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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형성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들
김준곤 목사의 설교에 미치는 영향 요소들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정신적 고통을 체험하면서 받은 소명이 무엇이며, 복음주의 신학사상이 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본 후에 설교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동역자들을 탐구하고자 한다.
1. 김준곤 목사의 고난과 소명
김준곤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해 저무는 인생 사양의 언덕길에서 먼 마을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보다 절실한 것들을 안고, 한 생애를 가난한 보따리에 꾸려 들쳐매고 산마루를 전망해보는 시간이다”라고 회고하였다. 그의 생애는 비극적인 일이 잇따라 일어났었다. 어린 시절 사랑하던 동생이 집배늘에서 불놀이 하다가 화상으로 고통을 당하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숨이 막혀 죽을 것같은 심정이었고, 또 다른 동생이 집근처 산 벌목 현장에서 구경하다가 나무에 치어 죽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어머니가 키우셨던 백치인 사촌형이 폭설이 쌓인 어느 겨울날 아침에 이웃마을을 가는 고개길 눈 속에서 동사체로 발견되었다. 이어서 어머니를 비롯하여 세 분의 형님들이 차례로 급사하셨다.
일제 때 약 9개월 동안 만주 목단강시 인근 소만 국경지역인 마창이라는 화전민 마을의 김인석 목사댁에 피신해 있었다. 이른 새벽에 교회에 나와 기도하고 수백 구절의 성경을 암송했고, 김인석 목사가 소장하고 있던 신학, 문학, 철학서적 등 2천 여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는 금식도 많이 했고 사흘에 한 끼, 이틀에 한 끼를 먹었던 그 당시의 어려움을 회상했다. 일본군에게 잡히면 죽을 몸이라 매일같이 교회에 가서 밤을 세워 기도를 했고, 살려만 주신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고 주님께 처음으로 소명을 하였고, 일본도 망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고 한다. 결국 일본군의 오만과 잔인함이 소련군의 점령으로 종말로 이어졌으나, 소련군도 역시 짐승처럼 날뛰는 광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소련군이 여자들을 강간할 뿐만 아니라 어디론가 데려가 버리는 판에 그는 겨우 약식 결혼식을 마치고 아내와 함께 약탈과 강간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곳을 떠나 고향으로 수백 리 피난길에 올랐다. 소달구지를 타기도 하고, 때로는 걸기도 하면서 죽음과 같은 그 곳에서 나오는 길은 연옥의 길이며 나의 25시였다고 시대의 참혹함을 회상했다. 그 당시에 김준곤은 “정글의 맹수들이 포효하는 밤에 어린이가 내 살길은 엄마 밖에 없어서 엄마 품에 매미처럼 매달리는 듯이 주님 품에서 그 눈동자 속에 영원한 첫사랑을 연습했고, 이 모든 수난이 주님의 뜻으로 자신을 향한 사랑과 주님만 사랑하게 하는 영원한 첫 사랑의 연습이라고 마음 속 깊히 새겨져 있었다”는 진실한 고백을 했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의 이어진 돌발적인 죽음으로 고통을 받았던 김준곤은 특히 딸 신희가 어린 두 손녀를 애절하게 부탁하고 157일 간의 극한 고통 속에서 위암으로 죽는 비극적인 일로 주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참된 감사와 은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였다. “딸 신희는 죽었고, 그녀의 극한 고통은 비로소 끝났다. 붙잡고 있는 딸 신희의 손목이 서서히 굳어지고 차가와지고 있음을 느끼고, 종잇장처럼 마르고 창백한 얼굴은 분명 태풍이 지나간 뒤의 호수같이 잔잔하다. 지상의 산 사람 얼굴 중에 이토록 성스럽고 가난한 여인의 얼굴이 있을까하고 생각에 빠져 있었다”고 자기의 심정을 실토하였다. “시간이 흐른다. 나는 언어도, 행동도, 존재조차도 정지된 어떤 제로점에 선 것이다. 십자가 상의 주님을 바라본다. 가시관 밑으로 피가 빗물처럼 줄줄 흐르고 있다”고 주님께 섭섭함을 토로했다. 그렇게 가냘픈 아이에게 그리도 가혹한 고통을 주다니 “주여” 부를 힘도 없었다고 하였다. 이윽고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깊고 깊은 존재의 밑바닥, 주님이 뚫어버린 지하에서 지하수가 솟아 나오듯이 세미한 음성으로 한 찬송이 터지고 있었고, 찬송의 영이 주어진 것이다.
저는 딸의 죽음 앞에서 아픔과 슬픔을 느꼈으며 말할 수 없이 외로웠고 하늘은 텅 비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읍니다. 자신이 열 번 죽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꼈옵니다. 저만 경험하는 것 같았읍니다. 인간의 제로점이 되었읍니다. 아무 것도 없었읍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도가 있었읍니다. ‘주여! 이런 중에도 내 마음에 감사와 찬송을 심어 주오소서’ 딸의 시체 옆에서 손목을 붙잡고 한 시간 동안 제가 앉아 있을 적에 깊히 뚫린 그 영혼의 구멍 속에서 맑은 샘물이 졸졸 솟아나기 시작했읍니다. 그 전에 부른 찬송가와는 의미가 달랐읍니다. 깊이가, 질이 달랐읍니다. 주님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같았읍니다. 찬송을 진실하게 불렀읍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읍니다. 주님이 저에게 새 일을 시작하셨읍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렸읍니다. 새 막이 열렸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었읍니다.
이와같이 딸의 죽음이 가르쳐 준 깨달음은 자신이 어쩌다가 갑자기 죽을 경우가 생겼어도 5분 간이라도 잠시 의식이 돌아오게 해서 찬송을 부르고 감사하는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게 하여 그들 속에 주님이 나타내게 하고 영광을 돌리게 한 후에 다시 자기를 데려 가도록 기도를 했다고 한다.
1963년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Problem of Pain)”를 손수 번역하여 출판했다. 특히 그 저서의 부록에 있는 R. 하바드 박사가 쓴 고통의 관찰 결과로 “정신 고통은 육체적 고통보다는 덜 심하지만 보다 참기 힘들다. 흔히 정신적 고통을 은폐하려는 노력은 괴로움을 한층 더 가중시킨다”는 글을 통해서 김준곤은 고통의 문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정신적 영적인 보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는 인간으로서 고난과 죽음이라는 정신적 고통의 문제를 극단적으로 체험하면서 평생을 그리스도를 품에 안고 살았던 삶의 모습이 그의 예화집에 여실히 잘 드러나고 있다.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한 후 법성포 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중에 한국전쟁이 일어나 신안군의 고향집 지도섬으로 피난을 갔다가 지역공산당에게 체포되어 아버지와 아내가 목전에서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김준곤은 저서인 영원한 첫사랑과 생명언어의 머리말에서 나의 아버지는 ”곤봉과 죽창과 돌로 쳐서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다시 살아나서 사자처럼 울부짖는 소리는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였다. 그의 전 존재가 자신의 의식의 피 안에서 하나의 소리로 터져 나온 것이 내 이름이었다. 불러도 불러도 내 이름을 부르시다가 심장이 터져 돌아 가신 주님을 내가 맨 처음 만났을 때 다르게는 살 수 없는 내 운명이 영원 전부터 결정된 것을 알게 되었다“고 주님의 사랑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주님과 나와의 순애보는 지금 시작했을 뿐이고 영원이 계속될 것이고, 주님과 나의 이 세상 천로역정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도 학살 현장으로 끌려가다가 21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되었다. 이 석 달 동안에 2만 명의 주민 가운데서 2천 명이 죽었다고 한다. 한번은 한 북한군이 김준곤의 목을 칼로 베려고 할 때 한 지방 공산당 폭도의 부인이 나의 집에서 피를 흘리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마대자루 속에 넣어 낭떠러지 꼭대기에서 바다로 던져지려는 순간 모든 의용군은 특정 지점으로 집결하라는 메시지를 받고, 그를 죽음의 가장자리에서 그냥 내버려두고 물러갔다고 한다. “이 모든 핍박의 기간동안 나는 하나님과 화평한 상태에 있지 못했습니다. 비록 내가 그 당시 그리스도인이기는 했지만 나는 인간 비극의 밑바닥에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나의 구주를 기억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나의 부르짓음을 들었습니다. 내가 십자가 위에 계신 나의 주님을 바라볼 때 나는 그 분과의 교제를 다시 새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주님께 고백할 때 그는 주님으로부터 민족 복음화를 하라는 소명을 다음과 같이 받았다고 한다.
저는 비탄에 잠겨 하나님을 의심하기 시작했읍니다. 저의 영적인 생명도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그런데 사망의 골짜기에서 주님은 저를 부르셨읍니다. 그것도 제 가족을 살해한 바로 그 공산당들에게 당신의 증인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전까지 저는 절대 헌신하지 못하였읍니다. 이때서야 비로소 저는 저의 생애의 전폭을 주님께 드렸고 하나님께로부터 한국의 민족 복음화를 저의 개인적인 비젼을 받았습니다.
1962년 2월 중순 박요한 목사의 누님이 운영하던 삼각산의 기도처에서 성령의 감동하신 가운데 민족 복음화을 위한 환상을 받아 “어머니처럼 하나밖에 없는 내 조국. 어디를 찔러도 내 몸과 같이 아픈 내 조국. 이 민족 마음마다, 가정마다, 교회마다, 사회의 구석구석, 금수강산 자연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게 하시고 뜻이 하늘에서 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민족 복음화를 위한 특별한 기도를 하게 되었고, 비로소 그날 밤에 민족복음화운동의 비전이 처음으로 태동하게 되었다고 한다.
2. 복음주의 운동
웨슬리를 중심으로 한 영국의 부흥운동, 조나단 에드워즈의 미국 1차 대각성 운동, 그리고 빌리 그레이엄의 부흥 운동이 복음주의 운동을 저변 확대시킴과 동시에 복음주의 각성 운동을 더욱 활성화시켰다. 한국 교회가 복음주의를 받아드린 것은 선교 초창기부터이다. 1905년 한국의 복음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협의체를 구성하였고, 재한복음주의선교회연합교회라는 공식적인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 협의체는 복음주의 근본 사상과 일치하는 복음 전도를 위해서 연합했다는 취지가 매우 중요한 핵심 사항이다. 정통주의적 신앙하에 성장하면서 보다 체험적인 신앙을 추구했던 초대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한국 교회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을 강조하는 체험적인 복음주의 전통을 이어받도록 하여 한국 개신교의 신학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초부터 교파를 초월한 복음주의 운동을 일으키게 한 시발점은 한국에 대중 전도운동으로 전파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복음주의는 교리를 절대화하는 정통주의도, 구원의 복음을 상대화하는 자유주의도 배격하면서 단지 온전한 복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정진경 목사는 이러한 복음주의가 한국교회의 주류가 되었고, 이런 성향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분이 바로 김준곤이라고 확신했다. 김준곤의 모든 선교사역은 체험적인 복음주의 정신의 중심에 서 있었고, 복음주의 정신으로 한국대학생 선교회를 창설하였으며, 대학생 선교를 통하여 사분오열된 한국교회 연합운동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정진경 목사가 증언했다
성경은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에베소서 4장 3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의 연합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가 됨“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개별성을 인정하면서 연합을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연합은 조직이나 제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복음주의적인 선교 정신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에 김준곤 목사의 복음주의적 선교사역은 연합운동에 크게 기여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김준곤은 복음주의적 신학교육과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터득한 복음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초교파적 선교단체가 성공을 거둘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C.C.C.를 통해서 한국 민족과 해외선교에 대한 비전, 불타는 구령에 대한 열정으로 타오르게 만들었다. 그는 교계와 선교단체를 긴밀하게 연결해 주는 고리 역할을 어떤 지도자보다도 충실하게 잘 감당했던 것이다. 엑스플로 ‘74에서 교파를 초월한 거의 모든 개신교가 적극적인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그의 탁월한 리더십과 더불어 복음주의 정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빌리 그레이엄처럼 그는 교파를 초월한 온전한 복음으로 교회가 연합할 수 있도록 화합의 장을 마련한 것이다. 김준곤은 교계 전체의 지지를 이끌어 내어 초교파 선교단체의 비전을 한국 교회 전반으로 확산시켰고, 이를 통해서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서 독보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국 복음주의 운동은 1973년 빌리 그레이엄이 주도한 서울 전도 집회, 1974년 엑스플로 ‘74와 같은 대중 전도운동과 1980년 세계복음화대성회 등의 대각성 운동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1973년 김준곤이 주도한 빌리 그레이엄의 서울 전도 대회는 한국의 복음화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서 처음으로 예장 합동을 포함한 한국의 개신교 교단을 하나로 화합하는 역할을 시도한 것이다. 또한 C.C.C.를 비롯한 선교단체의 대학생들에게 한국 선교의 비전을 심어 주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 개신교 역사상 270 만이라는 엄청난 군중들이 여의도 광장에 모여 합동으로 연합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러한 빌리 그레이엄의 1973년 서울 집회가 국내외적인 대중 전도 운동의 촉매가 되었다.
엑스플로 ‘74 개회사에서 김준곤은 “우리가 여기 모인 단 한 가지 큰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지상 명령을 좇아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과 그 복음을 전할 더 많은 사람을 보다 효과적으로, 보다 전략적으로, 보다 집중적으로 훈련시키 위함입니다”라는 메세지를 전하면서 지금이 바로 우리들이 복음을 전도하는 최후 최대의 도전적 기회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메마른 한민족의 가슴에 진리의 복음의 횃불을 높이 들게 한 엑스플로 ‘74는 빌리 그레이엄 서울 전도집회에 이은 성령의 연쇄적인 강력한 역사로 나타나게 되었고, 수십 만명의 사람들이 복음의 말씀을 통해 놀라운 변화와 회심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대중 전도집회인 1977년 민족복음화대성회와 1980년 세계복음화대성회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김준곤이 창립한 한국대학생 선교회가 한국의 복음주의 운동을 확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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