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시장에 관하여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개국한 조선은 사농공상이란 말에서 보듯이 상인은 노비계급 바로위의 계급으로 천시를 받던 직업이었으며,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원칙에 따라 궁궐의 뒤에 만들어져야 하나 북악산으로 막혀 궁궐앞으로 시전을 건설하게 되었다.
시전을 건설하기 전부터 도성안에는 크고작은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고 특히 종로사거리 일대는 이미 난전이 운집하여 혼잡하였고, 사람과 재화가 구름처럼 모여 든다는 뜻의 운종가로 불리고 있었다.
태종때인 1412년부터 1414년에 걸쳐 국가에서 시전행랑 건물들을 건축하였으며 시전을 관리, 감독하는 경시서(세조12년 평시서로 개칭)를 두어 각종 상인들이 무질서하게 상행위를 라는것을 막고 도성내 주민에게 생활용품을 판매하고, 정부에서 필요로하는 물품을 조달하는 기능을 하도록 하였다.
시전행랑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대부분 파괴되었고 광해군때에 이루어진것으로 추정된다.
17C이후 인구의 증가와 유통량이 증가하면서 시전체계의 근간인 일물일시(一物一市)의 원칙이 무너지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을 겪은 후 금속화폐의 유통과 대동법의 실시, 민간 수공업의 발달로 이현, 칠패시장뿐만아니라 난전활동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시전상인들은 높은 국역 부담을 지더라도 난전을 규제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아 상업적 이익을 독차지하려 했고, 양난 후 정부는 재정보충을목적으로 시전상인들에게 난전을 규제할 수 있는 '금난전권'이라는 특권을 부여하였다.
초기는 육의전 -선전(중국 비단취급), 면포전(무명과 은을 판매), 면주전(국산 명주), 저포전(모시베), 지전(지류), 어물전- 으로 한정되었다가 소소한 물권에까지 모든 상품에 금난전권이 적용되어 18C 서울의 시장은 금난전권의 독주무대이었다.
금난전권의 폐해가 커지면서 정조15년(1791)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해통공이 시행되었고 1884년 갑오개혁때 전면폐지되었다.
육의전처럼 큰 시전은 각 시전마다 상인 자치조직인 도중을 구성하였고, 이 조직은 정부에대한 조달을 총괄하였고, 상품판매권을 독점하였다.
모든 시전 상인은 도중에 가입해 도원이 되었으며, 보통 혈연관계로 상업활동을 배우기위해 15세가 되면 시전에 나와 일을하면서 가업승계 준비를 했다.
종루의 시전상가
종루의 시전상가는 궁궐이나 관아 또는 양반 사대부가에서 필요한 사치품이나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시장으로 주로 대낮에 거래가 이루어졌고,2층의 목조 기와집으로 건설되어 1층은 점포로 2층은 상품보관 창고로 이용하였다
18C이후 상거래의 규모가 커지고 사상도고의 성장과 이들에 의한 시전상인 배제및 시전상인들간의 분쟁등으로 유통체계와 질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1896년 9월부터 시행된 황도건설사업과 1898년부터 시작된 전차부설사업으로 새롭게 정비되면서 종로거리는 전통적 시전과 다른 새로운 근대식 상점과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일제가 조선에 대한 경제침탈을 목적으로 시행한 1905년 화폐개혁으로 국내에는 금융공황이 일어나 종로시전상인을 비롯한 전통 시장 상인들이 막대한 타격을 입업고, 이후 신식시장의 등장으로 상업공간은 주변지역으로 확장되어 갔고, 시전행랑자리는 상회나 상점으로 바뀌었으며, 화신백화점이나 동아백화점등의 새로운 형태의 유통체계로 바뀌게 된다.
광장시장(이현시장)
이현은 동대문근처, 곧 배오개를 기점으로 남족일대에 형성된 시장으로 인의동에 있던 고개이름으로 배오개의 한자식 표기.
이현시장은 18C에는 종루, 칠패와 함께 서울의 3대 시장으로 자리잡으며 의류, 목면, 미곡등 각종 상품을 판매했지만 주로 채소와 해삼물을 도매하는 시장으로 금난전권의 규제를 피해산지구매와 매점매석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였다.
동북지역에서 서울로 향하는 상품이 1차로 모이는 시장으로 칠패와 더불어 난전 상인들에 의해 개척된 시장이었으므로 상거래 질서가 어지러웠다.
100년여년의 역사를 지닌 서울 종로구 예지동의 '광장시장'은 대한민국 최초의 상설시장이다.
청계천의 광교와 장교사이에 있는 시장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으며, 일본인 경영자와 상인들간에 대립이 많아던 남대문시장에 비해 동대문시장은 순수 조선 자본을 바탕으로 한 조선인 시장의 명맥을 끗끗이 지켜 나갔단다.
미곡, 어류, 과물, 잡화등이 거래되었고 특히 미곡이 가장 많이 팔렸으며, 대두, 소두류의 잡곡등도 팔렸다.
칠패시장
남대문시장은 1414년 조정이 감독하는 시전형태로 출발, 조선후기에는 서소문과 남대문사이 칠패시장이 생기면서 어물거래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17C후반 남대문 안쪽에 선혜청의 창고가 설치된 것을 계기로 도성 밖의 외어물전, 경주인의 거주지역등과 연결되어 도성 바로 밑에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한강연안의 마포, 서강을 거쳐 들어오는 미곡이나 생선이 서소문을 통해 이곳에 모였다.
'칠패'라는 명칭은 조선후기 어영청의 칠패(일곱번째 순찰담당구역)가 남대문 밖에 칠패 초소인 복처가 있었기 때문에 형성된 시장으로 미곡, 포목, 어물등 각종 물품이 집하되어 판매되고, 특히 어물전이 가장 규모가 크고 거래가 활발했다.
칠패는 형성단계부터 불법으로 취급된 난전시장으로 시전상인들의 강력한 규제 대상으로 특히 어물전상인들의 견제와 통제가 매우 심하였다. 칠패상인들은 금난전권의 규제를 피하고 가격 경쟁력을 높이기위해 산지구입이나 매점매석을 통해 물가를 마음대로 조정하여 시전상인들에게 타격을 주었다.
1608녀누대동법을 시행하면서 물가조절및 기근구제등을 하던 상평창이 폐지되고 대동미와 대동포등의 출납을 관장하는 선혜청이 설치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이후 조세를 화폐로 걷게 되자 현물을 보관하는 창고의 쓸모가 없어졌고, 1897년 이 창고를 상인들에게 상점으로 내주고 창고 안마당은 행상들의 장사터로 삼았다.
정부는 곳간세와 행상세를 거두는 대신 관리인을 파견하여 청결과 방화, 방범등 맡기며, 최초의 근대적 도시상설시장 즉, 재래시장이 생겼다.
선혜청창고는 옛 상평창자리에 만든 것이어서 신창, 이 시장은 신창 안장또는 창내창이라고 불렀고 이것이 현재의 남대문 시장이었다.
후기
무더운 날씨임에도 간간히 불러주는 시원한 바람이 더위를 잊게해주었어도 더운 날씨에 두시간 동안 조선시대 시장에 관하여 답사를 이끌며 해설을 해주신 이경숙선생님의 차분한 설명에 감사드리며 다음은 문선선생님의 도심권50플러스센터에서의 실내 강의임을 예고해주신 도경재대표님, 묵묵히 해설을 들으며 참여한 최유선, 김성열선생님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유선, 김성열, 이경숙선생님의 해설을 피드백해주신 도경재대표님의 설명을 시원한 커피점에서 들었으며 커피값을 내주신 이경숙선생님
모두들 수고 많았습니다