
미국세계선교센터(USCWM)자료에 의하면 무슬림 종족이 4천개나 되며 미전도지역에는 8억6천명이 살고 있으며 소수 부족은 3천개로서 1억 4천만명이 문명과 격리된 채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1) 무슬림에 접근하는 선교방법
이슬람에 접근하는 선교방법은 지역과 성격에 따라 달리해야 한다. 현재 이슬람은 교리적으로 크게 한 가지로 형성되어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U.A.E,콰타르 등 순니파와 이슬람국가들은 전통주의 이슬람권으로 분류할 수 있다. 왕조국가를 형성하여 자체적으로 엄격한 교리를 고수하고 있으나 대외적으로 매우 온건하다. 법적으로 타종교의 활동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 이런 나라에서는 공공연히 전도활동을 할 경우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된다.
사회주의 이슬람은 리비아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슬람 세계를 지배했던 서구에 대한 반감이 큰 지역이다. 반면 비 서구국가에 대해서는 매우 호의적이다. 이곳에서는 제3세게 피식민국의 감정을 이해하고 접근할 때 좋은 접촉점을 마련할 수 있다. 민족주의 이슬람의 대표적인 나라는 터어키이다. 이슬람교와 민족 중에 민족을 우선순위에 놓는다. 따라서 이슬람법이 국가법으로 되어 있지 않고 서구적인 민주법이 헌법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기독교 선교는 이질적인 집단의 양성,민족 분규를 위한 음해 공작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기존의 소수 기독교 민족 집단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이란으로 대표되는 근본주의 이슬람은 최근 강하게 일어나고 있는 운동이다. 반이슬람세력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근본주의 이슬람에 정치적,물리적으로 대항하는 일은 금해야 한다. 왜냐하면 영적 전쟁이지 정치적 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란의 경우 호메이니의 회교혁명 후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인이 더 성장한 것을 볼 수 있다. 전투적인 이슬람을 보면서 감정적 물리적인 대항을 피하고 희생과 사랑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한다.그러므로 이슬람을 향한 선교전략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새로운 인식전환이 필수가 된다.
첫째, 무슬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납하는 화해의 선교적 자세로
동화되어야 하낟.
둘째,무슬림은 우리의 이웃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대화해야 한다.
셋째,무슬림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의 형제라는 의식이다.
넷째,기독자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즉 섬기는 사역이다.
다섯째, 종교가 아닌 인간을 상대해야 한다. 전도는 일종의 인격적인
대화,관심,우정,사랑,이해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복음이 이해되도록 선포하고 설득시키는 길이다. 이슬람교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어야 하낟.
2) 팀사역을 통한 선교활동
사도바울은 탁월한 설교자이면서 선교사였다. 그러나 그는 최초로 파송될 때부터 동역자와 팀사역(Team Work)을 하였다. 처음에는 바나바와 동행하였고(행13장)후에는 실라와 사역하였으며(행15장) 루스드라의 제자 디모데와 상당히 오랜 동안 함께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는 사역의 연속성과 효율성뿐만 아니라 제자훈련에도 확실한 방법이어서 훗날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 하였다. 팀사역을 정의한 다면"둘 이상의 사람들이 같은 비전과 같은 목표,같은 뜻을 가지고 모여서 함께 주님의 일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교지의 형편에 따라 다르지만 많은 경우 선교사팀을 구성해서 선교할 수 있다. 각기 재능과 은사가 다른 사람들로 팀을 구성해서 종합적인 선교사역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예:사회봉사관 운영,국제 선교팀과 합류).
중동선교는 교파를 초월해서 팀선교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선교는 함께하는 것이다. 혼자하는 것이 아니기에 함께 일하는 선교가 되어야 한다. 교회를,교파를 각 선교단체의 특성을 초월해서 선교현지에서 팀사역을 해야 한다. 팀사역이 주는 유일한 점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먼저 각 선교사의 다양한 은사를 활용할 수 있으며 영적,육적,재정적으로 서로에게 도움과 보호를 받을 수가 있다. 또한 전문화를 통하여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일을 수행해 나갈 수 있으며 일에 대한 압박감도 덜게 된다. 또한 서로서로의 정보교환이 원활해지고 결원이 생겨도 연속성이 보장되며 선교인력을 보다 넓게 흡수할 수 있다. 아울러 서로간에 영적 성숙을 체험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부요케 하는 유익이 있다.
3)전문직업인을 통한 선교활동
전통적으로 볼 때 선교사는 신학교육을 받은 정식 교역자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들에게 요구되는 일은 교회개척,직접 전도,설교 등이었다.따라서 선교사를 언급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목사 또는 전도사라는 선입견이 있었으며 또 그런 전문적 교육과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가장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 들여졌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볼 때 공산권고 이슬람, 힌두권에 속한 나라들은 소위 전문적인 선교사의 입국을 심각하게 제한하고 있으며 이런 나라의 수효는 계속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나라들도 특수한 기술이나 기능이 있는 전문인들은 여전히 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자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역시 중동지역에 입국하여 사역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비 전임선교:Part-Timer).평신도 선교사는 특별히 중동지역에서 많은 장점이 있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선교사 입국 비자 발급이 목사선교사보다 용이하다.평신도 선교사 대부분이 직업을 가지기 때문에 본국교회나 선교기관에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전도적 접근이 비교적 용이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동지역에 전문직업인 선교사 파송 전략을 가져야 한다.
4) 자국민 교회를 통한 선교활동
중동지역에 있는 한인교회는 그리 많지 않아도 가정교회,지하교회,지상교회가 있어서 이슬람권을 향한 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크게 감당하고 있다. 사우디 4교회,UAE 3.교회,바레인 1교회,콰타르 1교회,쿠웨이트 1교회,이란1교회,이집트 2교회,터어키 2교회,오만 1교회 등이다. 물론 한국인 건설현장에 많은 현장교회들이 있어서 자국민 근로자를 위한 선교활동과 채용된 근로자 3국인 선교활동 그리고 현지인 선교활동도 적게나마 하고 있다. 특별히 자국민 교회는 해외동포를 대상으로 선교하고 있으나 교회의 발전과 성장에 따라 무슬림선교와 제3국인 선교를 위한 그 일익을 감당하고 있다. 주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선교활동은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1) 동포선교
ㄱ.체육 지도자
ㄴ.상사 지사원과 가족
ㄷ.개인사업가
ㄹ.현장 근로자
ㅁ.재중교포 근로자
(2) 3국인 선교
ㄱ.힌두인;인도인
ㄴ.무슬림권:방글라데시인,파키스타인
ㄷ.불교권:태국인,중국인,스리랑카인
ㄹ.가톨릭:필리핀인
ㅁ.공산권:소련과 공산권 국가에서 오는 여행객
ㅂ.기타 외국인
(3) 현지인 선교
ㄱ.아프리카 지역 무슬림:수단인,소말리아인
ㄴ.인접국가의 무슬림:이란인,시리아인,레바논인,팔레스틴인,이집트인,
요르단인,예멘인,발루치(오만)인
ㄷ.본토인 무슬림:토착인과 베두원
위와같이 지하선교활동이지만 나름대로 한인교회들은 중동선교의 문이 열리는 그날을 희망하면서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4. 장기선교활동을 위한 선교의 기지확보
선교에 있어서 전략은 성공적인 선교를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흔히 보이는 야구나 축구,배구나 농구 그리고 권투시합까지도 이기기 위한 비장의 전략을 가지듯이 선교 역시 예외가 없다. 적절하고 효과적인 전략이 있는 곳에서 성공적인 선교가 이루어진다. 건전하지 못하고 비효율적인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 곳에서의 선교는 성공적이기를 기대할 수 없다.
성경에는 선교전략이라는 특별한 말이나 교훈이 없다. 그러나 바울의 지중해 연안을 중심한 선교과정에서 우리는 바울의 전략선교적 의도를 쉽게 읽을 수 있다. 그가 대도시 선교를 집중적으로 감행한 일이나 로마 선교를 갈망하였던 사실은 전략적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가 로마 교회를 지원교회로 삼아 스페인 선교를 시도하게 되었던 사실(롬15:24)에서 유럽 선교의 전략성에 대한 바울의 인식을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자기의 선교계획을 예고하면서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이미 복음으로 다 편만케 하여 팔레스핀 지방이나 소아시아 지방에 더 이상 전도의 대상자가 없게 되었으므로 이제는 로마행만이 남아 있는 선교 코스라고 한 사실(롬15:19-20)에서 우리는 바울 선교에 관해서 전략적 활동을 배울 수 있다. 바울의 의중에는 중요한 도시를 먼저 복음화시킴으로 그 지역의 복음화는 그 도시교회에 맡기려는 선교계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은 계속 중요한 새로운 선교지를 택하여 선교하되 에베소,고린도와 같은 중요한 도시는 그 중요성에 비례하여 비교적 장기적 체제와 집중적 선교를 감행한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중동지역에서의 선교활동 역시 전략이 있어야 한다. 단기선교전략보다 장기선교전략이 우선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선교의 전진기지를 확보해야 한다. 중동지역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는 장기선교사업은 다음과 같다.
1) 사회복지원:지역사회를 위하여 복지관을 설립하여 무슬림과 친밀한 사회적 인간관계를 가지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심어 나간다(장애자 센타,양로원,휴게실).
2) 의료봉사:의료기술의 지원 및 봉사활동
3) 마약퇴치 사업:아랍국가의 가장 큰 사회문제인 마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하면서 선도하는 활동(청소년을 위한 선도사업)
4) 기술교육원 운영:컴퓨터 기술,농업기술
5) 선교전지훈련센터:선교사 후보생, 단기 선교사,장기 선교사들을 위한 선교전략 연구(아랍어 연수,선교사 연장 교육 등).
5. G.C.C. 국가에서 가능한 선교전략
1981년 5월 25일 페르시아만 협력기구(GCC)가 출범되었다. 사우디 아라비아,바레인,쿠웨이트,콰타르,오만,아랍 에미레이트 이상 6개국이다.GCC창설 목적은 걸프 연안국가들의 정치,경제,군사,종교 협력 및 동맹국으로서의 교섭력에 있다. GCC의 관심분야는 지역안보,경제와 사회기능,협력 형태,안정 등이다. 이들은 GCC를 유럽의 EEC형태의 협력기능 또는 ASEAN 협력기구 형태로 발전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다. GCC 국가별 종교적 특성을 고려해 볼 수 있으나 실현 가능성이 있는 선교전략들이 있다.
1) 종교부지 내에서의 선교활동 강화
영국의 지배를 받은 국가들이라 독립시 종교부지가 인정되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예:바레인,U.E.A.오만 쿠웨이트).
2) 제3국인을 향한 선교활동
GCC 국가에서는 제3국인 근로자와 사업가들이 많은 황금어장이다. 약 45개국에서 들어온 근로자들이 있다.
3) 비거주지역 선교
현지에 거주할 수 없는 단점이 있으나 원거리 사역을 하는 전임 선교사역이다. 해당 지역의 영적 상태를 파악하고 기독교 상황을 수집 분석하되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선교사는 활동이다.
4) 걸프지역 성경학교 운영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성경학교를 운영한다(지도자 양성과정과 평신도 훈련과정).
5) 가정교회(기도처)설립
제3국인 자국민 선교사들에 의하여 지하교회들이 곳곳에 설립되어 선교활동 중에 있다(분산된 기도처).
6) 수지침 시술소 운영
무료 수지침 시술서 운영을 통하여 사회봉사 활동에 적극 참여한다.
7) 태권도 도장 운영
올림픽 종목으로 선정된 태권도를 보급하며 선교전략을 세운다.
Ⅶ. 미래를 향한 이슬람선교의 비전
과거 30년 간에 걸쳐 중동에서 있었던 정치적인 사건은 이미 전세계를 급격하게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앞으로 훨씬 더 복잡한 문제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둘러싼 정황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고 있든지 이제 모든 기독교인은 기도하면서 중동에 선교의 문이 열린다는 확신을 가지고 선교의 도전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세계는 변화하고 있다. 중동 역시 변화의 물결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허버트 케인은 "유엔의 세계인권선언에 이슬람국가 대부분도 회원국으로 서명하였고 이 인권선언은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고 있다는 점과 종교의 자유는 미래의 물결로서 이슬람 국가나 공산주의 국가도 세계와 나란히 가기 위하여 인정하게 될 것이며 이슬람 세계의 계속적인 서구 세계화의 접촉은 개방사회로서의 속도를 촉진시킬 것이다"는 점을 들어 이슬람 세계의 전도의 문이 열릴 것으로 내다 보았다.
1. 세계선교의 흐름을 통한 아시아 교회의 선교시대
1974년 로잔에서 근세기 최대의 복음전도 선교대회가 열렸다. 이 복음주의적 선교관계자들의 모임에서 고백된 로잔 언약은 "우리는 선교의 새 시대가 동트고 있음을 기뻐한다. 서양 선교의 주도적 역할은 급속히 소멸하고 있다. 하나님은 신생교회를 통한 세계복음화에 위대하고도 새로운 자원을 일으키고 계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이는 지금까지 세계 선교를 주도하던 유럽교회나 미국교회의 선교시대가 지나가고 있으며 제3세계 교회가 선교의 주역을 맞게 된 제3세계 교회 선교시대가 오고 있음에 대한 공동의식의 고백이다. 지금 유럽과 미국의 교회는 자체가 쇠퇴하고 있고 그들의 선교가 쇠퇴하고 있는 동안 제3세계 대륙인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는 12,666명이고 아프리카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의 수는 2,715명이며,라틴 아메리카에 파송되어 온 선교사의 수는 11,262명,라틴 아메리카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는 1,314명인 반면 아시아는 12,806명의 선교사를 받고 있으며 7,1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제3세계권에 해당하는 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아시아 모두 받고 있는 선교사의 숫자는 1만 2천명 정도로 비슷한데 보내는 선교사의 숫자는 아시아가 3배 이상으로 월등하다는 것을 보게 된다. 세계 5대륙 중 복음화가 가장 뒤진 곳이 아시아인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선교의 열정은 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오토 디벨리우스는 "복음은 처음에 유대인에 의하여 특유하게 유대적 문화영역으로부터 헬라적 세계로 전달되었고 두번째 전달은 이 헬라적 세계로부터 로마까지 미쳤다. 세번째 전달은 북유럽의 게르만 사회로였다. 네번째 전달은 극동의 백성들에게 전달될 것이다"라고 하며 서구 이후에 아시아 선교시대를 선언했다.
2. 무슬림 장벽을 넘어서서
기독교 복음은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한다. 즉 기독교 세계복음화의 확실성(The certainy of the World Evangelization)이다. 결국 복음이 세계 어느 민족,국가,언어집단(Language group)을 막론하고 전파되고 복음화가 완성되는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세계를 품은 기독자들의 선교의지요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난공불락의 철옹성처럼 보이는 무슬림 세계에도 벽이 무너지고 문이 열리는 그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주님께서"(계3:7)반드시 무슬림 세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날을 허락해 주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슬람의 복음화를 위해 주님께 헌신할 수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찾고 계신다. 이슬람은 사탄의 마지막 요새가 될 것이다. 간교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무슬림에 수많은 장애가 있다 하여도 결국 성령님의 역사와 능력 아래 무슬림의 영혼들을 굴복될 것이며 중동지역에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될 것이다.
3. 아랍종족 선교의 희망
랄프 윈트,패트릭 존스톤,데이빗 그레이브 등 세계선교 지도자들의 합의하고 있는 전세계 미전도종속수는 1만 2천 개이다. 22억의 인구가 바로 이 미전도종족에 속해 있다. 랄프 윈터가 원장으로 있는 미국세계선교센타(USCWM )의 자료에 의하면 앞에서의 소개와 같이 4천개의 무슬림 종족 가운데 8억 6천명이 살고 있으며 소수 부족은 3천개로 1억 4천만명이 된다고 한다.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족 일부,수단의 베자족과 다푸르족,이란의 많은 소수 종족, 이집트의 누비아족,레바논의 드루즈족 등 수많은 소수 종족들이 알려진 신자가 하나도 없거나 모국어로 된 성경의 일부도 없는 실정이다. 중동지역에서의 종족은 889종족으로서 셈족이 50.6%로서 아랍인이 1억 6천 4백만 명이고 유태인이 3백9십만 명,앗시리아인이 18만명이다. 인도유럽족은 20.8%로서 이란인이 4천3백9십만 명이며 쿠르드족이 2천1백만명,집시가 3백만 명이고 유럽인이 1백만 정도이다. 투르크족은 16.2%를 차지하는데 5천3백만 정도이다. 아프리카족은 5.8%로서 1천9백만 명이고 이들 중 대다수가 수단에서 산다. 다른 아프리카 종족들은 이집트(누비아),리비아 그리고 남부 모리타니에 살고 있다. 베르베르족은 5.5%로서 2백4십만 명 정도이다. 코카서스 종족은 0.41%로서 1백3십만4천명 정도이다. 아르메니아와 체르케쓰,기르고, 아디게이와 그루지아에 분포되어 있다. 윈터 박사는 1만2천개 미전도종족의 복음화를 위해 최소한 한종족마다 한 팀을 이뤄 활동할 4명의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4만 8천명의 새로운 선교사가 배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1만 2천 미전도 종족 가운데 8천 종족에 대해서는 선교단체들이 사역을 하고 있거나 사역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 4천 종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이나 대책이 없는 상태이다. 이러한 즈음에 우리는 종족선교에 대한 계획과 대책 그리고 선교의 희망을 가지면서 선교사 파송 계획을 가져야 한다.
4. 회교원리주의와의 영적 투쟁
회교원리주의(Islamic Fundamantalism)는 이슬람교에 입각한 회교권의 완전한 정치,사회,경제 질서의 재건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일종의 정치 이데올로기이다. 회교원리주의의 운동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대두되기 시작했으나 아랍세계로 서구적인 자유주의 가치관을 수용해 근대화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조화론"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다가 1979년 2월 호메이니가 이끈 이란 회교혁명의 성공에 고무돼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현재 아랍권이 직면한 정치,경제적 위기가 무분별한 서구화를 추구하는데 있다고 보고 그 유일한 해결책은 "이슬람의 부흥"즉 이슬람화밖에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처음 회교 소수파인 시아파가 이 운동의 주축을 이루었으나 최근에는 분파적 종교운동을 뛰어넘어 다수파인 수니파도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특시 기성세대층과 젊은 층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이 운동은 이란과 같은 회교공화국 건설이 찬서구화 반미를 내걸고 서구화를 추구하는 현체제와 이를 지원하는 미국 등 서방국가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제3세계의 반외세 및 민중해방운동과 일맥상통한다. 이들의 지지세력들은 근대화의 실패로 인한 경제침체,정치불안,이슬람의 도덕적 가치관 붕괴 등 현체제가 지속되는 한 장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는 좌절감에 원리주의 운동을 최후로 의지할 이념으로 보고 있다. 바로 이 회교원리주의가 기독교에 대항하는 가장 큰 영적세력이 된다. 이러한 이슬람세력을 세상의 방법으로 대항해서는 안될 것이다. 영적인 전투만이 승리할 수 있는 길이 된다. 성령의 능력에 힘입은 기도의 준비와 능력이 비장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
Ⅷ.나아가는 말
한국교회는 단일 문화와 언어를 가진 민족으로서는 드물게 전세계에 흩어져 선교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국내 경제의 어려움은 선교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이러한 전환기는 도전의 때이면서도 양적인 성장과 함께 질적인 성숙을 이룰 것을 내다보는 시기이다. 이 사춘기적 전환기는 요구하는 것이 많다.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화되어야 할 필요들이 감지되고 있고, 그에 따라 정비해야 할 일들이 놓여 있다. 앞날의 전망도 유년기처럼 항상 낙관적일 수만은 없다. 이런 때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단계에서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온전한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슬람권 선교는 확실히 힘든 일이다. 1265년부터 1315년까지 50년간 이슬람권 투사였던 이슬람선교의 개척자 Raymond Lully(스페인,1215-1315)는 사랑과 기도와 눈물과 설복으로 이슬람교도들의 개종을 위하여 80세 노구를 이끌고 헌신하였으나 별로 많은 사람을 개종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이슬람교도들로부터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역시 이슬람권 선교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분 중의 한 사람인 Samuel M.Zwemer 박사도 그 자신의 이슬람권 선교노력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나이다"라고 성경본문(눅5:5)의 말씀으로 의미심장한 설교를 한 일이 있다. 난감해 보이고 불가능해 보이지만 이 시대 우리들의 최종적인 관심과 표적은 바로 이슬람권 선교가 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앞으로 21세기 초엽 이슬람세계에 복음이 전파될 돌파구가 생기리라 확신해 본다. 어떠한 돌파구가 생길지 확신할 길이 없으나 중동전쟁을 통하여, 혹은 이슬람 내의 깊은 종교적 회의를 통하여, 정치,사회,종교의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강권적인 섭리에 의하여 일어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때를 위하여 인내있게 기다리는 마음으로 준비해야 한다. "형제 자매여,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마 아니요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7-8).
"내게는 하나의 열망밖에 없다. 그것은 그분이며 그분뿐이다."
(I have one passion : it is He and He alone.) - 진젠도르프 -
"하나님으로부터 큰 것을 기대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 윌리암 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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